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퀼리브리엄”, B급 영화는 비디오로 봐야 제 맛

내 돈으로 표를 사주면서까지 꼭 보고 오라고 적극 권하고 싶은 영화는 있지만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절대 보지 말라고 뜯어
말리고 싶은 영화란 없다는게 내 생각이다. 오랫동안 상영관을 들낙날락 하다보니 나름대로 영화 고르는 안목이 생겨서 그런 정도의
심각한 재난은 미리 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아무리 형편 없는 영화라도 나름대로 한번쯤 봐줄만한 가치는
어디엔가 갖추고 있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무지 이쁜 구석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형편 없이 만들어진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에도, 그런 ‘한번쯤 봐줄만한 가치’는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 가치란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것인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상대적 비교의 대상이 되어준다는 점에 있다. 극장이라고는 올해의 전국민 참여 영화 한 두 편에 한해서만 출입하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영화도 음식 처럼 맛 없는 요리를 먹어봐야 정말 잘 만든 일품 요리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나는 말하고 싶은 거다.

영화가 정말 실망스러운 경우의 진짜 원인은 실제 영화의 완성도에 비해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찾았다가 겪게 되는 낭패감에 있다. 같은 영화라 하더라도 보는 사람의 기대치나 다른 조건들에 의해 관람 중에 느끼는 바가 많이 틀려지게 되긴 하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실망감에 젖게 되면 그 영화의 장점이고 뭐고 다 싫어지게 되는게 인지상정이란 생각이다.

“이퀼리브리엄”에 대해서는 사실 반신반의했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느꼈던 허전함을 부분적으로나마 충족시켜줄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있었지만 그럴만한 수준이 못된다는 경계의 소리도 들었다. 그래서 내 스스로 B급 영화는 B급 영화 나름대로 보는 방법이 있다며 일단 처음 가졌던 호감을 그대로 지켜나갔다.

전에 “이퀼리브리엄”을 B급 영화라고 했더니 누가 봵!하는 답글을 달았던데, “이퀼리브리엄”은 굉장히 B급 영화인 것이 맞다. 그럼 크리스챤 베일은 뭐냐고? 솔직히 난 크리스챤 베일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당시 그가 B급 영화의 주연과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의 조연 자리를 오고가는 그런 수준의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이퀼리브리엄”을 보고나서 영화를 아직 못본 다른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런 거다. ‘이 역시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보지 말라고 뜯어 말리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극장에서 꼭 볼 필요까지는 없던 영화다. B급 영화는 … 역시 비디오로 보아야 제 맛이다.

영진공 신어지

‘말죽거리 잔혹사 (2003)’, 그 시절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

1978년, 지금의 양재동이 말죽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고 그 인근의 모습이 아직은 농지와 잡초밭으로 황량했던 시절.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 통치 하나를 시대의 키워드로 꼽기에 충분했던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주인공의 이야기. 아니, 그때 즈음 검은 교복을 입고 학창 시절을 보냈었고 지금은 사십 줄에 들어섰을 형들과 누나들의 잔혹했던 시절 이야기.

어쩌면 이 영화는 오랫동안 386이라 불리던 그들이 하나 둘 대오에서 이탈해 가는 시점에 이르러 만들어진 스스로를 위한 송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소룡을 보고 자라 군대 보다 더 지랄 같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머리 군인 대통령 아래 최류탄 냄새가 곳곳에 배인 대학 캠퍼스를 거닐었던 그들의 로망스가 드디어 막을 내리는 시점이 된 것이다. 빨리 앞서간 몇몇은 대통령도 만들어냈고 스스로 새파란 얼굴을 내밀며 정치인 금품 비리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이 영화가 개봉하던 때에 그들은 더이상 새로운 세대가 아닌 그 시점의 기성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2009년, 어찌된 노릇인지 추억 속에 석화된 줄 알았던 이 영화의 풍경들은 현실에서 스멀스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군대 이야기라는 것들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의 취사선택에 의해 못가본 이들이 듣기에는 상상도 못할 끔직한 체험담이 될 수 밖에 없듯이 78년 말죽거리의 고등학교 이야기도 충분히 잔혹하며 엽기적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어쩌면 그렇게도 고리타분 하신지. 그보다 좀 더 이전 세대인 곽재용이 <클래식>에서 들려준 이야기 보다야 조금 낫긴 하지만 평면적인 한 남자의 추억담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한마디로 한편의 성장영화로서는 구태의연한 편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를 괜찮다 할만한 영화로 만들어주는 것은 꼼꼼하게 재연된 당시의 인물들과 소품들이다. 3학년 깡패 선배들이나 교사들이나, 등장하는 조연과 단역들이 예전 <넘버 3>에서 돌깡패로 나온 송강호를 처음 봤을 때 놀랐던 기억을 머쓱하게 만들 만큼 대단히 사실적이다. 그리고 학교 옥상의 격투 장면들 역시 과장 없이 그려져 은근히 아드레랄린을 솟구치게 만든다. 이 정도면 자국 영화에서 만큼은 오로지 사실주의만을 요구하는 우리나라 관객들의 유난함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할만 하다.

