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개념과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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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재단에서 발행하는 <Green Report>에 연재했던 만화입니다.
제가 워낙 환경의식이 없어놔서, 몇번 연재 못하고 스스로 포기했습니다만…;;;
여튼 늘 삐아제의 ‘보존개념’ 공부할 때마다 떠오르던 이야기를 한번 그려본 겁니다.


영진공 짱가

<택시 블루스>, 가려진 다른 한쪽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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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얘기하자면 <택시 블루스>는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최하동하 감독이 운전하는 택시 안에서 6미리 디지털 캠에 포착된 생생한 삶의 편린들과 함께 영화 속에는 재연된 장면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연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캠코더 렌즈 앞에서의 모습이 정말 ‘사실 그 자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습니다. 택시 안에 카메라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간을 못하는 완전히 만취한 경우는 예외가 되겠지만, 자신이 하는 말와 표정이 기록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한 피사체가 된 인물들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와는 약간이나마 달리 반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에서도 카메라 앞에서의 인터뷰는 흔히 등장합니다. 작가는 기록된 영상물을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의도에 맞게 편집합니다.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이란 건 애초부터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끝도 한도 없는 부분입니다. <택시 블루스>는 완전한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 없는 작품이지만, 어떤 장면이 재연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란 얘깁니다.

그렇다면 한 편의 드라마로서 본 <택시 블루스>는 어떻습니까? <택시 블루스>는 픽션과 사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며 삶의 실체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 상황극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실체는 하이! 서울 페스티벌의 축하 폭죽이나 청계천 루미나리에의 밝은 조명 아래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그런 화려함은 어두운 부분을 가리고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 위한 정책적 기만에 가깝습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벌이는 환영의 축제일 뿐이죠. 그렇다고 <택시 블루스>가 특정한 이슈에 대한 시사 고발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화려한 불빛이 강할 수록 더 어두워질 수 밖에 없는 체제의 그림자 속을 피곤한 눈 비비며 들여다 보는 영화입니다. 엔딩 크리딧이 끝난 이후에 마치 관객과의 대화를 대신해 넣은 듯한 에필로그는 ‘왜 이런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냐’는 질문에 대한 감독의 답변을 대신합니다.1) 고양이 한 마리의 주검 앞에서 감독을 태운 택시와 카메라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사납금을 채우기 위해 결국 그 곁을 떠나야 하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들을 향한 감독의 마음은 결국 한 편의 장편 영화를 탄생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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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얘기지만 <택스 블루스>가 다큐멘터리냐 아니면 모큐멘터리냐는 장르적 정의는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설령 완전한 픽션이었다 할지라도 <택시 블루스>가 담고 있는 진정성과 작가적 성과에는 어떠한 상처도 낼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에도 작가의 살과 피로 쓴 작품이라는 표현이 있다면 아마도 이 작품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카메라는 감독의 택시 안에서 목격되는 승객들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열악한 생존의 현장을 함께 기록합니다. 영화 중반까지 관객과 함께 관찰자의 모습으로 남아 있던 감독은 어느새 대도시의 그늘 속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이제는 일부 헐리웃의 블럭버스터까지도 스스로 반성하기 시작한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의 폭압성은 그 변방 대도시 안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어느 독립영화 감독의 삶 마저도 저 한쪽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넣고 말았음을 고백합니다.

