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공 64호]켄 로치

산업인력관리공단
2006년 12월 1일

이번에 켄 로치 특별전에서 본 영화들에 대해 감상문을 써보고자 시도하지만, 쉽지가 않다. 몇번을, 시도했다 지우다를 반복하다, 그냥 닥치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를 다시 읽고 있다. 통일노동자당(일명 P.O.U.M, 품)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스페인 내전이 서술되는 것은,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이나 [카탈로니아 찬가]나 비슷하다. 심지어 오웰과 데이빗 카(이안 하트, <랜드 앤
프리덤>의 주인공)가 P.O.U.M의 의용군에 소속된 계기 – 우연히 열차 안에서 그쪽 사람과 만나 합류했기 때문에! –
도 비슷하기 때문에, <랜드 앤 프리덤>이 [카탈로니아 찬가]를 느슨하게 각색한 것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아마 데이빗 카가 속해있던 정당도 독립노동자당이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이 독립노동자당원이었다.)

두 작품이 비슷한 것은 같은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인”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의용군에
입대하게 되는 과정, 전선에서 생활하는 모습은 다들 비슷비슷했을 테니까. 언어적 차이, 문화적 차이를 겪는 것과 함께, 스페인
내전이 정치적인 방향에서 진행된 양상에 대해 반응하는 것도 비슷했을 테니까. 다만 조지 오웰은 데이빗 카처럼 공산당에 입당하고
국제여단으로 적을 옮겼다가 다시 의용군으로 돌아온 적은 없다. 오웰은 휴가 나왔다가, 데이빗 카는 부상 치료차 후방에 왔다가
‘엉겁결에’ 바르셀로나 시가전에 휘말리는데, 이때 둘은 서로 반대편이다. 오웰은 통일노동자당 계열 의용군으로서 당시
노동조합(정확히, CNT 계열)이 관리하고 있었던 전화국을 사수하는 입장이었지만 데이빗 카는 마침 공산당에 입당하여 제복을 입고
전화국을 접수하기 위해 공격하던 입장이었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데이빗 카가 CNT의 플랭카드가 달린 전화국
저쪽에서 영국인을 발견하고 그에게서 “대체 그쪽에서 뭘하고 있는 거요?”란 소리를 들을 때, 그 영국인이 조지 오웰일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상상하는 건 관객-독자가 취할 수 있는 즐거운 특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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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앤 프리덤>은 5, 6년 전, 처음으로 본 켄 로치 영화이기 때문에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 바로 뒤에
본 <레이닝 스톤>과 함께 이 영화는 내게 ‘켄 로치 영화’에 대한 일종의 ‘각인’으로 너무 강하게 남아있어서, 나는
켄 로치의 영화들을 내멋대로 <랜드 앤 프리덤> 계열과 <레이닝 스톤> 계열로 나누곤 한다.
사회/역사적인, 거시적 질서 안에 개인이 휘말려 들어가는 걸 다루면 <랜드 앤 프리덤> 계열, 개인 혹은 그의 가족이
겪어나가는 사건들을 찬찬히 미시적으로 다루면 <레이닝 스톤> 계열. 구분 기준이 너무 자의적이라 당연히도 두 계열에
속하지 않는 영화가 더 많긴 하지만 하지만 이게 그래도 내게는 꽤 쓸모가 있다. 예를 들어 전자 계열이라 할 수 있는 켄 로치의
최근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랜드 앤 프리덤>과 플롯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하층민들>, <내 이름은 조>는 전형적인 <레이닝 스톤> 계열. <달콤한 입맞춤>은
<레이닝 스톤> 계열로 넣을 수 있겠지만 살짝 변종으로 느껴진다. 역시 근작이라 그간 스타일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일까.

롤랑 조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켄 로치 영화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점을 딱 집어 표현한 게 롤랑 조페다. “켄 로치
영화에는 ‘사람’이 있다. 그들을 꼭 껴안아주고 싶다.” 나는 켄 로치 영화들에 나오는 사람들이, 픽션의 인물들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도저히, ‘만들어진 인물’이라 느껴지지 않는 그 생동하는 인간들, 생생한 인간들. 심지어 그 인물들이 ‘배우들’이라는
너무 당연한 사실마저도 잊어버리곤 한다. (그리고선 어! 빌리 엘리엇네 아빠 아냐? 이러고 있다;;) 켄 로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시나리오가 개연성이 없다는 둥 이념에 함몰되어 있다는 둥 하는 소릴 들으면, 난 그들이야 말로 ‘이념을 갖기 싫다는
이념’에 함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탈정치를 외치는 이들이야말로 실은 가장 정치적이다.) 그 이념의 편견 때문에 켄
로치의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켄 로치 영화에서 혁명의 선전과 이데올로기적 공세만 본다면, 당신은 켄 로치 영화의
3/4을 그냥 망막 위로 흘려보내버린 것이다. 극히 일상적인, ‘영화의 사건’이 될 성 싶지 않은 사건들을 묘사하면서도 그저
에피소드와 에피소드의 연결이 아닌 ‘플롯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짐 앨런, 폴 래버티의 시나리오와, 낭비 없이 간결하고 건조하게
바로 들어갔다 빠지는 배리 애크로이드의 카메라, 켄 로치와 함께 하는 게리 루이스, 로버트 칼라일 등 켄 로치 전문 배우 혹은
이전엔 연기란 걸 해본적이 없는 비전문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이 모두를 조율하며 구현해내는 연출 등, “켄 로치와 그 친구들”이
만들어내는 성과는 사실,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도큐멘터리 아닌 ‘극영화’로서의 기본기에 충실한 영화를 보여주곤 한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빠지고 있다는 소릴 듣고 있긴 하지만(그는 이미 70세의 ‘할아버지’감독이고, 아무래도 그의 최전성기는 90년대
초중반이었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한편으로는, 한결 여유로워진 그의 후기 영화를 오히려 이전 영화보다 더 좋아하는 관객들도
분명 존재하리라.

켄 로치는 지금 또 신작을 찍고 있다. 변함없이 폴 래버티의 시나리오를, 이번에는 <9.11> 때 잠깐 같이 한
– 물론 <랜드 앤 프리덤>과 <히든 아젠다>에서 한참 밑엣 스탭으로 참여한 적이 있긴 하지만 – 나이젤
윌로비 촬영감독과 함께 한다. 프로듀서 짝꿍 레베카 오브라이언도 여전히다. 참 노인네가 정정도 하지. ㅎㅎ 그저 부디,
건강하시라. 그래서 그 식지 않는 열정으로 계속, 영화를 보여주시라.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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