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바’, 낯선 거리에 비춰진 내면의 풍경들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2008년 작품입니다.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두 딸과 아버지가 시카고를 떠나 이탈리아 제노바에 정착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박찬옥 감독의 <파주>(2009) 와 무척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확실한 기승전결과 끝맺음을 보여주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보다는 등장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 집중하고 있고, 그 방법으로 주변 풍경에 인물들의 감정을 투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노바>와 <파주>는 여러모로 다른 영화입니다.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배우도 다르고 로케이션도 다릅니다. 하지만 영화가 중점적으로 드러내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그 방식이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너무 유사합니다. 이것을 두고 대중적인 흥행 영화를 지향하지 않는 대안적인 영화들의 전세계적인 공통 지향점이라 할 수 있는 걸까요?

스토리텔링에 의존하지 않고 특정한 메시지를 주장하지도 않으면서 오직 등장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 상태를 형상화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는 이런 영화들은 확실히 일반적인 감상 습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전히 새로운 내용이나 강력한 내러티브의 힘에 풍부한 감정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영화 – 최근에는 <용의자 X의 헌신>(2008) 이 그랬습니다 – 가 관객으로서는 이상적인 영화입니다. 하지만 감정 없이 뻔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거나 그나마도 어디서 본 듯한 줄거리를 답습하는 영화들 – 한마디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범작들 – 에 비하면 이렇게 복잡한 인간 감정의 미로를 탐험해나가는 영화가 백번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파주>의 내러티브가 약간이나마 미스테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던 반면 <제노바>는 특별히 이렇다할 비밀조차도 따로 두고 있지 않습니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블루>(1993)가 그랬듯이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고의 원인은 다름아닌 둘째 딸 메리(펄라 하니-자딘)의 장난 때문이었고 가족 모두와 사고를 일으킨 메리 본인까지 그 잘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제노바>는 감당하기 힘든 상처와 가족의 부재를 끌어안고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이들의 험난한 투쟁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겨진 세 가족의 불안한 현재와 미래를 형상화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복잡한 미로와 같은 제노바의 거리 풍경인데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탐험해온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은 매우 빠른 편집을 통해 붕괴의 위험 선상에서 힘겨워하는 가족 구성원들의 심리적인 풍경을 매우 사실적인 톤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둘째 딸 메리는 죽은 엄마를 그리워하던 나머지 환상을 보게 되고 첫째 딸 켈리(윌라 홀랜드)는 내적인 고통과 부담감에 떠밀린 듯 탈선을 하기 시작하는데 아버지 조(콜린 퍼스)로서는 엄마 잃은 두 딸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무력하기만 합니다. 뭔가 커다란 사건이 이들 가족에게 터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러닝 타임을 지배하지만 나름의 큰 위기 상황을 넘기면서 결국 무사히 여름 방학 기간을 마치고 두 딸이 학교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습니다.

<제노바>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서로 반목하던 가족들이 다시 하나로 뭉치게 되는 가족 드라마의 전형성에 의존하기 보다는 시종일관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불안하기만 하던 그 상황 자체에 방점을 찍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영화가 준비해둔 내러티브 상의 극적인 장치라는 것이 그다지 효과적인 편은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등장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의 결들을 따라가는 것이 <제노바>를 감상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영진공 신어지

“파주”, 죄의식과 부채의식 그리고 상실과 두려움의 4중주

광포하고 매력적인 치정극으로 홍보되는 이 영화.
치정극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 영화를 다 보고나서 … 인생이란게 … 전체가 욕망과 두려움이 뒤얽힌 한편의 치정극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가련한 두 남녀의 몸부림이 너무 안쓰럽고, 두 사람의 노력에 비해 삶이 너무 아이러니해서 보기에 많이 아렸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영화는 시작부터 죄의식을 자극하며 시작한다.
8년 전 수배 중이던 중식은 짝사랑하던 선배의 집에서 기거를 하고 있다. 선배의 남편도 함께 운동하던 선배이며 구속되어 있는 상태다.

