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과 “군도”에 대한 단상

영화 <명량>은 역사 매니아도 아니고 밀덕후도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 봐도 고증의 문제가 툭툭 걸립니다. 게다가 메이크업을 잔뜩 한 조총 스나이퍼 따위를 쓸 데 없이 만들어 넣는 등 영화의 매무새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충무공이 장계를 쓰는 장면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글을 쓰는 이순신의 상반신 샷으로 시작하면서 다음은 글을 쓰는 손을 클로즈업하고 그 다음은 손까지 포함한 전체 샷이 나옵니다.

하지만 전체샷으로 넘어올 때 꼿꼿했던 충무공의 허리가 숙여져 있습니다. 첫 샷에서는 손이 안 잡히니 글은 쓰는 척만 하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폈을 테고 마지막 샷에서는 손까지 잡히니 신경써서 글을 써야 하는 터라 허리를 숙였겠지요. 허나 샷의 연결이 껄끄러울 정도로 튑니다.

그리고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에서 충무공이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올려 베는 모습을 정면에서 잡고 다음 샷에서 카메라는 적장의 등 뒤에 가 있는데, 이순신의 칼이 왼쪽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오른쪽 아래에 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뭔가 깔끔하지 않다는 것을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다 느끼게 되고 이 정도면 NG컷이라 할 만 합니다. 문제는 이런 컷들이 꽤나 많아서 매무새가 조악합니다. 아무리 쌈마이 헐리웃 영화라고 하더라도 이런 컷들은 보기 힘듭니다.

정작 문제는 배우 최민식의 존재입니다. 자신없는 감독은 최민식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될듯 보입니다. 최민식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하지만 최민식 연기가 정말 잘 나올 때는 극 안 캐릭터의 개성이 매우 강할 때입니다. <파이란>에서의 강재,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장경철처럼 말입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취화선 동행취재기를 씨네21에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과의 인터뷰를 인용하겠습니다.

– 임권택 감독님과의 해석상의 차이가 있습니까.

=근본적인 차이는 없죠. 그러면 큰일나게요. (웃음) 다만 지금 초상화냐, 풍경화냐, 라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전 굵은 붓으로 죽죽 그리고 싶은데, 그럴 때 감독님이 아니다, 굵은 붓으로 그리다가 가는 붓으로 바꿔라, 하시면 내가 성이 안 차는 부분이 생깁니다. (웃음) 자꾸만 내것이 나오니까 괴롭죠. 내 것을 버리고 감독님 것을 취해야 하는데, 나를 죽여야 하는데, 자꾸만 내 분석대로, 내 방식대로 몸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목표를 가는 거니까요.

다음은 임권택 감독 인터뷰 중에서 발췌입니다.

=장승업이 김병문 집에 담 넘어가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 최민식씨가 눈물을 흘려서 NG를 내셨다면서요.

– 그것도 기품과 관련될지도 몰라요. 물론 울 수도 있는 거요. 그러나 사소한 감정을 드러내는 쪽으로 장승업이를 찍어오지 않았다고. 거기서 느닷없이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안에는 깊은 사랑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살아내는 놈인데, 여기 와서 울고 있으면 그게 맞겠냐고. 삐끗삐끗 감정이 튀어나오면 수렁을 밟는 거죠.

최민식은 이런 배우입니다. 영화는 여러 파트가 한 데 어우러져야 하는 장르인데 그는 연기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캐릭터만 살아나고 나머지는 죽어버린다는 것이죠. 저는 이 절정이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최민식은 과거처럼 자신의 연기로만 영화를 다 뒤덮진 않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이나 <신세계>에서는 많이 절제하는 연기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최민식은 최민식이죠. <명량>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은 모든 대사, 모든 표정에 감정이 뚝뚝 묻어납니다. 아들과 밥을 먹으면서 하는 간단한 대사 “같이 먹으니까 좋구나” 이 아홉 글자에도 목소리의 톤과 인토네이션을 써서 감정을 묻혀내죠. 그로써 최민식의 이순신은 끊임없이 얘기합니다. 나는 힘들어, 나는 괴로워, 나는 어려워 ……

그런데 과연 이순신이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마구 쏟아내는 인물이었을까요?
“난중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병신년 이월 열 나흘 – 밤에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을미년 칠월 초 하루 –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갑오년 이월 열 엿새 – 홍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나 나라가 평정될 리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물론 아들이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격정적으로 비통함을 드러내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힘들고, 괴롭고, 어렵고, 외로울 때에도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뒤척거리고, 천장만 올려다보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

