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벌위원회 3종 세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판의 미로, 미스터 로빈 꼬시기”, <상벌위원회>, <영진공 66호>

상벌위원회
2007년 1월 8일


일요일 밤. 모처럼 생긴 짬을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심야영화 생각이 났다. 스타식스 극장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판의 미로, 미스터로빈 꼬시기’ 이렇게 세 편 상영 예정. 판의 미로는 마음에 아주 들었던 영화라서 한 번 더 봐도
좋겠다 싶었고, 다른 두 영화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 달려갔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그동안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호오를 떠나 기대 없이 보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면서 단 한
장면에서 눈물이 흘렀는데, 일순의 사려깊은 배려(나는 에너지 변환장치를 달아주는 일순의 행동을 배려-라고 보았다)로 자신이
충전되었다고 생각한 영군이 병원 관계자들에게 총탄을 난사하는 장면이었다. 적에게 마음껏 총탄을 난사하고싶은 소원을 이룬 영군은
그 순간 행복했을까. 그 장면을 보면서 ‘얘야 네 마음 알겠다’ 하는 할머니 마음이 불현듯 생겨 순간 짠해졌던 것이다. 일전에
어느 지인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는데, 그건 누구나 갖고 있는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는 임은경의 모습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두 영화에서의 임은경과 임수정의 모습은 가냘픈 소녀의 분노 표출이란 점에서 닮기도 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흥행에서 망해버렸지만.

아쉬운 점은 영군과 일순을 제외한 다른 환자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일까. 정신병동이란 배경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에
매력적인 장소임은 분명할 것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도 그 점을 십분 활용해 저마다 다른 질환으로 괴상한 행동을 하는
환자들이 등장해 웃게 만들었다. 그러나 단지 웃게만 만들었다. 그런 식의 웃음이라면 개그콘서트의 ‘봉숭아 학당’에서도 매주 볼
수 있는데. 젊은 남녀의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는 게 목적이었으니 다른 환자들의 상처까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은 것이려니
생각하다가도, ‘구구절절이 아니었대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내가 열렬히 좋아하는
텐도 아라타의 ‘영원의 아이’란 소설의 주요 배경은 아동 정신병원. 아이들의 기이한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어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던 그 소설과 이 영화가 자꾸 비교되었던 거라. 조금만 신경써 주었다면 훨씬 속깊은 영화가 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

판의 미로-
어릴 적 주위 환경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한 날들을 보내고 있던 나에겐, 책을 읽고 공상하는 것이 가장 큰 위안꺼리였다. 그리고
우리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국 창작동화나, 위트 있는 미국 작가들의 동화보단 전설을 바탕으로 한 유럽 동화들이 그렇게
좋았다. 공주, 신기한 동물, 갖가지 마법, 유령과 괴물들이 등장하던- 아이들 동화치곤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 그런
판타지가 없었다면 내 유년은 훨씬 초라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예전에 썼던 글 일부를 그대로 옮겨오면:

“나는 동화를 읽으며 핀란드의 자작나무와 별을 동경했고, 저주 때문에 눈물 대신 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어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때도 미친듯이 웃을 수밖에 없던 어느 왕비의 삶을 진심으로 슬퍼했다. 책을 덮은 현실 속의 친구들은 새엄마에게 맞은 자리가
지렁이처럼 솟아오른 동갑내기 친구와 엄마가 미군에게 시집가 버림받은 어린 여자아이와 그게 자위란 것도 모른 채 단지 ‘기분이
좋아지는 거’라며 내 앞에서 자위를 하곤 했던 그 아이의 배다른 어린 오빠와 어른들이 ‘양색시’라 부르던 옆집 아주머니였고,
책을 펼치면 개똥지빠귀와 구두장이 이반과 영리한 당나귀와 빛을 뿜는 깃털을 가진 불새와 죽음을 알리려 구슬피 흐느끼는 요정
반시와 산 속의 거인이 친구가 되었다.” ㅡ라는 것.

