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2부







과학혁명으로 체면을 구긴 종교계가 짱돌을 굴려 내놓은 것이 자연신학이었다. 자연신학이란 쉽게 말해 자연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며 인간들은 자연의 법칙을 연구함으로써 고귀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털끝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이론이다. 즉 과학은 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말이다.




자연신학은 과학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종교는 계속해서 어깨에 힘주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과학혁명 이후에도 과학은 여전히 종교의 앞마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과학을 신을 이해하는 도구로 본 덕분에 기독교는 과학을 장려했다. 수도원 같은 곳에서는 과학에 몰두하는 성직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것도 신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였다. 특히 성경을 장르문학으로 분류시킬 수 있는 지구의 나이와 생물의 발생, 진화에 관한 문제에서 종교는 과학의 발목을 꽈악 붙잡고 있었다. 다른 과학 분야보다 생물학의 발전이 늦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윈 이전의 생물학 논란들




다윈 이전의 보수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생물의 기원을 대략 6000년 전에 하나님이 모든 생물들을 각각 별개로 창조하였다고 보았다. 즉 ‘강쥐는 태초에도 개새끼였으며 고냥이는 태초에도 고양이였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산이나 들판, 바다 등과 같은 지질학적, 생물학적 환경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대재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하마와 고래는 같은 조상에서 진화하였다고 밝혀져 있다.


하지만 개별창조이론으로 보면 하마와 고래는 태초에도 하마와 고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식물학, 자연사, 지질학과 같은 분야는 견본 수집 말고는 딱히 연구라고 할만한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학혁명 후 물리학이나 천문학, 화학 등은 빡시게 이론을 세우고 실험을 하며 원리를 정립하는 등 학문의 체계가 잡혀갔고 당연히 그에 따라서 많은 법칙을 밝혀냈다.




하지만 생물학이나 지질학은 할게 없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저 있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선 그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들을 모으는 오타쿠만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18세기에는 식물채집이 유행이었고 많은 부유한 아마추어 생물 오덕들에 의해 표본들이 수집되었다.




대항해시대를 맞이하며 역마살이 낀 유럽인들은 세계 구석구석으로 싸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동식물들을 수집했고 이러한 견본들은 런던, 파리, 스웨덴과 같은 중심지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지에는 바로바로 그 유명한 분류학의 본좌인 뷔퐁과 린네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표본들을 합리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분류 체계를 개발하기 위해 피똥을 싸는 노력을 기울인다.






나는 누군가 ... 여긴 어딘가 ...




수많은 표본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뜻하지 않게 생물 전체를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효과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기리고자 그의 소중한 피조물들을 모았는데 이게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에 냉수를 끼얻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러한 관찰과 증거들을 토대로 발생과 진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자 지구의 나이에 관해서도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생기게 된다. 새로운 이론이 전제하는 진화는 아주 작고 천천히 일어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환경과 복잡한 구조의 생물종들이 완성되려면 졸라 엄청나게 긴 시간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학자들이 지구가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되었음을 서서히 확신하기 시작한다.




그럼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기 전까지 발생과 진화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던 지구 나이에 관해 당시 종교계의 눈치를 봐야 했던 생물학 본좌들의 고뇌를 간략하게 되짚어 보자.






생물의 발생과 진화에 관해 고민하다







존 레이 John Ray (1628~1705)




옆집 사는 외국인 강사 이름이 아니다. 존 형님은 17세기 가장 위대한 박물학자이자 생물 분류학의 토대를 마련한 형님이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린네는 어쩌면 편집증 환자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구를 정복이라도 할 기세로 1677년 [조류학], 1686년 [어류의 역사], 1686년 [식물의 역사], 1710년 [곤충의 역사]를 출판하며 생태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종(種)을 분류학의 기본단위로 확립했다는 점이다. 즉, 현대적 의미로 종이라는 개념을 확립한 이는 존 형님이다.







식물의 역사는  1686년, 1688년, 1704년에 걸쳐 3권을 출간한다.
여기에는1만 8천 가지 이상의 식물들을 각각의 계통, 형태학, 분포, 서식 등을
기준으로 분류했을 뿐만 아니라 약으로의 효용과 새싹의 발아 과정 등
식물의 성장과 관련된 특징들도 기술해 놓았다.