<택시 블루스>가 전달하는 정서적 충격은 각양각색의 군상들을 나열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감독 자신이 제 3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발가벗는 위치에까지 나섬으로써 완성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었든 설령 픽션이었든, 작가로서의 흔히 갖게 되는 자기 보호본능을 던져버림으로써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들의 정서적 방탄막을 함께 걷어내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영화의 소재에 접근하는 진정성은 단순한 선택이나 면밀한 관찰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관객들의 손을 잡고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택시 블루스>는 다시 한번 입증합니다. 6미리 캠코더로 찍어 극장 상영용으로 변환된 화면은 비록 어둡고 거칠지만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진심과 자기 고백은 <택시 블루스>가 단순히 관객들의 관음증에만 호소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삶의 질곡을 관통하며 관객들을 그 안으로 이끌고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택시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실체가 이토록 어두운 것들만 있는 것은 분명 아니겠지만 그것은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 취사선택입니다. 작가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제 3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태도도 좋은 작법이지만 <택시 블루스>와 같이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 역시 훌륭한 접근 방식입니다. 더군다나 실체의 어느 한 측면만 부각되고 알려져 있는 세상이라면 다른 쪽 측면도 누군가는 들여다보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취사선택의 과정에서 너무 극적인 장면들만 모아놓았다거나 심지어 재연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얼마간의 허구를 통해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모든 예술이 본래 지향하려던 바가 아니던가요. <택시 블루스>는 기승전결 구조와 같은 기본적인 구성이 완결성 있게 제시되는 영화는 아닙니다.2) 여건의 한계 탓도 있었겠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날 것 그대로의 힘이 희석되는 일 없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생각난다고들 하시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2003)에 빗대어 “라이프 액츄얼리”라고 씌여진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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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사회가 끝나고 최하동하 감독의 GV가 있을 것으로 알았는데 그런 거 하나 없이 썰렁하게 끝나더군요. 솔직히 그래, 이게 맞는 거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GV라고 해봐야 이거 진짜냐, 아까 그 장면 다큐냐 재연이냐 라는 질문만 받아야 했을테니 차라리 피하고 싶었을테고, 무엇보다 감독은 오직 영화를 통해서만 자기 할 이야기를 다 하고 또 그걸로 끝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케팅 차원에서, 그리고 일부 관객들이 원하는 바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이루어지는 것을 이해는 합니다만 모든 상영관에서 모든 상영이 끝날 때마다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나서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완성되어 관객 앞에 던져진 영화, 거기에 작가가 직접 나서서 이 얘기 저 얘기하고 돌아다니는 건 작품과 관객 사이를 훼방하는 미학적 불순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일부 젊은 감독들이 자기 작품 마케팅에 일조할 겸, 고생한 만큼 재미도 좀 볼 겸, 겸사겸사 돌아다니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저 같으면 가급적 GV가 없는 시간을 택해 작품과 저와의 대화를 최대한 방해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2) 장현수 감독이 택시 운전사들의 삶을 소재로 <라이방>(2001)을 만든 바 있는데, 일반적인 극영화의 작법과 모큐멘터리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앞으로 좋은 비교가 될 듯 합니다. 두 작품만 놓고 본다면 저는 당연히 <택시 블루스>의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영진공 신어지

<뉴 하트>, 저마다 다른 조직 내 생존 전략


예전에는 영화보고 딴소리 하는 거 참 좋아했는데, 애 엄마가 되고 나니 영화는 꿈도 못 꾸고 TV밖에 못 봅니다. (애 엄마라는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안 밝히고 글을 썼으면 좋겠는데, 안 밝히면 설명이 안 되더라구요)그나마 집중해서 보는 것도 아니지만, TV는 영화처럼 집중해서 보아야 할 의무가 없으니 그나마 변명이 가능합니다. 몇 장면 못 봤다고, ‘그때 졸았냐?’소리를 듣지는 않겠죠?


