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치”, 비관과 낙관 사이의 아슬아슬한 곡예




한 손에는 비정함을, 다른 손에는 로맨스를 ...



배트맨은 부르스 웨인이 변장한 캐릭터고, 스파이더맨은 피터 파커가 변장한 캐릭터야. 하지만 수퍼맨은 달라. 수퍼맨이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어 변장한 캐릭터가 클라크 켄트지. 그런 면에서 수퍼맨은 아주 독특하지.
– 영화 “킬빌” 중에서

주성치 대인의 영화 “쿵푸 허슬”. 영화 … 끝내준다. 그는 이야기의 완급조절, 액션의 밀도와 상상력에 있어서 진정 본좌다. 근데 영화만큼 재미있었던 건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영화 초반부에 도끼파가 쏘아 올린 폭죽이 도끼모양으로 하늘을 수놓는 것 같은 아기자기한 연출들을 보며 지나치게 낄낄거리던 내 주변 관객들은 오히려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조용해졌다. 영화가 끝난 후, 그 초반에 즐거워하던 관객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뭐야, 너무 잔인하고 무서워서 재미없어…”

오해의 시작, 소림축구


그의 전작 『소림축구』를 통해서만 주성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의 영화에 대해 갖는 큰 오해 중에 하나는 그가 코미디 배우이고 그의 영화가 코미디라는 생각이다. 그건 사실 채플린의 영화를 코미디로 착각하는 것만큼이나 하기 쉬운 오해지만, 그 오해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댓가의 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채플린의 영화는 코미디로 봐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주성치의 영화를 코미디로 오해하면 뜻밖의 충격을 받게 된다. 앞서의 그 관객들도 이런 오해의 희생자다. 이 댓가는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를 “금발미녀 공금횡령 도주사건 이야기”로 착각하고 보던 관객들이 샤워실 살인 장면에서 받았던 충격만큼이나 크고, 놀러 갔다가 매맞고 돌아온 아이들의 심정만큼이나 억울하다.

하지만 그가 이전에 만든 영화 『희극지왕』이 전혀 희극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오해는 진작에 접었어야 할 일이다.
 

희극은 커녕, 비극이더구만 ...


그는 『도신』을 패러디한 『도성』에서 인간슬로모션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의 황당한 상상력은 단순히 웃기는 쪽으로만 뻗어나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구품지마관』 같은 영화에서는 고관대작에 잘못 걸려 누명을 뒤집쓴 임신부가 항의하다가 입에 곤장을 맞고, 배를 짓밟혀서 유산(!)을 하고 질질 끌려가는데 이건 결코 코미디가 아니다. 물론 그 뒤에 말발로 폭포를 이겨내는 장면으로 이 비장/애통이 커버되긴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앞서의 비장/애통이나 폭포수와 싸워 이기는 말발은 모두 같은 황당함이다.

『홍콩 레옹』에 나오는 귀신들의 사연도, 그 귀신들에 엮여서 목이 잘리고 배가 갈라지는 인물들의 모습도 역시 코미디가 아니다. 그보다는 하드고어 호러에 가깝다. 그는 사람들이 짓밟히고, 마구 죽어나가는 장면을 의외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식신』에서 잘나가다 배신당해 비참한 처지에 몰린 주성치가 비루하게 굴다가 더 심하게 짓밟히는 장면도, 『서유기 – 월광보합』에서 도적들이 여자주인공 언니의 칼에 맞아 순식간에 황천가는 장면들도 모두 당연한 일인 듯, 무덤덤하게 연출된다.

『소림 축구』에서는 수위를 아주 낮췄지만, 여전히 그 잔인 무도함은 남아있다. 라이벌의 계략에 말려 무릎이 박살나서 절름발이가 되고, 그렇게 당하고 나서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 때문에 끝없이 비굴하게 굽신대야 하는 오맹달의 처지는 결코 코미디용 설정이 아니다.

이러니 『쿵푸허슬』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뽑은 칼을 다시 그 상처에 꽂아 넣고, 그 칼을 사이드 미러로 쓰며, 어린아이가 오줌 세례를 맞고, 일가족이 휘발유를 뒤집어쓰며, 아무렇지도 않게 죄 없는 새끼고양이를 반동강이 낼 수 있는 것이다.

웃기되, 그냥 웃을 수 만은 없는 그의 영화들 ...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평범함을 뛰어넘고 남의 눈에 띄기 위해서 기발해지고 창의적이 되어보려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기발함을 감추고 평범한 척, 상식적인 척해야 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 마치 클라크 켄트라는 변장으로 자신의 본질을 감춰야 하는 수퍼맨처럼 말이다.

창의성에 대한 연구들에 의하면, 창의성이란 훈련이나 노력을 통해서 키워질 수 있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갖고 태어나는 독특성의 문제다. 어떤 생각이 창의적이라는 말은 그 생각이 그만큼 비정상적이라는 뜻이며, 기발한 상상력은 규범을 벗어난 일탈적인 생각을 뜻한다.

『쿵푸허슬』에 보면 정신병원이 등장하는데 이 병원의 제목은 ‘정신병원’이 아니라 ‘비정상자 수용소’ 비슷한 이름이었다. 사실 정신병은 상식을 심하게 벗어난 사람들, 정상범위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붙이는 의학적 죄명인데 그런 면에서 주성치 역시 바로 그 병원에 수감되어야 하는 존재에 가깝다.