이런 이순신의 모습과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의 모습은 격차가 큽니다. 아마 연출자가 이를 알고 최민식의 연기를 더 죽이려 해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둘 사이의 “짬밥” 차이가 얼만데 ……

오히려 류승룡이 이순신을 맡고 최민식이 구르지마를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외에도 소위 과도한 ‘국뽕’이나 텔레파시와 치마 시그널 등 무리한 설정이 있는데도 “명량”은 흥행가도를 힘차게 내달리고 있습니다. 리얼리즘을 정말 사랑하는 한국의 관객들, 그리고 문단 독자들의 성원 덕분에 말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묘사하는 게 리얼리즘이라 한다면 한국의 대부분 흥행 영화는 모두 리얼리즘이 베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설국열차>가 좀 예외랄까? 실은 <괴물>도 리얼리즘이지요.

우리 관객이나 독자들이 왜 리얼리즘을 좋아하는지는 다른 차원의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영화 <군도>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의 매무새, 그러니깐 만들어 놓은 모양은 <군도>가 <명량>보다 낫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군도>는 현실의 이야기를 현실이 아닌 것처럼 묘사했고, 이는 관객에게 매우 불편한 접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현실의 이야기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면 모르겠는데,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이며 그 과거의 현실은 지금의 현실과 별로 다를 게 없죠. 그런데 그 현실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촬영하고 음악을 깔고 편집을 해 놓으니 관객은 혼란스럽지요.

김구 선생이 절정 무술을 사용하며 일본인을 때려 잡는데 거기다가 무협 스타일 자막으로 “흑심패룡장의 고수 백범 김구”라고 깔고, 고속 촬영에다 웨스턴 음악 넣고 영화 “300”처럼 편집하면서 재해석하면 관객들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김구 선생이 몸 담았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이기에 이처럼 재해석하려는 사람은 없겠지만, 허나 <군도>가 보여주는  현실도 어쩌면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 백성은 현재와 흡사한 채권추심도 당합니다.

영화 속 현실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얘기하면서도 묘사는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누리끼리한 서부 영화 스타일 색보정, 음악과 무협 영화와 같은 캐릭터 구축과 샘 페킨파 같은 급격한 줌인 줌아웃 등을 써대니 당연히 언발란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군도>의 흥행이 주춤하는 것은 여타의 요인이 많겠지만 제 생각에는 <명량>과는 다르게 리얼리즘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창수”, 임창정, 슬픈 목숨의 노래

우연히 버스에 붙은 영화 <창수> 포스터를 봤어요. 임창정이 껄렁한 변두리 달건이 티셔츠 입고 사람들한테 끌려다니는데 창수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근데 창수가 슬플 창(愴), 목숨 수(壽)예요. 보통 사람 이름에 누가 이런 한자를 써요. 번성할 창에 빼어날 수 정도 쓰지. 그것만으로 이 캐릭터가 설명되더군요. 이 창수라는 놈은 태어난 게 불행한 놈이구나. 그런데 그 역할이 다름아닌 임창정이에요. 임창정은 이 방면에 아주 독보적인 배우죠.

그런데 작품을 개인 화보로 생각하는 배우들이 있어요. 대표로 이범수. 이 분 첫 인상은 강렬했어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차승원 운전기사로 나올 때. 아주 생양아치 단발로 나오죠. <태양은 없다>에서도 그렇죠. 그러다가 지명도가 생기니까 자기가 원빈인 줄 아는 것 같아요. <아이리스> 보면 정보요원이 아니라 모델이더라고요, 연기를 하지 않고 화보를 찍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보면 임창정은 굉장히 영리한 배우예요. 자기가 어떻게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를 잘 알죠. 시나리오 상에서 자신의 역할이 어떠해야 되는지를 아주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스카우트>, <색즉시공>, <1번가의 기적> 등은 그냥 망가지는 캐릭터가 아니었어요. 그 망가짐 안에 페이소스들이 가득차 있죠.

독재의 ㄷ자도 모르던 대학시절에 대한 페이소스, 가난하고 못 생겨서 뒤처져야 하는 젊은이들의 페이소스, 가난해서 깡패가 됐는데 다시 가난한 이를 수탈해야 하는 이의 페이소스. 망가짐 안에 그 페이소스를 담아낼 수 있는 대한민국 유일한 배우라고 생각해요.

