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너는 홀몸이 아니란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도 울었나 보다.”


 


 


근래 Made in 마블 코믹스 표 영화를 보던 내 마음을 표현해준 것은 이 시 한 구절이었다. 제아무리 매니아가 아니라면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없는 영화라고 해도, “아이언 맨 2″부터 “토르”, “캡틴 아메리카”로 이어지는 마구잡이식 재고 대방출, 찍고보자식 영화 완성도의 꼬라지는 그야말로 암담한 수준이었다.


 


그건 매니아란 변명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배트맨”과 “엑스맨”의 완성도는 원작을 보지 않은과연 영화 붐을 타고 미국산 코믹스들이 번역 되기 전에 그 원작을 본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이들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드디어 2012년 세계 종말이 오기 전에 등장한 어벤져스. 대체 어떤 세기의 대작을 만들었길래 앞의 작품들을 그렇게 분탕칠 해야 했는지, 수능 시험 성적표를 앞에 둔 수험생 아니 재수생 마냥 내 가슴이 다 설레었다.


 


그렇게 “어벤져스”는 마블이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 났던 것이 이해가 갈 만큼 평일 관람료 8,000원을 후울~쩍 뛰어넘는 재미를 던져주는 작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앞서 마구 뱉아내던 작품들을 꾸역꾸역 보느라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 말초신경을 시원스레 경락 마사지해주었다.


 


그러나 “어벤져스”는 홀몸이 아니다. 앞서 3개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등장한 작품이 아니던가. 나 역시 울며 겨자 퍼먹는 심정으로 앞선 작품들을 다 보았기 때문에 어벤져스를 향한 나의 기대치는 평일 관람료 기준 아이언맨2(8,000)+토르(8,000)+캡틴 아메리카(8,000)이 포함된 32,000원이었다. (안타깝게도 어느 한 작품 조조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과연 “어벤져스”가 나에게 32,000원 어치의 기대감을 만족시켜 주었냐고 한다면 글쎄다. 연애에서도 상대방과 밀고 당기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보스급인 사슴머리의 존재감은 옥의 티가 아니었을까 한다. 기껏해야 헐크의 1회용 개그 소재 정도였으니 이렇게 폼 안나는 보스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주인공들이 워낙 넘사벽이라 적과의 싸움보다는 지들끼리 싸울 때 오히려 더 땀을 쥐는 긴장감을 느끼게 해준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래서 나의 점수는 32,000원 만점에 24,000원까지다. B급도 아닌 C급 특촬물스러웠던 영화 캡틴 아메리카는 지금 생각해도 안주 없이 소주 한 병 까게 만들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 전차로 니들이 진정 히어로라면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기 앞서 우리의 호주머니를 생각해서 앞으로 이 이상의 수준으로 3편 정도 더 나올 수 있게 혼신의 힘을 다해주길 바라는 바이다. OK?!



영진공 self_fish


 


 


 


 


 


 


 


 


 


 


 


 


 


 


 


 


 


 


 


 


 


 


 


 


 


 


 


 


 


 


 


 


 


 

“매치 포인트”, 우디 앨런의 직설화법





나 어릴 적에는 대중문화를 즐기는 것 그 자체가 뭔가 부의 상징처럼 보였을 정도였는데, 그건 우리집이 흔히 말하듯 밥 걱정을 겨우 면할 정도로 가난했던지라 그 흔한 라디오 한 대도 없었고,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줏어와서 고친) 작고 볼품없던 단 한 대의 TV 채널권은 언제나 할머니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음악과 영화는 나보단 좀더 살 만한 집 애들이 가진 것이었다. 당연히 더욱 고립되고 소외되고. 어머니가 교육에 한이 맺혀서 아들이 아닌 딸자식이라도 공부 잘 하는 넘은 대학 보낸다는 굳은 결심이 없었다면, 그에 걸맞게 어릴 적부터 질나쁜 버전이나마 책을 잔뜩 들여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난 너무나 일찌감치부터, 부자는 아니지만 라디오 한 대는 갖고 있었을 법한, 혹은 문화적인 세례를 받은 오빠나 언니를 두어 덤으로 그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아이들마저도 나와 다른 처지의 아이들로 두고 경계했고, 그 대가를 나이를 들고나서 치르기 시작했다.

