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속의 애니메이션 삽입곡

* 순서는 무순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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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두의 권 영화판 : Heart of Madness


[북두의 권] 영화판의 삽입곡. 영상과 음악과 연출이 삼위일체를 이뤘나니, 완벽하도다!

2.  요술공주 밍키 : 꿈속의 왈츠

요술공주 밍키 OVA, [꿈 속의 왈츠]에서 가수 대신 대타를 뛰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밍키의 모습. 역시 공주는 뭘 해도 잘 어울린다니까!

3.  Transformer the movie : You got the torch

You got the torch!

You got the power!

달려라, 옵티머스 프라임! 싸워라 옵티머스 프라임!

아는 사람은 아는 걸작 애니메이션, [트랜스포머 더 무비]의 옵티머스 프라임 등장 씬.

4.  Megazone23 : 背中ごしにセンチメンタル

다들 [마크로스]의 민메이에게 열광하던 시절, 나는 이상하게도 [메가존23]의 이브에게서 더 강렬한 매력을 느꼈다. 아마도 그녀의 노래에선 은은한 뽕짝 삘이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5. 변덕쟁이 오렌지로드 : ?

청춘을 불살랐던 애니메이션, [변덕쟁이 오렌지로드]. 아유카와 마도카의 콘서트 장면은 놓칠 수 없는 청춘의 한조각이랄까.

청춘을 불살랐던 애니메이션, [변덕쟁이 오렌지로드]. 히로인 마도카의 콘서트 장면은 놓칠 수 없는 청춘의 한 조각일지라!

영진공 DJ Han

밥 포시 감독의 <캬바레>를 보며 흥분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번 씨네바캉스에선 ‘밥 포세’라고 소개가 되던데, 전 이 감독은 영화는 단 한 편도 본 게 없으면서 이름은 ‘밥 포시’로 표기하는 게 훨씬 익숙하단 말이죠. <카바레>는 물론이고 <올 댓 재즈>도 바로 이 감독의 영화. 그러나 국내에선 비디오도 DVD도 구하기가 힘든 영화였어요. 요즘은, DVD는 모르겠네요.


이 영화는 1973년 아카데미 시상식 당시 천하의 <대부>를 깔아뭉갠 영화로 악명이 높습니다. 미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무시무시한 걸작 <대부>는 당시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지만 3개 부문만을 타갔지요. 그러나 <대부>가 타간 상들은 꽤나 알짜배기 상이었기 때문에 억울해 할 이유가 거의 없습니다. 작품상, 각색상, 남우주연상이었으니까요. 애초에 <대부>에는 ‘주연’이라 할 만한 여배우도 없었고, 사실 뮤지컬 영화, 그것도 아주 잘 만든 뮤지컬 영화가 떡 버티고 서 있는데 음악상 같은 걸 주기도 그렇잖아요? 아카데미는 무명감독 코폴라는 박대했지만 분명 <대부>에게 작품상을 안겨주었고, 주연인 말론 브랜도에게도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어요. 밥 포세가 자격없이 감독상을 타간 것도 아니죠. 게다가 이 해엔 죠셉 맨케비츠(<탐정>)와 존 부어맨(<딜리버런스>)도 후보에 올랐습니다. <후보자>를 연출한 마이클 리치는 후보에 오르지도 못했고 고작 각본상 하나 후보에 올라 이것만 타갔습니다. 한마디로 <대부>와 함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영화들은 하나같이 기라성 같은 영화들이었습니다. 코폴라가 억울해할 바가 전혀 못 돼요.


