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미스 다이어리>, “작고 초라하고 어설프고 모자란 인물들 하나하나를 깊은 애정으로 그려낸 배우들, 감독에게 감사하다.” <영진공 68호>

상벌위원회
2007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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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빤쓰야
옛날이야기들에서 주인공 소년들이 하나같이 ‘공주’를 일종의 ‘상’으로 받는 걸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 후로 행복했다 – 는데, 그 ‘행복’, 그간의 고난과 모험에 대한 보답과 ‘상’이, 언제나 금은보화와 공주인 것. 나이가 들고 브루노 베델하임의 [옛 이야기의 매력]을 읽고서야 이해를 했다. 남자 중심 사회에서의 한계이긴 해도, 그것은 곧 귀한 것, 소중한 것의 ‘상징’일 뿐이라는 것을. 그저 오랫동안 습관적인 ‘상징’이라는 걸. 실제 어머니가 포악하든 헌신적이든 악착같든 상관없이 우리가 ‘어머니’라는 상징에서 포근하고 포용적이고 기댈 곳을 떠올리듯 말이다. 이제 여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대가 되자, 역경을 해쳐온 여자 주인공에게 ‘상’으로 주어지는 상징은 ‘젊은 남자’가 된다. 연하의, 능력있는 남자. 어차피 이 영화는 리얼리즘을 내세운 드라마가 아니므로, 이러한 상징에 굳이 태클은 걸지 않기로 한다. 사랑은, 둘이 마침내 ‘사귀자!’ 하는 순간보다 그 이후 유지하는 게 더 어렵고 중요함을, 서로 마음을 확인하는 건 순간이요 이후 유지의 노력이 바로 일상이고 삶임을 그리는 건, 혹은 연하의 똘똘한 남자와 연애하는 연상녀라는 게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현상인지, 혹은 그런 여자에게 어떤 애로점이 있는지 등등을 그려내는 건, 이런 장르가 할 일도, 이런 장르에 기대할 일도 아니다. (씨익~)

30대 여자로 산다는 것. 돈도 못 벌고 정해진 직장도 없고 애인도 없는데 30대 여자로 산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거기에서 벗어날 확률은, 최미자(예지원)의 말에 의하면, 하늘을 날다 추락했는데, 죽지 않고 선체에서 기어나오자 벼락을 맞고, 그리고도 죽지 않을 확률보다도 더 적다고 한다.


시종일관 과장법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가운데 최미자가 흘리는 눈물은, 뜨겁게 진짜배기다. 쿨하게 한번 자자는 바람둥이에게 복받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쏟아내는 말은, 남들 귀엔 진드기가 들러붙는 말로 들릴지 몰라도, 그런 게 아니다. 최미자를 비웃었던 그들은 아마 그렇게 항변하던 순간 최미자의 눈을 보지 못했을 거다. 그 눈을 보았다면 절대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순 없는 거다. 가볍게 놀리던 입을 오히려 닫게 만드는 그 묵직한 슬픔을. 무슨 대단한 희망과 꿈과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소박한 꿈도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가는 곳곳마다 주눅들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최미자의 가슴에 맺힌 슬픔과 상처가 너무 날것 그대로라 놀랐다. 그걸 그렇게 날것으로 내놓는 예지원한테 놀랐다.


그러므로 내가 이 영화에 기대했던 것은, 모두 충족되었다. 과장된 그 몸짓과 연거푸 저지르는 실수들에 웃으면서, 나는 최미자가 그려내려 했던 삶의 아픔, 슬픔, 답답함, 그리고 지리멸렬한 시간들을 견디게 해주는 순간의 흥분과 기대와 꿈을, 최미자가 원하는 대로 읽어내려갔으니까. 최미자의 세 할머니를 보며 저 나이가 되어도 삶이, 웃음이, 눈물이, 두근거림이, 연정이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안도했으니까. 미자와 개성만점 세 할머니, 아버지와 삼촌까지 – 작고 초라하고 어설프고 모자란 인물들 하나하나를 깊은 애정으로 그려낸 배우들, 감독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참 큰 위안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혼자라도 모처럼 기분좋게 웃으며 맥주 한 잔, 할 수 있었다.


상벌위 선도부 위원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