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 리턴즈”, 세상이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







“슈퍼맨 리턴즈”(Superman Returns, 2006)



이 영화에서 로이스 레인이 “세상은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는 칼럼을 쓰는데, 그녀의 기사를 제가 대신 써봤습니다.

이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서 로이스레인은 ‘세상에 슈퍼맨은 필요없다’ 는 기사로 퓰리쳐상을 타는 것으로 나온다. 그녀는 틀렸다. 세상은 단순히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사실 슈퍼맨은 문제 덩어리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든 영화든 <슈퍼맨>의 세계는 너무나도 순진하고 착하다.

이 세상에 슈퍼맨 같은 존재가 있을 때 벌어질 일은 이전에 재기컴치는 슈퍼히어로물 『인크레더블』이 이미 쫙 리뷰한 바 있다. 세상에는 매순간 사건사고가 벌어진다. 매초마다 범죄에 희생되는 사람이 있다. 슈퍼맨이 그들을 다 구할 수 있겠나. 당연히 선택할 것이고 그러면 그때부터 문제다. 누구는 구하고 누구는 무시하느냐. 이건 정치와 경제와 철학이 얽힌 문제다. 그리고 이런 문제로 싸움이 붙으면 결코 끝장이 안나듯, 슈퍼맨의 선택은 결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만약 그가 로이스 레인하고 인터뷰(?)하며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 사람들에게 목격된다면, 누가 죽어갈 때 슈퍼맨은 한가하게 여자랑 노닥거리고 있었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영화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박물관이 털렸어요. 슈퍼맨이 이 창녀와 노는 동안 말이죠!” 로이스 레인의 대사다)

사실 슈퍼맨은 MMOG에서 운영자와 거의 비슷한 존재다. 운영자가 어디든 순간이동 해서 중재하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처럼 슈퍼맨도 그렇다. 운영자가 투명인간도 되고 엄청난 파워를 발휘해 게임세계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것 처럼 슈퍼맨도 그렇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운영자들은 게임이용자들을 위해 일을 하는데, 역시 슈퍼맨도 그렇다. 하지만 MMOG 세계에서 게이머들에게 추앙받는 운영자는 별로 많지 않다. 게이머들에게 ‘영자’ 라고 불리며 하인취급을 받거나, 심지어는 공공의 적 취급을 받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들의 잘못 때문일까? 물론 어떤 운영자는 실제로 잘못을 저지른다. 게임 세계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특정한 팀의 편을 들거나, 심지어 사리사욕을 채우기도 한다. 하지만 운영자가 욕을 먹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잘못을 해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에게 초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이고, 사람들의 기대를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슈퍼맨이 존재할 때 생기는 가장 심각한 큰 문제는 세상의 규칙이 이 슈퍼맨 때문에 바뀐다는 것이다. 그 어떤 사고도 슈퍼맨은 막을 수 있다면, 사람들의 안전에 대한 개념도 바뀐다. 그 어떤 심각한 범죄도 슈퍼맨이 막을 수 있다면 치안에 관한 시스템이 바뀐다. 그러다보면 또 문제가 생긴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는데 제대로 수습이 안 되면 책임이 슈퍼맨에게 돌아간다. 원래 이 세상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슈퍼맨 때문이다.”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데는 아마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의 문제의 원인도 따져보면 슈퍼맨 때문이 아니던가. 그가 없었더라면 문제의 ‘슈퍼 수정’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초반의 재난도 클라이맥스의 재난도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안티 슈퍼맨 패거리가 등장하고, 인터넷은 슈퍼맨빠와 슈퍼맨까 들의 전쟁터로 변할 것이다.

“브라이언 싱어”는 이번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서 거의 노골적으로 기독교 구세주를 인용 한다. 슈퍼맨은 예수처럼 고난을 당하다가 옆구리를 찔리고, 지구의 문제거리를 날려버리기 위해 치명적인 크립토나이트에 매달려 죽는다. 마치 인류의 죄를 대신 짋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처럼 말이다.