그 해 아카데미 상을 쓸어간 건 바로 <카바레>였습니다. 여우주연상이 <카바레>의 라이자 미넬리에게 돌아간 건 너무 당연한 결과예요. 연기 잘 해, 춤 환상이야 노래도 잘 불러, 게다가 영화도 좋거든요. 남우조연상 후보는 총 다섯 명 중 세 명이 무려 <대부>의 배우들이었지만(알 파치노, 제임스 칸, 로버트 듀발) 역시 <카바레>의 조엘 그레이가 타갔습니다. 아마 이건 당시도 좀 의외였을 듯 싶어요. 아니면, <대부>에서 무려 세 명이나 올랐기 때문에 표가 분산됐을 수도 있죠. 쇼마스터 역으로 출연한 이 배우 역시 뮤지컬 배우로서 매우 출중한 능력을 자랑합니다. (<더티 댄싱>의 제니퍼 그레이의 아버지가 바로 이 양반이죠. 전 이 사람이 여장하고 나왔을 때 못 알아봤어요. 가발을 벗어던지고서야 으악! 했는데 그건 장안에서 저뿐만은 아니었답니다.) 그리고… 감독상, 편집상, 사운드상, 음악상, 의상상, 미술상 같은 걸 타갔지요. 화려한 퇴폐미를 자랑하는 뮤지컬 영화가 받아 마땅한 상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해의 아카데미 상은 워낙 <카바레>가 쓸고 다른 주요 부문은 <대부>가 쏙 빼갔기 때문에, 부어맨의 <딜리버런스>나 맨케비츠의 <탐정>이 낙동강 오리알이 된 신세였고 <후보자>는 후보에도 못 올라본 억울한 신세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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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숑가게 만드는 공연장면


그렇다면 과연 <카바레>는 그토록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영화였을까요? 네, 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춤과 노래가 섞여있는 뮤지컬 영화는 인기가 좋은 법입니다. 주디 갈란드의 딸 라이자 미넬리가 지 엄마만큼이나 재능 있고 잘 한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아카데미 취향에도 딱 맞지요. 사실 외모는 주디 갈란드가 좀더 예쁩니다만, 라이자 미넬라가 어필하는 ‘소년틱한’ 이미지는 굉장히 묘한, 주디 갈란드의 예쁜 소녀적 매력과는 완전히 다른 마력을 갖고 있어요. 게다가 영화 초반 중절모와 검은 스타킹에 가터벨트를 메고 보여주는 공연은 정말 사람을 한순간에 보내버릴 정도로 환상적인 매력을 자랑하는걸요. 조엘 그레이와 나란히 “머니머니머니~”를 읊어대는 코믹한 춤과 노래는 어떻고요? 게다가 이 영화는 배경이 1930년대 베를린입니다. 영화 초반, 극장에서 쫓겨났던 나치 대원은 영화의 말미 당당하게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쇼를 보고 있습니다. 대체로 손가락질 당하며 “이뭐병” 취급을 받던 나치가 10대와 20대의 피끓는 ‘아이들’에게 퍼져나가며 점차 힘을 얻어가는 바로 그 시기!를 지저분한 설명없이 컷 몇 개로 딱딱 보여줍니다. 그리고 곧장, 사회가 어지럽고 불안할수록 퇴폐미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걸 탁, 보여주지요. 스토리라인은 퍽 간단하지만, 꽤 파격적이기도 해요.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굉장히 파격적이죠. 외교관의 딸로서 유럽 어느 카바레에서 댄서 노릇을 하며 ‘배우가 될 거야’ 이러고 있는 여주인공이라뇨. 워낙 색에도 밝고, 애인이 있는데도 다른 남자와 자는 걸 아무렇지 않아 합니다. 전 이 영화에서 가장 걸작인 장면이 그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브라이언 : 그렇게 그 남작이 좋으면 가서 같이 자!
샐리 : 그러고 있는데
브라이언 : (충격을 받아 한동안 말을 못한다)
브라이언 : 나도 그래