There is no luck.

도스토예프스키 지침서를 옆에 두어가며 [죄와 벌]을 읽는 크리스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다.

영국에서야 락과 영화는 서민문화를, 클래식과 오페라와 문학이 고급문화를 상징할지 몰라도, 대한민국에선 락과 영화, 특히 예술영화가 바로 지식인 문화의 표상이 아니던가.

딱 대학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마침 당시 발간됐던 ‘키노’를 옆에 두고 영화를 보았고, 이를 매개로 만난 인간들이 걸작이라 혹은 천재라 떠들어대는 락앨범과 락밴드의 이름을 몰래 잘 기억해 두었다가 테이프로 하나씩 사 모으며 음악을 들었다.

21세기에 영화가 이토록이나 히트를 치는 대중문화의 총아로 떠오를 줄은 당시엔 몰랐지만. 이런 까닭에, 게다가 이제는 여자가 아닌 남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크리스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갔고, 심지어 계급상승을 욕망하며 윤리적으로 타락해가는 그 숱한 영화와 드라마의 그 흔한 주인공들처럼 크리스가 멍청하고 얕은 놈이 결코 아닌 것에 안도했다. 심지어는 내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면서도, 그의 범죄가 결코 들키지 않기를 바랐을 정도였다.

영화의 설정과 줄거리는 우리가 너무나 식상하게 보고 보고 또 보아온 것이다. 하지만 깊이가 다르다. 사람들이 흔하게 예상하는 서투른 윤리적 훈계와 설교도 집어넣지 않는다. 너무나 냉정하고, 그러면서도 아프다. 기본적으로 영화를 아주 잘 만드는 사람의 그 능수능란하고 대단한 손길은 어떻고? 당연하다, 감독이 “우디 앨런”이니까. 그리고 결코 당연하지 않다, 이전의 “우디 앨런”이라면 엄청난 블랙유머를 가진 코미디로 풀었을 테니까.

영화를 보면서 이 할배가 미쳤나, 노망이 들었나 싶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 할배가 이렇게 굳은 얼굴로 작정하고서 눈앞에 시퍼런 칼을 들이미는 영화를 보고 들은 적이 없기에. 도대체 우디 할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게다가 이 할배는 원래 러브러브 뉴욕~파가 아니었던가. “스칼렛 요한슨”을 빼고 런던 배경에 영국배우들로 꽉꽉 들어찬, 무시무시하고 염세적이고 ‘직설법’을 구사하는 이 영화가 정말 “우디 할배”가 만든 영화라고?


“매치 포인트”의, 이른바 사람들이 ‘반전’이라 부르는 그 마무리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래, 나는 그걸 바랐다. 하지만 그가 그녀들에게 그런 대사를 할 줄 몰랐고, 정말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 이게 자본주의였지. 크리스는 ‘운’이라 말하지만, 그가 그토록 입에 달던 ‘운’이라는 것이 맨 마지막 장면에서는 크리스가 아닌 가족들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 그거다. 운이라는 건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내건 은총의 선택이다. 개인의 노력? 성실? 능력? 좋아하는 걸 끝까지 즐기며 하는 것? 웃기는 소리. 자본주의의 간택, 애초의 지배자들의 간택이다.

그것을 지배자들 스스로 ‘운’이라고 부른다. 니가 운이 좋은 거야, 왜냐하면 우린 널 선택했으니까. 넌 우리 편이 되기 위해 그 무슨 짓이라도 할 테니까, 그리고 결코 네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그 대사가 가족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핏줄로 이어지고 나서야 비로소다. 그제서야 그는 정말로 그들 사회에 포섭된 것이다. 그가 무슨 짓을 했든 … 안 들키면 되는 거다.



