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두비”(2009), 메시지와 주제 사이의 균형감이 아쉬운 영화

반두비

뚱한 표정이 민서의 매력

신동일 감독은 참 운이 없다. 데뷔작을 포함해 그의 첫 두 영화는 모두 투자사와 배급사간 ‘자본’끼리의 이런저런 갈등과
사정 때문에 영화를 다 만들어놓고도 개봉이 한정없이 미뤄졌다가 가까스로 뒤늦게 소규모로 개봉했다. 제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방식을 택함으로써 자본의 문제를 해결해 세 번째 영화를 찍어놨더니, 이제는 정치의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청소년 모방 위험’을 이유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아 개봉 전부터 영화 외적인 것으로
스캔들의 주인공이 돼버린 것이다. 영화를 지지하든 안 하든, 10대를 위해 만든 영화가 도리어 10대들이 볼 수 없도록 금지를
당했다.

딱히 눈에 띌 만한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없는데도 이러한 등급을 받은 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가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얼마나
‘불온한’ 영화인지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우려된 ‘청소년 모방 위험’의 타겟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하나는 모두가 짐작하는 바로 그 이유, 그러니까 현직 대통령을 향한 직설적인 조롱과 비난, 그리고 또
하나는 이주노동자와의 연애, 그것도 ‘까만 피부’를 지닌 이주노동자와 ‘성적인 텐션이 분명히 존재하는’ 연애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정으로 불온한 것은 바로 후자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온함은 다시, 한국사회의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고스란히
폭로한다.

재미있는 것은 감독이 이 위선적인 허위의식을 이미 영화 내에서 그대로 까발렸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민서(백진희)가 자신의 담임 선생님과 딱 마주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방문자>의 주연 김재록이 이 난감한 담임
선생님을 참 애처롭게 연기한다. 너무나 애처로워서 더욱 코믹하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위력적인 장면이자,
남자어른들에게 가장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10대의 성을 끝없이 터부시하면서 특히 10대 여성에게
‘순결하고도 무성적인 존재’로 있을 것을 강요하지만, 정작 막 10대를 벗어난 가장 젊은 여성들의 성을 가장 더럽고 치졸한
방식으로 착취하는 경향이 있다. 10대 청소년들이 성매매 시장으로 유입되는 것도 바로 이 틈새다. 게다가 그들은 ‘어리다고’
각광을 받으면서도 ‘불법’이라는 이유로 착취를 당하는 이중적 모순에 놓이곤 한다.) 담임 선생님 씬이 그토록 위력적이고 코믹한
것도 바로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현실이 고스란히 폭로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소위 ‘통제되어야 할’ 여성의 성이 ‘민족의 범위를 벗어난’ 남자들, 특히 가난한 외국 출신 남자들과 엮일 때 한국
남성들의 분노는 폭발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이 영화를 공격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공격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영화는
민서와 카림(마붑 알엄) 사이의 성적인 텐션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민서는 카림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한국사회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방식, 즉 ‘(여성 착취적인) 봉사의 의미의’ 성적인 접촉을 시도한다. 이 영화가 다른 의미에서
‘선정적인’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이 영화가 선정적이라면 그것은 성을 다루거나 묘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성, 특히 10대 여성의 성을 다루는 방식의 위선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인 남성들이 가장 터부시하고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에서 건드려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적 외피를 두른 채.
이것의 결과가 바로 현실 층위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셈이다. 영화의 허구적 층위에서 이미 고발된 아이러니와 모순이
현실의 층위에서 고스란히 반복을 통해 재현된다.