그 시절의 체험들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맞어 맞어 하면서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학교 다닐 때 꼭 저런 애들 있었어 하면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 이라면 교복 입고 나타나 화끈하게 벗어주는 권상우의 열연을 즐기면 된다. 물론 그걸 보기 위해서는 그의 혀 짧은 쑥맥 연기를 오랫동안 견뎌야 한다.

영진공 신어지

“돌이킬 수 없는 (Irreversible, 2002)”, 관객을 피곤하게 만드는 영화

등장인물이 과거를 회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시퀀스 구성을 아예 시간 역순으로 되감아 올리는 역배열의 영화 형식은 <박하사탕>과 <메멘토> 등에서 이미 성공적으로 선보인 예가 있어 더이상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제아무리 엔딩 크레딧을 꺼꾸로 틀어보고, 제목과 배우들의 이름을 역상으로 보여준들 최초의 시도는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상적으로 편집된 영화를 아예 처음부터 꺼꾸로 틀어주는 시도라면 모를까, 어차피 영화를 구성하는 시퀀스 단위 내에서는 이렇게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 역배열의 한계일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 <돌이킬 수 없는>이 피곤한 이유는 역배열의 영화 형식 때문이 아니라 여과없이 보여주는 잔인한 폭력, 살인과 강간 장면, 그리고 시신경의 한계를 시험하는 정신없는 카메라 워킹 때문이다. 워킹이 아니라 이건 뭐 위아래 좌우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아예 덤블링을 해댄다. 그리고 한 시퀀스를 한 테이크로 끝내는 방식으로 찍었으니 영화 전체가 열 몇 테이크 밖에 안되는 셈이다. 감독의 재주나 배우들의 연기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관객의 정서와 육신은 무척 피곤해진다.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보면서 감독이 참 새디스트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돌이킬 수 없는>의 가스파 노에(Gaspar Noe)는 한술 더 떠서 무척이나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영화적인 야심은 대단한 인물인 것 같다. ’91년 단편 <까르네>에서 ‘자폐증세가 있는 딸의 초경을 강간당한 것으로 오인하고 무고한 남자를 살해한 한 도살업자의 생애’를 다룬 바 있는 그의 ’98년 장편 데뷔작 <아이 스탠드 얼론>은 바로 그 도살업자의 출소 이후의 이야기이고, <돌이킬 수 없는>의 첫 시퀀스에서 자기 딸아이를 강간했다고 고백하는 뚱뚱한 중년의 남자 역시 바로 그 도살업자다.

제도권 영화가 허용하는 한계를 시험하며 온갖 논란을 불러 일으키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면 그는 일단 성공한 축에 들어간다. 다시 보고싶지 않더라도 영화를 일단 본 사람은 이 영화에 대해 계속 말하고 싶어했으니 말이다.