수많은 출세의 욕망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패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출신적인 한계 – 우리가 ‘일말의 양심’이라 부르는 한 가닥의 윤리, 혹은 원래 자리로의 회귀 본능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자본주의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가난하지만 자기 고집을 내세우면, 그리고 행복을 찾으려 들다간, 그리고선 감히 지배층과 엮이려 들었다간, 노라 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말씀이다.


영진공 노바리

 


 


 


 


 


 


 



 


 


 

“아이언맨 2”, 스칼렛 안나왔으면 도대체 워쩔?

아이언맨은 배트맨과 비슷한 점이 많은 수퍼히어로 캐릭터입니다. 토니 스타크는 브루스 웨인과 마찬가지로 외계인의 자식도 아니요 방사능에 노출된 벌레에 물린 일도 없는, 소위 ‘민간인’ 자격으로 수퍼히어로의 반열에 올라선 인물이잖아요. 두 사람은 모두 기업가 출신의 백만장자로서 악당들을 물리치는 데에 필요한 특수 복장이나 무기들을 스스로 마련해서 활약합니다.

물론 두 캐릭터 사이에는 다른 점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서 철저히 자신의 신분을 감추면서 활동하는 반면 토니 스타크는 기자들 앞에서 대놓고 “내가 바로 아이언맨”이라 밝히고 업적에 따른 댓가를 누립니다. 배트맨이 최근작의 제목처럼 ‘어둠의 기사’로 머물고 있는 반면 아이언맨은 그와 달리 ‘빛의 기사’나 ‘태양의 기사’로 자리매김합니다.

<아이언맨>(2008)의 인기는 그 천연덕스러운 밝음의 미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같은 해에 개봉되었던 크리스토퍼 놀란 버전의 두번째 배트맨 시리즈, <다크 나이트>(2008)가 일반적인 수퍼히어로 영화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으며 평단과 객석 모두에게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던 때에도 “내가 원했던 배트맨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했던 관객들이 있었습니다.

백만장자로서의 오만방자함을 사칭하면서 막상 수퍼히어로로서는 끊임없이 고뇌해야만 했던 배트맨은 어쩌면 작품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캐릭터 자체의 매력은 내던져야만 했던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언맨>은 과감히 여타의 수퍼히어로들과는 다른 길, 즉 관객들에게 ‘깊이에의 강요’가 아닌 ‘2시간 동안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일에 충실함으로써 예상되었던 이상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속편이면서도 그 흔한 부제목이나 변형도 없이 그저 <아이언맨 2>입니다. 이토록 쿨한 제목짓기 만큼이나 내용면에서도 별다른 변화의 시도가 필요치 않았던 속편 프로젝트였습니다. 존 파브로 감독과 주연급 배우들의 대부분이 그대로 다시 참여해준 가운데 새로운 캐릭터들이 추가로 투입되었습니다.

<다크 나이트>가 그랬듯이 내용과 주제 의식에서의 깊이를 더하기로 했던 것이 아니라면 어차피 수퍼히어로물의 속편이란 물량으로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깊이를 포기하고 철저히 물량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수퍼히어로물이 어떻게 망가지게 되는지는 조엘 슈마허 감독이 연출했던 <배트맨 포에버>(1995)와 <배트맨과 로빈>(1997)이 좋은 선례를 남긴 바가 있긴 합니다.

<아이언맨 2>의 경우 물량 공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을 만한 여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망가지게 될 특별한 사연이 있었던 것 역시 아니었던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랬던 만큼 관객 입장에서도 전편에서 보여주었던 만큼의 즐거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2시간의 관람이라면 충분히 만족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보게된 속편 영화입니다.

<아이언맨 2>에 새로이 투입된 물량이란 세 명의 배우와 CG로 만들어낸 다수의 로봇들로 요약됩니다 – 테렌스 하워드를 대신해서 출연한 돈 치들을 제외한다면요. 미키 루크와 샘 록웰이 불편한 악역 짝패를 이뤄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다른 한편에서는 스칼렛 요한슨이 토니 스타크의 가까이에서 기네스 팰트로만으로는 부족했던 2%를 확실하게 채워줍니다.