반두비

본국의 어린 여성과 이주노동자 유부남 남성의 자연스러운 신체접촉은,

한국의 남자어른들에겐 불편한 악몽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저 성적인 접촉의 장면이 여성, 특히 주인공인 10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이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고
보기에도 모호한 지점이 있다. 영화 전체적으로 민서를 생동감있게 해주는 것은 그녀가 어떤 일관된 사고나 가치관에 따라 숙고하고
행동한다기보다 거의 즉물적인 욕구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라는 바로 그 지점에 있지만, 이 특징은 민서라는
캐릭터를 ‘알 거 다 아는 척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모순의 존재로 묶어둔다. 그녀는 유사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며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 잘 알고있는 듯 말하고 행동하지만 오히려 성에 대해 무지한 어린아이같은 존재다. 그녀가 카림에게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어떤 ‘난감한 천진함’이 포착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성적인 행위의 생물학적인 ‘조건반사’
과정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그 행위가 지닌 다층적 층위에서의 사적, 사회적,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단적인
근거가 어머니의 남자친구인 기홍(박혁권)에 대한 무조건적 적대다. 그녀는 어머니와 기홍 사이를 전적으로 ‘동물적인 성적 행위만
존재하는 관계’로 여기며 혐오감만 드러낼 뿐, 그 관계에 있을 다른 정서적 교감이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결코 이해는커녕
짐작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장면에서 민서의 행위는 오히려 사회가 여성의 성을 다루는 하나의 방식에 대해 그 외형을
그저 흉내내는 것일 뿐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녀가 그 의미들을 (새삼) 깨닫고 자신의 주체성 하에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은 영화 막바지에나 나오는 키스씬이다.

이 영화의 수상하고 기묘한 모순도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나는 <반두비>의 민서 캐릭터가 살아 생동하는 10대
여성을 그렸다기보다는, 386 지식인 남성이 ‘촛불소녀’에게 투영한 이상형을 그려낸 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허남웅 기자가 지적한 대로(새 창으로 열기),
‘감독의 이상을 뻣뻣하게 구현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모범생 로봇이라는 것이다. 사실 ‘촛불소녀’에 대한 386들의 기대가 과연
무엇인지 이 영화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화도 또 없다. 카림의 월급을 떼어먹은 사장의 집에서 민서가 난동을 벌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말하자면 386 남성 지식인들이 ‘어른’이기에 대놓고 하지 못하는 일련의 체면구길 제멋대로의 행동과 거침없는
말들을 ‘어린 여자’라는 방패 하나로 대신 질러줄 수 있는 존재다. 혹은 동년배들의 혐오어린 시선이나 비난엔 끄떡도 않을 남성
어른의 위선을 대신 콕 찝어 폭로하고 수치를 안겨주어 윤리적 각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이거나. 민서가 남성의 욕망을 잘
알면서도 완전히 무지한 모순을 갖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감독이 민서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그녀는 매혹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구체적인 성적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 읽힌다. 바라보는 자가 자신과 다른 이의
시선 모두를 애초부터 억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적으로 완전히 무지한 천진한 존재고, 그러면서도 남성의 욕망을
꿰뚫어본다고 가정된 존재다. 어쩌면 이와 같은 메커니즘은 소위 ‘국민여동생’ 문근영을 향한 팬덤이 보여준 어떤 현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녀는 성적으로 매력이 있으되 결코 그녀 자신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알아선 안 된다. 그녀를 보는 ‘나’는
그녀에게 성적인 매혹을 느끼되 그것을 성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절대로 안 된다. ‘내’가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이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건 죄다. 그러므로 그녀는 순결한 누이가 되어야 한다. 그녀와 성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건 외부의
타자뿐이거나 이 모든 소소한 서민들을 뛰어넘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자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매혹은 사라지거나, 여전히
원존재의 상태로 봉인될 것이다 …

반두비

식사장면의 중요성

 

