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토리노 (Gran Torino),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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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번 미국 아카데미 측의 최대 실수는, <그랜 토리노>(2009)를 주요부문에 단 한 개의 후보도 올리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2009)의 작품상 수상에 이의 없지만 <그랜 토리노>를 제치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9)를 후보에 올린 건 명백한 실수이며 숀 펜(<밀크>(2009))의 남우주연상 수상에 박수를 보내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탈락시키고 브래드 피트에게 후보자격을 준 건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랜 토리노>와 이 영화에서 영감님이 보여준 연기를 ‘찬양’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코왈스키가 타오를 만났을 때

<그랜 토리노>에서 영감님이 맡은 역할은 한국전 참전 경험이 있는 월트 코왈스키로, 해리 칼라한(<더티 해리>(1971))이 나이를 먹으면 됐음직한 인물이다. 첫눈에 봐도 냉혹한 보수주의자의 면모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예컨대, 손녀의 배꼽티가 맘에 들지 않고 아들이 일본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는 것이 불만이며 이웃이 동남아시아 출신 이민족으로 채워지는 것이 못마땅하다. 한마디로 이것이 미국의 ‘변화’된 현재라서 화가 나는 것. 그래서 코왈스키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신의 신념만은 지키고 싶은 심정이다. 50년 이상 근무했던 포드社의 1972년형 그랜 토리노를 오랫동안 꼭꼭 숨겨둔 모습은 과거의 미국적 가치를 지키려는 코왈스키의 상징적인 행동에 다름 아니다.

이스트우드는 <그랜 토리노>의 연출 목적에 대해 “코왈스키를 통해 미국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원래 이 영화의 배경은 시나리오 상에서 미네아폴리스였다. 이를 이스트우드가 죽어가는 자동차 산업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디트로이트로 바꿨다. “이는 수십 년 전부터 계속된 사회적 이슈였다. 그래서 영화의 내용과 잘 어울렸다. 경제는 불황을 겪고 있고 실업률은 매우 높으며 갱들은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만큼 범죄와 폭력은 일상이다. 그 세계에 씁쓸한 참전 군인이자 포드社 노동자 출신인 코왈스키가 살고 있다는 설정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미국의 현재에 변화를 가져온 범죄와 폭력은 코왈스키에게는 대척점에 서있는 가치다. 그것들이 자꾸 코왈스키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올수록 역설적으로 그는 또 다른 변화, 즉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 변화가 코왈스키에게 좋았던 시간으로 기억되는 과거로의 퇴행이 아닌 말 그대로 새로운 미래를 향한 전진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그랜 토리노>는 변화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코왈스키가 변화를 위해 지독한 편견을 버리고 대립각을 세우던 이웃과 융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런데 그 대상이 흥미롭다. 코왈스키가 그렇게 혐오하는 흐멍족 이민자 소년 타오(비 뱅)다. 그가 다른 이민자와 다르다면 ‘소속감’이 부재하다는 점인데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채 부유하는 흐멍족 소년에게서 코왈스키는 올바른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켜야 할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다. 이는 코왈스키의 보수주의자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그가 이민자에게 거부감을 갖는 건 백인과는 다른 유색인종이라서가 아니라 도대체가 미국시민으로 융합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의 원, 즉 커뮤니티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코왈스키의 입장이다. 안 그래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영화에서 보여준 세계는 순환하는 원과 다를 바 없었다. <체인질링>(2008)에서 보여준 1928년 LA 공권력의 거대한 부패는 2009년 현재에도 재현된 역사의 순환이었으며 <아버지의 깃발>(2007)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7)는 미군의 시각과 일본군의 시각이 개별적 존재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화로 짝패를 이룬 하나의 세계였다. <그랜 토리노> 역시 다르지 않다. ‘구세대’ 코왈스키와 ‘신세대’ 타오가 미국의 새 역사를 모색하기 위해 손을 잡는 말 그대로 순환구조로 이뤄져있다.

코왈스키에게 현재의 그랜 토리노는 주인을 찾지 못해 운행을 중단한 미국(의 가치)이다. 그가 호시탐탐 그랜 토리노를 노리는(?) 친자식들에게, 그리고 이웃의 젊은 갱들에게 차를 넘기지 않는 건, 그러니까 정신 나간 고집쟁이 늙은이 같은 행동을 고수하는 건 그들이 미래의 미국을 이끌어나갈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는 전시물에 불과한 그랜 토리노를 타오에게 유산으로 남기는 건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백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온갖 인종이 들끓는 미국의 미래는 젊은 유색인종들에게 달렸다 해도 틀리지 않다. 하여 나의 조국 미국을 지켜야겠다는 코왈스키의 보수적 신념은 외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아닌 교화와 융화를 통한 발전적 모색으로 변모한다. 코왈스키에게 열쇠를 물려받은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는 마지막 장면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미국이라는 세계의 마침표이자 출발점인 셈이다. (장례식으로 시작해 디트로이트 중심가 배경으로 영화를 마치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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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가 프랭키를 만났을 때

이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의미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는 영감님의 평소 철학과 정확히 조응한다. 그에게 ‘고전주의자‘라는 명칭이 붙은 건 기교와 감각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이야기로 영화적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에서 기인한 바 크다. 그의 신작이 항상 전작과 비교해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10년 전, 20년 전의 작품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눈에 띄게 뚜렷해진다.

