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속 스캔들(2008), “이 영화는 제목이 안티다.”




제목이 안티라능~
<과속스캔들>을 보며 내 눈을 잡아끌었던 부분이 있다. 차태현이 분한 남현수가 자신의 딸인 정남(황정남)과 함께 집안일을 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넓디넓고 먼지 한 톨 없는 데다 완벽하게 정리가 된 집안에서 현수가 스스로 아침밥을 해먹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요일별로 라벨이 붙어있는 락앤락에 식재료가 정리돼 있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정리된 냉장고에서 요일에 해당하는 락앤락 통을 꺼내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다. 솔직히 그 장면을 보며 저 넓은 집을 어떻게 저렇게 관리하누, 부터 냉장고는 누가 정리해줬나, 했다. 그러다 라디오의 청취자 사연을 빌어 정남이 아버지한테 뭘 해줄까, 하는 장면에서 “밥 한 끼 해드리라” 조언할 땐 역시 한국남자구나, 했었다. 아침밥을 차려놓은 정남에게 툴툴대며 반찬투정을 할 때, 그리고 집안 청소를 하는 정남을 옆에 두고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는 현수를 보면서는 “그럼 그렇지” 했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고 현수와 정남과 정남의 아들 기동이 다 함께 사는 게 익숙해지면서, 현수는 정남과 함께 아침밥을 차리고, 함께 집안 청소를 한다. 놀랐다. 정말로 놀랐다. 그러니까 현수는 특유의 깔끔한 성격으로 그 넓디넓은 집안을 이제껏 스스로 열심히 청소하고 관리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뭐 가끔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기도 했겠지만.) 그리고 22살이 되어 찾아온 딸과 그녀의 6살난 아들, 즉 현수의 손자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 그는 집안일을 딸에게만 미루는 것이 아니라 딸과 분담을 한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대형TV를 열심히 닦는 차태현의 모습처럼 멋진 모습이 없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이 모두 성숙한 반면 남자들은 현수의 친구 창훈(성지루)만 빼면 모두 무책임하고 어리석고 찌질하다는 데에 있다. 물론 36살 화려한 싱글생활에 갑자기 찾아온 딸과 무려 손자의 존재는 심하게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다. 심지어 유전자 검사까지 강행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아빠되기라는 것도 부단한 노력과 학습의 결과인데, 이 집의 딸은 창훈의 적절한 지적대로 “길러주지도 않았는데 지들이 알아서 커서” 찾아왔다. 그러니 그의 아빠 노릇이, 할아버지 노릇이 영 신통치 않을 수 있다는 것도, 무조건 그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어하는 것도, 아빠 노릇이라는 걸 ‘비싼 옷 안겨서 신데렐라로 변신시켜주기’ 같은 자기과시용으로 착각하는 것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그의 뺀질함은 역시나 심하다. 자기가 위기에 몰렸다고, 화가 난다고 정남에게 해대는 소리들도 너무 심했고, 그걸 “화나니까 그냥 해본 소리”로 슬쩍 넘어가려 드는 것도 참 뻔뻔하다. 정남과 다시 재회한 그녀의 첫사랑 상윤(임지규)은 어떠한가. 처음엔 왕자님처럼 나타났다. 어리버리해서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 거야 귀엽다고 해줄 수 있고 정남 앞에서 쭈뼛거리고 수줍어하는 것도 그렇게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치곤 꽤 순박한지라 호감도 팍팍 간다. 현수와 함께 있는 정남을 보고 오해한 것까지도 그럴 수 있다 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하는 그의 행동이 중요한 것 아닌가. 어쩜 그렇게 찌질한 남자의 전형적인 못난 짓은 다 골라가면서 할 수 있는지. 게다가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까지 더 하면, 아이고야,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할 수 있나, 못나도 이렇게 못날 수가 있나.


