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두비”(2009), 메시지와 주제 사이의 균형감이 아쉬운 영화

반두비

뚱한 표정이 민서의 매력

신동일 감독은 참 운이 없다. 데뷔작을 포함해 그의 첫 두 영화는 모두 투자사와 배급사간 ‘자본’끼리의 이런저런 갈등과
사정 때문에 영화를 다 만들어놓고도 개봉이 한정없이 미뤄졌다가 가까스로 뒤늦게 소규모로 개봉했다. 제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방식을 택함으로써 자본의 문제를 해결해 세 번째 영화를 찍어놨더니, 이제는 정치의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청소년 모방 위험’을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아 개봉 전부터 영화 외적인 것으로
스캔들의 주인공이 돼버린 것이다. 영화를 지지하든 안 하든, 10대를 위해 만든 영화가 도리어 10대들이 볼 수 없도록 금지를
당했다.

딱히 눈에 띌 만한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없는데도 이러한 등급을 받은 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가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얼마나
‘불온한’ 영화인지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우려된 ‘청소년 모방 위험’의 타겟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하나는 모두가 짐작하는 바로 그 이유, 그러니까 현직 대통령을 향한 직설적인 조롱과 비난, 그리고 또
하나는 이주노동자와의 연애, 그것도 ‘까만 피부’를 지닌 이주노동자와 ‘성적인 텐션이 분명히 존재하는’ 연애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정으로 불온한 것은 바로 후자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온함은 다시, 한국사회의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고스란히
폭로한다.

재미있는 것은 감독이 이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이미 영화 내에서 그대로 까발렸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민서(백진희)가 자신의 담임 선생님과 딱 마주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방문자>의 주연 김재록이 이 난감한 담임
선생님을 참 애처롭게 연기한다. 너무나 애처로워서 더욱 코믹하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위력적인 장면이자,
남자어른들에게 가장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10대의 성을 끝없이 터부시하면서 특히 10대 여성에게
‘순결하고도 무성적인 존재’로 있을 것을 강요하지만, 정작 막 10대를 벗어난 가장 젊은 여성들의 성을 가장 더럽고 치졸한
방식으로 착취하는 경향이 있다. 10대 청소년들이 성매매 시장으로 유입되는 것도 바로 이 틈새다. 게다가 그들은 ‘어리다고’
각광을 받으면서도 ‘불법’이라는 이유로 착취를 당하는 이중적 모순에 놓이곤 한다.) 담임 선생님 씬이 그토록 위력적이고 코믹한
것도 바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현실이 고스란히 폭로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소위 ‘통제되어야 할’ 여성의 성이 ‘민족의 범위를 벗어난’ 남자들, 특히 가난한 외국 출신 남자들과 엮일 때 한국
남성들의 분노는 폭발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이 영화를 공격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공격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영화는
민서와 카림(마붑 알엄) 사이의 성적인 텐션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민서는 카림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한국사회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방식, 즉 ‘(여성 착취적인) 봉사의 의미의’ 성적인 접촉을 시도한다. 이 영화가 다른 의미에서
‘선정적인’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이 영화가 선정적이라면 그것은 성을 다루거나 묘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성, 특히 10대 여성의 성을 다루는 방식의 위선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인 남성들이 가장 터부시하고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에서 건드려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외피를 두른 채.
이것의 결과가 바로 현실 층위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셈이다. 영화의 허구적 층위에서 이미 고발된 아이러니와 모순이
현실의 층위에서 고스란히 반복을 통해 재현된다.