<그랜 토리노>는 코왈스키의 거친 면모 때문에 한때 <더티 해리> 시리즈의 최종판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영화를 보건데 그렇게 틀린 표현은 아니다. 다만 1970년대를 주름 잡았던 <더티 해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2009년 버전 해리 칼라한인 월트 코왈스키는 성난 청년에서 사려 깊은 노인으로 성장한 이른바 ‘어른의 초상’이다. <그랜 토리노>의 까칠한 코왈스키가 보여주는 즉각적이고 마초적인 행동은 그의 전부라고 하기엔 무언가 사연을 감춘 듯한 인상이 짙다. 해리 칼라한이었다면 그런 행동은 오로지 쾌락을 위한 것이지만 코왈스키에게는 이제 반성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코왈스키가 한국전 참전 당시 행했던 정당하지 못한 일로 심각한 내적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50여 년간 마음에 심어두었던 반성의 씨앗이 책임감이라는 신념을 통해 숭고한 희생의 열매를 맺으니 이야 말로 어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성찰이라고 할까. 한마디로, 코왈스키는 해리 칼라한이 나이를 먹어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의 프랭키로 변모한 인물이다. 권투도장 관장 프랭키는 지금껏 여자는 단원으로 받은 적 없는 지독한 보수주의자다. 하지만 매기(힐러리 스웽크)의 가슴 아픈 가족사에 자신의 사연이 겹치며 책임감을 느껴 그녀와 팀을 이룬다는 점에서 코왈스키와 흡사한 인물인 것이다.

<그랜 토리노>를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비교하면 이 차이는 크지 않지만 <더티 해리>와 비교해 크게 느껴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만큼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서서히 진화해왔다. 알려진 바대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로 감독 데뷔한 그는 20년 만인 1992년 <용서받지 못한 자>로 작가의 위치에 올랐다. 이와 관련, 인상적인 인터뷰 내용이 있다. “장르영화들을 하면서도 특정한 것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낀 시간이 있었다. 나는 장르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다른 지점마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갔다.”

이는 이스트우드의 영화 뿐 아니라 그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영감님의 영화처럼 이스트우드의 캐릭터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월이라는 지혜가 쌓여갈수록 서서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장황한 설명 필요 없이, <그랜 토리노>의 코왈스키에게는 평상시 욕을 섞어가며 허물없이 지내는 이발소 친구 마틴(존 캐롤 린치)이 등장하는데 그는 <더티 해리>에서 조디악 킬러를 연기한 인물이기도 하다.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에서도 주요한 용의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형사와 범인의 관계였던 코왈스키와 마틴이 <그랜 토리노>를 통해 죽마고우로 등장한다는 설정은 노인이 된 이들이 지금 서로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려 깊은 위치에 섰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트우드 영화의 백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월이 힘이 느껴진다는 것. <더티 해리>가 폭주하는 청년의 영화(캐릭터)였다면 <그랜 토리노>는 한발자국 물러설 줄 아는 어른의 영화(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완성형의 영화라고 말하기 꺼려지는 것은 세월이 쌓여갈수록 늘어나는 나이테의 지혜가 영감님의 영화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930년생인 그의 나이 올해로 79세. 배우로써는 은퇴일지도 모를 <그랜 토리노>지만 그는 현재 넬슨 만델라를 다룬 차기작 <휴먼 팩터>의 촬영에 들어갔다. “은퇴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난 그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즐겁습니다. 영화를 그만 두고자 했다면 벌써 그랬겠죠. 어머니는 2년 전 97살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만약에 내가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면 여전히 20년 가까운 창작력이 남아 있겠죠.” <그랜 토리노>는 영화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세계지만 여전히 영감님의 세계는 ‘어떤’ 완성을 향해 진화하는 중이다. <그랜 토리노>를 지금 막 보고서도 여전히 그의 차기작이 기대되는 이유다.

* 본문에 인용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인터뷰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 온라인판에 등록된 글의 일부로, <듀나의 영화게시판>에 올라온 srv님의 번역문을 부분,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영진공 나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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