사실 스칼렛 요한슨이 매력적인 여비서 나타샤 로마노프로서만 등장할 때에는 그저 눈요기 정도로 끝날 것이었다면 뭐하러 나왔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블랙 위도우로 변신해서 특수 합금 갑옷의 아이언맨이 보여줄 수 없었던 육탄 액션을 선보일 때에는 아, <아이언맨> 시리즈가 이번에도 한 건 해냈구나 싶었습니다 – 아니, <아이언맨 2>가 전편에 비해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니요? 스칼렛 요한슨이 가죽옷을 입고 나왔잖아요!

전편에서 예고되었던 것처럼 제임스 로드 중령(돈 치들)이 또 다른 아이언맨 수트를 입고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언맨과 콤비를 이룬다거나, 이안 반코(미키 루크)가 완성해낸 무인 조종 전투로봇들이 대거 등장하며 화려한 공중 추격전을 벌이는 등은 아이언맨에 심각하게 열광하는 관객이 아니고서는 그야말로 물량 이상의 각별한 재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았던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서류 가방 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이동형 아이언맨 수트가 새롭게 선보였고 그외 토니 스타크의 연구실이 홀로그램 시스템 등으로 이전 보다 훨씬 첨단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들 역시 이런 정도의 영화에서라면 당연히 나와줘야 할 눈요기 거리 정도 밖에는 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직접 연기하는 – 일부 장면에서는 대역을 쓴다 할지라도 – 매력적인 캐릭터의 등장과 활약은 분명히 물량의 확대 그 이상의 효과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아이언맨 2>와 같이 캐릭터의 매력이 중요시될 수 밖에 없는 속편 영화에서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엔딩 크리딧이 무지하게 길 것으로 예상되어서 영화가 끝나자마자 상영관을 빠져나오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습니다만 – 물론 미리 알고 생각을 해두었더라면 참았겠지요 – <아이언맨 2>에는 전편과 같은 보너스 컷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번에는 토르(Thor)라는 마블코믹스의 또 다른 수퍼히어로의 등장이 암시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아이언맨> 시리즈는 그것 하나만으로 계속 이어져갈 계획이었던 것이 아니라 마블코믹스의 수퍼히어로들이 각자의 영화화된 작품들로 출발해서 종국에는 모든 캐릭터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종합편을 선보인다는 계획 하에 진행된 프로젝트의 일부인 것이라고 하는군요.

역시나 일일 연속극인 것도 아닌 바에야 2 ~ 3년에나 한 편씩 선보이는 장편 영화의 시리즈물로서, 그리고 이미 그 바닥을 훤히 드러내기 시작한 <아이언맨> 시리즈나 토니 스타크의 캐릭터를 좋아하기 시작한 관객들에게까지도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소식인지요.

아니나 다를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스칼렛 요한슨의 2012년 출연 예정작은 마블코믹스의 수퍼히어로들이 총출동한다는 <어벤저스>라고 합니다. 그들이 다 모인다고 해서 그 전에 없었던 작품의 깊이가 갑자기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이언맨>을 처음 보았을 때 만큼의 재미는 보장해줄 수 있는 묘수는 이미 마련해놓은 셈이라 하겠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 보기 전까지 저는 아이언맨을 잘 몰랐고 블랙 위도우도 몰랐습니다. 앞으로 보게 될 토르나 캡틴 아메리카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 시리즈를 영화화하고 있는 사람들은 필요하다면 스칼렛 요한슨의 할머니를 데려와서라도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어낼 줄 아는 이들이라는 건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우디 앨런, <스쿠프> <영진공 70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7년 3월 13일