요새 뉴하트 잘 보고 있습니다. 하얀거탑, 봉달희 등등과 함께 거론되며 비판도 많이 받지만, 전 좋습니다. 하얀거탑처럼 숨막히고 박진감 넘치는 권력투쟁의 호흡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서 저는 좋아요. 요새 보니 뉴하트에 연애라인 나온다고 싫어하시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은데, 저는 좋습니다. 달달하니 젊은 애들 연애질 하는 것도 보기 좋구요. (뭐 생각해 보니 제가 지성보다 어린데 젊은 애들 어쩌고는 좀 그렇습니다만. 암튼 뭐 심신이 피곤하다보니 총각처녀들은 나이에 상관 없이 다 보송보송하고 예뻐보입니다.) 드라마는 그저 이 정도가 무난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 오며 가며 봐도 되고, 신경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는 정도 말이지요. 역시 생활 패턴이 바뀌니 드라마 선호 취향도 바뀌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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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하트 인기도 많고 다들 재미있게 보시는 것 같은데,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뭔가 조직생활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 무조건 본인의 직장생활 경험이 투영됩니다. 그러면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떠오르지요. 드라마 구성이 웰메이드로 하얀거탑처럼 꽉 짜여져 있지 않아서 그렇지 (그리고 사실 꽉 짜여진거, 어린 애 있는 주부 입장에선 그닥 반갑지 않다는) 제가 병원생활의 디테일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지, 그냥 일반 직장생활로 치환시켜 본다면 뉴하트도 꽤 사실적입니다. 하얀거탑도 조직 내 생존의 필살기에 대한 것이었고, 뉴하트도 조직 내 생존의 필살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만 하얀거탑은 정치9단들과 높으신 그분들의 안력이라면, 뉴하트는 잔챙이 중간 간부와 비정규직과 신입사원들의 필살기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 다를 뿐인 것 같습니다. 다시 일반 직장생활로 치환시켜 본다면 하얀거탑이 경영층 높이신 분들의 보이지 않는 ‘탑’속의 권력 투쟁이었다면, 뉴하트는 사무실에서 껄렁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칙주의자인 척 하지만 하는 짓은 영업 수주 스타일 독불장군 최강국(조재현), 냉혹한 CEO 스타일 박재현(정동환), 제꾀에 제가 넘어가는 김정길(이기영), 사람 좋은 트러블 봉합자 이승재(성동일), 정치 하면 안되고 실력으로 승부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인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꼭 정치하려고 하는 신임 상무님 같은 민영규(정호근) 같은 분들도 공감이 가고, 그 밑에 펠로우 레지던트, 인턴 애들의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방식에도 다 정이 갑니다.

가장 안 쓰럽고, 보듬어 주고 싶은 캐릭터는 펠로우 닥터인 설래현(김준호)이에요. 비정규직 의사라고 할 수 있는 펠로우인 김준호는 비굴과 튀지 않기 납작 엎드리기가 몸에 밴 사람이지요. 하지만 절대 밉지 않아요. 마음 속에 정도 있는데 눈치 보고 살다보니 어쩌다 그렇게 된 겁니다. 엊그제 김준호가 손재주 좋아 인정 받는 이은성(지성)에게 “너 그래봐야 이 조직에서 성공못한다. 너 이 조직이 이방인(타대 출신)을 얼마나 싫어하는 지 알지?”라고 하는 걸 보고 “저 찌질한 자식…”하는 생각이 들기는 커녕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신입들 조차도 자기를 추월할까봐 마음도 냉정하지 못하면서 가끔씩 어설프게 군기잡던 안쓰러운 과장님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가장 멋있는 건 마취과 조민아(신동미) 선생이죠. 어디에 줄 서지 않고, 크게 튀는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조용한 실력과 스스로의 직업윤리에 따릅니다. 이 똑똑하고 멋진 여자가 어쩌다 바보같이 동료 의사 김태준(장현성)과 불륜관계에 빠져있는지는 모르지만, 흐름을 보니 오래 갈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지요. 여직원으로 회사 다니면서 윗 선배 중에 조민아 선생 같은 사람 있으면 회사 다닐 맛 나죠.

물론 조복길(정경순) 수간호사도 조민아처럼 멋진 캐릭터죠. 조민아 선생의 모든 장점에다가 남편과도 현명하게 잘 지내는 완벽한 여자랄까. 스스로는 약게 직장생활 못하는 스타일이죠. 약게 행동하는게 스스로 스타일에도 맞지 않구요.

배대로(박철민)도 좋은 캐릭터에요. 항상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즐겁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팀에 이런 중간 관리자 있으면 좋죠. 눈치도 적당히 있고, 밑에 애들도 사실은 챙기고, 정도 있고, 실력도 없는 건 아니고, 정도 없는 것도 아니고. 딱 중간이고 적당하게 묻어가는 스타일. 이런 사람이 진짜 조직에서 제일 오래가는 사람입니다. 조직이라는 생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기도 하구요.

소심한 레지던트 우인태(강지후)도 이해가 갑니다. 격무에 시달려서 지쳐 버린 거죠. 게다가 광희대학 출신에 특별한 단점도 없는 지라, 면피인생을 살아가는게 제일 좋을 거란 걸 압니다. 정말이지 나쁜 거 없는 생존전략이지요.