물론 당연히 그 역시 예수처럼 부활하되 부활의 흔적은 역시 예수처럼 그를 덮었던 침대시트가 치워진 것 뿐이다. 게다가 부활 후 그는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여인에게 제일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다빈치코드』의 인용인가?)

그러나 감독은 신약의 구세주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인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를 죽인 것은 악당이 아니라 바로 그가 구원하려던 민중이었다는 점이다. 세상은 구세주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 구세주가 등장하면 결국에는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슈퍼맨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슈퍼맨은 이 세상의 적이다.

영진공 짱가

“더 문”, 미스테리라기 보다는 윤리적 문제 의식을 다룬 영화

<더 문>은 제목처럼 달을 배경으로 하는 SF 영화입니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만나는 샘 록웰의 단독 주연작이지요. 스틸 컷들을 대충 보면서 스릴러물이거나 경우에 따라 공포 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자세한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기는 했지만 막연하게 SF 공포영화류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문>은 SF이기는 하지만 스펙타클한 미스테리 보다는 차분한 분위기의 휴먼 드라마에 좀 더 가깝습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탄소 에너지 시대를 끝마치고 달 표면에서 청정 에너지원을 채굴해서 사용하는 미래의 어느 시점이라는 나레이션이 깔립니다. 그래서 <문라이트 마일>(2007) 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배경만 달 표면일 뿐 <더 문>에서는 국제 분쟁의 조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2주 후에는 3년 간의 근무 기간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가 가족들과 다시 만날 일만을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 샘 벨(샘 록웰)의 몹시 외롭지만 평화로운 달에서의 일상이 펼쳐질 따름입니다.

* 고강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더 문>에서의 분쟁 – 드라마를 구성하기 위한 갈등의 배치 – 은 다름아닌 샘 벨과 샘 벨 간에 발생합니다. 이게 뭔 소린고 하니 3년 간의 근무를 마치고 지구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던 외로운 달 나라 우주인 샘 벨이 사실은 복제인간이었던 것이죠. 작업 중 사고로 인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 샘 벨이 의식불명에 빠지자 새로운 3년을 시작하게 될 또 다른 복제인간 샘 벨을 시스템이 깨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새로운 샘 벨이 회사의 지시를 무시한 채 사고를 당한 다른 샘 벨을 구출해오면서 시작됩니다. 새로운 샘 벨이 회사의 지시를 따라 구조대의 도착을 얌전히 기다리기만 했다면 샘 벨(들)은 영원히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을테지요. 그리고 지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와 어린 딸이 오래 전 과거의 기억에 불과하다는 사실도요.

갑자기 두 사람이 된 샘 벨은 서로가 진짜임을 주장하며 다투게 됩니다. 하지만 샘 벨과 샘 벨 간의 갈등이란 결국 자신들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됨에서 오는 충격과 함께 그런 식으로 운영을 해온 회사의 비윤리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하여 <더 문>은 놀랍게도 리들리 스콧 감독의 클래식 <블레이드 러너>(1982)와 정서적으로 같은 연장선 상에 놓인 작품이 되고 맙니다. 물론 액션 씨퀀스의 스케일이나 존재론에 대한 고민의 깊이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분명하긴 하지만요.

<더 문>에서 가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인류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 사용량의 70%를 담당하고 있는 이 중요한 작업에 어찌하여 단 한 명의 작업 인원만 파견해놓고 있느냐는 부분입니다. 최소한 기지 하나에 7 ~ 8명의 팀 조직은 갖다놔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나 싶은데 영화는 샘 벨과 샘 벨 간의 갈등과 해법을 위해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관객이라면 누구나 샘 벨이 근무하고 있는 달 기지의 이름 “SARANG – 사랑”을 영화 곳곳에서 발견하며 즐거워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데이빗 보위의 아들로 알려진 영국 출신의 감독 던칸 존스가 자신의 장편 데뷔작 <더 문>을 만들 당시 여자친구가 한국인(당시 런던필름스쿨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이사강)이었다고 하는군요.