코폴라는 우디 앨런을 ‘진정한 작가’로서 노상 부러워했다는데, 이번 주 씨네21의 정성일은 그가 ‘세련된 취향을 가졌을지언정 진지한 작가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음, 정성일의 그 글을 대충 ‘건너뛰기 독서’를 하다가 이 구절을 보니, ‘작가영화’하면 뭔가 졸립고, 진지하고, 유머라곤 털끝만큼도 없고, 우울하고, 언제나 인상을 찌푸린 채 인간과 사회와 우주에 대해 고민을 늘어놓는 영화들이어야 할 것같다. 실제로 ‘진지함’이라는 게 촌스럽고 안쓰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 세상이니, 그런 ‘진지한’ 작가영화들이 뭔가 ‘대단한 것’으로 격상시키는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또다시, 소위 ‘천박한 대중’과는 유리된 채 난척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되는 것 같은걸. 나같은 ‘천박한 대중의 일원’은 가까이 하면 안 될 것같은… 그러니 잉그마르 베르이만에 대한 내 개인적 애정은 꽁꽁 숨겨두고, 우디 앨런을 작가영화에서 제해주신 그 센스에 오히려 고마워하도록 하자. 모든 작가(오퇴르 auteur)들이 스타와 작업하길 기피하지 않았으며 – 오히려 기회가 된다면 열렬히 그 기회를 이용했으며 – 때로 상업영화 씬에서의 성공을 간절히 원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사적으로 은밀히 기억할 일이다. 고다르라 해서 별로 예외였던 것같지도 않다. 하여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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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포스터는 좀더 어두운 분위기
우디 앨런이 스칼렛 요한슨과 작업을 해주시는 바람에 <매치포인트>와 <스쿠프>가 일반 극장가에서 개봉했고 그래서 설비 좋은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겐 행복한 경험이다. 나야 스칼렛 요한슨도 너무너무 좋아하니까. 숀펜과 작업한 <스윗 앤 로다운>도 개봉되지 않았고, 그나마 휴 그랜트가 나왔다고 <스몰타임 크룩스>가 하이퍼텍 나다 정도에서 개봉했던 걸 생각해 본다면, 메가박스니 CGV니 하는 극장에 버젓이 우디 앨런의 영화가 걸리는 건 내게 어떤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애니씽 엘스>는 또 얼마나 초라하게 개봉했던가. (물론 헐리웃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던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유>는 그나마 좀 많이 걸렸었다. <마이티 아프로디테>는 동숭?) 작년 5월경, 필름포럼에서 우디 앨런 특별전을 할 때 본 다섯 편의 영화들을 아무디 다시 되새겨봐도, 우디 앨런의 영화가 주는 유쾌발랄함과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웃음, 그리고 그 사이로 가슴 싸하게 만드는 어떤 슬픔이 한국의 관객들과는 어쩜 이렇게 궁합이 안 맞는지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 게다가 우디 앨런의 여주인공들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엽냔 말이다.


난 풍만한 섹스어필로만 이미지가 굳어가는 듯한 스칼렛 요한슨을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덜렁이 아가씨로 그려준 우디 앨런 영감이 너무 고마웠다. 약간 탁한 그 특유의 목소리로 우디 앨런 식 대사들을 다다다다다 내뱉는 스칼렛 요한슨은 더할 나위없이 ‘우디 앨런식 여주인공’으로 보인다. <애니씽 엘즈>에서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던 크리스티나 리치와 달리, 스칼렛 요한슨은 왕년의 다이안 키튼이나 미아 패로만큼의 오오라엔 못 미쳐도, 그들의 그 지적인 분위기와 달리 약간 맹하면서도 더없는 사랑스러움으로 나름 새로운 우디 앨런식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매치 포인트> 이후 우디 앨런이 스칼렛 요한슨과 또 한편의 영화를 찍고있단 소식을 접했을 때만도 그저 ‘아, 요한슨이 이뻤나봐’하고 말았는데, <스쿠프>를 보고나니 그 양반이 왜 요한슨을 탐냈는지 알 것같다. 우디 앨런은 그녀의 영민한 재능과 아름다움을 높이 사고 자기 영화에 잘 어울릴 거라 예측했을 뿐 아니라, 언제나 자기 나이보다 대여섯 살에서 많게는 열 살 위의 여자를 연기하고 있는 이 조숙한 여배우에게 자기 나이에 맞는 ‘놀이로서의 연기’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음이 틀림없다. 영화 안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샌드라(혹은 제이드)를 바라보는 우디 앨런의 눈에 어찌나 애정과 기특함이 담뿍 들어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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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너무 귀엽고 예쁜 요한슨 양. 휴보다는 우디와 더 잘 어울리는.