영진공 신어지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녀의 매력을 디벼보자 … “브리짓 존스의 일기” 1편



한국에서 흥행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1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참으로 겸손한 규모로 겸손하게 개봉했다. 아무리 “르네 젤웨거”가 『제리 맥과이어』에서 상큼발랄 매력을 보여주었다 한들 『제리 맥과이어』는 엄연히 “톰 크루즈”의 영화였고, “르네 젤웨거”는 그저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한 귀여운 여배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성미 넘치는 섹스 심벌’이라는, 참으로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으로 칭송받는 “콜린 퍼스”가 한국 관객들에겐 “저 넘은 누구여?” 소리를 듣고 있던 때였고. 그나마 관객들에게 알려진 “휴 그랜트”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과 『노팅힐』 등등에서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여겨진, 그 어리버리 소심 착한 캐릭터가 아니라 무려 ‘악당’이고 실은 ‘조연’이라니, 이 영화의 흥행가능성은 영화판에서 밥 좀 먹었다 싶은 사람들에게서 두루두루 ‘아니올시다’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원작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히트를 치기를 했나, 그것도 아니고, “멕 라이언” 언니께서 나오시는 로맨틱 코미디에 익숙한 한국 관객들에게, 듣기에도 요상한 영국식 억양으로 도배된 낯선 코드의 영국식 로맨틱 코미디가 먹힐 거라 생각한 사람… 감식안이 대단히 뛰어나거나 대단히 형편없거나, 둘 중 하나였으려니.

뚱뚱하고 술고래에 줄담배를 피워대는 그녀 ...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흥행에 나름대로 성공한 데다 일부에서 극도의 추앙을 받는 컬트작이 되기에 이르렀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한국에서 개봉했던 그 때, 단 2주 극장?걸렸던 이 영화는 몇 주 뒤 몇몇 극장에서 재상영을 감행했고, 이래저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본전을 두 번 뽑고도 남을 정도의 관객이 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 영화의 소문은, 극장에서 간판이 떨어진 뒤에 더 불어났다. 비디오, DVD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꾸준히 사람들에게 어필했을 뿐만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 따위는 연애에 환상을 가득 갖고 있는 여자들이나 보는 거라고 생각하던, 자고로 영화는 액션이 짱이라 외치던 남자관객들도 슬금슬금 이 영화를 나중에사 보고 어머니나!를 외치곤 했으니… 그렇다면,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매력이 과연 무엇이었단 말이냐?



난 외로왔을 뿐이고 …

이제, 이 영화에 얽히고 설킨 사연들을 초간단 스피드로 짚어보는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를 가슴 두근 벌렁 콩당대며 기다리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베스트 셀러는 아니어도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나름의 여성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흥행을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층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20대 후반 ~ 30대 초반 여성들이었고, 그 수도 그렇게 많지 않았기는 했으나, 이 관객층에서 나름대로 특별한 관객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남들이 이름도 어려워하는 “콜린 퍼스”를 보며 거품을 물고 쓰러지고, 헬렌 필딩의 원작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물론 제인 오스틴의 고전 [오만과 편견]의 열혈 광팬들이었던 것이다.

헬렌 필딩의 원작소설은 이해가 가지만 갑자기 제인 오스틴이 왜 튀어나오냐고? 그 비밀을 알려드리겠다. 바로,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출생의 비밀이다. TV 드라마의 숱한 주인공들만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보니 재벌집의 하나밖에 없는 혈통이었다더라, 알고 보니 쌍둥이였다더라, 알고 보니 바꿔치기 당한 거라더라… 따위 상투적인 레퍼토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오묘한 출생의 비밀이.

영국의 국립방송인 BBC에서는 곧잘 자기네들의 고전 소설을 TV 시리즈로 각색해 이런저런 배우들을 모셔다가 미니 시리즈로 만들곤 한다. 그 바닥에서도 유명한 수 버트휘슬이라는 프로듀서가 앤드류 데이비스라는, 역시 그 바닥에서 유명한 베테랑 작가를 데리고 1995년, ‘무모한 도전’을 시도한다. 그것은 바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TV 시리즈로 옮기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것이다. 제목은 디립다 거창하고 문학계에서는 근대 소설의 효시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한껏 추켜세우는데, 엄청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책인가보다 하고 큰 맘 먹고 읽기 시작했다가 애걔? 이거 웬 하이틴 연애소설이냐? 며 깜짝 놀라는 소설. 혹자들은 빠져들고 혹자들은 유치하다며 책을 던지고 마는 소설. 그 [오만과 편견]은, 영국 여성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문학 작품이다.