괴로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반항하고 대항해 싸워서 상황을 바꿔놓을 수도 있고, 가출이라도 해서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콱 죽어버릴 수도 있고, 너희는 그렇게 살아라 나는 도인처럼 신경 끄고 내 삶에만 몰두하겠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같이 어린 여자아이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방법들은 아니라,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어른들이 현실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안 어린 오필리아는 판타지 속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엄마는 잔인한 새아버지와 재혼하며
바로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불안한 현실에서 오필리아가 만나는 판타지는, 그냥 공상 속 세계가 아니라 필사적인 탈출구였을
거다. 그런데 그 판타지마저 100%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잔인하고 힘겨운 모습이어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잘 나가다가
엔딩이 황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나는 그런 엔딩 때문에 오필리아의 판타지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판의 미로’는 ‘나는 대충 행복하게 귀염 받으며 살고 있는 어린 아인데요, 어쩌다 잘하면 공주가 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이제부터 흥미진진한 모험을 떠나볼까요?’ 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건데. 패키지 상영인 이번 관람뿐만 아니라 ‘판의 미로’
한 편만 보았던 지난 관람에서도 영화가 끝난 후 ‘기대와 다르다’며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던 걸 보면 홍보의 핀트가 어긋났던
게 아니었나 싶고…

미스터로빈 꼬시기-
‘영화를 보러 올 관객들은 2~30대 여성이 많을 거고, 그들이 기대하는 수준은 이 정도일 것이니, 이렇게 만들면 그 정도
기대치는 채워주지 않겠어?’ 하는 생각으로 만든 것 같다. ㅎㅎ 나도 큰 기대 없이 보기 시작해서 딱 그만큼의 만족감만 얻었다.

어쨌든 옆에서 아무리 ‘남자는 길들이기 나름이야!’ 라고 말해줘도 ‘왜 꼭 인간관계를 그렇게 계산하면서 사나요?’ 하면서, 내
집앞이 아니라 지하철 열 다섯 정거장 떨어진 ‘오늘따라 피곤한 우리 자기’의 집앞으로 달려가 데이트하다가 차이고 정신차린 많은
여자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꿀밤 한 대씩 맞는 기분이었을 거다. (내가 그랬다, 아악-)

하지만 공감대 형성을 제외하곤 부실한 이야기 구성. 아무리 악에 받친 내기라지만, 애인에게 차이자마자 작심하고 다른 남자를 꼬실
수 있는 여자가 얼마나 될까(게다가 극중 엄정화의 캐릭터라면) 싶기도 했지만. 그건 접어두고라도, 장면 하나하나가 죄다 이전에
다른 드라마나 영화들에서 접했던 사건들이었다. 민준과 로빈의 만남, 도시락 가로채기, 실수로 버린 물건 찾아 쓰레기장 뒤지기,
일본 기업인의 자부심에서 비롯된 갈등을 감성적 호소로 해결한다는 설정…… (더 쓰고 싶지만 그러다 줄거리 다 쓸까 봐.)
그런 면에서 제니퍼가 갑자기 민준을 찾아 로빈의 첫사랑 얘길 꺼내는 대목은 진부하면서도 생뚱맞은 독특한 장면이었다. 한 여자가
연적을 제발로 찾아가 남자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은 기존에 많이 보아온 것이었던 반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이 영화에선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 ‘쟤는 왜 저래?’ 싶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이것이었다. 민준의 상사가 ‘로빈은 영어를, 다른 사람들은 우리말을 하기로 했다’면서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사장님의 탁월한 제안이 아닌가?” 란 대사를 읊던 장면. 나는 그 대사가, 시나리오 작가가 관객들에게- “다니엘
헤니가 캐스팅 됐어요. 그런데 우리말을 시키려니 부족하고, 다른 배우들에게 영어를 시키려니 그것도 여의치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설정하니까 얼추 얘기가 되지 않나요? 이 아이디어 생각해내고 모두 기뻐했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아이고.

