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요즘 책을 읽는 사람은 희귀종이다. TV는 더 재미있어졌고, 인터넷은 한번 들어가면 두세시간 날리는 건 기본이다. 출퇴근시간에는 다들 휴대폰만 들여다보는지라 책은커녕 신문도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인다. 이런 게 아니라해도 학생들은 입시와 취직공부에 목을 매야 한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친해지는 게 우리네 세상이지만, 책을 읽고 나서 같이 얘기라도 나눌 사람이 주위엔 없다. 그런 와중에 나온 <침대와 책>은 책 이야기에 목마른 독서가들을 열광시켰다. “나 어릴 적 이런 책 읽었는데, 그 책은 이 대목이 좋아.”라고 할 때 그들은 반가움을 느꼈고, “비가 오면 파전에 막걸리를 먹으며 이런 구절을 떠올리곤 해.”라고 하면 그들은 자신의 기억을 대입해가며 깊이 공감했다.

그 책의 저자인 정혜윤 피디가 두 번째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소문난 책벌레들을 찾아다니며 일합을 겨루는데, 이런 식이다.
고수: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이 내 청춘을 장식한 책이다…내가 행복하지 못하니까 세상과 싸우는 거더라.
저자: 그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자신들의 동질성의 실현,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한바탕 꿈이다.
대부분의 무공 대결이 상대를 해치는 것이지만, 책을 매개로 한 대결은 서로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보는 이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끈다. 책의 장면 장면들은 오비완-아나킨의 대결보다 아름답고, <와호장룡>의 대나무숲 결투보다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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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독서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추천도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맥락 속에서 자기만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30쪽).”는 저자의 말은 저자 자신에게도 오롯이 돌아간다. <침대와 책>에서 그간 읽었던 수많은 책들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맥락과 의미를 만들어낸 저자는 이번 책에서 한층 더 세련된 배치를 통해 읽는 이를 몰입시킨다.  “몰락하는 일만 남았”기에 딱 한권의 책만 세상에 남긴 하퍼 리같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저자는 책이 거듭될수록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낸다. 독서광들에겐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고, 나처럼 문학소년의 시기를 겪지 않은 사람에겐 책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 주는 이 책이 ‘서재가 사랑한 책’ 1위에 올라간 건 당연한 소치다. 저자의 화려한 무공을 보고 있노라면 젊은 시절 야구만 봤던 내 삶을 되돌리고 싶어지지만, 그게 불가능하니 저자의 세 번째 책을 기다리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련다.

한마디 더. 내용으로 보나, ‘이진경’ ‘박노자’ ‘공지영’ 등의 이름으로 보나 이 책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의 모습을 표지에 싣는 ‘미녀마케팅’을 펼쳐, 미녀에 약한 독자들마저 끌어들인다.


영진공 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