그 상황만 하더라도 중식의 마음엔 이미 부채의식과 죄의식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선배는 구속되었는데 자기는 피신을 해 가며 구속되지 않았다는 부채의식. 그리고 선배가 부재중인 상태에서 그 아내인 여선배를 사랑하고 있다는 죄의식.

그런데 영화는 그 죄의식에 기름을 퍼붓는다. 그저 사랑하는 선배를 한번 안아보려는 인간적인 욕망은, 한 순간 방치된 아이에게 화상을 입히게 되고 중식에게는 그 화상만큼의 트라우마와 죄의식을 남긴다.

미친듯이 갚으려고 해서, 자꾸만 빚지는 남자 중식

그날 이후로, 중식은 그 죄의식을 감당하기 위해 자꾸만 부채를 갚으려 하고,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그 버거운 짐을 갚는데 쓰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마 은수와 결혼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상환자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성욕으로 인해 아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트라우마 때문에 은수와의 부부관계도 원만치 아니하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어느정도 죄의식을 취기로 덮은 후에 다시 아내를 찾았을 때 은수의 등에 확연하던 화상자국. 그 화상에 미친듯이 매달리며 외치는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는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자신의 부채를 갚듯이 시작했던 결혼생활은 결국 ‘언니를 제대로 사랑해 주지 못했어’라는 고백으로 끝나고, 속죄를 하려는 목적은 전혀 달성되지 못한다. 게다가 그런 그녀를 가스 폭발로 인해 잃게 됨으로써 중식은 더 심한 죄책감을 집어 안게 된다.

철거대책위원회의 시위가 막바지에 다다른 때, 화염병 사용을 망설이는 철거민들에게 중식은 자신이 화염병 사용에 관한 혐의는 모두 뒤집어 쓸테니 쓰자고 말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보험사기혐의로 연행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려던 중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시 빚지게 됨으로써 죄의 부채를 늘려 나가기만 한다.

영화 말미 쯤에 ‘이런 일들(운동) 왜 해요. 무슨 의미에요’라고 하는 말에 중식은 ‘자꾸만 할일이 생긴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자꾸만 빚이 생기고, 자꾸만 속죄할 일이 생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애초에 한가지 죄의식이 지배할때 그것을 갚지 않으려 했다면 점점 더 부채가 불어나지는 않았을텐데, 죄를 짓고 갚으며 중식은 시지프스처럼 계속해서 그 삶을 살아간다.

잃고 싶지 않아 떠나기 때문에, 자꾸만 잃는 여자 은모

중식을 대표하는 말이 ‘속죄’라면 은모를 대표하는 말은 ‘상실’이다. 은모의 삶은 잃고, 또 잃고, 잃지 않으려고 떠나는 것으로 요약된다.

첫 등장부터 은모는 부모를 상실한 상태이며, 집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있다. 가진 것, 기댈 것이라고는 언니 은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식의 등장으로 은모는 언니 은수를 상실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두렵지만 결국 그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중식은 형부가 된다.

언니 은수가 중식과의 행복한 관계를 갈구하면 할 수록 은모의 두려움이 커져 나가는 가운데, 부부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언니 은수가 중식과 원만한 밤(?)을 보낸 후 은모를 제외한 둘만의 아침상을 차리는 순간 그 두려움은 극대화가 되고 은모는 또 다시 잃는 것이 두려워 떠난다.

가족사진에서 형부의 얼굴을 오려내고 친구와 며칠 밤 집을 나갔다 온 그 때, 은모는 자신이 두려워했던것 보다 훨씬 더 무섭게. 언니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다. 애초에 잃을까봐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잃지 않았을 일이었는데.

그래도 형부한테 맘 붙이고 잘 살고 있던 은모에게 또 다시 상실의 두려움이 찾아온다. 바로 자신이 중학생이고 형부가 공부방 교사이던 시절 수업시간에 전해들었던 형부의 첫사랑의 등장. 든든한 보호자였던 형부가, 아기 사진을 들고 온 어떤 낯선 여자 앞에서 엎드려 속절없이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고3이고, 바로 며칠 사이에 어른이라는 ‘선고’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형부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다시 혼자가 되게 될까봐 은모는 떠난다. 그리고 그 떠남이 결국 중식을 잃게 되는 전조가 된다.