미국에 몰아치고 있던 히피의 바람과 그 여파로 <오멘> 같은 영화가 나오고 있던 시절(네, 전 <오멘>을, 히피 자식들이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중산층 부모 세대의 불안한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영화라 생각합니다.)입니다. 내 아이를 가졌는지 저 남작의 아이를 가졌는지 모를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약속하고 그 아이를 내 아이로서 받아들이는 남자나 정조 개념 같은 건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아예 보이지 않는 여자가 사랑스러운 주인공들로 나오기에 지극히 어울리면서도, 지극히 어색한 그런 시대였죠. 배경이 아마 유럽이기에 가능했을 겁니다만. 당시 미국인들에게 유럽은 아무리 혁명이 실패했어도 그 여파는 남았던, 그런 곳이었을테니까요. 1930년대가 다시 호출된 것은 분명 정치적인 맥락이 있겠지만요. 사실 이런 여주인공 캐릭터는 딱 천박해지기 쉬운데, 라이자 미넬리의 소년같은 외모(허리가 없죠, 언니가…)와 천진난만함이 샐리 보울즈라는 캐릭터를 그저 하고픈 게 있으면 그대로 해버리는 딱 ‘어린아이’같은 캐릭터로 만듭니다. 펭귄머리를 하고 이따만한 인조눈썹에 시커먼 눈화장을 하고 나오는 라이자 미넬리는 사실 성숙한 섹시미보다는, 귀엽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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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고 깜찍하기도. "머니머니머니~"를 부르는 장면.

영화의 말미, 임신중절 사실을 안 브라이언은 샐리의 곁을 떠나고, 샐리는 여전히 신나는 얼굴로 무대에 오릅니다. 하지만 전 그 마지막 장면이 참 슬펐어요. 프로는 아무리 속이 썩는 일이 있어도 무대 위에선 밝고 신나는 얼굴로 쇼를 선보여야 하죠. 천진난만하고 세상 무서운 건 모르던 초반의 샐리와, 영화 말미에서 아기를 낙태하고 애인을 떠나보낸 뒤 무대에 오르는 샐리는, 둘 다 똑같이 활짝 웃으며 신나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살짝 질감이 다릅니다. 사람이 어른이 된다는 건, 속에 이따만한 돌덩이를 품고 심장은 철철 피를 흘리고 있으면서도 순간순간의 희망과 웃음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며 열심히 살아가고, 그렇게 살아남는 것이란 생각이 요즘 들어요. 그렇게 샐리는 피눈물을 속으로 삼킨 채 여전히 쇼를 해요. 앞으로도 그렇겠죠. 영화에 명시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샐리가 임신중절 수술을 한 건 브라이언이 장학생 지원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란 사실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어요. 따져묻는 브라이언에게 샐리는 “나 원래 이렇잖아, 내가 한 변덕 하잖아.”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지만, 샐리에게 청혼하며 ‘옥스포드에 장학금 신청했다’던 브라이언이 얼마 후 더없이 어두운 표정을 하며 샐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고민에 빠져있는 장면(바로 여기서 샐리는 임신중절을 결심하는 것 같습니다만)이 들어간 건 바로 그 때문이겠죠. 브라이언에겐, 결과적으로는, 마침 사실 좋은 핑계거리가 제발로 찾아와준 거고요. 그는 샐리와의 관계를 지속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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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쇼라네~!! 가운데 광대분장의 쇼마스터가 조엘 그레이.

우린 여기서 또 한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진난만한 척 바보인 척 그저 신나서 헤헤거리는 백치미 넘치는 여자들의 얼굴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 그녀들의 실없는 짓은, 어쩌면 당신을 마음깊이 배려하는 큰 희생을 해놓고도 그 사실로 당신을 옥죄지 않기 위해 피눈물을 삼키며 쓴 가면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 소위 ‘착한 남자’들 중 일부는, 당연히 책임지고 나쁜놈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쁜놈이 되기 싫어서 결과적으로 여자에게 온갖 짐을 다 떠넘기고 상대를 나쁜년으로 만드는 데에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답니다. 여자들은 또 이런 남자들을 조심해야 하죠. 브라이언도 비스무리하죠. 진정 사랑했다면 남자건 여자건 기꺼이 그 죄짐을 먼저 졌을 겁니다.


어쨌거나, 나치가 득세하고 애인이 가건말건 공연을 계속하는 샐리를 보며 당연한 교훈 하나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거죠 : 쇼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쭈욱.