최동훈의 <도둑들>에서 이정재를 보고 굉장히 반가웠어요. 그는 굉장히 멋지고 세련된 이미지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정재에게는 그보다 더 특출난 이미지가 있지요.

배창호의 <젊은 남자>, 김성수의 <태양은 없다>에서의 이정재 말입니다. 그 이정재는 물질적인 욕망에 가득차 그것을 쫓아가는 ‘불나방 날라리’ 이미지예요. 그런데 그 속물적인 욕망이 너무 순수해서 안타까운 캐릭터죠. 또 그래서 남을 속이고 죽여서 성공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 욕망을 이루지 못 하고 좌절하죠. 속물 날라리지만 좌절하는 날라리이고 애처로운 날라리이지요.

최동훈 감독이 <도둑들>을 개봉하면서 사실은 <범죄의 재구성>에서의 박신양 역할을 ‘이정재’를 생각했다고 했어요. 저는 옳다구나 했죠. 박신양은 자꾸 조폭이나 건달로 나오는데 도저히 조폭이나 건달, 날라리가 되지 못 해요. <범죄의 재구성>에서 열심히 하긴 했지만 그 날라리 역할을 이정재가 했으면 더 잘 어울렸겠죠.

<도둑들>에서 최동훈은 이정재를 잘 읽었어요. 딱 어울리는 캐릭터를 주었지요. 이정재가 연기한 뽀빠이는 <젊은 남자>, <태양은 없다>에서 이정재가 십년 늙은 버전이에요. 개날라리에 똥폼 잡으며 힘껏 잔머리 쓰고 대가리 굴려봐야 선수들을 못 당하지요.

전 영화에서 캐스팅이 그래서 아주 중요하다고, 캐스팅만으로도 영화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고 보는데 임창정은 ‘슬픈 목숨 달건이’ 역할로는 보지 않아도 최고이지요. 그래서 살펴보니 감독이 각본까지 써서 입봉하는 작품이더라고요.

전 그러면 놀라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암튼 그런 말을 했지요. “모든 감독은 한 편의 걸작을 갖는다. 그건 바로 자기 이야기다.” 각본까지 쓴 거 보니, 거기다 입봉작이다 보니 아마 위의 말이 잘하면 이 작품에 들어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창수>의 시놉을 보니까, 태어난 게 불쌍한 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네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도 저는 매우 매력적으로 느낍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죠. 사랑해서는 안 되는 철천지 원수 집안.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더 귀한 것이 됐고 고전이 되었죠.

<레이디 호크>도 있었어요. 서로 만날 수가 없어요. 여자는 낮에 매로 변하고, 남자는 밤에 늑대로 변하지요. <리벤지>도 생각납니다. 조폭의 첩을 사랑한 케빈 코스트너. 사랑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디 인간사가 그렇게 되나요? 댓가를 받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댓가는 아주 처참했지요. 그래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인간이지요.

“여자의 남자”도 있었어요.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소설이 원작이었죠. 영화였나 드라마였나 암튼 김혜수가 나오는 … 여자가 대통령의 딸이었지요. 도저히 사랑할 신분이 아니에요. 하지만 사랑은 시도 때도 없이 주제도 꼬라지도 안 보고 찾아와요.

<데미지>도 빼놓을 수 없어요. 아들의 아내, 며느리한테 사랑에 빠지지요. 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그 주인공을 힘들게 하고 고통에 빠뜨리고 좌절시키고 죽이는데도 끊임없이 변주돼요. 조건, 배경, 재산, 학벌 따지는 안전한 사랑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큰 코 다치는데 그게 사람 뜻대로 되지 않지요. 그게 사랑이지요.

영화를 꿈공장이라고 합니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에 꿈이며 그것들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기성품처럼 찍어대니 공장이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꿈이지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나 <노팅힐>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꿈이겠지요. 하지만 <창수>는 제목만 봐도 해피엔딩일 리가 없죠.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은 시궁창 현실에 꼬라박히겠지요. 저는 그 꿈이 얼마나 처절하고 처참하게 좌절될지 기대가 돼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꿈을 꾸는 게 좋을지, 이루어지지 않기에 꿈도 꾸지 말아야 할지,

영화 결말에 가서 창수는 좌절된 꿈이더라도 행복해 할까요? 좌절된 꿈이기에 불행해 할까요? 그래서 <창수>라는 영화가 궁금해요.

저는 창수가 행여 목숨을 내놓더라도 행복해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사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