반면 박보영이 연기하는 정남/재인을 보라. 처음 그녀가 관객에게 어필하는 매력은 촌스러운 외모와 저돌적인 당돌함, 그리고 그 무표정하고 뚱한 얼굴에 있다. 다짜고짜 아버지 집에 자기 아들 손을 붙잡고 쳐들어간 거야 영화의 첫 ‘해프닝’을 만들기 위해 그런 거고, 이후 그녀가 현수에게 하는 말들을 가만 들어보면 틀린 말이 하나 없다. 그녀도 꽤 많은 고민 끝에 찾아갔고, 그녀가 내세운 뻔뻔함은 뻔뻔함 축에도 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22년간 보지 못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그로 인한 상처를 달래기 위한 자기방어 기제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자신을 딸로 인정해주기만을 바랐고, 그조차 젊디젊은 아버지에게 그리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이해한다. 그래도 자기 꿈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아버지 집을 나와서는 식당에서 먹고자고 일을 하는데, 그 바쁘고 힘든 점심시간 일크리에서도 그렇게 열심인 데다 친절할 수가 없다. 항상 방실방실 웃으며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총알처럼 튀어다닌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그녀가 차태현과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유머와 개그가 거의 대부분 그 뚱하고 무표정한 얼굴과 말투에서 나왔다는 걸 상기해본다면, 식당에서 정남이 그렇게 웃으며 일하는 장면은 이 캐릭터의 건강함을 그대로 증명해주는 것이자, 보는 관객에겐 힘들어서 눈물짓는 장면보다 더 안쓰러움을 선사한다. 현수가 들이대는, 기동이가 다녔던 유치원의 원장님(황우슬혜)은 또 어떠한가. 현수가 알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기동이의 고민과 천부적인 피아노 재능을 발굴해준 게 바로 그녀다. 현수에게 먼저 저녁을 먹자고 제안하고, 현수가 할아버지란 게 다 밝혀지고 나서 그녀가 보여주는 반응도 걸작이다.

이 영화에서 세 사람의 유머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컷.

포스터와 소개글만 보면, <과속스캔들>은 황당한 설정으로 시작해 어이없는 억지 설정과 웃기지도 않는 엉터리 말장난으로 대충 뭉개면서 시간이나 끌다가 막판에 감동의 눈물 한 번 찍 주려고 작정한 영화처럼 보인다. 제목부터 그런 뉘앙스를 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그렇지가 않다. 감독은 영화에 차용한 코믹한 요소들을 절대로 유통시한을 넘겨가면서까지 사용하지 않는다. 일회용은 일회용으로, 두 번 쓸 것은 두 번 쓸 것으로 깔끔하게 끝내버린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지루해 하품을 하는데 감독과 배우들만 웃기다고 우기는 코미디를 반복하는 일은 없다. 참 뻔한 설정으로 시작해 뻔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데도, 그 과정들은 믿음직한 사건들과 디테일에 충분히 웃기는 유머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연출의 리듬감도 아주 좋다. 씬마다, 씨퀀스마다 마무리가 아주 깔끔하고 다음 장면으로 부드럽게 넘어갈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가 적절한 타이밍에 제대로 리듬감을 탄다. 액션과 리액션의 감각이 상당히 좋다. 게다가 정남이가 얼굴에 마스카라 범벅이 된 채 무대에 있는 현수에게 올라가 통곡하는 장면이 주는 파워가 대단하다. 어찌 저 어린 배우가 저런 감정을 토해낼 수 있나, 참 놀랐다. ‘애를 잃어버리고 정신줄을 놔버린 엄마’의 모습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내다니, 고백하자면 나도 이 장면에서 펑펑 울었다. 후반에 가서 ‘훈훈한 가족간 감동’이 강조되면서 살짝 늘어지는 감이 있지만, 영화가 내내 주었던 웃음과 재미에 비하면 그 정도 흠결이야.


“나도 몰랐는데 아빠가 돼 있었다네” 설정의 코미디의 거의 끝물에 나온 <과속스캔들>은, 이 부류의 영화 중 가장 웃기고,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비록 장르영화로서 틀에 딱 맞춘 일정한 공식 때문에 다소 식상한 감은 있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장르영화를 보는 이유도 바로 그 이유 아닌가. 그 한도 내에서 이 영화는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차기작이 매우 기대되는 신인감독이 다시 나왔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