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4부]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1부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2부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3부

앞서 얘기했지만 진화의 개념은 혜성처럼 등장한 다윈이 안쪽 호주머니에서 불쑥 꺼내놓은 이론이 아니다.

다윈 이전에도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생물의 발생에 대한 논의들이 있어왔다. 하지만 당시의 유럽은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공구리 치던 시절이었다. 그 세계관은 신이 식물과 동물의 종들을 각각 별개로 창조하였으며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낳는다는, 즉 종은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 노아의 홍수와 같은 대재앙이 우리가 관찰하는 지질학적, 생물학적 환경을 설명해 준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신의 경이로운 솜씨를 기리고자 그의 피조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생물오덕질이 하나의 유행이 된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다. 생물의 표본들이 한곳에 모이면서 생물 전반의 큰 그림을 그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이렇게 소심하고 쪼잔할 정도로 다양한 생물들을 신이 일일이 창조했다는 생각에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커다란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깨뜨려야 될 또 하나의 벽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지구의 나이에 관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생물들이 진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지구의 나이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다



제임스 어셔James Ussher(1581-1656)

지구의 나이에 대해 처음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 이는 제임스 어셔(James Ussher)대주교였다. 그는 1581년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에서 태어났으며 26살 약관의 나이에 더블린 신학대학의 신학과 학과장이 되었고 1925년에 아일랜드 영국국교회의 최고 고위직인 아르마 대주교(Archbishop of Armagh)가 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학창시절 반장 한번 못해본 우리들로서는 처세술에 능했던 얍샵한 인물일거야 하며 자위하고 싶지만 학생 때부터 역사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받았으며 수많은 역사책을 탐독했고 방대하고 권위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저술하는 등 학자의 면모도 가진 똑똑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영문판으로 나와 인터넷에서 팔리고 있는 Annals of the World

그가 집필했던 책 중 주목할 것은 1650년에 출간한 Annals of the World라는 라틴어로 쓴 책으로 에덴동산에서부터 AD 70년까지의 모든 주요한 사건들을 망라한 세계 역사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에 실려 있는 아담의 후손 나이를 차례로 더하는 계산을 통해 지구는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정오에 탄생했다고 발표했다. 지금을 기준으로 약 6014년 전인 것이다. 당시로서는 성경이 곧 진리였던 시대였기 때문에 매우 그럴 듯한 이야기로 들렸겠지만 지금 우리들로서는 신을 향한 열망과 지식을 향한 열망을 잘못 비벼놓으면 얼마나 어이없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벌써 날 잊은건 아니겠지?!

생물학자 진영 쪽에서는 재벌2세 뷔퐁형님이 뉴턴의 프린키피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지구의 나이를 계산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지름이 약 4천만 피트인 우리 지구와 똑같은 크기의 빨갛게 달궈진 쇳덩이는 6천 년과 같은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거의 식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5만 년 이상이 흐른 다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라고 말만 번지르하게 해놓고는 지구가 식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뷔퐁형님은 태양에 혜성이 충돌 하면서 떨어져 나온 물질이 지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기의 지구는 태양과 같이 뜨겁게 용융된 상태였고 생명이 존재할 수 있을 때까지 서서히 냉각된 것이며, 이 때 냉각에 걸린 시간은 6,000년 가지고는 턱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뷔퐁형님은 철구슬을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가열한 다음,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식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는 실험을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지구와 크기와 비슷한 구가 식는데 걸리는 시간을 외삽하는 방식으로 측정했다. 그 결과 뷔퐁형님은 지구의 나이가 최소한 7만 5천 년은 되어야 한다고 [자연사 Historire Naturelle]에서 언급했다. 지금보자면 실험이 매우 5학년 3반 과학실험스럽고 현재 최고 측정치인 45억년에도 훨씬 못미치지만 성경의 굴레를 벗어나 과학만으로 지구의 나이를 측정한 시도에 의의가 있으며 또한 제임스 어셔가 추정했던 지구의 나이보다 훨씬 많았다.

물론 이런 뷔퐁의 도전을 하나님의 행동대장을 자쳐하는 기독교에서 미소로 화답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뷔퐁은 ‘철학적 추론’이라는 멋들어진 현학적 핑계를 대며 기독교의 철퇴를 피해 간다. 뷔퐁의 다음 세대에는 수학자이자 푸리에 해석으로 유명한 조세프 푸리에가 등장해서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는데 뷔퐁의 측정치는 명함도 못내밀 정도의 어마어마한 수치가 나오게 된다.
 