속죄할 권리도, 떠날 권리도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는가

자신의 죄의 댓가를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발버둥쳐도,
잃지 않기 위해 자기가 먼저 떠나도,
자꾸만 더 깊은 늪으로 빨려들어가는 두 사람의 엇갈리는 삶을 보면 삶은 허무를 넘어 덫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과 똑같은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은모에게 지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그 진실을 부여잡고 지키려고 하는 중식.

대체 그 한가닥 진실을 지켜낸다는 것이 얼마나 은모를 지켜줄 수 있으랴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가 들어앉는 중식과 나이트클럽/용역깡패 사장의 차창을 스쳐가는 은모.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때 그 진실하나를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삶의 힘이라는 것이 참으로 풀잎처럼 얇기만 하다.

영화를 다 보고,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영화 참 … 독하다.’

어쩌면,
중식은 그토록 처절하게 속죄하려고 노력하는데도 죄의 짐을 조금씩 덜기는 커녕 물에 젖어가는 목화솜을 진 당나귀처럼 점점 그 짐이 더 무거워지기만 한다.

은모는 훌훌 털고 떠나려고 하는데도 삶이 가진 잔인한 힘은 은모를 ‘상실’과 대면하도록 자꾸만 끌어다 꿇어 앉힌다.

정확히 옮길 순 없지만 중식이 영화 막바지에 교도소 면회실에 앉아서 했던 대사가 마음에 자꾸 걸린다.
‘내가 교만했던 것 같아. 내가 얼마나 미욱한 놈인지’ 하는 말이 들어가 있던 그 대사.

그래,
사람은 다 미욱하지.
그렇다고 몸부림 치는 것 조차 ‘교만’인 것인지.
어쩌라고 … 대체 사람보고 어쩌라고.

영화 참, 독하다.

영진공 라이

 

“파주”, 복잡한 내러티브 그러나 단 하나의 감정

형부와 처제 사이에 벌어지는 금단의 사랑 이야기 – 지고지순한 쪽이든 살색 향연이 펼쳐지는 쪽이든 – 로만 기대한다면 적잖이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더군다나 두 주인공의 미래에 대한 명확한 결말 – 둘이 행복하게 잘 살게 되는 쪽이든 둘 중에 하나 또는 둘 다 죽어 슬퍼지는 쪽이든 – 을 필요로 하는 관객이라면 매우 황망한 기분을 안고 상영관을 나설 수 밖에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들처럼 박찬욱 감독의 적절하게 홍보되지 못한 이상한 영화로 잘못 알고 보는 것이 아니라 <질투는 나의 힘>(2002)의 박찬옥 감독이 7년만에 내놓은 장편이라는 정도만이라도 정확히 알고 본다면 전형적인 멜로 드라마의 틀에서 빗겨 나갈 수 밖에 없는 이 한 편의 영화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으리라 – 그런 준비만 되어 있다면 크게 실망할 일은 없으리라는 얘기다. 오히려 다른 영화들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꼼꼼한 연출의 힘을 만끽하길 원한다면 <파주>는 올해 하반기 반드시 봐두어야 할 작품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의 거리 풍경이나 수도권 재개발을 둘러싼 험상궂은 투쟁의 현장 등이 등장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과 맞물리며 구구절절한 대사를 대신한다 – 문어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사용되는 대사들에 비해 차라리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였다고 할까.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중식(이선균)과 은모(서우)가 약 8년의 시간에 걸쳐 겪게 되는 사건들은 <파주>를 의외로 매우 복잡한 내러티브의 영화로 여겨지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데, 감독의 의도는 역시 미스테리로 관객들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일 보다 등장 인물들의 감정을 화면 곳곳에 촘촘하게 새겨넣는 쪽이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파주>는 복잡한 내러티브 속에서 단 하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영화라고 하겠다. 그러나 <파주>가 표현하고 있는 그 감정의 실체는 사실 매우 모호한 것이어서 단순히 욕망이라고만 정의할 수도 없고 질투와 불안, 죄의식과 두려움의 감정 따위가 마구 뒤섞인 무엇이다. <파주>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줄거리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중식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였던 영화는 어느새 은모의 이야기 – 정확히 말하자면 은모의 입장과 감정으로 그 중심을 이동한다. 중식의 입장에서 본다면 <파주>는 마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순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모의 입장에서 그 사랑은 구원의 손길이기는 커녕 매우 의심스럽기만 한 구속일 따름이다. 은모가 원했던 것은, 죽은 언니의 남편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겨진 보호자 중식과의 결합 – 연인으로서라기 보다는 부모의 죽음 이후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안정적인 생활의 터전으로서 – 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언니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진실이 갓 스물의 은모로서는 절대로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은모는 감당못할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중식을 오해하고, 그 오해를 뒤로 한 채 친구와 함께 50cc 스쿠터에 의지해 다시 한번 자신의 길을 찾아나서지만 그 길이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를 암시하는 지점에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파주>는 은모가 감당못할 진실을 결국 알게 될 것인지, 그런 이후에 중식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후의 이야기를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다기 보다는 바로 그 시점에 은모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과 감정의 복합성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영화 <파주>의 실체다.