반두비

본국의 어린 여성과 이주노동자 유부남 남성의 자연스러운 신체접촉은,

한국의 남자어른들에겐 불편한 악몽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저 성적인 접촉의 장면이 여성, 특히 주인공인 10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이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고
보기에도 모호한 지점이 있다. 영화 전체적으로 민서를 생동감있게 해주는 것은 그녀가 어떤 일관된 사고나 가치관에 따라 숙고하고
행동한다기보다 거의 즉물적인 욕구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라는 바로 그 지점에 있지만, 이 특징은 민서라는
캐릭터를 ‘알 거 다 아는 척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모순의 존재로 묶어둔다. 그녀는 유사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며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 잘 알고있는 듯 말하고 행동하지만 오히려 성에 대해 무지한 어린아이같은 존재다. 그녀가 카림에게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어떤 ‘난감한 천진함’이 포착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성적인 행위의 생물학적인 ‘조건반사’
과정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그 행위가 지닌 다층적 층위에서의 사적, 사회적,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단적인
근거가 어머니의 남자친구인 기홍(박혁권)에 대한 무조건적 적대다. 그녀는 어머니와 기홍 사이를 전적으로 ‘동물적인 성적 행위만
존재하는 관계’로 여기며 혐오감만 드러낼 뿐, 그 관계에 있을 다른 정서적 교감이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결코 이해는커녕
짐작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장면에서 민서의 행위는 오히려 사회가 여성의 성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에 대해 그 외형을
그저 흉내내는 것일 뿐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녀가 그 의미들을 (새삼) 깨닫고 자신의 주체성 하에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은 영화 막바지에나 나오는 키스씬이다.

이 영화의 수상하고 기묘한 모순도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나는 <반두비>의 민서 캐릭터가 살아 생동하는 10대
여성을 그렸다기보다는, 386 지식인 남성이 ‘촛불소녀’에게 투영한 이상형을 그려낸 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허남웅 기자가 지적한 대로(새 창으로 열기),
‘감독의 이상을 뻣뻣하게 구현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모범생 로봇이라는 것이다. 사실 ‘촛불소녀’에 대한 386들의 기대가 과연
무엇인지 이 영화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도 또 없다. 카림의 월급을 떼어먹은 사장의 집에서 민서가 난동을 벌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말하자면 386 남성 지식인들이 ‘어른’이기에 대놓고 하지 못하는 일련의 체면구길 제멋대로의 행동과 거침없는
말들을 ‘어린 여자’라는 방패 하나로 대신 질러줄 수 있는 존재다. 혹은 동년배들의 혐오어린 시선이나 비난엔 끄떡도 않을 남성
어른의 위선을 대신 콕 찝어 폭로하고 수치를 안겨주어 윤리적 각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이거나. 민서가 남성의 욕망을 잘
알면서도 완전히 무지한 모순을 갖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감독이 민서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그녀는 매혹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구체적인 성적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 읽힌다. 바라보는 자가 자신과 다른 이의
시선 모두를 애초부터 억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적으로 완전히 무지한 천진한 존재고, 그러면서도 남성의 욕망을
꿰뚫어본다고 가정된 존재다. 어쩌면 이와 같은 메커니즘은 소위 ‘국민여동생’ 문근영을 향한 팬덤이 보여준 어떤 현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녀는 성적으로 매력이 있으되 결코 그녀 자신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알아선 안 된다. 그녀를 보는 ‘나’는
그녀에게 성적인 매혹을 느끼되 그것을 성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절대로 안 된다. ‘내’가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건 죄다. 그러므로 그녀는 순결한 누이가 되어야 한다. 그녀와 성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건 외부의
타자뿐이거나 이 모든 소소한 서민들을 뛰어넘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자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매혹은 사라지거나, 여전히
원존재의 상태로 봉인될 것이다 …

반두비

식사장면의 중요성

 

