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키트

2005년 5월 31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자고 갈래요?

늦은 밤 데이트를 마치고 집앞에 데려다 준 남자를 향해 “라면먹고 갈래?”가 그렇게 해보고 싶지만 6개월 백수기간의 타격으로 차곡 차곡 모아둔 푼돈들은 죄 날린 처지. 향후 3년 내에 독립이란건 요원해졌다. 일본으로 미국으로 다녀온 친구년들이 호기심에 사왔다가 도저히 간수를 못하고 나에게 양도한 콘돔이니 딜도니 하는 애들은, 덜컥 받아오긴 했지만 열쇠도 없는 서랍속에 불안하게 방치되어 있고. 그 사실이 문득 떠오르는 밤이면 잠도 못자게 불안하다. 아 이 딱한 청춘이여.
처지가 이러하니 혼자살기 10년차인 친구 y양이 어떤 면에선 부럽기도 하다.

내 친구 y양은 항상 침대 옆 서랍 안쪽에 조그만 주머니를 비치해 놓고 산다.
안에 콘돔 몇개, 피임용 질좌제 등이 들어 있는 이름하야 섹스키트. 최근에 선물 받은 딜도도 당당히 들어있다.
y양은 주로 집에서 섹스를 즐기기 때문에 침대 옆 섹스키트는 그녀의 필수품이 되었고 빨간 벨벳으로 되어있는 주머니는 끈을 꽉 땡겨 닫아놓으면 복주머니마냥 졸라 귀엽기까지 하다.
y양이 섹스키트를 비치해 놓은 것은 2002년, 그때 섹스용품을 한 자리에 정리해 놓을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투명 플라스틱으로 된 상자에 콘돔, 질약, 발기지속제 칙칙이, 바닐라 오일 같은 것들을 넣어 책꽂이 높은 곳에 올려두었다.
그때부터 y양은 남자들이 집에 와서 옷을 벗어 재끼고 덤벼대는 순간, 잽싸게 책꽂이에 달려가 섹스키트를 꺼내들었다고 한다. 어리둥절해 하는 그들에게 키트에서 꺼낸 귀여운 콘돔을 씌여주고는 자자 이제 본게임 한판? 하며 생글거리면 다들 어이는 없어 했지만 그래도 곧 적응들을 했다.
하지만 카오스 이론처럼 y양의 섹스 키트를 본 남자들은 모두 그냥 섹스 파트너가 되었을 뿐, 어느 하나 연인이 되기는 거부했다.
책꽂이로 달려가기 귀찮았거나 아님 콘돔이 떨어져서 “오빠가 약국가서 사와”하며 명령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들을 이어갔지만 첫 섹스에서 키트를 본 남자들은 이왕 선 자지 싸고나 보자는 식으로 섹스를 했지 y양의 준비성을 칭찬해 줄 기색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식당에 가서 맛있게 식사를 한 후 “아까 네 생각이 나서 이걸 사왔어”하며 귤 두어 개를 꺼내는 여자는 사랑할지언정, 결혼 전의 피임과 건강을 위해 방 한 구석에서 콘돔을 꺼내 드는 여자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 남자들이다.
“네 몸이 허약한 것 같아서”하며 곰탕을 끓여주며 속으로는 정력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여자는 귀엽다고 봐주면서 잘 안꼴리는 그대를 위해 칙칙이를 뿌려주는 여자는 징그러워 하더라 이말이다.

섹스를 할줄 아는 여자들은 지갑 한 쪽에 콘돔 한두개를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남자의 센스에 감동한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배려이고, 그 남자가 어른스럽게 섹스를 할줄 알고 책임감 있는 남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외국 영화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서랍을 열고 콘돔을 꺼내들며 하고 있던 입맞춤을 멈추지 않고 콘돔을 끼곤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미혼인 여자가 콘돔을 꺼내들면 “역시 자긴 준비성이 투철해”라기 보다는 ‘그 동안 이놈 저놈 다 대줬나보군’하며 어쩔 수 없이 콘돔을 끼곤 한다.