하지만 존 형님은 신앙심이 깊었다. 그는 창조에 대한 성경의 말씀과 자신의 연구에서 오는 괴리감에 힘들어했다. 개별창조이론으로 보기엔 생물은 너무도 다양했다. 예를들어 하나님은 벼룩을 창조할 때 조차 개벼룩, 사람벼룩, 고양이 벼룩 등 아주 세세하게 창조했다는 소리인데 이게 아무리 생각해도 좀 구렸다. 하지만 순정파였던 존 형님은 결국 1691년 [창조에서 신의 지혜 Wisdom of God in the Greation]를 발표하며 창조설을 받아들이고 이를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창조에서 신의 지혜]

존 형님은 신을 뿌리칠 수 없었던 로맨티스트였던 거시다! 








칼 린네우스 Carl Linnaeus (1707~1778)




분류학의 본좌답게 편집증적인 성격을 지녔던 린네 형님은 오늘날도 쓰이고 있는 ‘이명식binomial’ 명명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다. 그 덕분에 이후 후배 동식물학자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롭게 발견한 종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은 19세기 들어 종의 관계와 진화법칙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원천이 된다.




이명식binomial이란 생물분류의 기본단위를 종(種, species)으로 하여, 속(屬, Genus)-과(科, Family)-목(目, Order)-강(綱, Class)-문(門, Phylum) 등의 하위 단계로 생물을 분류하고 이를 토대로 생물 각 종의 이름을 그 종이 속하는 속명(屬名)과 그 종 자체의 이름(種名)을 병기하여 2단어로 구성하는 명칭이다. 예를 들면, 사람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데, Homo는 속명이고, sapiens는 종명이다. 이 때 속명의 머리문자는 대문자로, 종명의 머리문자는 소문자로 나타낸다.








이명식이 사용되기 전에는 나라마다 지방마다 같은 생물을 지칭하는 이름은


 다양했으며 그 이름 또한 매우 복잡했다.


프랑스 생물학자이자 박물학자였던 Brisson Mathurin Jacques (1723~1806)은


사자를 Felis cauda in flocum definente(꼬리의 끝에 뭉치가 있는 고양이)로,


호랑이를 Felis flava maculis longis nigris variegata(길고 검은 무늬를 가진


황색고양이)로 명명했다. 현재 이명식에 의하면 사자는 Panther leo,


호랑이는 Panthera tigris로 명명한다.


이 얼마나 심플한가!







린네 형님의 히트작 [식물종 Species Plantarum]




린네 형님은 1735년 [자연체계 Systema Naturae]를 출판하지만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준 책은 1753년에 출판된 [식물종 Species Plantarum]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이명식을 언급한다. 그리고 1758년 이 책의 10판 1권에서 이명식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포유류, 영장류, 호모 사피엔스 등의 용어도 정의한다.




린네 형님은 이명식 말고 또 하나 중요한 발걸음을 내딨는데 그건 당시로선 불경스럽게도 생물의 분류에 ‘인간’을 처음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게다가 형님은 대담하게도 인간이 원숭이들과 똑같은 속(屬)에 속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현재 DNA에 따르면 사람은 침팬지로 분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린네 형님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기독교에 대들 정도의 깡은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한 속의 유일한 구성원으로 분류하였고 지금까지 호모Homo 속(屬)에는 인간 단 하나의 종만 있다.







1746년 출판한 자신의 [스베치카의 동물들Fauna Svecica]에서 그는


사람과 원숭이를 다르게 분류해야 할 과학적 특징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위에 언급했듯이 린네 형님은 기독교를 믿었고 따라서 개별창조이론을 믿고 있었다. 그는 현재 지상에 존재하는 종의 수는 태초에 신이 창조했던 종의 수와 같다고 믿었다. 그러나 린네 형님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가는 자료와 증거들을 보며 개별창조이론이 뭔가 구리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 말년에는 종들 사이의 구별과 종 내부의 다양성이 모두 시간에 의해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영진공 self_fish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2009년은 다윈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다윈의 해’다.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만든 주인공의 해답게 올해 초 영국에서는 재밌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1896년에 창립한 BHA는 현재 약 6천 5백 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주로 과학, 인문 계통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의회에도 


100명 이상의 의원이 지지그룹을 형성해 성공회가 국교인 


영국에서 무종교인들의 권익을 돕고 있다.