상벌위원회 상임간사
도대체(http://dodaeche.com)

기예르모 델토로: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산업인력관리공단>, <영진공 66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7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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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un's Labyrinth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해 새삼 생각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화려한 비주얼에 취해
한동안 잊고 있었다. 판타지는 현실의 고통, 세계와 세계의 충돌과 그로 인한 파괴와 재생의 순환, 그 과정에서 유혹받는 인간의
나약함과 악과 타락을, 그리고 시험에서의 승리를 은유적으로 다룬다. 판타지는 당연히 잔혹하고 격렬할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판타지에서는 그러므로, ‘전쟁’이 빠질 수 없다. 판타지는 원래 현실에서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견디게 해주는 힘을
선사해주는 존재이다. 때로 그래서 판타지는 현실도피적이라는 비난을 받곤 하지만, 만약 그마저도 없다면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판타지가 현실도피적인 게 아니라, 현실에서 ‘너무 쉽게’ 도피하는 사람들이 판타지를 남용하는 게 문제인 게
아닐까. 판타지의 본래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퇴행적 핑계로 후퇴하지 않는, 간만에 훌륭한 판타지 영화를 봤다. 하지만 난 확실히
어른인가보다. 오필리아가 요정나라의 공주로 갔으니 기뻐해야 마땅할텐데, 영화 본지 하루가 지난 지금도 가슴이 이토록 아프며
슬픔의 눈물이 나는 걸 보면.

영화의 배경인 1944년의 스페인은, 스페인 혁명이 패배하고 혁명은커녕 (부르주아적이라며 혁명세력에게 비판받았던) 공화국
정부도 지키지 못한 채 프랑코의 독재정권에 권력을 내주었던 때다. <랜드 앤 프리덤>과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혁명의
공기를 숨쉬며 자신의 존엄성을 걸고 일어났던 사람들은 이제 정부의 군대에게 쫓기며 산 속에서 생활하는 게릴라(빨치산!)가 되어
있다. 오필리아의 모험은, 만삭의 어머니와 함께 새아빠인 (프랑코 군대의) 비달 중위가 주둔해있는 기지로 이사오면서 시작한다.
어른들의 절망과 슬픔은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느껴지기 마련이고, 게다가 이 아이는 자신이 어찌해볼 수 없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
고통스러운 상황이다. 새아빠는 냉정하고 무서우며 엄마는 몸져누워서는 오필리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고통을
이해해 달라고 요구한다. 외로운 아이는 부대의 안살림을 도맡아하는 메르세데스에게서 아파 누운 어머니가 줄 수 없는 또다른 모정을
느끼지만 메르세데스와 온전히 교감할 수는 없다. 그 와중에 요정의 초대를 받고 나무요정 판을 만나며, 자신의 원래 신분 –
요정나라의 공주 모아나 – 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너무 오래 살았기에, 요정나라로 돌아가려면 세 가지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M_ more.. | less.. | 영화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스페인 내전 직후라는 정치적 현실에서 근거한, 게릴라의 활동과 비달 부대의 토벌 작전.
비달의 부대에서 일하는 메르세데스와 부대에 출입하며 부상자와 오필리아의 어머니를 돌보는 의사 역시 실은 게릴라들을 돕고 있다.
또 한 축은, 이 살풍경한 환경에서 도저히 적응하지 못한 채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며, 그리하여 환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오필리아의 내밀한 여행. 메르세데스나 오필리아는 각자 비밀을 가지고 있고 서로에게 호감과 애정을 느끼지만 그 비밀을 온전히
소통하지 못한다. 오필리아에겐 게릴라니 전쟁이니 하는 게 도저히 이해 안 갈 어른들의 고통이며, 메르세데스에겐 요정과 판의
이야기란 아이들에게나 존재하는 동화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저 각자의 비밀의 흔적(메르세데스의 조심스러운 행동,
오필리아가 그려놓은 마법의 문)을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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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원래 정체는 요정나라의 공주 모아나. 혹은 혁명의 노동자.