나는 경구 피임약과 콘돔을 사용하는데 y양은 콘돔 착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요즘에는 피임용 질좌제를 사용한다고 한다. 직접 해보진 않았지만 화장실에 비치해 두고 섹스 전에 간단히 씻으며 삽입을 하기에 비교적 편리한 방법의 피임법인듯 하다.
질좌제가 체내에서 녹은 상태로 들어오는 정자를 함께 녹이는 역할을 하는데, 콘돔도 꺼내들지 않고 질외사정도 요구하지 않는 y양에게 남자들은 아주 자연스럽고 뻔뻔하게 삽입을 한 상태로 묻는다.
“혹시 임신주기는 아니겠지?”
위에서 헉헉대는 그들이 아주 즐거운 표정 뒤에 이 질문을 할 때마다 y양은 따분하게 한마디 한다.
“밖에다 싸”
그럼 멈칫했던 몸짓이 다시 리드미컬하게 바뀌고 y양은 “임신주기는 아니겠지?”라는 무지한 말에 이미 감을 잃어버려 다시 몰입이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런 남자들은 사정 후에 또 나불거린다고 한다.
“자기는 액이 너무 많아서 참기 힘들었어”
y양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속으로 뇌까린다. 니가 들으면 또 기절을 하겠지만 얘야, 그건 액이 아니라 질좌제란다.

콘돔 안끼는 남자와는 자주지도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건만, y양은 요즘 고기와 풀을 가릴 상황이 아니라며 가끔 이렇게 말도 안되는 내숭을 떨어가며 섹스를 한다고 토로했다. 술잔을 부딛히며 대화를 나눌땐 그렇게 센스있던 남자들도 막상 침대 위에선 콘돔을 챙기는 센스와는 무관했던 거다.
“만약 남자가 지갑 안에서 자랑스럽게 콘돔을 꺼내들고 싱긋 웃는다면, 앨리스야 난 조루라도 참을 수 있어.”
섹스 키트를 정리하는 y양의 표정이 씁쓸하다.

영진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산하 성진흥연구소
앨리스(blur7908@naver.com)

“섹스 키트”의 14개의 생각

  1.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라면 반대 상황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첫 섹스에서 남자가 자기 가방이나 지갑에서 콘돔을 꺼내면 제비로 간주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2. 콘돔 자판기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살 때 쑥스러워서 말이죠… 글 잘 읽었습니다. 구구절절 동감해요

  3. “임신주기는 아니겠지?”
    이말이 분위기를 깨는건 사실이지만, 여자를 임신시키지않는다는 하나의 배려로 들어야하지 않을까요?

    섹스는 즉흥적인 로맨스에 의한 것이지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색녀의 이미지로 비춰지는건 어쩔수 없는 ;;)

  4. 익명님/ 삽입 전이라면 몰라도 이미 삽입한 상태에서 임신주기가 아니냐고 묻는건 여자를 임신시키지 않겠다는 배려가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리고 피임의 ‘준비’ 없는 섹스가 가져올 위험성은 잘 알고 계시겠죠? 색녀의 이미지로 비춰져도 어쩔 수 없다라… 윗글을 다시 잘 읽어보세요.

  5. 그 배려를 어째 삽입후 운동까지 하다가 “문득” 하냔 말입니다?

  6. 지하철 화장실 앞 자판기에 콘돔을 파는지는 자세히 안봐서 가물가물하네요 그래도 요즘은 꼭 약국이 아니라도 올리브영같은데가면 화장품이나 음료수같은것들하고 같이 팔더라구요 ㅎㅎ

  7. 핑백: Ssemi's Episode
  8. 참 우습지? 언제부터인가 이런 글들 밑에는 늘 잘 읽었슴다 같은 부류의 답글이 달려야만 한다는게. 잘들 읽었지? 가슴이 알싸해지지 않아? 난 존나 짜증나고 대체 이글을 쓴 애가 뭘하는 인간인지 궁금하진 않지만 누가 데리고 살지가 걱정되더라.너같은 새끼한테 안갈테니 관심꺼라 하겠지? 하지만 말이다. 이건 영 아닌거다. 괜히 페미니즘에 동화된 척 나름대로 쿨한척 하지마라. 이렇게 써대는 글쓴이보다 멋집니다. 하면서 뒤로 딴 생각들 하는 니들이 더 역겹다.사랑이 어쩌구는 안으마. 내 연인이 이런 글을 쓴다면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모르는 애기에 거품한번 물어밨다. 애도 누구의 연인일거라고? 내가 보기엔 아마 없을것 같은데?

  9. 돌꽃/ 남의 손으로 치는 오나니 는 자위게 아니게 ~*
    니가 놈인지 년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줍잔은 박수가 사람 잡는다는 거란 말이다.
    니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그넘이 요즘 뜨고 있는 인보를 꺼내드는 순간 너의 반응이 지금과 같겠냐?
    그차이를 말하는 거란 말이다.
    여성에 대한 이해? 내가 보기엔 너야말로 여성을 낮게 보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니가 여성이라면 빠굴, 자지,보지 이런 얘기하며 캬캬캬 웃는 정도를 여권신장으로 알고있는 무뇌순 이란 얘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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