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블루스>, 가려진 다른 한쪽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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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얘기하자면 <택시 블루스>는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최하동하 감독이 운전하는 택시 안에서 6미리 디지털 캠에 포착된 생생한 삶의 편린들과 함께 영화 속에는 재연된 장면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연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캠코더 렌즈 앞에서의 모습이 정말 ‘사실 그 자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습니다. 택시 안에 카메라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간을 못하는 완전히 만취한 경우는 예외가 되겠지만, 자신이 하는 말와 표정이 기록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한 피사체가 된 인물들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와는 약간이나마 달리 반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에서도 카메라 앞에서의 인터뷰는 흔히 등장합니다. 작가는 기록된 영상물을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의도에 맞게 편집합니다.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이란 건 애초부터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끝도 한도 없는 부분입니다. <택시 블루스>는 완전한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 없는 작품이지만, 어떤 장면이 재연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란 얘깁니다.

그렇다면 한 편의 드라마로서 본 <택시 블루스>는 어떻습니까? <택시 블루스>는 픽션과 사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며 삶의 실체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 상황극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실체는 하이! 서울 페스티벌의 축하 폭죽이나 청계천 루미나리에의 밝은 조명 아래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그런 화려함은 어두운 부분을 가리고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 위한 정책적 기만에 가깝습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벌이는 환영의 축제일 뿐이죠. 그렇다고 <택시 블루스>가 특정한 이슈에 대한 시사 고발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화려한 불빛이 강할 수록 더 어두워질 수 밖에 없는 체제의 그림자 속을 피곤한 눈 비비며 들여다 보는 영화입니다. 엔딩 크리딧이 끝난 이후에 마치 관객과의 대화를 대신해 넣은 듯한 에필로그는 ‘왜 이런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냐’는 질문에 대한 감독의 답변을 대신합니다.1) 고양이 한 마리의 주검 앞에서 감독을 태운 택시와 카메라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사납금을 채우기 위해 결국 그 곁을 떠나야 하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들을 향한 감독의 마음은 결국 한 편의 장편 영화를 탄생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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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얘기지만 <택스 블루스>가 다큐멘터리냐 아니면 모큐멘터리냐는 장르적 정의는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설령 완전한 픽션이었다 할지라도 <택시 블루스>가 담고 있는 진정성과 작가적 성과에는 어떠한 상처도 낼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에도 작가의 살과 피로 쓴 작품이라는 표현이 있다면 아마도 이 작품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카메라는 감독의 택시 안에서 목격되는 승객들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열악한 생존의 현장을 함께 기록합니다. 영화 중반까지 관객과 함께 관찰자의 모습으로 남아 있던 감독은 어느새 대도시의 그늘 속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이제는 일부 헐리웃의 블럭버스터까지도 스스로 반성하기 시작한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의 폭압성은 그 변방 대도시 안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어느 독립영화 감독의 삶 마저도 저 한쪽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넣고 말았음을 고백합니다.

<택시 블루스>가 전달하는 정서적 충격은 각양각색의 군상들을 나열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감독 자신이 제 3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발가벗는 위치에까지 나섬으로써 완성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었든 설령 픽션이었든, 작가로서의 흔히 갖게 되는 자기 보호본능을 던져버림으로써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들의 정서적 방탄막을 함께 걷어내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영화의 소재에 접근하는 진정성은 단순한 선택이나 면밀한 관찰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관객들의 손을 잡고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택시 블루스>는 다시 한번 입증합니다. 6미리 캠코더로 찍어 극장 상영용으로 변환된 화면은 비록 어둡고 거칠지만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진심과 자기 고백은 <택시 블루스>가 단순히 관객들의 관음증에만 호소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삶의 질곡을 관통하며 관객들을 그 안으로 이끌고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택시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실체가 이토록 어두운 것들만 있는 것은 분명 아니겠지만 그것은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 취사선택입니다. 작가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제 3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태도도 좋은 작법이지만 <택시 블루스>와 같이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 역시 훌륭한 접근 방식입니다. 더군다나 실체의 어느 한 측면만 부각되고 알려져 있는 세상이라면 다른 쪽 측면도 누군가는 들여다보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취사선택의 과정에서 너무 극적인 장면들만 모아놓았다거나 심지어 재연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얼마간의 허구를 통해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모든 예술이 본래 지향하려던 바가 아니던가요. <택시 블루스>는 기승전결 구조와 같은 기본적인 구성이 완결성 있게 제시되는 영화는 아닙니다.2) 여건의 한계 탓도 있었겠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날 것 그대로의 힘이 희석되는 일 없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생각난다고들 하시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2003)에 빗대어 “라이프 액츄얼리”라고 씌여진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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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사회가 끝나고 최하동하 감독의 GV가 있을 것으로 알았는데 그런 거 하나 없이 썰렁하게 끝나더군요. 솔직히 그래, 이게 맞는 거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GV라고 해봐야 이거 진짜냐, 아까 그 장면 다큐냐 재연이냐 라는 질문만 받아야 했을테니 차라리 피하고 싶었을테고, 무엇보다 감독은 오직 영화를 통해서만 자기 할 이야기를 다 하고 또 그걸로 끝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케팅 차원에서, 그리고 일부 관객들이 원하는 바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이루어지는 것을 이해는 합니다만 모든 상영관에서 모든 상영이 끝날 때마다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나서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완성되어 관객 앞에 던져진 영화, 거기에 작가가 직접 나서서 이 얘기 저 얘기하고 돌아다니는 건 작품과 관객 사이를 훼방하는 미학적 불순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일부 젊은 감독들이 자기 작품 마케팅에 일조할 겸, 고생한 만큼 재미도 좀 볼 겸, 겸사겸사 돌아다니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저 같으면 가급적 GV가 없는 시간을 택해 작품과 저와의 대화를 최대한 방해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2) 장현수 감독이 택시 운전사들의 삶을 소재로 <라이방>(2001)을 만든 바 있는데, 일반적인 극영화의 작법과 모큐멘터리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앞으로 좋은 비교가 될 듯 합니다. 두 작품만 놓고 본다면 저는 당연히 <택시 블루스>의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영진공 신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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