감독의 말로는 미래의 달 에너지 채굴 사업을 하는 회사가 미국과 한국의 합자회사라는 설정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건 삼성이 첼시 유니폼의 스폰서를 하는 등 영국 내에서 우리나라 기업과 제품들의 입지가 엄청 좋아진 최근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일까요. 제 생각엔 중국어(한자)가 좀 더 어울렸을 것 같은데 영어권 사람들에겐 별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샘 록웰의 대표작은 아직까지는 조지 클루니가 연출한 <컨페션>(2003)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샘 록웰이 출연한 SF 영화라고 하면 역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 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죠.

어쨌든 <더 문>은 그야말로 샘 록웰 혼자 고군분투하는 1인 영화라고까지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케빈 스페이시가 친구 같은 컴퓨터 거티의 목소리로 출연했고 샘 벨의 아내나 다른 등장 인물들이 간간히 모습을 비추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씨퀀스에는 역시 샘 록웰이 연기하는 병든 샘 벨과 잠에서 깨어난지 얼마 안된 팔팔한 샘 벨로 채워집니다.

혹시 샘 록웰이 아닌 다른 배우였다면 <더 문>은 어떤 영화가 되었을까요.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 제작비가 올라갔을 것이다, 입니다. 워낙 잘 하시는 데다가 인기도 많은 배우들이 많으니 샘 록웰이 아니었더라도 <더 문>은 좋은 영화로 만들어졌을 거라 생각한다는 거죠. 브래드 피트 주연의 <더 문>으로 한번 더 보고 싶어 하는 건 과연 저 혼자 뿐일까요.

 

영진공 신어지

 

 

“데이비드 게일”, 늦게 봐서 너무 미안한 영화

“데이비드 게일”에 대한 짧은 정보들은 실제 영화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부정적인 오해와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우선 사형 제도 철폐 운동을 하던 철학과 교수가 그 자신이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었다는 설정에서 “데드맨 워킹”(1995)과 같이 ‘좋은 영화지만 너무 무거울 것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 그리고 “아메리칸 뷰티”(1999)에서의 성공을 정점으로 꾸준하기는 하지만 별로 인상적이지 못한 후속작들만 찍고 있는 ‘또 케빈 스페이시 주연의 영화’로서의 꿀꿀함이 작용한다. 여기에 최근 십 여 년 이상을 계속 되어온 알란 파커의 슬럼프까지 더해져 마치 ‘이래도 영화가 보고 싶으냐’고 묻는 것만 같으니 말이다.

그러나 “데이비드 게일”을 보게 되면 극히 짧았던 이 영화의 극장 상영이 못내 아쉬워진다. 비디오로 출시되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보았다는 사실까지 몹시 미안하다. 곰곰히 따져보자면 근래에 “데이비드 게일” 만큼 까닭 없이 저평가된 영화도 없었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사실 “데이비드 게일”은 알란 파커와 케빈 스페이시의 장점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화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면서 말 그대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잘 빠진 스릴러.

영화는 이미 감옥에 갇혀 나흘 후면 사형대에 서야하는 한 남자를 중심에 놓고 회상체 형식으로 펼쳐지지만 그 구조는 조금 더 복잡하다. 영화 속 세상에서 알려져있는 주인공은 우선 ‘이력 있는’ 강간·살인범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데이비드 게일이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의 진실이 영화 속에서 밝혀지게 되길, 그가 억울하게 죽지 않게 되길 바라게 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관객들은 진짜 데이비드 게일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된다. 눈치 빠른 관객은 이미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른다’고 짐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드러난 주인공의 실체가 모든 관객들에게 마냥 편하게만 남겨지는 것은 아니다.

실력 있는 철학과 교수님이 주인공인 관계로 대사 속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에서 라깡까지 아우르는 여러 담론들이 영화의 격을 높이는 꽃장식을 해주는 동시에 전반적으로 너무 무겁게 느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데이비드 게일의 인생, 그의 결말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장치였음을 이해한다면 오히려 영화를 다시 한번 보면서 그 연관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길 수도 있다. 시나리오가 이렇게 매력적이었으니 니콜라스 케이지가 제작자로 나서 알란 파커에게 연출을 맡기고 케빈 스페이시 역시 한번 더 ‘지적인 반전의 화신’으로 출연했겠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영화를 보기 전에 가졌던 온갖 선입견들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하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