조세프 푸리에Jean Bapiste Joseph Fourier(1768~1830)



푸리에는 1768년 프랑스 오세르(Auxerre)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역학에 관심이 많았고 이에 관한 수식들을 통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뷔퐁보다 더 정확하게 지구가 식는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수치에 너무 놀랐는지 푸리에는 지구의 나이를 계산할 수 있는 수식만을 남겼다.

이 수식에 따라 계산을 하면 지구의 나이는 약 1억년이 나오게 된다!  기독교에선 6,000년이요 고작 7만 5천년이라고 발표한 뷔퐁도 해꼬지 당할 까봐 ‘철학적 추론’이라며 핑계를 대는 마당에 1억년 이라니. 푸리에가 놀랄만도 했다. 푸리에는 이외에도 뷔퐁이 지나쳤던 요소도 제대로 포착한다. 지구의 단단한 껍질은 그 속의 융해된 물질들을 둘러싸고 있어 단열작용을 하는 담요처럼 열의 흐름을 가로 막으며, 따라서 지구의 표면은 식었지만 그 속은 여전히 녹아 있는 상태라는 사실이었다. 


지구의 나이를 얘기하다
– 격변론(catastrophism)과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 –


이 두 용어는 상대편의 개념을 부정하기 위해 쓰인 단어이기 때문에 ‘~론’이니 ‘~설’이니 따위에 지레 놀라서 겁먹을 필요가 없다.

핵심은 단지 지구의 나이가 많느냐 적느냐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수명이 24시간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오늘 밤 클럽을 가서 헌팅을 성공하느냐는 일생의 가장 큰 사건일 것이다. 왜냐면 자칫 어설프게 뻐꾸기 날렸다가 망치면 마법사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명이 1000년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꼭 오늘 헌팅에 성공 못해도 내일 다시 시도해도 되고 한 달 뒤에 시도해도 되는 등 천천히 시도해보면 된다. 즉 오늘 클럽가서 헌팅하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 큰 사건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지구의 나이가 6,000년 이라고 가정한다면 대홍수나 운석의 충돌, 빙하기 등은 지구에게 있어 ‘격변’일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나이가 46억년이라면 대홍수나 빙하기, 대지진 따위는 늘상 있어왔던 ‘동일’한 일들의 반복일 것이다.


하루살이에게 저녁노을은 커다란 격변이지만 인간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일 뿐이다

단지 성경의 연대기만을 토대로 지구의 나이가 6,000살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화석과 지층들로부터 발견되는 증거들 앞에서 똥꼬가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해양생물 화석이 고지대에서 발견되면서 땅이 오랜 시간 융기했음을 암시하였고 현재는 볼 수 없는 기괴한 생물들의 화석은 생물이 멸종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처럼 새로운 증거들이 쌓여갔지만 그래도 기독교적 세계관의 그늘은 짙었다.

신앙심이 깊은 자연학자들은 이 증거들과 성경이 얼추 말이 맞도록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지구가 짧은 기간 동안에 대격변을 겪으면서 지금과 같은 세계가 만들어 졌다는 격변론이었다. 그리고 이 격변론에 힘을 실어준 것은 바로 리마르크를 왕따 놓았던 퀴비에 형님이었다.


끝판왕 퀴비에.
이번에도 퀴비에 형님은 다음 편으로.


 


*** 다음 편에서 계속 ***



 


영진공 self_fish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3부



 

*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1부


*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2부

2. 생물의 진화를 생각하다



 



뷔퐁 Count de Buffon(1707~1788)



프랑스의 자연학자이며 파리 왕립 식물원의 총책임자였던 뷔퐁백작은 귀티가 좔좔흐르는 사진에서 느껴지듯 벼락부자 아버지를 두었던 재벌 2세 출신이었다. 부잣집 가정사가 늘 그렇듯 이 집안도 재산문제로 시끄러웠다. 재혼하려는 아버지와 뷔퐁과의 재산싸움이 있었고 이 싸움에서 뷔퐁이 승리하며 많은 재산을 차지한다. 게다가 뷔퐁은 헐랭이 재벌 2세가 아니었다. 사업수완을 발휘하며 여러 사업에 투자를 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도 한다.




이렇게 돈이 차고 넘치는 뷔퐁형님이었지만 유별나게도 자연사 공부에 열중 했다. 뭐 느긋하게 자연사 책이나 뒤적이며 지적인 모양새나 풍길 요량인가 싶었지만 그는 정말 부지런하고 열정적으로 자연사를 파고들었다. 형님은 1749년부터 1804년에 걸쳐 무려 44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며 다산(?)의 제왕스런 면모를 보여준다. 이 중 [자연사 Historire Naturelle]는 그의 가장 기념비적 작품이자 과학사에 있어서도 의미있는 작품이다. 이해하기 쉽게 쓰인 덕분에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된다.



