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 아일랜드”, 반전 하나로 간단히 덮는 기술


많은 영화들이 관객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정 정도의 반전을 후반부에 보여주곤 합니다만 <식스 센스>(1999)식으로 단 한 마디의 스포일러에 영화 전체를 완전히 달리 보게 만들 수도 있는 그런 의미의 반전 영화는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듯 합니다.

제 경우 <셔터 아일랜드>의 반전을 감독이 의도한 지점에 이르기까지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영화를 제대로 잘 감상한 셈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전개가 반전되는 그 지점에 당도하기 전까지 <셔터 아일랜드>는 상당히 피곤하고 짜증스럽기까지 한 영화로 여겨졌습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긴 하지만 초반부터 배경음악을 아주 유난스럽게 사용하더니 컷과 컷의 연결이 자주 어색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군데군데 앞뒤가 잘 안맞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그외 폭풍우 내리치는 장면이나 모닥불 가에서 대화하는 장면조차도 상당히 신경이 거슬리더군요.

최근에 <러블리 본즈>에 대해 레인맨님이 “피터 잭슨이 발로 연출한 영화”라고 하신 것 때문에 신경질을 부렸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셔터 아일랜드>를 놓고 “마틴 스콜세지가 발로 연출한 영화”라고 해야 하는가 보다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반전을 통해 시종일관 어색하게만 보였던 내러티브의 전모를 알게 되면서 모든 것이 의도된 연출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반전을 알고 나면 그때까지 보아온 등장 인물들의 이상한 행동이나 전개들 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 참 이상하게 찍어놓은 장면들조차 모두 정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역시나 이 영악한 노인네 감독이 그렇게까지 영화를 이상하게 만들었을 리는 없었던 거죠.

하지만 오랜만에 반전 영화의 묘미를 만끽했다기 보다는 그저 아항 그게 그런 거였냐 – 이제야 납득은 한다만 여전히 피곤하구나 – 라는 정도입니다.

스콜세지 감독이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고전 영화의 연출 기법을 차용해서 보여주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본 바로는 이런 정도의 영화를 굳이 스콜세지 감독이 연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 그러지 말라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만 –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전체적으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비롯한 여러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그외 기술적으로 흠잡을 만한 구석도 없습니다만 – 물론 영화를 끝까지 보고난 후에 다시 정리된 바에 의하면 그렇다는 겁니다 – 그렇다고 아주 좋아라 할 만한 이유도 딱히 없는 작품이랄까요. 요즘은 영화를 워낙에 다들 잘 만드시니까 내용까지 마음에 쏙 들지 않으면 선뜻 치켜세워주게 되지를 않는군요.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일찌감치 감을 잡고 달리 보실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예전에 자주 얘기하던 바로 그 ‘반전 영화’다 보니 내용에 관해서는 뭐라고 말도 잘 못꺼내겠군요. 영화 줄거리를 확 뒤집는 반전이 있다는 이런 식의 정보조차도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 있어서는 이미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영화 속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마크 러팔로가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워대는데, 그럴 때마다 < 땡큐 포 스모킹>(2005)에서 담배 회사 대변인인 주인공이 헐리웃의 영화 제작자를 찾아가 PPL 상담을 하던 장면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담배를 태우던 시절의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디카프리오가 연습을 참 많이 했더군요.

Leonardo Dicaprio와 감독 Martin Scorsese

영진공 신어지

 

“시네도키, 뉴욕” 천재 시나리오 작가의 머리 속으로

찰리 카우프먼의 감독 데뷔작입니다. 원래 스파이크 존즈가 연출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찰리 카우프먼이 직접 연출까지 맡게 된 것이라 하네요 – 대신 스파이크 존즈는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긴 합니다. 그런데 혹시 스파이크 존즈나 미셸 공드리가 이 작품을 연출했더라면 어떤 작품이 되었을까요? 좀 더 재미있고 깔끔하게 만들어졌을 수는 있지만 역시나 우울하기는 매한가지였을 겁니다.

<시네도키, 뉴욕>이 우울한 것은 그저 삶 자체가 지독하게 우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찰리 카우프먼이 발견해낸 삶의 우울이죠.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지만 영화관에서 그런 전제 조건에 충실한 비극적 코미디와 씨름을 하다보면 마음은 어느새 가라앉을 수 밖에 없는 거겠죠. 약간의 위안을 얻을 만한 장면이 있긴 합니다만 분위기를 반전시킬 의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리스 비극의 원리에 충실한 작품으로 남겨두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시나리오 작가 출신으로 감독 데뷔를 하는 경우가 그리 보기 드문 케이스는 아닙니다만 찰리 카우프먼의 <시네도키, 뉴욕>은 마치 평론가 출신의 감독 데뷔작처럼 보일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채택된 내러티브의 전개 방식 역시 마치 생쌀을 씹어 넘기는 것 만큼이나 거칠고 난해하게 느껴집니다.

이미 죽은 나와 말년까지 고통받는 나, 나를 대신해서 연기하는 배우와 그 배우를 연기하는 또 다른 배우, 실제를 닮은 연극과 연극처럼 보이는 실제, 극장 안에 뉴욕 전체를 넣고 끊임없이 리허설만 반복하는 초대형 공연 계획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네도키, 뉴욕>을 반드시 봐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이제까지 찰리 카우프먼이 시나리오를 제공했던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예전에 보지 못했던 놀라운 상상력과 통찰력을 맛볼 수 있었듯이 이번 감독 데뷔작 역시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 레퍼러스가 될 만한 작품을 찾기 힘들 정도의 – 영화말고 희곡 작품에서는 좀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찰리 카우프먼의 영화 속에서 언제 한번 주인공들이 제대로 기를 펴고 살아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이긴 하지만 – 그래서 찰리 카우프먼 영화 속 인물들이 유난히 사랑스러웠던(?) 것인지도 – 이번 <시네도키, 뉴욕>의 연극 연출가 케이든 코타르(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처럼 바닥을 닥닥 긁어대는 경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싶습니다.

그래도 여복은 타고난 것인지 딸 아이를 데리고 독일로 가버린 미술가(캐서린 키너),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격려해주는 꽃다운 여배우(미셸 윌리엄스), 그닥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말년을 함께 해주는 여인(사만다 모튼), 그리고 온 몸에 문신을 한 채 오해와 저주를 끌어안고 숨을 거두는 자신의 딸(로빈 웨이거트)까지 케이든 코타르의 삶은 여인들의 품에 안겨 그 안에서 고통을 받고 희망도 찾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되지요 – 이건 뭐 리어왕과 함께 비극의 전당 최고 상석에 앉을 자격이 충분하지 싶습니다.

네. 솔직히 지금은 <시네도키, 뉴욕>을 통해 찰리 카우프먼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천재 시나리오 작가의 예술적 니힐리즘을 맛본 텁텁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책맞은 자기 동정으로 관객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 찰리 카우프먼식 유머가 전편에 깔려 있는 데다가 영화의 내용을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시네도키, 뉴욕>은 영화의 내용 자체가 현실과 예술 작품 사이의 상호 반영을 다루고 있는 바, 분명 찰리 카우프먼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네도키, 뉴욕>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연출했던 1999년작 <존 말코비치 되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찰리 카우프먼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 잠시 동안 찰리 카우프먼처럼 생각하고 느낄 기회가 있다면 그 경험은 아마도 <시네도키, 뉴욕>에서 본 것들과 무척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시네도키, 뉴욕>은 찰리 카우프먼의 영화들을 좋아하는 선을 넘어서 찰리 카우프먼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터널과도 같은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