나아가 내가 우려하는 것은, 신동일 감독 영화의 캐릭터들은 갈수록 어려지지만, 한편으로 갈수록 생동감과 자연스러움도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개연성을 해치며 ‘아귀가 안 맞는’ 어색함과 작위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
짐장에는 아무래도 신동일 감독의 주인공 캐릭터들이 나이가 많건 어리건 우리가 소위 ‘386’이라 부르는 특정 세대의 특정한
정서와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일관되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감독 자신이 가장 많이 반영되어 있던 데뷔작
<방문자>의 김재록 캐릭터는 실제 386 출신 지식인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그 나이 또래 아저씨’의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로 오면, 인물들은 포스트-386에 속하는 지금의
30대들로 설정돼 있으면서도 이들 캐릭터의 사적 역사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기억과 재료 부분은 일관되게 386의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 즉,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극중 나이에 어울릴 만한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거나, 90년대에 30대 초중반을 지나고 있던 인물들을 타임머신에 태워 2000년대로 불러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번 <반두비>에서의 민서 캐릭터 역시 계속해서 어딘가 어색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지금의
10대를 반영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라기보다는 감독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386 여성 친구/동지들이 10대이던 무렵의 소녀를
‘이상화’로 덧씌운 뒤 억지로 타임머신에 태워 2009년을 살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차피 허구의 창작물에서 인물들은
실제 그 나이대의 동시대 인물들보다는 감독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리자이기 마련이고 그 자체만으로 흠이 되는 건 아니지만, 신동일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적 배경 하에 특정한 시대를 특정한 나이로 거친 특정한 인간을 매우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간을 달리는 캐릭터’들은 관객들에게 어떤 면에서 상당히 경직성을 보여주며 예기치 않은 곳에
공감대를 흩뜨려버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민서는 종종 너무 제멋대로에 생각이 없어보이거나 즉물적이고,
카림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착하다. 나는 과연 10대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아, 우리 얘기다”라고 반응할지 아닐지 상당히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면 내 짐작은 다소 부정적이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나는 영화에서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직설화법으로 드러나는 정치적 자의식이 부담스럽다. 소신이 너무
명확해서 그 소신의 이론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잡히지 않는 현실의 모든 면까지도 이론으로 제어하려는 듯한 답답함이 종종 보인다.
나아가 이것이 지나치게 우직하고 직설법으로 드러나는 것도. 사실 <반두비>는 괜찮은 정도를 넘어서 상당히 훌륭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다.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도 상당하다. 그런데 여기에 지나친 정치적 자의식이 끼어들면서
매력을 깎아먹고 있는 것 같다. 정치적 메시지와 주제가 왜 매력을 오히려 돋우지는 못할망정, 지지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부담을
먼저 안겨주며 종종 민망함을 느껴야 하는가. 세련된 위트와 재치, 혹은 함축과 비유가 아쉽다. 특히나 이런 ‘장르영화’적 외피를
빌어온 영화에 그런 식의 날 것의 정치적 자의식을 부딪히게 하는 건 종종 덜컹거리며 영화의 전체적 균형감을 망치는 결과가 되기
쉽다. 극소수의 대가들이 충돌을 통해 오히려 시너지를 내는 방식으로 그려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내공이 아닌 것이다.

ps 1. 신동일 감독의 영화엔 그만의 반복되는 몇 가지 코드들이 있다. 신감독의 따님의 캐스팅도 그 중 하나인데, 이
영화에선 실물로도 이름으로도 등장하지 않았던 듯. 다만 신감독은 이번 영화에도 카메오 출연을 했다. 무려 1인 2역이다.
마르크스의 사진도 어딘가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서점 씬이 아니었을까 싶다.)

ps 2. 민서의 기원이 지금의 10대보다 오히려 386인 여자의 어린시절에 대한 ‘상상’일 거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
하나. 민서는 ‘오늘의 책’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의 알바생이란 2009년엔 거의 사라진 희귀한 존재다.