김미미(신다은)캐릭터도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제가 직장 3-4년차 때만 같아도 아마 김미미 같은 신입사원 보면 길길이 날 뛰었을 겁니다. 조복길이나 조민아 선생같은 선배들에게 ‘쟤 좀 가르쳐야 하지 않겠냐’하면서 말이지요. 근데 이젠 그저 귀엽습니다. 김미미는 남자들만 득시글 대는 조직에서 어떻게 자신의 여성성을 이용해야 좀 더 편하게 직장생활할 수 있는지를 아는 아이에요. 의외로 많은 여자들이 이런 본능을 잘 구사하지요. 극중 전개를 보니 이은성(지성)한테 꽂힌 모양이던데. 여성이란 걸 이용하는 게 아니라, 여성이라는 구덩이에 빠져 버릴 캐릭터입니다. 코도 깨지고, 머리도 깨져보면 절로 깨달을 겁니다. 실력이 아예 없는 애는 아니니까요.

마지막으로 살펴 볼 사람들은 똑같은 레지던트 1년차면서 서로 완전히 다른 조직내 생존 방식을 보여줍니다. 뭐 남녀를 가르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좀 거칠게 말하면 남혜석과 이은성 캐릭터는 조직에서 생존방식에 있어 남녀 차이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 요새 수능이든, 고등고시든 수석은 다 여자가 한다는게 대세가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만, 여기 남혜석도 그러하지요. 수능만점에 의대수석졸업, 인턴성적 수석이랍니다. 사실상 그런 타이틀이 아니었다면 남혜석의 조직에서의 존재감은 미미했을 거에요. 그런 타이틀이 있었기에 주목을 받을 수 있었고, 또 조직내 몇몇 세력으로 부터 좋은 제안도 받은 것일 거구요. 그런데, 결국 그것이 한계일 것입니다. ‘탁월’이란 물론 어떤 다른 조건들도 뛰어넘는 것이지만, 조직이란 결국 ‘조직’이니까요.


이은성은 정반대 점에 있습니다. 흉부외과가 미달이라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런데 어찌보면 이것 부터가 전략적입니다. 어디를 가야, 어느 조직을 가야 자신이 더 클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과 내에서, 병원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중요한건 그가 ‘문제아’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문제의 ‘핵’에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그저 남혜석처럼 성실하고 원칙적으로 일했다면 그는 그의 별명대로 영원히 ‘꼴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타고난 오지라퍼인 그는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면서 본인의 얼굴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일개 레지던트 일년차가 과 내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찌보면 그가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어요. 과장인 최강국 교수의 약점을 알고 있으면서, 또한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마음 속으로는 엄청난 신뢰를 얻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계산적인 방식으로든, 본능적인 방식으로든 말이에요.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환자를 향한 끊임없는 사랑을 드러내는 것은 종국에는 ‘별 볼일 없는 지방의대/비본교 출신’인 그를 ‘행동하는 건 조직에서 고문관이지만 실력은 끝내주는’ 최강국과 동일시키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은성의 일련의 행동들을 살펴보면 공장용어로 엄청 “쇼잉(showing)”을 잘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환자애 대한 애환심(?)을 수많은 사람에게 과시하며, 정의의 사도인 듯 행동하지요. 그 때문에 다른 과 교수들도 다 이은성을 알게 되고 일부는 호감도 갖게 되지요.
또 이런 이은성의 행보들은 사실상 공부는 성실히 하는 것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이은성의 실력을 향상시키게도 할 것입니다. 어려운 수술, 남이 안하는 수술에 문제를 일으켜가면서 까지 오지랍 넓게 참여함으로써 (남혜석이 문제 안 일으키고 시험에 나올 문제들을 소상하게 암기할 동안) 필드 경험이 쌓일 것이고, 타과 교수인 박광정한테 잘 보여서 사진 판독술의 실재와 핵심을 쌓고 있는 중이거든요. 인맥도 넓히고, 경험도 쌓고, 얼굴 도장도 찍고… 아. 정말 최고입니다. 배웠어야 해요. 직장생활은 저렇게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저도 남혜석 같이만 직장생활을 해온 인생입니다. (물론 남혜석 처럼 늘 수석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등바등 해봐야 B+ 인생이면서 말이지요) 얼굴 도장을 찍기를 하나, 결정적일 때 자기 자신을 내 세울 줄을 아나, 조직에 존재감 심을 줄을 아나, 그저 마음 속으로 ‘내가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 알아주겠지’하고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있었지요. 모르긴 몰라도, 차트 정리하고, 꼼꼼히 데이터 분석하고 하는 등의 누군가는 해야하지만, 해도 티는 안나는 그 성실한 작업들을 남혜석은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글쎄요. 조직 내 자신의 position을 다지는데 대한 효과는 회의 적이에요. 남혜석이 이후로도 수석+최초 등의 행진을 계속 해 나간다면 다를 수도 있지만, 남혜석이 그런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리 모두가 수석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남혜석은 잘 되어야 하얀거탑의 ‘최도영’같은 신세가 될 것입니다.


