“놓아라, 다 놓아라. 꽃피는 봄은 어차피 오지 않더냐?”, 『꽃피는 봄이 오면』



그러니까 30년이 지난 오래된 이야기다.
나는 일곱살이었고 은퇴하신 할머니는 할 일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부지런히 세 번째 사업 실패를 준비 중이었고 어머니는 아파트 상가에 아동복 점포를 알아보러 분주하였으며 밤이면 두분의 싸움이 잦았다.
낮은 길었다. 7살의 낮은 하루의 전부였으며 시간은 사각사각 지나갔다. 7살 세상은 홍옥 같이 사각사각했다. 어른들이야 어쩌건….

저녁이 되어 집에 들어오면 할머니는 손수 손주의 양말의 벗겨주시며 손을 씻으라 하셨고 얼굴을 씻으라 하셨으며 그 물을 버리지 않고 내 발을 손수 씻겨주시는데 쓰셨다. 뽀득뽀득 꼭 발은 닦아 주셨다. 난 발정도는 씻을 수 있는 7살이었다.

발을 누가 씻겨주는 것. 참 기분좋은 일임을 그 때 알았다.
내가 교회를 가기로 마음 먹은 것도 그즈음이다.
할머니 말씀하시길… 나즈막히…
“예수님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셨단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 교회를 그만두게 된 건 누구의 발을 닦아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보다 최하 3개국어 방언 실력에 두둑한 염봇돈을 내며 기도할 때마다 울부짓고 고함을 질러야 3개월 속성 회개 2급 자격증을 따는 이 땅 교회들의 웃기면서 기막한 포퍼먼스 를 본 뒤다.

사랑은 요란하지 않고, 아픔은 눈물에 있지 않고, 진실은 열띠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허진호”는 멋진 감독이다. 요란한 세상에 요란하지 않은 이야기를 제대로 쓴 사람은 “허진호”가 처음이었다.

‘철구'(“이한휘”분)가 ‘정원'(“한석규”분)의 “주정”을 말없이 받아주는 요란하지 않은 사랑, ‘다림'(“심은하”분)이 일없이 사진관에서 자고 가는 것을 봐야만 하는 정원의 아픈 웃음, 정원이 아버지에게 리모콘 사용법을 몇 번이나 가르쳐야 하는지 역정 낼 때 나오는 죽음에 대한 사실, 혹은 진실.

사랑이 뒤돌아가는 사람의 숨죽인 호흡에 있다는 것, 아픔이 억눌러 참아가는 사람의 어깨 들썩임에 있다는 것, 진실은 그리 거창한게 아니라 일상의 관계 속에 소소하다는 것. 난 참 크고, 빠르고, 우렁차고, 요란한 것에만 집착하고 즐겼지.

“류장하”의 『꽃피는 봄이 오면』을 기대한 건 그 “허진호”의 조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수연”을 떠나보내야 하는 “현우”는 도계초등학교 음악교사로 떠난다. ‘탄’밥을 먹어가며 살아온 관악부 아이들에게 음악은 꿈이자 오락이지만 “현우”에게 음악은 비루한 삶을 있게 만든 장본인이자 끝내 잡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다. 아이들과 “현우”의 대립은 그 쯤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좋은 설정에서 시작한 영화가 육수에 물탄듯, 콜라 김 빠지듯 하기 시작하는 건 “류장하” 감독의 욕심 때문일까? 아니면 런닝타임이 빠듯했기 때문일까?

“연희”와 “현우”의 말랑말랑한 관계는 니맛도 내맛도 없이 흐지부지
“수연’의 결혼과 “현우”의 괴로움은 끝에가선 아무일도 없다는 듯 대사 한마디로 흐리멍텅
“재일”과 재일 할머니의 사랑은 소소한 할머니의 사랑 하나 없이 민숭맨숭
관악부 아이들의 캐릭터는 하나같이 얼렁설렁

소소한 이야기를 소소하게 보여주는 방식은 감독이 알았지만
왜 소소한 이야기 속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매듭이 어떠하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왜 몰랐을까? 결국 어떤 플롯의 영화든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이야기가 열린 이유에 합당한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에 반해 조연 연기자들의 절륜의 연기는 감동적이었다.