영진공 노바리

국민과 국가의 신화 … 2008년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국제사면-인권위원회인 엠네스티 인터내셔날(Amnesty International)의 노마 강 무이코(Norma Kang Muico) 조사관이 오늘(2008. 7. 18) 한국의 ‘촛불집회’에서 발견된 인권침해 상황에 대한 보고(
자세한 사항은 여기)를 했다. 한국정부는 경찰이 과도한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한 적법한 수사와 처벌, 그리고 징집된 전경들이 시위현장으로 내몰리는 것에 대한 재고를 권고했다. 엠네스티의 권고는 강제성이 없는 것이기에 특별한 변화가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하지만 그다지 희망적인 의견을 내기는 힘들다. 18일 오전 국회에 출석한 한승수 총리가 물대포 사용을 ‘안전’한 진압장치라고 주장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향후 최루탄 사용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하지 않았다(자세한 사항은 여기)고 한다. 이것이 2008년 한국이라는 나라의 일상화된 권력집단의 물리적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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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로고>

  지난 10년간은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폭력이 없었다는 얘기를 하고싶은 게 아니다. 각 사업장, 재개발 마을, 거리 노점상에 대한 무지막지한 폭력은 지난 10년간 오히려 더 강화된 측면이 있었다. 폭력의 주체는 전경이 되기도 했지만 사업주와 용역관계를 맺는 폭력집단이 되기도 했다. 그것이 한국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주동자가 없이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많게는 수십만의 시민들이 모인 시위가 경찰에 의해 전면적인 폭력으로 해산되는 사태는 15년 가까이 만에 처음이기에 놀라움과 두려움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무리해서 단순화 시켜보면 계약관계로 맺어져있다. 현대사회의 규모가 직접정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국가-정부는 국민을 대리한다. 이 간단한 법칙은 사실 실상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 그러나 이 신화를 꾸준히 생산한 발원지는 국민-시민이 아니라 이들을 통치하는 국가-정부이다. 폭력의 역사로 점철된 국민국가 200여년을 가리고 포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국민국가는 국민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만들어진 신화’는 국민국가의 ‘헌법’을 통해 천명되고, ‘교육’을 통해 유포된다. 그런데 아주 가끔이지만 이 신화가 잠깐씩 현실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1987년이 그러했다. (지금의 촛불집회도 비슷하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자) 쉽게 말해 만들어진 신화를 어느새 진실이라 믿는 사람들에 의해, 현실에서 확인하고 싶어하는 열망이 모여 신화가 현신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신화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인간의 힘이란 때로 신화도 현실로 살짝 현신하는 상황을 연출해낸다. 신동엽 시인이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말 할 때 그 하늘은 그렇게 잠시 만들어진 신화가 현실에 잠시 실현되는 그 때이다. 그 현신을 본 사람들이 얻는 상징적 힘이란 엄청난 것이다. 그리고 그 신화의 거대한 물줄기는 어느새 다시금 시냇물만도 못한 크기로 작아져 스며들어버린다. 만들어진 신화도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는 정말 신화로 작동되기도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열망이 1987년 이후, 이렇게 더 급진적인 자본주의 사회로의 매진으로 바뀐 것, 혹은 2004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100만명의 촛불이 결국 2MB정권을 창출한 것 역시 배신이나 잘못된 굴절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이것이 신화(=국가는 국민에 의해 구성되고 만들어졌다)이기 때문이다. 워낙 신화라는 것의 작동원리가 그런 것이니까. (이에 대해서는 질베르트 뒤랑의 『신화비평과 신화분석』이 좋은 방향성을 제시한다) 문제는 2008년 한국은 이런 신화조차 짓밟히고 부정당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신화를 만들고 퍼뜨린 권력이라는 장치가 신화를 믿게된 사람들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들은 신화대신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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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과 국가의 계약을 통해 국민국가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은 매우 근대적인 발상이다. 정당성의 근원이 무오류의 어떤 ‘법칙’이 아닌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단서가 붙기 때문이다. 무오류의 법칙이란 신앙과 같다. 르네상스 시기가 근대의 미명이 될 지언정 근대라고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시간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다. 근대는 계몽주의적 진보를 믿는 사회이며, 계몽주의의 바탕은 계약에 의한 사회구조를 담보한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과학이 신의 영역과 바톤 터치를 한 모양새를 갖는다. 즉 과학적 법칙이 밝혀지면 이 현상의 모든 현상들에 대한 원인은 물론 미래까지도 확언할 수 있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이러한 무오류성의 과학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비교문화적으로 바라보면 이러한 과학 맹신주의자나 종교 맹신주의자의 모습은 매우 비슷하다. 근대는 이 무오류성을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대치하려 한다. (이는 올드 패션드 맑시스트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근대의 ‘계약’이라는 것도 만들어진 신화이며, 이는 일종의 전-근대 사회가 가졌던 무오류성의 무엇(신앙, 왕권, 무소불위의 과학)의 대치물이다. 탈/후기 근대에 이르러서 바로 이 계약도 무오류한 것이 아니라는 성찰성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무오류한 계약 자체를 의심하고 관계의 재설정에 대한 고민이 나타난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소수자의 목소리가 중요해지게 되는 것도 계약의 무오류성이라는 믿음이 깨지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종교와 이해관계를 넘어선 인권의 중요성, 또는 인간 이외의 환경이 인간 못지 않게 중요한 것도 마찬가지 성찰적 깨달음에서 연유한다.  