나아가 내가 우려하는 것은, 신동일 감독 영화의 캐릭터들은 갈수록 어려지지만, 한편으로 갈수록 생동감과 자연스러움도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개연성을 해치며 ‘아귀가 안 맞는’ 어색함과 작위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
짐장에는 아무래도 신동일 감독의 주인공 캐릭터들이 나이가 많건 어리건 우리가 소위 ‘386’이라 부르는 특정 세대의 특정한
정서와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일관되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감독 자신이 가장 많이 반영되어 있던 데뷔작
<방문자>의 김재록 캐릭터는 실제 386 출신 지식인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그 나이 또래 아저씨’의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로 오면, 인물들은 포스트-386에 속하는 지금의
30대들로 설정돼 있으면서도 이들 캐릭터의 사적 역사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기억과 재료 부분은 일관되게 386의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 즉,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극중 나이에 어울릴 만한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거나, 90년대에 30대 초중반을 지나고 있던 인물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2000년대로 불러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번 <반두비>에서의 민서 캐릭터 역시 계속해서 어딘가 어색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지금의
10대를 반영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라기보다는 감독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386 여성 친구/동지들이 10대이던 무렵의 소녀를
‘이상화’로 덧씌운 뒤 억지로 타임머신에 태워 2009년을 살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차피 허구의 창작물에서 인물들은
실제 그 나이대의 동시대 인물들보다는 감독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리자이기 마련이고 그 자체만으로 흠이 되는 건 아니지만, 신동일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적 배경 하에 특정한 시대를 특정한 나이로 거친 특정한 인간을 매우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간을 달리는 캐릭터’들은 관객들에게 어떤 면에서 상당히 경직성을 보여주며 예기치 않은 곳에
공감대를 흩뜨려버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민서는 종종 너무 제멋대로에 생각이 없어보이거나 즉물적이고,
카림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착하다. 나는 과연 10대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아, 우리 얘기다”라고 반응할지 아닐지 상당히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면 내 짐작은 다소 부정적이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나는 영화에서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직설화법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자의식이 부담스럽다. 소신이 너무
명확해서 그 소신의 이론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잡히지 않는 현실의 모든 면까지도 이론으로 제어하려는 듯한 답답함이 종종 보인다.
나아가 이것이 지나치게 우직하고 직설법으로 드러나는 것도. 사실 <반두비>는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 상당히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다.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도 상당하다. 그런데 여기에 지나친 정치적 자의식이 끼어들면서
매력을 깎아먹고 있는 것 같다. 정치적 메시지와 주제가 왜 매력을 오히려 돋우지는 못할망정, 지지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부담을
먼저 안겨주며 종종 민망함을 느껴야 하는가. 세련된 위트와 재치, 혹은 함축과 비유가 아쉽다. 특히나 이런 ‘장르영화’적 외피를
빌어온 영화에 그런 식의 날 것의 정치적 자의식을 부딪히게 하는 건 종종 덜컹거리며 영화의 전체적 균형감을 망치는 결과가 되기
쉽다. 극소수의 대가들이 충돌을 통해 오히려 시너지를 내는 방식으로 그려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내공이 아닌 것이다.

ps 1. 신동일 감독의 영화엔 그만의 반복되는 몇 가지 코드들이 있다. 신감독의 따님의 캐스팅도 그 중 하나인데, 이
영화에선 실물로도 이름으로도 등장하지 않았던 듯. 다만 신감독은 이번 영화에도 카메오 출연을 했다. 무려 1인 2역이다.
마르크스의 사진도 어딘가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점 씬이 아니었을까 싶다.)

ps 2. 민서의 기원이 지금의 10대보다 오히려 386인 여자의 어린시절에 대한 ‘상상’일 거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
하나. 민서는 ‘오늘의 책’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의 알바생이란 2009년엔 거의 사라진 희귀한 존재다.

영진공 노바리

<추격자>는 좋은 영화인가?