[자연사 Historire Naturelle]


독창적인 이론은 없지만 풍부한 자료들을 끌어모아 체계적인 형태로 정리함으로써 


여러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연구의 시발점을 제공했고, 사람들에게 박물학자 붐을 


일으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뷔퐁형님은 과학 행정가이자 대중적인 활동가로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아쉽게도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형님은 종들은 진화한다고 주장했던 초기 진화론자 중 한 분이었다. 형님은 진화를 과거의 튼튼한 조상으로부터 점점 퇴화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명의 창조에 개입하는 것은 오로지 열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거의 지구는 온도가 높았기 때문에 생물의 창조가 더 쉬웠고, 고대의 뼈에서 보듯 당시의 생물 역시 그렇게 컸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연사] 4권에서 당나귀는 말이라는 종에서 진화한(그러니까 퇴보한) 후손이며 


원숭이도 인간의 종에서 진화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뷔퐁형님은 돼지의 발가락뼈나 꼬리처럼 쓸모없는 부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은 창조할 때 
궁극적인 목적 따위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며
지적 설계론에 맞불을 놓는다.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뷔퐁형님은 생물의 진화를 인정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진화를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다윈이 진화라는 개념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듯 진화의 개념은 휠씬 전에 등장했다. 다윈이 본좌에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진화의 매커니즘을 훌륭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윈보다 앞서 진화의 매커니즘을 설명하였던 분이 계셨다. 바로 비극의 주인공 라마르크 형님이시다! 두둥~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 (1744~1829)

드디어 생물학계 최고의 비극의 주인공인 라마르크 형님이 등장하셨다. 다윈보다 먼저 진화의 메커니즘에 눈을 뜬 훌륭한 형님이지만 ‘기린’이라는 포유동물 하나로 인해 그의 업적과 이론들은 모두 버로우 되고 말았다. 그러나 형님은 결코 기린이란 단어 하나로 평가되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라마르크 형님의 진화이론은 비록 틀리긴 했지만 후배 진화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다윈 역시 라마르크 형님의 이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님의 이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진화이론을 전개해 나간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학계는 진화 메커니즘을 둘러싸고 다윈주의와 라마르크주의로 나뉘어 박터지게 싸우게 된다. 이 싸움에서 다윈주의가 승리하면서 라마르트 형님의 이론은 찬밥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아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라마르크 형님은 ‘장-밥티스트 피에르 앙투안 드 모네 드 라마르크’라는 길고 긴 이름을 가진 프랑스의 별 볼일 없는 군소귀족 출신이었다. 군인, 은행원 등 초반 직업은 과학과는 멀어 보였지만 마음속엔 과학을 향한 알콜 램프를 태우고 있던 분이었다. 은행 일을 하는 틈틈이 의학, 생물학, 기상학을 공부했고 결국 책까지 집필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1776년에는 [대기의 주요 현상에 대하여]를,
1778년에는 [프랑스의 식물 flore-francaise]을 출판한다.
이 중 [프랑스의 식물]은 프랑스 식물의 분류에 관한 표준 교재가 되면서
식물학자로서 명성을 날리며 학술회 회원으로 선출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프랑스의 식물]의 대박이후 은행일에서 손을 떼고 본격적으로 생물학계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런 라마르크 형님 뒤를 봐준 이가 바로 재벌 2세 생물학자 뷔퐁이었다. 뷔퐁의 달콤한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라마르크 형님은 1790년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에 입성하여 곤충과 벌레 분야의 연구 책임을 맡게 된다. 형님은 이 연구에서 무척추동물invertebrates이라는 이름을 창안하여 이들을 분류한다.

 

척추가 없는 친구들을 분류하고 무척추동물이란 이름을
붙여준 것은 다름아닌 라마르크 형님이었다.

지식에 대한 욕구가 많았던 형님은 생물학, 기상학, 물리학, 화학 등에 까지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참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써냈다. 그 중에는 라부아지에 본좌님의 이론에 반대되는 물리화학적 이야기를 논하는 책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형님의 글솜씨가 안드로메다스러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들이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형님이 택했던 직업들은 대개가 돈 안되는 명예직들이어서 일생동안 돈 걱정을 하며 살아가야 했고 말년에는 눈이 머는 등 순탄한 일생은 아니었다.