  말이 좀 많이 돌았다. 이제 한국 사회로 다시 돌아와보자. 2008년 들어 수많은 토론 자리에서 듣게 되는 야당의 이야기; 속단하지 말고 믿고 따라와다오, 국민여러분 저를 믿고 맡겨주시시오, 겸허히 받아들이지만 지금은 위기니 지도력이 필요한 때, ….. 여기에는 계약의 기본이 되는 상호간의 검토나 건설적 토론의 틈이 들어설 수 없다. 믿고 따르라…. 믿고 따르면 되지, 왜 시비를 거냐, 심지어 좌파적 사고다. 좌파, 우파의 문제가 아니라 계약을 이행하는 당사자는 당연히 계약 내용에 대한 재검토와 이행과정에 대한 검수가 필요한 법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정부는 계약이 아닌 무오류의 신앙을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듯한 발언을 자주 꺼내 놓는다. 그것이 모든 정권, 권력의 속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부는 도가 지나치다. 한국의 ‘근대화’를 외치던 누구의 시대가 자꾸 떠오른다.

  시작에서 이야기한 엠네스티의 지적과 동시에 나오는 총리의 발언이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계약 진행사항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제3자의 감사가 이뤄질 때, 근대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계약은 다시금 돌아보고 점검하고 수정하고 진행하는 게 옳다. 하지만, 전근대적 신앙의 세계에서는 제3자의 말은 우리를 해하는 세력의 얘기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전근대적 사고로 무장된 사람들에게 엠네스티의 지적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도전이며, 받아들이기는 커녕 반드시 분쇄시켜야 할 악의 무리의 악의 발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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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근대 자체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 다만 근대가 작동되는 과정에 담긴 수많은 폭력과 억압이 문제이며 그 해결책은 근대의 여러 측면에 소소하지만 의미심장하게 담겨있다고 믿는 편이다. 근대는 여전히 역사를 믿는 사람들에게 전근대에서 진일보한 세계이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들에겐 전근대적인 믿음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타협과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없애야 할 악으로 보인다. 문제는 무오류성의 확실성이 갖는 죽은 기운이다. 무오류한 과학은 미래를 완벽하게 예단한다. 여기에는 불확실성이 가지는 건강한 생명력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믿고 맡기면 모든 것은 다 잘되게 되어있다는 신앙심에는 불확실성이 들어가서도 안되고 허용되지도 않는다. 즉 무오류의 신앙은 도덕과 같은 권위를 획득하고, 이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건강한 계약은 불확실성의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 재계약, 계약 수정, 나아가 계약 파기라는 불확실성이 작동할 수 있다. 신앙이 아닌 인문-사회과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불확실성의 작동이 가져오는 역동적인 가능성을 연구하고 의미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사회과학을 하는 한 사람으로, 2008년 사회계약이라는 신화를 책 속의 신화로 봉인하고 무오류의 신앙으로 대체하려는 정부와 사회계약 신화를 현실로 만들려는 시민들의 대립은 슬프지만 너무나 감동적인 민주주의의 한 장면이다. 이를 한국의 문제로만 볼 것인지 혹은 더 큰 세계와의 연결점을 찾아 글로벌 시대의 시민의 문제로 만들 것인지는 시민들의 선택이다. 그러나 지금 전-근대로 회귀하려는 정부는 분명 시대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강물은 상류에서 하류로 흐른다. 홍수와 밀물을 만나 역류하는 순간을 맞이하더라도 그 잠시를 지나면 다시 흘러내리게 마련이다. 영구한 역류란 있을 수 없다.