나는 이 영화가 혁명 실패의 슬픔과 고통을 은유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이 사라지고 모두가 서로를 인간으로서 존중하며 새로운 희망을
품었던, 실제로 혁명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스스로 파시스트에 맞써 싸우고 있었던 당시 스페인 국민들에게 혁명의 실패가 주었던
암울한 고통과 슬픔은, 자신의 힘으론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워 할 수밖에 없는 오필리아의 절망적인 상태와 연결된다.
게릴라들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 즉 메르세데스와 의사선생, 그리고 토벌작전 중 잡혀온 말더듬이(‘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고문에 의해 동지를 팔아넘길 말만을 강요당하는 민중, 그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매우 상징적인 캐릭터) 등의 이야기를 꽤
자세하게 전개시키고 있으며, 스페인 내전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에겐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이
이전에 연출했던 영화 <악마의 등뼈> 역시 스페인 내전 당시 의용군(이자 게릴라) 부모를 둔 아이들의 이야기였음을
기억한다면, 이 영화가 오필리아의 암담한 현실을 그리기 위해 스페인 내전을 그저 끌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확연해진다.
오필리아의 죽음은 곧 혁명의 실패를 의미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현실에서의 오필리아는 죽었다 해도 사실은 훌륭하게 미션을
마치고 – 그것도 가장 어려운 미션을 자신의 희생으로서 지혜롭게 통과하고 – 요정나라의 공주로 돌아간다. 그녀는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오필리아의 주검은 안고 눈물을 흘리는 메르세데스는 오필리아가 남긴 웃음의 의미를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이가 더 들면
알게 될 것이다. 현실에서 표면적으로 혁명은 실패했지만, 혁명은 결코 끝나지도 실패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아이들은
어른들의 선생님이란 말은 과연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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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관문의 수문장. 영웅신화와 판타지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특징을 골고루 가진.

어린 남동생을 지키기 위해 공주 따위 안 돼도 좋고, 그래서 ‘뭐든 무조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는 (노예의) 맹세를
깨고 아가를 지키겠다는 자신의 주관을 실천하고서는 비록 뭣같은 새아빠에게 총을 맞는다 해도, 바로 그 순간이 요정나라의 공주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것이었음이 드러날 때,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토록 자신이 싫어하고 증오하는
대위일지라도 그의 아가는 소중하게 품어안고, 그 부대에 있는 어린 소녀를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메르세데스의 선택과 행동은 정확히
오필리아의 선택 및 행동과 겹친다. 혁명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아무리 친부인들 독재자의 하수였던 그의 이름조차 아이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는 것, 애초에 누구의 핏줄이건 혁명의, 자유의 가치를 주고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 지금 흘린 피는 비록
외견상으로 헛된 죽음에 불과해 보일지라도, 바로 그것이야말로 요정나라의 공주로 돌아갈 수 있는 어려운 관문. 혁명은 언제나
‘내일’을 꿈꾸고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아가는 길이다.

메르세데스 언니 만만세. 혁명의 주체는 역시 여성. 허릿춤에 감춰둔 감자깎는 칼의 위대함. 그럼에도 역시나 영화의 맨 첫
장면(이자 끝부분의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메르세데스의 눈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 어른이라서, 더없이
완성된 성인 어른이라서, 저미는 슬픔을 그저 조용한 흐느낌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던 메르세데스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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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영진공 65호]<판의 미로> – 현실이 항상 피해자인 이유