리차드 도킨스가 부회장으로 있는 영국인본주의자협회(British Humanist Association, 줄여서 BHA)에서는 2008년 12월 말 영국 각지를 운행하는 버스에 도발적인 광고를 내었다. 회원과 일반인들에게서 기부를 받아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걱정 말고 인생을 즐겨라(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라는 광고를 한 것이다. 재밌게 보였는지 곧이어서 스페인의 무신론 단체에서도 유사한 버스 광고를 내보냈다.







사진 속 이는 그 유명한 리차드 도킨스.


리차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등의 


저자며 현재 옥스퍼드 대학의 석좌교수로 있다. 대표적인 진화론의 


지지자로서 유신론자들을 향해 날카로운 단어들을 집어던지는 생물학계의 


진중권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10월 BBC와 인터뷰에서는 “종교는 세금감면, 


노력 없는 존경, 공격당하지 않을 권리, 어린이들을 세뇌할 권리 등에서 


무임승차하고 있다”라며 또한번 종교계를 향해 광속구를 내질렀다. 






그러자 발끈한 이가 나타났다. 그는 런던 소재의 러시아 전문 위성방송 ‘러시아 시간’의 사장 알렉산더 코로브코였다. 그는 BHA의 광고에 맞서 “신은 있다. 믿어라! 걱정 말고 인생을 즐겨라(There is God. Believe! Don’t Worry. Enjoy your life!)”라고 적어서 런던을 운행하는 버스에 광고를 하였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됐네, 지구는 물론 우주의 시작과 끝도 밝혀버리겠네 하는 2009년에도 신의 유무를 둘러싼 과학과 종교의 맞짱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 논란의 중심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 다윈의 해를 맞이하여 진화론으로 촉발된 신은 ‘있다! 없다?’의 시끄러운 떡밥의 역사를 한번 훑어보기로 하자.







지동설을 처음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그의 걸작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을 주저한 것은 흔히 알고있는 종교적 핍박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시의 과학으론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롱거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16세기가 되자 과학사에는 그 유명한 코페르니쿠스가 짠하고 나타난다. 그는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는 지동설을 발표하면서 기독교가 그려놓은 세계관에 깽판을 놓기 시작한다. 17세기에는 과학의 본좌 갈릴레오가 다시한번 지동설로 쐐기를 박는다. 코페르니쿠스는 그저 이론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지동설을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고 기독교 역시 심기가 불편한 정도였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달랐다. 그의 주장은 관측을 토대로 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입 닥치고 버로우 타라는 협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양립할 수 없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은 이후 더욱 가열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편에서 둘은 동맹을 맺게 된다. 과학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설계를 탐구함으로서 위대한 설계자와 그의 섭리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학과 종교의 허니문은 영국에서 더욱 튼튼한 기반을 확보한다. 





허니문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802년 설계는 설계자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담은 윌리엄 팰리의 [자연신학, 혹은 자연 현상에서 모은 신의 존재와 속성에 관한 증거들 (Nature Theology, or Evidence of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the Deity Collected from the Appearances of Nature)]이 출간된다.




 







내용을 짧게 소개하자면.


“길 가다가 떨어진 시계를 보면 당연 시계공이 만들었겠구나 생각하는게 당연지사. 그렇다면 그런 시계보다 훨씬 복잡한 생물들을 보면 당연히 전능한 신이 만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느뇨~”




그렇다. 이 책은 현재 창조론의 버전업인 지적설계론의 토대로 쓰였으며 리차드 도킨스의 책 [눈먼 시계공]에서의 ‘시계공’은 바로 윌리엄 펠리의 그 시계공인 것이다.




이 책은 당시 젊은 찰스 다윈은 물론 과학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종교와 과학은 결국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상을 심어주었으며 현재 까지도 진화론을 공격하는 창조론자들의 대들보가 되고 있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