중류층의 똘똘한 아가씨가 상류층의 거만한 미혼남과 사사건건 시비가 붙다가 알고 보니 사랑이었다며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는, 지극히 통속적인 줄거리의 이 소설이 과연 어디가 대단해서 근대 문학의 효시고 대단한 고전 걸작이란 말인가? 라고 의문을 표시할 독자들이 있다는 것, 다 안다. 그런데 여성의 삶이 철저하게 남자들의 경제력에 의존되고, 재산은 철저하게 남자들에게만 상속되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이 사회 풍속도와 계급간 모습을 리얼리스틱하게 그리고, 당대 소설들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던 주체적이고 자립심 강한 여주인공이 나오며, 그런 무지막지한 사회의 틀 안에서 사람이 갖기 마련인 어떤 본성들을, 그것도 유머와 재치 통통 넘치는 설정과 문장으로 묘사한다는 건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시는 동인도 회사니 서인도 회사니 하며 영국이 식민지 경영에 박차를 가하던 때고, 인텔리 및 상류계급의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또 한편으론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가난한 여성들과 심지어 5, 6살 어린아이들도 공장에서 마구 일하던 상황… 기존의 계급 제도에 균열이 오던 그 미묘한 상황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는 매우 미묘하고 암시적으로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한 계급의 한남한녀들에 대한 제인 오스틴의 문체는… 자기도 속한 계급이라 그런지 애정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가벼운 냉소가 들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소설을 원작으로 한 6부작 TV 미니시리즈… 사실 제인 오스틴 소설에서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장면을 슬쩍 끼워 넣으면서까지 영국의 모든 여성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려 버렸다. “나 너 좋아하는 거 같아, 뭐, 니가 나에 비해선 좀 심하게 쳐지긴 하지만, 내가 너랑 결혼해 줄게. (잘난척 으쓱~)” 요로코럼 재수없게 청혼을 했다가 퇴짜를 맞고 어이가 없었던 남주인공, 이후에 분노에 들끓기보다 그 사랑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는 하나의 행동이 있다. 그것은 옷을 입은 채로 자신의 그 드넓은 호화저택에 딸린 연못에 풍덩! 뛰어드는 것이었으니. 일명 ‘젖은 셔츠 씬’이라 불리는 이 장면에 모든 영국 여성들과 한국의 팬들은 쌍코피 줄줄 흘리며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언제나 고개를 30도 가량 위로 들고 모든 사람을 내려다 보는 듯한 남자주인공이 사랑에 눈멀어 흩어질 때, 여성들은 얼마나 짜릿함을 느끼며 흥분하던가. 그리고 영 재수꽝인 줄 알았던 그가 알고 보니 심성도 좋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도 기꺼이 감싸는 따뜻하면서도 현명한 사람이고, 실은 사교성 없는 성격을 스스로 방어하느라 남들에게 재수없어 보이는 것임을 알았을 때, 어찌 이 남주인공에 빠지지 않을 텐가. 얼굴에 거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은 채 여주인공과 계속 다투고 싸우는 척해야 했던 남자주인공, 미스터 다아시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바로 콜린 퍼스였으니 …