영진공 신어지

“제노바”, 해사한 지중해에 어리는 슬픔의 그림자

영화 <제노바>
어린 딸 메리가 자초한 사고로 시작한다. 엄마, 언니와 함께 어딘가로 향하던 메리는 지루함을 달래려는 듯 두 눈을 가리고 옆
차선을 달리는 자동차 색을 맞추는 놀이를 한다. 이상할만큼 자신보다 잘하는 언니 켈리를 시샘하다가 메리는 장난삼아 운전 중인
엄마의 눈을 가린다. “엄마도 해봐, 엄마도 해봐” … 그리고 일어난 끔찍한 사고. 엄마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난다.

일상에 남겨진 세 식구는 좀처럼 아물지 않는 상처를 달래기 위해 애쓰지만, 보일 듯 보이지 않게 두 아이의 자매애는
허약해가고, 그럴수록 동생 메리는 자책감으로 악몽과 환영에 시달린다. 한 순간 아내의 빈 모든 자리를 채워야 하는 아빠 조는 두
딸과 함께 ‘아내 생각을 덜 할 수 있는’ 제노바로 떠나기로 한다.

제노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도착한 세 가족은 좁지만 아늑한 새 터전에 짐을 풀고 오붓이 저녁을 한다. 모든 게 평범한 듯 보이는 제노바에서의 차분한 첫 날밤은 계속되는 메리의 악몽과 울부짖음으로 산산이 조각나고 만다.

영화는 화면 안에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이국의 신비한 구시가지를 놀랍도록 가득 채우는 동시에 빠른 편집과 카메라의
흔들림으로 등장 인물들의 불안함을 전한다. 희한하게도 이 두 장치가 대치될수록 두 눈은 헐렁할 틈 없이 스크린에 압정 박히 듯
고정된다.

감독 마이클 윈터버텀은 마치 사실처럼 연기하는 뛰어난 배우들을 데리고 엄마의 부재가 뒤덮은 가족의 슬픔을, 어린 딸들의
아픔을, 아빠의 고단함을 도시 ‘제노바’ 를 통해 정갈하게  풀어놓는다. 거기에 영화의 공간과 잘어울리는 배경음악은 자칫 어둡고
뿌옇게 될 수 있는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뻔히 허구인 줄 알면서도 메리와 켈리를 진심으로 어루만지며 보게 되는게 바로 영화
<제노바>의 힘이다. 좋은 소설을 읽은 느낌의 우리영화 <파주> 와 <여행자> 만큼이나 문학적인
느낌도 준다.

마이클 위터버텀이 자신의 전작 <쥬드>(1996) 에서처럼 결국 메리를 허망하게 떠나 보내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 하며 영화에 집중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라도 희망을 읽을 수있어 다행이었다.  물론 내용상의 허점이 존재하더라도 깊이 아끼는 감독 마이클
윈터버텀의 <제노바>는 나에게 발꼬락이 시려오는 가을의 맨 끝을 따뜻하게 덥혀 주었다. 한번 더 보고싶다.