상벌위원회
2006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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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판타지의 국가에 살고 있던 나에게 초현실적인 판타지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한번씩 전국이 암흑이 되는 민방위날이 되면 동네
앞까지 돼지머리의 공비가 쳐들어올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살짝 떨리기도 했고 새디즘으로 중무장한 선생들은 1.5cm의 머리길이를
강요하며 삼청교육대 원생 대하듯 애들을 쥐어 패기에 바빴다. 80년대 후반, 대다수 중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체벌은 이미 폭력의
수위를 넘어섰고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얄팍한 구호는 폭력으로만 이루어졌다. 그것도 권력의 입장에서만…


폭력과 억압, 구호와 선동의 근대화 판타지에 몰입을 강요당해야 했던 우리는 굳이 신세계를 찾아 도피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신세계를 암만 그려봐야 우리 머릿속에는 고작 대머리 쿠데타나 빡통 암살밖에 떠오르지 못했으니 말이다. 대신 빡통의
요정과, 달짝한 씨바스리갈의 뒷이야기과 장*희씨의 도미 이유 등이 선데이서울스러운 상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판타지는
‘황홀한 사춘기’가 열어주고 있었다.


도미시마 다께오.


주인공 마사오를 내세워 일본 전역의 여자를 별 어려움 없이 ‘따먹는’ 이 통속 소설은 전국의 중고등학교 남학생 토스테스테론 분비를
촉진시켰다. 친일파가 정권의 실세가 되고 정의에 폭력이 앞서며 폭력이 곧 ‘정의사회 구현’이 되는 이 비현실적인 세계에 아가씨,
아줌마, 심지어는 하숙집 아줌마 딸까지 범하는 마사오의 여성편력은 성을 통해 계급과 도덕의 벽을 부수는 판타지였다. 『구타하는
선생을 범하고, 집값으로 현실을 옥죄는 집주인을 마음으로 강간할 수 있었고, 계급과 차별을 벽을 부수고 재벌집 딸년을 범할수
있었다.』 라고 말하면 개뻥인거고 툭 까놓고 우리는 말초신경의 지배 하에서 말초신경이 요구하는 대로 순응 할수 있는 것이
마스터베이션 외에는 없었다고 말해야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지금이야 택도 없는 이야기지만 유두하나 나오지 않는 ‘건강 다이제스트’만으로도 충분히 자위할 수 있었던 시절. 500번은 더
돌려봐서 이제는 저게 사람인지 바야바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폐품수준의 포르노 테이프를 봐도 하루종일 흥분이 가시지 않던 시절에
소위 ‘음란서적’으로 통칭되는 성적 판타지 소설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담보로 단백질과 테스토스테론을 앗아가는
사채업자였고 고리대금업자였다.


천박한 군사문화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고는 핏대선 노동문학과 일체의 정치색이 담길 수 없는 애매모호한 초현실주의(난 이문열이
대표하는 80년대 순수문학의 기저에는 초현실주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조롱조로…)문학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없었다. 꿈을 먹어야 하는 시기에 말초신경을 담보로 뇌로 가야할 단백질을 엉뚱한데 쏟아버린 지금. 판의 미로에서
오필리어가 도피했던 환상의 세계는 또 얼마나 부럽고 행복해 보였던가 말이다.


오필리어가 문학으로 찾으려던 판타지와 내가 80년대를 살아낸 ‘황홀한 사춘기’까라의 판타지는 도피라는 측면에서 서로 닮아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도피하고자 했다면 현실에서 현실과 맞닥뜨리면서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았어야 한다. 이 영화가 그토록 슬펐던 건
바로 현실과 머리를 맞출 수 있는 힘이 없었다는 것이며 어디로 발버둥을 치던지 결국 부조리한 세계에 남겨진 비틀어진 닭대가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평일날 교통사고로 죽어야만 보상금 7억을 받을 수 있는 보험에 가입한 한 쪼다같은 가장의 불편한 아침 출근길에는 항상 판의 미로와 황홀한 사춘기의 판타지가 교통사고로 끝났으면 하는 소망과 맞물려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춘기의 판타지에 축배
그럴껄(tito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