깐깐한 엄마 역으로 나온 “윤여정”의 툴툴 털어내는 대사는 장삼이사의 옆집 엄마들 푸념처럼 정겨웠고(그녀를 누가 『화녀』(1971년작)에서 분한 팜므파탈이라고 연상하겠는가?), 특히 “김영옥”의 말한마디 없이 수수한 할머니 눈빛은 절절한 이시대를 부대껴온 할머니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이 또한 누가 그녀를 보고 마징가 쇠돌이역의 성우라고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최민식”, 이제는 절정인 듯한 폐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이 얼기설기한 그물같은 시나리오에 마지막 끈으로 역할을 다 한다.


할머니는 18년 전에 돌아가셨고 나는 아직 그 발가락 사이에 뽀드득하던 할머니의 늙고 가는 손가락 느낌을 잊지 못한다. 그 분의 사랑하는 방식은 이리도 소소하셨다. 사람들은 아직도 큰 소리로 싸우고, 왁자지껄하게 사랑하고, 미친년 널 뛰듯이 요란하게 슬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꼭 적이 된 그녀를 총구 앞에 두고 마지못해 죽여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꽃피는 봄이 오면』은 아쉽지만 외면할 수는 없는 영화가 된다. 아직 세상이 이 영화가 필요할 만큼 충분히 지랄중이다.

 


영진공 그럴껄

허진호,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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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터가 더 어울립니다.
가진 것은 몸뚱이뿐인 인생이 바로 저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인데, 그 몸뚱이마저, 건강조차 갖지 못한 사람 둘이 만나 사랑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 둘이 만나 사랑을 갖고 집도 갖고 행복도 갖게 되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을 텐데, 거참 그런 행복이 오래 가질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원래 간사한 거긴 하지만 또 인간 중엔 행복을 도저히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남자가 기적적으로 낫고 보니 슬슬 허파에 바람이 듭니다.


세상에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지만, 허진호 감독은 언제나 멜러를 찍으면서도 언제나 그 멜러는 대단히 드라이했습니다. 그의 신파는 눈물을 최대한 말려버리는 신파였습니다. <행복>에선,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봄날은 간다>에서 냉정한 한두 마디로 유지태를 떠나보냈던 이영애인데, 여기서의 황정민은 술먹고 주정하며 울면서 감정을 토해내고, 임수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임수정은 길을 달리며 울음을 터뜨리다가 목놓아 통곡까지 합니다. 어머나. 허진호가, ‘내놓는 감정’에 조금은 덜 쪽팔려할 줄 알게 됐나 봅니다. ‘길을 달리며’ 우는 건 다른 영화에서라면 유치했겠지만, 폐가 40%밖에 안 남은 임수정이 달리는 건 마음이 아픕니다.


섹스도 할 수 있는 엄마 대용으로 여자에게 어리광 부리다가, 지가 마음이 변해 헤어지고 싶은데 ‘나쁜 놈’ 되는 건 또 싫어서 그 책임을 여자에게 미루는 그런 개찌질이 같은 남자들이, 좀 있습니다. 먼저 이별을 통고하면서 나쁜 놈 역할조차 상대에게 떠넘기려 하는 무개념 무책임 남자놈들은 연애할 자격이 없는 놈들입니다. 어디 가서 또 어떤 여자들 등쳐먹고 가슴을 찢어놓으려고요. 그래서 세상엔 ‘착한 척’하는 남자들이 제일 재수없고 나쁜 놈들인 겁니다. 남자가 갸르랑거리는 가늘고 높은 고양이 목소리를 내면서 간이고 쓸개고 내줄 것처럼 애교떨며 착한 ‘척’을 할 때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다른 여자한테 작업멘트가 담긴 이메일이나 쪽지를 보내거나 다른 여자의 머리와 손을 쓰다듬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헤어지는 순간에도 당신 뒷통수를 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찌질이들은 헤어지고 한참 지나서까지도 뒷통수를 치기도 한답니다. 이런 찌질이들의 단골멘트가 “너에겐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어서”입니다. 너무 부족한 사람이면 노력을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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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붙이지 않고 그냥 이미지와 컷으로만 가서 다행인 씬.