‘조직의 생리’를 모르는 여성 직장인들 대부분이 남혜석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갑갑해요. (제가 대표적인 인물이었구요) 남자들은 아무리 눈치가 없어보여도 조직 내 ‘생존’에 본능도 발달해 있고, 필살기도 있는 편입니다. 남자들이 대한민국 조직의 축소+엑기스판인 군대에 다녀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여자들이 ‘공부 열심히 하면 인정 받는다’는 신화에 매몰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요. 암튼 저는 뉴하트 보면서 그럽니다. ‘이은성 보고 배우자!’

이은성이 그냥 순수한 열정이라구요?
에이, 너무 순진하세요.


TV보는 아줌마
영진공   라이

<파프리카>, 현실 세계로 밀려들어온 인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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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의 세계는 무한하다고 말들 하지만 프로젝트 기획서를 내밀면 늘 ‘왜 애니메이션이지?’라는 대답만 돌아왔다”고 곤 사토시(今敏) 감독이 말했더군요.1) 저 역시 새로운 애니메이션 작품을 접할 때 마다 ‘이 작품은 왜 애니메이션이어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을 꺼내들곤 합니다. CG가 아무리 발달했어도 여전히 실사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에서는 표현하기 힘든 영역이 분명히 있고, 그런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방식이 바로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그 버릇을 여태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을 보면 ‘이 정도라면 실사로 했어도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2) 실사로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실사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닐텐데, 아무래도 실사 영화에 비해 애니메이션 장르 자체를 한 수 낮게 취급하는 고약한 선입견이 있는 듯 합니다.

츠츠이 야스타카 원작의 <파프리카>는 ‘곤 사토시의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법한 작품들 뿐’이라는 편견에 대응하는 역작이라 할만 합니다. 어쩌면 기획자들로부터 ‘왜 애니메이션이어야 하지?’라는 질문 받는 일이 지긋지긋했던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파프리카>는 실사 영화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SF 판타지의 본때를 보여줍니다. 이 정도라면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1988)나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5)와 <이노센스>(2004)에도 필적할 수 있는 기록적인 성취라 하겠습니다. 특수 장치를 이용해 타인의 꿈 또는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은 타셈 싱 감독의 실사 영화 <더 셀>(2000)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더 셀>이 <양들의 침묵>(1991)과 같은 범죄 수사극으로서의 장르적 한계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파프리카>는 SF 범죄 스릴러로 출발하여 인간의 꿈, 그리고 꿈과 등가 관계에 있는 과대망상이나 신화, 그리고 영화와 인터넷 세상과 같은 매체들이 현실 세계와 맞물리고 있는 형이상학적 경계선을 적극적으로 탐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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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을 통해 ‘애니메이션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보여주겠다는 작가의 자의식은 <파프리카>의 도입부를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토나카와 형사의 꿈 장면으로 시작하게 했습니다.3) 이어서 화려한 주제 음악이 함께 하는 타이틀롤을 연결시키니 여느 액션 블럭버스터의 도입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확실히 <파프리카>의 외형은 국제적인 흥행을 고려한 장르의 양식을 잘 따라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도난 당한 DC-미니의 행방을 추적하며 범인을 밝혀내는 범죄 스릴러로서의 내러티브를 기본으로 기존의 유명 애니메이션들에서 본 듯한 초현실적인 장면들이 기시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미리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특히 영화 팬들과 인터넷 사용자들을 위한 주제의 확장과 현대적 재해석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기에 관객의 뒷통수를 어루만져주는 뜻밖의 멜러 요소까지 가미되니 한 편의 성인용 애니메이션으로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하겠습니다.