화학계의 본좌 라부아지에가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혁명사상에 동조적이었던 라마르크 형님은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된다.

무척추동물을 분류했고 고생물학을 창시하였으며, 현대적 의미의 화석 용어를 고안하는 등 후덜덜한 업적을 이루어냈지만 역시 가장 손꼽히는 업적은 다윈보다 앞서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한 점과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체계를 세운 점일 것이다.

형님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연구하는 과학으로서 생리학이나 해부학 등의 단편적으로 이루어지던 연구들을 독립된 분과학문으로 체계화하고 여기에 생물학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리고 동물, 식물, 광물의 3개로 나뉘어있던 것을 동식물을 합친 생물계와 무기계로 재편성했다. 이후 생물계는 일관된 물리화학적 체계를 근거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는 생기론이라 하여 생물체를 이루는 구성 물질과 무기체를
이루는 물질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물론 라마르크 형님도 생명체와 무기체는
엄격히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생기론자는 아니었다.
형님은 생명체든 무기체든
그 구성물질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법칙은 동일하며 단지
이 구성물질들이 어떻게 조직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생명체와 무기체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라마르크 형님은 평생 동안 개체가 형질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그것이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진화의 방식에 대한 모델을 개발했다. 이런 생각이 처음 드러난 것이 1809년 발표한 [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에서인데 바로 책이 라마르크 형님을 지금까지도 기린의 아버지(?)로 기억되게 만든 악몽의 출발점이 된다.

그럼 어째서 [동물철학]은 논란의 장작더미가 되었을까?

라마르크 형님은 [동물철학]에서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2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환경의 상호 관계 속에서 필요성에 의해 기관을 창조하고, 그 기관은 사용할수록 강해지며, 사용하지 않을수록 퇴화된다는 용불용설이론과 둘째는 이렇게 획득한 것은 세대를 거쳐 자손에게 전달된다고 하는 획득형질의 유전설이다.



용불용설과 획득형질의 유전을 설명하기 위해 라마르크는 기린의 목을 예로 든다.
높이 있는 나뭇잎을 먹기위해 목을 길게 빼 용을 쓰다보니 목이 점점 늘어났으며
이렇게 획득한 형질은 유전이 되어 지금의 기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진화이론은 단지 1부의 내용일 뿐이다. 2부는 생명체와 무기물의 차이를 설명하는 일반 생물학, 3부는 심리 생리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듯 [동물 철학]은 진화론에 국한된 것이 아닌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기초를 명확히 세우고 이를 연장으로 심리학적 토대까지 세우려고 했던 거창하고 값진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는 저서였다. 


하지만 당시 이 책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이 책이 제대로 읽히기 시작한 것은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고 사람들이 진화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라마르크 형님의 글솜씨는 훌륭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형이상학적 단어들이 너울거렸고 지독한 문어체를 구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 내용이 접수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생물을 분석하는 데 사용된 물리화학적 이론들은 구닥다리였다. 이미 세상은 화학계의 본좌인 라부아지에의 화학이론들로 갈아탔는데 [동물철학]에는 18세기 화학이론이 적용되어 있었다. 게다가 [동물철학]에서 진화와 관련된 제1부만 발췌하여 번역되고 출판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결국 그의 책은 왜곡되어 단편적으로 수용되면서 알멩이는 없어지고 이해를 돕기 위해 등장했던 기린만이 살아남아 구천을 떠돌게 된다. 



라마르크와 다윈의 진화이론의 차이.
즉 기린의 목은 목적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일어난 변이가 아니라
우연히 발생한 목이 긴 돌연변이가 환경에 더 적합하였고 
그럼으로서 목이 짧은 기린은 도태되고 목이 긴 기린만 살아 남은 것이다.

 


 어쩌면 다윈과 라마르크는 참 비슷한 구석이 많다.
둘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하였고 그 예로 든 동물로 인해 놀림을 당해야만 했다.
  



라마르크 형님은 멸종되는 종은 없고 다만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단순한 단세포 생물에서 점점 복잡한 생물로 진화되었으며 이런 메커니즘으로 용불용설과 획득형질의 유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진화의 과정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한 인물이 발끈하고 튀어나오게 된다. 라마르크 형님은 사후에 다윈주의자들에게 시달렸지만 살아생전에도 만만찮은 상대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그를 괴롭힌 인물은 형님보다 늦게 파리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온 후배였다. 그는 종은 변하지 않으며 단지 대격변으로 모든 종이 멸종하고 다시 생겨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명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생물학자였다. 

그는 퀴비에였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