영진공 노바리


ps. 워낙 유명한 뮤지컬이 원작인지라, 성공적인 영화화 이후에도 지금도 꾸준히 전세계 무대에 올려지고 있습니다. 샘 멘데스가 연출하고 제인 호록스가 주연한 TV 버전이 있던데, 이거 한번 보고싶어지네요.

이순신의 리더쉽과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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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인간 일반에 해당되는 것이든, 아니면 민족주의적 사고든 간에 한국인 혹은 한국문화 고유의 특성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국인의 장단점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한 인물, 이순신 장군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순신 장군은 한국인을 움직여서 불멸의 업적을 남긴 최고의 리더라 할 수 있다. 그는 17번의 주요 해전에서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 그 해전 중에는 12척 대 300여척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명랑대첩도 포함된다.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적이었고, 동시대의 그 어떤 해군조직보다도 강력했다. 그런 그가 한국인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한국인의 전통적 특성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인은 원거리 대면을 선호한다.

이순신은 절대로 부하들이 직접 적과 마주치치 않게 했다. 실제로 당시 전투기록을 보면 조선군은 성안에서 활을 쏠때는 강했으나 직접 적과 마주치는 전투에서는 거의 언제나 졌다. 조선군의 무기체제에는 활만 있을뿐 창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았다. 즉, 조선군은 먼거리에서 쏘기에 능했고, 적과 마주보고 육박전을 펼칠 각오는 절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순신 역시 거의 모든 해전을 원거리 포격전으로 해결했다. 일본의 해전은 육박전을 지향하는데, 그들의 장기인 육박전을 할 기회를 아예 주지 않은 것이다.

둘째, 한국인은 카리스마에 약하다.

임진왜란때 전사를 보면 앞서 말했듯 전면 격투전을 벌이면 조선군은 대부분 졌으나, 신기하게도 사상자는 별로 없다. 말 그대로 그저 사라져버렸다. 즉, 조선군은 직접 적과 대면하면 싸우기 보다는 그냥 도망쳤다. 예외는 곽재우나 권율같은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휘관이 있을때 뿐이다. 이런 명장의 지휘하에서 조선군은 그 누구보다도 악착같이 싸워 이겼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만약 지휘관이 죽으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모두 도망쳤다. 원균이 죽었다는 칠천량 전투에서도 사실 주요 장수들은 모두 죽지 않고 도망쳤다가 이순신이 부임하자 다시 기어나왔다. 이순신은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노량해전에서도 자신의 전사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천하무적 조선수군이 순식간에 종이호랑이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히딩크가 사라진 한국축구의 무기력 처럼 말이다.

셋째, 한국인은 이기적이고 실리적이다.

앞서 조선군이 질 것 같으면 다 도망가버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랬을까? 그들은 어쩌면 전쟁의 목적 같은 것을 공유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에서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내세우는 깃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체면은 중시했으나 명분은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명분이고 명예고 내가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이것이 그들의 모토였다. 한국인은 애초부터 이기주의자이자 실리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이순신은 자기 부하들이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가족의 안전을 자기 군의 안전이나 승리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부하를 믿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부하들을 늘 닦달했다. 그는 부하를 엄하게 처벌하고, 확실하게 포상했다. 훈련만큼이나 이 상벌체계의 유지에 최선을 다했다. 이 시스템을 통해서 이기적이고 실리적인 부하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덧붙여, 이 시스템을 거꾸로 이용한 이들도 많다. 선조가 대표적인 인물. 그가 임진왜란 내내 저지른 일이라고는 몰래 도망가기와 전공을 세운 이들 역적으로 몰아 죽이기 뿐이었다. 그 덕분에 단 한번도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는 원균이 수군통제사까지 되는 말도 안되는 일도 벌어지고, 그 원균이 당대 최강 조선수군을 단 한큐에 말아먹어버리는 블랙코미디가 벌어졌다. 어쩌면 이런 인간들이 위에서 오래 오래 군림한 탓에 한국인이 더 실리적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 유성룡이 선조의 미친 짓을 어느 정도라도 제어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그때 끝장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한국인의 성격이 디지털 매체로 인해서 변화했을까?
그렇지 않은 듯 하다.