마지막 엔딩을 보며, 왠지 찡해져왔다. 샌드라를 자기자식처럼 그리 염려하고 아끼다가 결국 죽음을 맞고는, 저승사자의 배 안에서도 여전히 너스레를 떠는 그 코믹한 시드니의 에필로그가, 내겐 극중 인물인 시드니의 말로라기보다는, 우디 앨런 자신의 실제 심정을 토로하는 듯이 느껴졌다. 많은 감독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걸 보며 우디 앨런 역시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며 그 길을 생각해 보는 것이겠지. 하긴, 난 언제가 될지 몰라도(되도록이면 아주아주 나중이었으면 좋겠다) 우디 앨런이 실제로 죽는다면, 저승사자의 배 위에서도 여전히 코미디 영화의 디렉션을 하며 주절주절 수다를 늘어놓을 것같다. 바로 시드니처럼.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영진공 62호]<굿 우먼>(A Good Woman)의 명대사들..

상벌위원회
2006년 10월 31일


제가 스칼렛 요한슨 칭찬을 몇번 했더니
지인이 영화 <굿 우먼>을 빌려주더군요.

영화는 처음에 좀 지루하게 시작합니다만,
곧 놀라운 대사빨을 발휘하며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정말이지 이 영화는 여자와 결혼에 대한 냉소적인
인용구로 써먹기 딱 좋은 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보는 내내 이 영화 각본가가 누군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보니 원작자가 오스카 와일드.

어쩐지 그냥 내공이 아니더라니…
(하지만 스토리 전개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 두 여자 사이의 관계가 반전인데, 그게 좀 어색하더라는...

근데 영화는 그런 냉소적인 대사와는 달리
상당히 따듯하고 해피하게 끝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도 그랬을지,
아니면 제작자의 입김 탓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름대로 분위기 망치지 않는 한도내에서 적절한 마무리였습니다.

포스터에서는 뭐 세기의 스캔들 운운 하는데
그런거 전혀 아닙니다.

그저 이태리 휴양지에서 노닥거리는 한가한 무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약간의 소동, 그리고 두 여자의 기구한 관계
(어떻게 보자면 우리나라 드라마스러운)
뭐 그런 소소하고 잔잔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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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여자Bad Woman는 귀찮고, 착한 여자Good Woman는 따분해. 차이는 그것 뿐 이지

사람들이 경험이라고 부르는 건 대부분 실수를 말하죠.

여자는 이해받기 보다는 사랑받기를 원해요

(‘오페라는 로맨틱해요’ 라는 말에 대한 대답)
말을 노래로 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지. 로맨틱은 무슨

부도덕한 사람이 훨씬 더 나아

아내는 일단 배신을 당하면 똑같은 행위의 자유를 얻는 셈이죠

몰라도 되는 건 알고 싶지 않아요. 아는 게 병이거든요.

영원한 사랑은 유령 같은 거야. 다들 유령 얘기는 해도 본 사람은 없다구.

소시지와 여자는 말야. 제대로 즐기려면 준비과정을 보면 안 돼

여자가 여자를 못 믿는 건 남자 때문이예요.
여자도 여자를 못 믿고 남자도 여자를 못 믿으니 아무도 여자는 못 믿겠군요.
힌두교와 카톨릭을 섞어놓은 거랄까?

왜 결혼을 교회 제단에서 하는지 아나?
멀쩡한 사람을 제물로 바치거든

이 세상에는 두가지 비극만이 존재해.
하나는 내가 원하는 걸 남이 가진 경우,
다른 하나는 이게 정말 최악인데, 바로 결혼이지

사랑은 전쟁이야
남자는 돌격하고 여자는 저항하지
남자가 물러서면 여자는 퇴로를 막아
승산이 없어요.

뭐 이길 필요가 있을까. 싶어지는 스칼렛..

상벌위원회 상임 간사
짱가(jjanga@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