하지만요, 이건 워낙 황정민이 그런 놈이어서 그랬던 거고, 사실 그 황정민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또 아닙니다. 저도 별로 고고하고 착한 사람이 아닌지라, 내가 상처를 받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고, 거기엔 제가 인식하고 있는 것도, 제가 지금까지도 깨닫지 못한 채 부지불식간 준 것도 있습니다. 모나게도 모질게도 못나게도 찌질하게도 굴어봤고, 지금도 종종 그러합니다. 내가 모질게 굴었던 사람, 내가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만은 아닐 겁니다. 원래 관계라는 게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이것은 연인관계에서만 통용되는 법칙도 아닙니다. 어떤 친구와, 혹은 어떤 선배와, 어떤 후배와, 우리는 날마다 새로이 관계를 갱신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그제껏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의 흔적(물론 전 연인 내지 배우자의 흔적을 포함해)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교훈삼아 더욱 열심히 사랑할 수 있게 됐을 때 우리도 한뼘쯤 다시 자라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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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예감.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납니다. 여자의 예감은 원래 무서운 겁니다(…)


만약 내가 지금 사랑을 잘 하고 있다면, 처음부터 잘했을 가능성보다 찌질하고 못났던 과거를 교훈삼은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다만 그렇게 사람 가슴 찢어놓고 갔으면 잘 살 것이지, 왜 그렇게 다시 폐인이 됐나, 싶습니다. 하긴, 나는 여전히 아프고 사막을 헤매는데 나 버리고 간 놈이 잘 먹고 잘 살고 연애도 잘 하고 있다고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약오르고 열받는 일이 되겠지요. 사람 마음이란 왜 이리 좁고 간사하고 못돼먹었을까요? 아, 저만 그런 거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진정 사랑했다면, 그가 잘 살아도, 못 살아도 한동안은 신경이 쓰일 겁니다. 이것은 꼭 그에게 마음과 미련이 남아서는 아닐 겁니다.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의 나도, 지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하는 나도, 같은 사람이니까요.


허진호 감독이 말하기를, 황정민이 영수 캐릭터를 조금 더 이해갈 만하게, 결을 불어넣어 줬다고 합니다. 그렇더라고요. 저도 황정민이 무척 미우면서도, 근데 또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짠하기도 하더라고요. 마냥 미워하지만은 못 하겠더라고요. 임수정도 황정민도, 둘 다 나의 모습을, 혹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코 화해하지 못하는 한 사람 안의 두 개의 자아일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에게 특별한 증오와 혐오를 품는 건, 그가 나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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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처럼 아파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여겨지는 순간들. 누구나 가슴에 삼천원 있는 겁니다아~


그냥, 사랑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사랑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랑 자체가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현실엔 가끔 이벤트가 필요하지만, 이벤트로만 이루어진 현실은 불안하고 연속성이 없습니다. 임수정과의 시골생활은 임수정에겐 현실이었지만 도시남자 황정민에게 결국 ‘현실’, 내지 ‘새로 선택한 현실’이 아니라 ‘이벤트’였고 ‘가상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계가 오래갈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결국 사랑이 진정한 행복으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에 대한 답을 하나 얻은 것 같습니다. 원래 가장 상투적인 이야기가 가장 고질적인 고민과 물음에 대한 답을 품고 있는 법입니다.


ps. 그간 자꾸 “못생기지만 정감 가는 아가씨”로만 나오던 공효진이 세련되고 시크한 역으로 우정출연합니다. 최근 <M>에서도 그런 역으로 나오던데, 슬슬 그런 쪽으로 이미지를 바꾸려는 듯. 사실 공효진은 굉장히 우아하고 세련된 옷발을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몸매와 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하죠.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