영진공 헤비죠

촛불집회와 매트릭스

뭐 몇 차례 참석한 주제에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가 뭐하지만 …
촛불집회의 변화 과정은 제가 보기엔 <매트릭스> 1편에서 3편으로의 변화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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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1편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새로움으로 가득찬 사이버 펑크 였습니다.
설마 이런 이야기로 이렇게 멋진 결과를 맺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요.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시큰둥했습니다만(1편의 흥행은 의외로 저조)
그래도 지금은 역사에 길이 남을 1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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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매트릭스

하지만 속편으로 갈수록 규모는 커졌으나 이야기는 오히려 낡은 틀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3편은 사이버 에픽이라고 할 법한 끝없는 전투와 희생으로 채워져 있는데
물론 그것도 의미는 있었으나 아무래도 1편의 후속작에서 기대할 수 있는
“무엇”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새롭지 않았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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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연상케했던 3편…

촛불집회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광우병 문제를 들고, 그것도 중고생들이 그 중에서도 여학생들이 청계천과 광장에 나왔을 때 사람들, 특히 저 같은 어른들은 반신반의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집회는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죠.

바로 청소년들의 개성과 재기가 발휘되었기 때문이죠.
이 시기의 촛불집회는 낯설면서도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메시지에 힘을 얻고
청소년들의 희생에 분노하고 창피해하던 어른들이 합류하면서
규모도 커지고 힘도 세졌으나
원래의 그 재미있고 생기 넘치는 촛불집회의 모습은 사라져가는 것 같습니다.

원래 이 집회는 지휘자가 앞에 나가서 몸짓과 구호를 일일이 참가자들에게 가르쳐주고 따라하라고 지시하는 그런 집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기에 이렇게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고요.
하지만 10일의 집회는 바로 그랬습니다.
지휘자가 구호도 가르쳐주고 동작도 지시하더군요..

초기의 촛불집회가 일종의 살아 숨쉬는 정글 생태계였다면
10일의 촛불집회는 점점 목축장을 닮아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80년대에 그랬던 것 처럼, 지휘와 통제의 대상으로 말입니다.

물론 이런 뻘짓에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은 여전히 자발성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 여담인데, 6일 집회에서 어른들이 버스를 흔들고 있을 때,
그 옆에서 아이들이 쓰레기를 치우고 있더군요.
끝없이 나오는 쓰레기에 우와~ 하면서도 몇 명 안되는 여고생들이
12시 넘어까지 그러고 있더라고요… 어른들 쪽팔리게…)

어쨌든 거의 백만이 모였는데 사고 하나 없었다니…
성지에 모인 이슬람교도들이나 이 정도가 될까요.

이미 이 시점에서 촛불집회 참가자들과
컨테이너 뒤에 숨은 인간들 사이에는 백년의 격차가 생긴 셈이죠.

하지만, 이 백년을 앞서 진화한 새로운 생태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생태계의 리더는 밖이 아닌 생태계 내부에서 만들어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제는 그저 모이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은 결코 80년대의 낡은 것이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만약 그랬다간 그건 정말 쥐약이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10일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옆에 서있던 어떤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하시더군요.

“정 컨테이너 뒤에서 안기어나오겠다면, 밖에서 우리가 새로 대통령 뽑지 뭐.
쟤는 저 안에서 혼자 대통령하라고 하고… “


저도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