<파프리카>라는 제목은 작품 속 중심 캐릭터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피망과 비슷한 고추 품종의 향신료이기도 하죠. 인간 욕망과 좌절의 발현이기도 한 꿈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가장 인간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파프리카는 아츠코가 만들어낸 꿈 속의 자아이기도 하지만 파프리카가 없는 아츠코란 역시 “뭔가 부족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대로 나쁘지는 않지만 양념 한 가지가 빠진 심심한 요리 한 접시와 같다고나 할까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허물어뜨리면서도 양 측면을 모두 끌어안고자 하는 <파프리카>의 결말은 가장 영화적인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삶의 길을 보여주는 데에 성공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서브 스토리를 위한 조연이면서도 중심 내러티브와 맞물려 중요한 역할을 해준 토나카와 형사가 극장 매표구에서 “어른 한 장”이라며 수미쌍관을 이루는 마지막 장면까지, <파프리카>는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넘어 완전 영화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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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름2.0 365호 p.73 “애니메이션이 다루지 않은 것을 하고 싶다”

2) 2001년작 <천년여우>(千年女優)가 특히 그랬습니다. 시대를 넘나드는 장면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기만 한다면 실제 배우들이 연기를 했더라도 별다른 무리 없이 만들 수 있었을 법한 작품이었습니다.

3)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며 맞물리는 꿈 속 세계야말로 애니메이션의 효율성을 가장 쉽게 보여줄 수 있는 장면 아니겠습니까. 토나카와 형사의 꿈 속에 등장해 신경증 치료를 돕는 10대 소녀 파프리카가 사실은 DC-미니를 통해 창조된 정신과 박사 아츠코의 또 다른 자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까지가 <파프리카>의 인트로입니다.


영진공 신어지

Apple Inc.와 포드주의

2007년 7월 Apple Inc.는 iPhone을 내어 놓으면서 정직원과 1년 이상된 파트타임 직원에게 이를 선물했다. 근대에 들어서 한 회사의 ‘생산물’이 그것의 생산에 개입한 노동자가 아무런 추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소유’하게되는, 조금 혁신적인 사건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는 처음이 아니다. Apple Inc.는 2005년도에도 iPod shuffle을 전 직원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고려해보면 실상은 이와 다르다. 사실 iPhone이든 iPod shuffle이든 분명히 각인된 정보로는 디자인은 캘리포니아의 Apple Inc.에서, 제조 자체는 중국에서 이루어졌고, 중국의 하청업체 노동자는 iPhone을 받지 못하며, 물론 iPhone의 부품인 칩셋을 제공한 소니와 삼성 등등의 기업 노동자도 iPhone을 받을 수 없다.

더군다나 경영관련 서적 좀 넘겨본 사람들은 1만7천여명이 넘는 Apple Inc. 직원 전원이 iPhone을 갖게 되어 이로 인해 생겨나는 부가적인 요소들에 대해 여러 항목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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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시대다. 농작물을 생산하는 농토 단위면적당 생산량의 경제성이 양모를 생산하는 목초지 단위면적당 생산량의 경제성보다 떨어지면서, 농노는 ‘예속’관계에 있으면서 생산수단이던 토지를 버리고, ‘살기 위해’ 도시를 찾아 공장으로 들어갔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 매우 잘 묘사해둔 ‘분업’은 결국 이렇게 공장을 찾아 들어간 노동자들이 자기 힘으로 만든 ‘생산품’에서조차 ‘소외’되게 만든다. 대장장이가 철을 녹여 못을 만들 줄 알아 이를 소유하고 거래하던 시대를 지나 대장장이 여럿이서 쇠를 녹이고, 못의 머리를 만들고, 몸통을 만들고, 이를 다시 결합하는 작업을 나누어서 하는 시대도 지나 아예 이 생산품을 소유는 커녕 대리로 ‘돈’을 받아가며 만들어주는 시대가 온 것이다.