 


<스포일러가 있어요.> 







<추격자>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에는 많이들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전 서울의 강북, 그 중에서도 소위 ‘서민동네’라 할 수 있는 주택가들(아파트촌 말고요)의 그 특유의 미로같은 골목길들의 표정을 제대로 드러내는 영화를 이제서야 처음 본다며 감격했고, 김윤석의 연기에 감탄했으며, 하정우의 연기에 그저 놀라움을 느낄 뿐이었지만, 이 영화가 과연 좋은 영화인가, 그리고 이 감독에게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에는 계속 멈칫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의 폭력수위에 거부감을 느껴서는 아니에요.  전 사실 피가 튀거나 폭력 그 자체를 다루는 영화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보지도 못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공포를 느끼거나 구역질을 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퍽 담담하게 보고 나온 편이에요. 시사회 때 영화를 보고 왔으니 영화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꽤 일찌감치 영화를 본 셈인데, 영화 어떻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살인의 추억>만큼 좋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아주 잠시 멈칫거리다가 “영화 잘 나왔던데요”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멈칫거림의 정체가, 그리고 “영화 좋던데요”라고는 말을 하지 못한 이유가 과연 무얼까 생각했더랬지요.


솔직히 저는 이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잘 빠진 장르영화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보도자료에 맨 처음 써 있던 감독의 말, 그리고 이후 잡지 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본 감독의 말은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말이었는데, 전 그걸 보고 더 갸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경찰들, 우왕좌왕하면서 범인을 못 잡죠.  하지만 솔직히 김윤석이 수사를 가장 크게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영화에서 과연 시스템의 무능이, 그에 대한 분노가 적절하게 드러났는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저 대답은 감독이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의도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그리고 ‘급조된’ 답이 아닐까란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서영희가 결국 죽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합니다.  저는… 뭐 글쎄요. 마지막에 김윤석과 하정우의 격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장면의 살인은 상당히 ‘양식적’으로 표현돼 있죠. 전 그녀가 죽는 게 크게 문제되진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까지 불쾌감을 느끼지도 않았지만, 이 장면에 대한 문제제기는, 실은 “대체 이 영화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영화일까”라는 저의 질문과 그리 다르지 않은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두 질문 모두, 실은 이 영화의 윤리성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쾌락을 위해서 이 영화가 살인의 스펙터클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는 게 과연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감독이 보여주는 대로 우리가 이렇게 소비를 해도 괜찮을 것일까, 에 대한.


꼭 유영철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도 이제 연쇄살인이 분명 사회적 이슈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하정우에게 특히 공포를 느꼈던 여성관객들의 경우, 사실 이 영화가 (벽화 그리는 내용만 뺀다면) 프로파일러들이 말하는 연쇄살인범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묘사했고, 그걸 또 하정우가 고스란히 재현해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바로 이 면에서 하정우에게 상당히 놀랐던 거거든요.  대다수에게 그저 ‘대상’으로만 비춰질 뿐인 대상을 정말로 ‘대상’으로 그려버리는 예가 이제껏 한국영화에선 그리 흔치 않았고(어떤 식으로든 관객의 ‘이해’를 요구하죠), 그런 걸 연기하는 배우는 더더욱 흔치 않았으니까요.  이제껏 영화 속에서 그려진 연쇄살인범들이 이 영화의 하정우처럼 그런 식으로 그려진 예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아요.  우리가 연쇄살인범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체로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들이죠.  이건 프로파일러들의 실제 분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이라는 설정은, 영화가 실은 연쇄살인이 아닌 도시사회의 계급을 그리는 비유이며, 그 장르의 영화가 성립시켜 놓은 일종의 공식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공식과 ‘장르문법의 활용’은, 영화를 일정정도 실제 현실과 거리가 있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거리감은, 예술, 특히 ‘픽션’에선 상당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저는 이 영화에서 소위 ‘리얼리티’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체 왜?


창작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겉의 이야기 안에 속의 이야기와 주제를 감추고 있죠.  (이 ‘주제’라는 걸 꼭 ‘교훈’과 등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나아가 사실 주제라는 거 없어도 좋을 거라 생각해요.  하나의 장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형식을 실험해보고, 그 형식에 대항하기도 하고, 그 형식을 갖고 장난을 치는 것 역시 분명 예술의 범위일 테니까요.  그런데 <추격자>의 경우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겉의 번드르르한 이야기 속에 정작 주제라 할 만한 것, 속의 이야기는 없는 텅빈 공갈빵처럼 느껴져요.  그렇다면 이 영화가 형식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가?  다시 이어진 어떤 인터뷰에선 ‘탈장르 영화’ 운운하고 있더군요.  전 그 탈장르 운운하는 얘기 역시 감독 자신도 대답 못 하는 어떤 의문에 또다시 끌어댄 임시방편격 대답이라는 의심이 들더군요.