1. 한국인은 원거리 대면을 선호한다:
디지털 매체는 원거리/간접 대면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한국인은 그걸 매우 좋아한다.

한국문화는 직면해서는 대화나 토론을 하는 일과 잘 맞지 않는다. 누군가는 조선시대의 활발한 당쟁이나 상소들을 예로 들면서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때의 논쟁도 서로 자신의 입장을 견고히하는 논쟁이었지, 관심사를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토론은 아니었다. 성에 들어가서 원거리 전투를 해야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나,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서 간접적인 논쟁에 실력이 발휘되는 것이나 어쩌면 비슷하다. 그리고 이런 특성은 보다 확실한 원거리 활동을 보장하는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에서 더 잘 발휘되었을수도 있다. 한국인은 애초부터 대면 만남보다는 원거리 만남을 선호하는 것이다.

2. 한국인은 대세와 카리스마에 약하다:
한국인은 주류를 매우 중시한다. 디지털매체에서도 결국 주류만 남기를 바란다.
멱함수의 법칙은 한국에서 더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한국의 3대일간지 점유율이 외국에 비해서 독과점수준임에도 아무도 그것을 문제시 하지 않는 이유, 이동통신이 결국 4자에서 3자로 조만간 2자 체제로 변화해가는 현상, 어떤 분야에서든 2개 이상의 강자가 남지 못하는 현상도 아마 이런 특성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은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확실한 강자와 그 라이벌 체제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오히려 불안해 한다. 한국인은 선택의 여지가 많아지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선택을 해야 하면 대부분 그냥 도망치고 만다.

3. 한국인은 이기적이다:
한국인의 유일한 신념은 자기 자신이다.
대부분의 매체는 결국 사적인 연결을 위해 사용된다.
공적인 의사소통은 매체 사용의 주류가 아니다.

한국인은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한다. 개인이 조금 확산된 가족 이상을 원치 않는다.
또한 한국인은 명분을 내세울지는 몰라도 절대로 그 명분을 믿지는 않는다.
집단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수 있을만큼 신념이 강한 사람은 한국문화에서 결코 정상이 아니다. 노사모가 완전히 수용되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런 지점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핵심은 결코 공적인 메시지나 학술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 배후에 깔린, 혹은 그 메시지의 사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책이나 어떤 선언이 발표되면, 그 선언의 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 공유자(가족, 친지)와 이를 공유하는 활동이 작동한다. 그것은 80대 20의 비율이상일 것이다.

4. 한국인은 이기적이되, 개인적이지는 않다:
언제나 대세를 따르기를 바라고, 대세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한다.
모든 정보기관의 촉각은 거기로 향한다.

개인주의는 신념을 필요로한다. 하지만 한국인은 신념을 믿지 않는다. 고로 이기주의자이지만 개인주의자는 아니다. 한국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 신념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대세이냐이다. 왜 한국 부자들이 한국에서는 돈을 쓰지 못하고 외국에 나가서 돈을 쓸까? 튀고 싶어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제대로 튈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취향이 없다. 그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 취향을 집단의 눈총속에서도 주장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자기의 취향이 소수인 곳에서 자기를 주장하기 보다는, 그것이 대세인 곳을 찾는다. 아니 대부분은 개인취향 자체가 없으므로 그냥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하는대로 따라서 외국으로 갈 뿐이다.

5. 한국인은 실리적이다:
질 보다는 양이 우선이다. 적은 비용은 카리스마 다음으로 중요하다.

명품바람이나 고급소비성향들이 부각되면서 사람들이 착각하게 된 것이 한국인의 소비취향이 고급화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양을 우선시한다. 같은 조건이면 가장 싸게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짝퉁을 선호하는 것, 공짜를 선호하는 것, 불법복제가 일상화되어 있는 것이 한국문화의 기본이다. 명품을 찾고, 프리미엄 서비스를 선호하고, 저작권에 예민한 것은 한국문화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중국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제품의 소구지점은 결국 카리스마와 가격 뿐임을 의미한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