생산 수단으로부터 ‘타의로 인해 자유롭게 된’ 노동자, 자기 노동으로 생산품을 만들어도 그게 ‘내 것’이 안 되는 노동자.

나는 Apple Inc.의 사건을 그 괴리감의 중간 쯤 놓인 혁신적인 사건이라 보는 거다.
생산에 관련된 모든 노동자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제조사’에 있으면서 ‘제조품’을 가질 수 있고, 잉여 생산품을 ‘내다 파는’ 그런 원시적인 개념으로 말이다.

Fordism이라는 것이 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포드주의라 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 경제 철학 중 하나인 이 사상은 단어에서 알 수 있듯, Ford Motor Company의 창설자인 Ford가 생각해 낸 것이다.

세계 경제 공황의 파급으로 인해 Ford Motor Company는 생산된 차량의 재고만 쌓이고 팔리질 않았다. 이로 인해 Ford가 내어 놓은 정책은 노동자의 임금을 인상하는 방안이었다. 경기가 경색되어 소비자가 지갑을 열지 않으면 결국 생산품이 팔리지 않아 생산도 줄어들고 전체 부가 감소하는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결심한 정책이었다.

물론 모든 노동자가 임금이 오른다고 Ford 자동차를 사는 건 아니다. 하지만 Ford Motor Company의 노동자는 오른 임금으로 인해 어느 정도 소비의 여유가 가능했고, 이로 인해 주변 경기의 경색도 완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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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재미난 나라이다. 대학생들 대다수가 자신은 ‘진취적’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가진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하고, 그렇기 때문에 경쟁사회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는 듯 하다. 옆 나라 일본과 비교해 보면 그런 태도는 상이하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일본은 결국 근래에 인력이 모자라서, 대학 4학년생들은 이미 취업이 대부분 결정되었고 취업설명회도 3학년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취업 희망 직장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회사가 아니라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미는’ 온화한 직장 분위기를 선호한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복지부동으로 편안히 다닐 수 있는 직장을 의미한다. – 일본에서는 법령으로 정년에 대해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얘기하는 복지 부동은 우리 네의 공무원 인식과 비슷한 이야기로 인식하면 된다 –

차라리 일본 청년의 다수가 더 자기 정체성에 충실하다. 대한민국 청년 다수는 고용 불안에 대해 하나의 정체성이 두 가지 대응을 한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경쟁하면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호하는 직장은 철밥통인 공무원’이 되어버리는 웃긴 상황이 오는 거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편의점 알바까지도 사장님 마인드로 경영에 충실하다.

대한민국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 평균은 일본보다 꽤 높다. 이는 정년 보장이 되지 않는 우리나라 현행 법령과 보장이 되는 일본의 차이로 인해 노조가 얻어낸 결과다. 대기업 취업이 희망인 한 경영대 학생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온다.

“임금이 높은 이유는 귀족 노조 때문이죠”

이게 바로 우리가 미처 자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현실의 괴리이며, 노동자 따위 안중에도 없게 만드는 언론과 사회 풍토가 만들어내는 비극이다.

‘돈’이란 건 돌고 돌아야 전체의 부가 증가한다.

억울하게 ‘귀족 노조’라 불리는 노동자도 임금을 받으며 이 임금에서 국가에서 요구하는 세금으로 ‘원천징수’를 당한다. 차라리 온갖 비리와 탈세로 얼룩진 대한민국 대기업의 타락한 모습보다 깨끗하다.

물론 노조도 이권으로 인해 타락할 수 있으며, 노동자도 연말정산에 종교단체에 기부하지도 않은 돈을 기부했다며 익세를 한다.

어쩌면 이마저도 사장님 마인드에 충실한 노동자들이 넘치는 나라여서인지도 모른다.
타인이 나보다 소득이 많아서 행복한 세상이라면 문제가 있다.
그러나 타인이 나보다 소득이 많아서 더 많은 기회와 권력을 가지게 되는 사회라면 그건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다.


영진공 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