한 친구와 이런 얘기를 하다가, 분명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사건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화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반론을 하더군요.  하지만… 이건 감독의 대답이 아닙니다. 만약 감독이 이렇게 대답했다면 전 곧바로 수긍해버렸을 거예요.  이건 현실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당하고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한 재현의 의지, 라는 너무나 명확한 작품의 주제와 이유를 포함하고 있는 답변이니 말이에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화라는 건 굳이 촬영 시 앵글과 컷과 편집뿐 아니라,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에서부터 ‘선택’의 예술이지 않던가요.  그리고 그건 영화뿐만이 아니고요.  우리 현실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거대한 덩어리처럼 서로 얽히고 또 얽혀 있는데, 그 중 어떤 한 부분을 꺼내서 어떤 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는 무수한 선택으로 이뤄져 있고요.  영화뿐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다는 그 모든 창작은 현실의 재구성이기도 합니다.  그 현실이 우리의 실제 리얼라이프이건 환상이건 꿈이건 이상이건 공포건요.


창작자는 그저 ‘그냥 그 얘기가 하고싶어서’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답 안에는 사실 그저 감독의 순수한 욕망 외에 상당히 많은 것들이 들어있기 마련이죠.  감독 자신이 언어로 세련되게 설명하지는 못할지라도, 분명 어떤 필요성과 이유를 가지고 있기에 욕망을 느낀 것이고, 이것은 창작자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속해있는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마련이며, 이는 곧 작품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고, 때때로 비평가들은 감독 자신조차 의식의 차원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일관성있는 필요성과 이유를 끄집어 내기도 하죠.  (사실 그게 비평가들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추격자>는?


만약 감독이 ‘그냥 이 얘기가 하고 싶었다’라던가, ‘굉장히 센, 사실적인 연쇄살인범 얘길 해보고 싶었다’라고 대답했다면 차라리 너무 쉽게 수긍해 버렸을지 몰라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식의 대답은 하고있지는 않지요.  어떻게든 사회적인, 좀 나쁘게 말하면 ‘있어보이는’ 대답을 하고 있는데 그 대답들은 제게는 하나같이 상당히 공허하고, 아전인수격으로 끌어온 답변들처럼 여겨집니다.  제가 이 영화에 과연 윤리성이 있는가, 라고 느꼈던 것은, 영화가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마구 허물면서, 그 사실과 그가 유래할 파장 같은 것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고 있지 않는 듯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폭력을 스펙터클화해서 소비하는 방식에는 분명 ‘공식화’와 ‘장르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은 폭력을 소비함에 있어 현실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폭력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그 폭력을 ‘허구화한’ 즉 ‘허구화된 폭력’을 즐기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고, 이것은 다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짓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나, 싶은데요.  영화 속에서 어마어마한 폭력을 구현해놨던 무수한 감독들의 무수한 영화들은 실은 그 폭력을 현실에서의 폭력과 상당히 구분하고 있고, 양식화 시켜놓고 있습니다.  샘 페킨파가 됐던 타란티노가 됐던, 영화 안에서 폭력 묘사가 강해질수록 이 폭력을 둘러싼 ‘영화’라는 경계, 현실에서 분리된 ‘허구’라는 경계가 그만큼 강해지는 거거든요.  하지만 <추격자>는 그렇지가 않죠.  저는 이 영화가 그 부분에 대해 아예 아무런 생각도 배려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든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겠다, 잘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모든 창작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민을 해야 하는 어떤 경계를 아무 생각없이 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