사회적 체면도 그렇고, 자기자신도 당황할 만큼 뜻하지 않은 사랑의 감정에 제스처 하나,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자기자신을 부여잡다가, 호수에 뛰어들고 젖은 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다 딱 걸렸네! 여주인공과 마주쳐 버리고, 여주인공이 위기에 빠졌을 때 아무 말 없이 생색도 안 내면서 모든 일처리를 완벽하게 해주는… 연기하기가 꽤 까다로운 이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그는, 심지어 원조 미스터 다아시였던 “로렌스 올리비”에를 능가해 버릴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역을 맡았던 남자 배우, “콜린 퍼스”가 평소에 보이는 처신과 행동거지는… 사람이 참 바르다. 게다가 지적이고 똑똑하다. 오죽하면, 이 사람이 『오만과 편견』의 연기를 하면서 인터뷰에서 했던 캐릭터 분석이, 유수의 문학평론가들도 글이 실리기 어렵다는 문학잡지에 떡하니 실려서 팬들을 뿌듯하게 만들었을까 말이다.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역시나 이 BBC 시리즈와 “콜린 퍼스”의 미스터 다아시에 홀딱 반해 정신 못 차리고 있던 헬렌 필딩이 쓴… 일종의 팬픽이다. 이 BBC 시리즈에 열광했던 사람들이라면 키득댈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설정들. 예를 들면 원작에서 마크 다아시의 외모를 묘사하면서 슬쩍 “콜린 퍼스”의 특징을 끼워넣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다.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도, 이 BBC 시리즈가 영국을 얼마나 초토화 시켰는지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TV 방영시간마다 거리가 쥐죽은 듯 조용해져버리는 런던 거리를 사랑한다고 브리짓이 썼던 구절이 있지 않던가. 브리짓이 우울할 때마다 친구들이 들고와 밤새 또 보고 또 보고 하던 게 『오만과 편견』 테이프, 그 중에서도 젖은 셔츠 씬이 아니던가. 한술 더 떠서, 속편인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의 원작이기도 한 [브리짓 존스의 애인]에는 브리짓이 “콜린 퍼스”를 인터뷰하러 가는 장면까지 나온다! 기억하시는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콜린 퍼스”가 맡았던 그 캐릭터 이름이 ‘마크 다아시’였음을. 성도 똑같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원작을 각색하고 원작에 없던 장면을 넣으면서 굳이 『오만과 편견』을 언급한다.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아시가 살던 대저택의 이름, ‘펨벌리’가 영화로 오면 브리짓이 일하는 출판사 이름이 되어 있고, 출판사 리셉션 장면에선 『오만과 편견』 출연자였던 “크리스핀 본햄 카터”가 카메오 출연을 한다. 대니얼 클로버(휴 그랜트)와 브리짓이 보트 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지는 장면, 그것은 단지 영화 『타이태닉』의 오마쥬 및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패러디가 아니라, 실은 『오만과 편견』의 젖은 셔츠 씬의 패러디인 것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개봉된 이후, 원작소설의 판매부수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국내에서 『오만과 편견』을 방영했던 EBS나 케이블 방송 등의 게시판에는 『오만과 편견』의 재방을 요청하는 글들이 러쉬를 이루었다. 그리고 실제로 On Style 같은 케이블 방송에서 이 시리즈를 다시 방영해주기도 했고. 『노팅힐』에서 보듯, 미국인의 영어 악센트가 섞여야 관객들에게 좀더 편안함을 주었던 영국산 로맨틱 코미디였으나, 완전히 영국식 악센트의 영어로만 이루어진 로맨틱 코미디, 또한 ‘워킹 타이틀’ 표 코미디가 완전히 한국 관객들에게 친근함으로 자리잡게 된 계기가 바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라 할 수 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러브 액추얼리』의 슬리퍼 히트를 기억해 보라.)

겉만 번드르하고 매력적이지만 실속없는 남자와 눈에 잘 안 띄지만 알고보니 진국인 남자 사이에서 한 여자가 왔다리 갔다리 하는 설정의 로맨틱 코미디는 흔하고 흔하다. 하지만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이루어낸 것은 좀 더 특별하다. 뚱뚱하고 술고래에 줄담배를 피워대고, 어처구니 없어 민망할 지경의 실수만 연발하는 여자가 ‘귀여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여자도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뭇 사람들을 유쾌하게 녹여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가 바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다. 또한 그저 마케팅 리서치 결과를 참조해 책상 머리에서 ‘장르영화의 공식’을 이래저래 끼워 맞춘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현대 도시인의 당면한 과제를 풍부하게 덧붙여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뽑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이것이 그 사회에 내재한 단단한 문학적 / 문화적 토양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All By Myself”의 오리지널은 Eric Carmen

(피아노 연주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을 차용하였다.)


 




영진공 노바리

동사서독, 醉生夢死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메뉴는
당신의 기억을 깨끗이 비워드리는
醉生夢死입니다.

이별의 아픈 기억으로 당신이 지금까지
드셨던 천일취(天日醉)보다야 훨씬 고급술입니다.
단 너무 많이 마셔버리면
앞으로 영원히 사랑을 잊어 버리실지도 모릅니다.”



