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피에르 멜빌, <그림자 군단> <영진공 69호>

과거사진상규명위
2007년 2월 26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Sabbath님이 열정적으로 보고싶다는 소망을 피력하셨던
바 있는 장-피에르 멜빌의 영화 <그림자 군단> 완전판이 마침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의 친구들영화제에서 상영된지라,
일종의 뽐뿌를 받아 상영 당시 보러 갔다. 워낙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영화가 재밌다는 얘길 많이 들은지라 조금 기대를 하면서도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관한 영화라 내 취향에 맞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게 웬걸. 이 영화는 매우 절제되고 건조한 이야기
진행에 매우 서정적인 음악이 기묘하게 충돌하는, 아니 그리하여 한차원 더 높은 멜랑꼴리를 만들어내는 그런 영화였다. (매우
취향이라는 얘기다.) 음악 얘길 꺼낸 김에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음악 외에도 전반적인 사운드 효과가 아주 인상깊었다. 특히
비시정권 본부로 호송된 제르니에가 탈출하는 장면에서, 빈 골목에 가득 울리는 제르니에의 발자국 소리와 헉헉대는 숨소리가 갖는
일정한 리듬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리노 벤추라와 장-피에르 카셀(뱅상 카셀의 아버지인 프랑스의 명배우), 시몬 시뇨레 등 한때 스크린을 풍미했던 위대한
배우들이 줄줄이 출연하는 이 영화는 레지스탕스를 그린 영화들의 흔한 상투성을 반복하지 않는다. 모두들 언급하는 대로, 고독하고
과도한 비장미를 풍겨대는 후까시 고뇌의 영웅들이 아니라 은신과 도망, 그리고 싸움과 엄격함과 금욕이 피로한 일상이 되어버린,
그러나 그 일상을 매우 성실하게 영위해내는 ‘보통사람들’로서의 레지스탕스를 그린다.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 청년. “조국을
너무나 사랑해서”와 같은 낯뜨거운, 그러나 대단히 선동적인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그저, “해야 할 일이니까” 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화면은 과장된 어리광의 비장미 대신, 절제된 슬픔과 인간 본연의 고독이 가득하다. 혹독한 조건 위에서 묵묵히
손에 피를 묻힌다. 총에 맞는 순간, 마틸드는 어쩔 수 없이 살고싶다는 욕망과 동지들에 대한 원망 사이에서도 차라리 동지들 손에
죽는 것이 행복하다는 상반된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들소’처럼 우리 역시, 마틸드를 죽여야 한다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강경한 제르니에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질리고 거부할지언정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그렇게 스러져간 목숨들이다. 딸의 불행 앞에서 이성을 잃는 어머니, 왜소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40대 중년의 남자,
연이은 고문을 받아 피떡이 된, 더없이 허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노인.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은은한 빛이
난다. 첫 임무를 배신자 처단으로 받아 패닉 상태에 빠졌던 ‘마스크’ 클로드가 영화 말미에서 더없이 침착한 태도를 보이듯,
어느덧 살인과 처단에 익숙해지는 자신들을 보며 그들 스스로도 자괴감을 느끼지 않았으랴. 그러나 그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 모두 체포돼 죽음을 맞고 만다. 그들은 진정 그림자로 존재하던 군대였고, 그림자의 운명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아무런 영광도 기쁨도 없이, 보상도 없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

아마도 이런 ‘건조한’ 터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멜빌의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첫 개봉 당시 비시정권에 우호적이라는 오해를
받았던 모양인데, 아마도 장 웬 감독의 <귀신이 온다>가 중국인에게서 ‘일본에 우호적’이라 평가받은 것은 물론 한국의
영화평론가한테까지 ‘허허실실의 역사인식'(심영섭)이란 오해를 받은 것과 비슷한 궤일 것이다.

과거사진상규명위 상임간사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ps 1. 멜빌 영화들을 쭈욱 보고싶은 욕심은, 작년엔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특별전을 한번 했었기 때문에 당분간 이뤄지기 어려울 듯. 그러나 올해엔 장 르노아르 특별전이 있다!

ps 2. 내가 본 버전은 완전판, 복원판 등으로 불리는데, 애초 개봉되었을 당시 잘려나간 10분을 복원했을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카날플러스에서 완전히 새로운 프린트로 복원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1969년 영화를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프린트로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도 부러운 일인지. 이번 친구들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김기영 감독의
<고려장>이 프린트 2권이 분실된데다 비내리는 화면(이나마도 영상자료원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프린트 세척과 복원을
하고 빠진 부분 줄거리를 자막으로 삽입한 버전)으로 본 것을 생각해보면, “진정한 영화강국” 프랑스가 부럽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그러나 워낙 열정적인 사람들이 제도권 안팎에서 노력하고 있으니, 우리 역시 그 빛을 분명 조만간에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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