More …
잠깐 언급했듯 <제노바>
배우들의 연기가 압권이다. 콜린 퍼스는 거대한 유명세에 비해 훨씬 담백하고 정적인 (아버지라기 보단) ‘아빠’를 연기했다. 두
딸 메리(펄라 하니-자딘)와 켈리(윌라 홀랜드)는 도대체 믿기지 않을 만큼의 호연을 펼쳤다. 특히 큰딸 메리가 풀 숏 안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순간은 감독이 개구지게 엔지컷을 넣은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만큼 자연스럽고, 영리하다.

영진공 애플

영화가 내게 꺼내 든 옐로우카드


하늘이 뚫린 듯 비가 퍼붓던 날, 퀵 아저씨가 장판같이 두꺼운 우비를 걸치고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땅이 꺼질듯 거친 한숨을 내뱉고는 그가 말했다. “오늘 또 한명 갔어. 젠장.  아 진짜 조심히 좀 다니라니까. ”

누군가 빗길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긴가 보다.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빗길인데 조심하세요.” 라고 겨우 소리 내었다.


비보호 좌회전

단편영화 <비보호 좌회전>에는 길가에 서서 우유와 빵조각을 입 안에 쑤셔 넣는 걸로 끼니를 대신하고 급하게 다음 배달
장소로 떠나는 퀵 기사가 등장한다. 여기저기서 ‘빨리빨리’를 외치는데 하필 이때 오토바이가 멈춰 선다.

다른 방도가 없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죽을힘을 다해 달리다가 급한 대로 택시를 잡아탄다. 하지만 이미 늦을 대로 늦은
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줄 아냐며 코앞에 서류 봉투를 거칠게 흔들며 으르렁대던 여자는 앞으로 거래하지 않겠다는 쉬운 결정을
내리고는 휙 떠난다.


그간 얼마나 많은 필름, 테잎, DVD 들을 영화제, 상영회, 개봉관으로 서울, 대구, 부산, 분당을 마다치 않고 퀵서비스를 통해
전달했을까. . 전국 각지로 가장 빠른 서비스를 ‘빨리빨리’ 부르고 보채고 따지고 깎으며 이용한 고객인 나는 그들에게 진심의
인사를, 절실한 안부를 건네보긴 했을까.

 


친구사이

파주

부산에서 본 많은 영화들은 택배 아저씨부터 스무 살 게이커플까지 내가 아닌 남의 사연을 조곤조곤 얘기한다. 왜 이제야 다른 사람들의 사연이 들리는 걸까…..

 

얼마나 긴 시간동안 나 혼자밖에 모르고 살았냐하면 말로 꺼내놓기 부끄러워 어딘가로 숨어야 할 지 모르겠다. 누군가의 고민은 간결한
조언 한마디로 끝냈고 남의 단점을 쉽게도 꼬집었다. 남의 걱정은 내 것이 아니었고 똑같지 않은 것엔 공감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방적이고 내 중심적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이상한 나를 PIFF 영화들이 거울이 돼 비췄다.



여행자

산책가

<친구 사이>의 밀리터리 게이 커플도, <파주>의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나눈 형부와 처제도,
<피시탱크>의 방황하는 15살 소녀도, <산책가>의 앞 못 보는 꼬마도, <여행자>의 고아원서
아빠를 기다리는 진희도. 모두 나보다 몇 겹은 두터운 이야기를 품고 산다.

그러면서도 <닿을 수 없는 곳>의 어린 가장은 아픈 엄마와 어린 동생 그리고 집 나간 아빠까지 모두 제 품안에 끌어안는다.
들 모두는 짊어진 무게가 벅차도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혼자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세상의 편견에 당당하게 맞서고
심지어 행복한 노래로 마땅히 아픔을 삼킨다. 땅 속에 제 몸을 묻어버릴 만큼 모든 걸 놓고 싶던 어린 소녀조차도 결국 세상 속
자기만의 오솔길을 찾아 천천히 걷는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임을 작품으로 일깨운 감독들의 깊은 혜안에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 PIFF 방문에서 더 늦기 전에 타인의 손을 잡을 것을 경고 받은 셈이다. 영화가 들이민 옐로 카드다.

영진공 애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