무협로맨스를 지향하는 영화 동사서독은 앙리의 와호장룡보다 훨씬 난해하게 사랑에 대해 그린
영화라고 봅니다. 몇 년전 미국에서 와호장룡이 대 히트를 칠 때 앙리의 이 작품이 결국 왕가위
에게 큰 빛을 지고 있지 않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중경삼림을 더 좋아하지만 사실 동사서독이 중경삼림보다 못한, 와호장룡보다
조금 못한 이유는 딱 한가지인 듯 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동사서독의 완결판을 본적이 없으니까요.

영화를 보다 보면 시대의 상황이나 극장 주들의 상영시간 단축 요청 등 제작사의 흥행의 이유로
이유 없이 잘려나가 반 쪽짜리 영화로 밖에 볼 수 없는 영화들이 생깁니다. 그 중 대표적인 편집
잘못으로 관객들에게 어필이 안되는 경우도 많이 생기는데 이러한 예의 영화들을 찾아보면
4시간의 원작을 자랑하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2시간 이상 잘려 개봉되어 줄거리의 혼돈을
가져 왔던 Once upon a time in America나 제작사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으로
되어버렸던 블래이드 러너 그리고 상영시간의 문제로 30분 이상 잘렸던 오우삼 최고의 명작
첩혈쌍웅, 시네마천국 등등이 아쉬움을 가져 왔던 영화라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다시 꺼내는 동사서독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왕가위 감독의 정통 서정무협 동사서독은
지루한 제작 기간으로 인해 오히려 중간에 취미 삼아 찍었던 중경삼림이 더 세계적으로 히트하는
바람에 맥빠지게 개봉되었고 상영시간은 달랑 100분 남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원작이 약 4시간
이라고 하는 낭설만 있지 도대체 기승전결을 알 수 없는 형이상학의 영화가 되버린것 같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4시간짜리의 원작을 찾아보지만 중화권에 살고 있지 않고 설사 있더라도
중국말이 맹탕인 나에게는 어불성설에 불과 할 뿐이다. 미국에서 구한 DVD역시 100남짓의 한국
개봉 시 편집과 대동 소이 할 뿐입니다. 그래서 중경삼림보다 타락천사보다 동사서독은 난해한
영화이고 어려운 영화로 보입니다. 그 당시 중화권의 최고 배우들 장국영, 장만옥, 양가위,
임청하, 양조휘까지 각기 한 홍콩 영화의 대가들이 모인 종합 백과 사전적인 영화임에도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영화의 이미지는 쓸쓸하게 우울하게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마치 소설이 아닌 한편의 서정시를 보듯이.




동사서독은 왕가위 철학의 집대성으로 보입니다. 그의 사랑 3부작 아비정전, 중경삼림, 화양연화
에서의 화두들이 모두 녹아 있습니다. 사랑은 이루어질 때 아름다운 것이 아니나 떠나 보낼때에
오히려 지고 무상한 아름다움으로 꽃이 핀다고 강변하는 듯 합니다. 사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이루어져 결혼으로 끝을 맺고나면 그 후에는 지루한 현실만이 남아버려 우리가 언제
사랑을 했었나란 의문 부호에 빠질때가 많습니다.

거기까지 전개하지 않더라도 누구던 가슴한구석에 모셔 놓고있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애틋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늘 다가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니까요.

영화에서 동사건 서독이건 그 둘과 이루어지지 못했던 임청하건, 장만옥이건 모두 다 쓸쓸한
일상을 보냅니다. 그리고 후회를 하면서도 그 인연들을 바로 잡지 못합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영화는 화두를 던집니다. 이루어지 못한 사랑이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고… ….

블레이드러너도 결국 완결편이 나오고, 원스어폰어타임인 아메리카도 10여년전 4시간짜리
완결편을 보았습니다. 동사서독의 완결판을 볼 기회는 없을까요. 아님 떠나간 사랑은 그저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놓고 그냥 일상을 살아도 별 지장은 없어 보이니 그렇게 진달래꽃 한 그루를
키우면 될까요?

거의 10년 만에 다시 본 동사서독에서는 장국영도, 왕가위도, 장만옥도, 임청하도
그리고 양조위도 우울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인생을 가르칩니다.

인생 뭐 있니, 그냥 그렇게 살면 되지.


영진공 클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