주성치는 『킬빌』에서 얘기한 수퍼맨처럼 세상이 자신의 본색을 이해해주기는 포기하고, 세상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다. 그렇게 변장을 하고 자신의 본질을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애초부터 비정상적이던 그의 본색은 영화의 곳곳에 드러난다. 그것이 그의 영화들 전체를 아우르는 개성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그의 관점, 그의 본색은?

그가 보는 세상은 무자비하다. 『소림축구』에서 양아치들과 축구를 하려다가 집단 린치를 당하던 주성치가 오맹달에게 항의한다. “이게 무슨 축구예요! 싸움이죠.” 그러자 오맹달이 화를 내며 대답한다. “축구는 원래 전쟁이야!!” 이건 그가 축구 이전에 인생 자체에 대해 하고싶었던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함부로 노닥거릴 수 있는 동네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눈뜨고 코 베어가고, 그런 꼴을 당해도 동정은커녕 코가 잘려진 병신이라고 더 짓밟아버리는 무자비한 생존경쟁의 지옥도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가 패배자들의 비루함에 대해서 그렇게 절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 모두가 잠재적인 패배자이기 때문이다. 지옥에서는 어느 누구도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단지 패배를 미루어 둘 뿐이다.
 

『서유기 - 선리기연』의 이 장면, 주성치식 로맨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가 우리를 감동하게 만드는 건, 그 지옥을 지옥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삐딱함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구라와 로맨스는 바로 거기서 나온다. 세상이 그렇게 무자비한 지옥일지라도,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지라도, 그 와중에 로맨스를 꿈꾼다는 것이 그의 영화가 가진 미학이고 그의 영화가 주는 긴장감의 근원이다.

역시 『쿵푸허슬』에서도 재연되는 주성치식 로맨스 ...


한 손에는 비정함을 다른 손에는 로맨스를 들고,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벌이는 아슬아슬한 곡예가 그의 본색이며 그의 영화는 점점 이 본색을 드러낸다. 관객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영진공 짱가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미신과 속설은 어떻게 생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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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가 원래 불편부당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제가 참여한 책을 소개합니다.
네, 이 글은 광고입니다. ^_^;;;;;;

사실 제가 이 책의 번역 작업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다른 한 명에 비해서 훨씬 작습니다. 그러니 제가 번역자를 대표해서 이 글을 쓰는 것도 바로 그 이유, 즉 제가 번역 과정에서 부족했던 참여를 대신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번역에 참여한 비중은 적지만 저는 이 책의 내용에 절절히 공감합니다.
한때 청소년들의 범죄나 비행이 모두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의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혐의는 갑자기 만화로 옮겨갔죠. <일진회> 같은 만화 때문에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일진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수많은 만화가들이 검열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90년대 말이 되자 다시 혐의는 인터넷에게 뒤집어씌워졌습니다. 당시 청소년 범죄와 자살이 증가했던 것은 인터넷 보다는 외환위기로 인한 사회불안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함에도 사람들은 인터넷을 탓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최근에는 다시 혐의가 컴퓨터 게임으로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매체와 청소년을 연구주제로 삼은 사람으로서 저는 영화, 만화, 혹은 인터넷이나 게임이 청소년들의 범죄율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하고 증명하느라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논증도, 심지어 통계수치나 미국이나 유럽의 연구결과와 같은 명백한 증거들도 대단한 효과는 없었습니다. 그저 시간이 약이었을 뿐입니다. 문제의 그 매체가 너무도 당연해져서 주목을 덜 받게 되면 저절로 이 혐의는 사라지곤 했거든요.

즉, 어떤 매체건 처음에 소개되고 확산되기 시작하는 시기에는 많은 관심과 함께 다양한 혐의가 씌워집니다. 만약 처음에 부여된 혐의가 옳았다면 그 매체가 확산될수록 문제는 더 커져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매체가 완전히 사회에 뿌리내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알거나 사용하게 되면 그 혐의는 어느새 잊혀집니다.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고발을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어리석어서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예측하려는 본능” 탓이라고 해야겠죠.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원인’과 ‘결과’로 구분해서 파악하고 이걸 통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과정을 예측하고 통제한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았거든요. 우리는 모두 구름을 보고 비가 올 것을 예측할 줄 알았던 선조의 후손들인 셈 아닙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나를 보고 열을 알아내는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 부적절한 대상에 대해서 발휘 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우리를 지금까지 생존하고 번성해서 만물의 영장으로까지 만들어준 그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짓는다거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불치병도 낫는다는 등의 바보 같은 미신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거죠.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오류들이 왜 오류인지를 아주 세세하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는 비법도 알려줍니다. 간단히 말해서 역과 대우에 해당하는 경우를 고려해보라는 것인데 책의 후반부에 더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물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빠듯합니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판단을 할 때만 그 전략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정말 중요한 판단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사실 저는 이 책을 읽어보기 전부터 이 책에서 지적한 미신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 미신이라는 주장에 반신반의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고, 심지어는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반신반의할 독자도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잘못된 추론에 대해서 반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바라는 것은 그저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이 책의 전략을 고려해보시라는 겁니다.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영진공 짱가

* 제가 많이 하진 않았더라도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서는 꽤 자신있습니다.
다른 언어 번역서와의 교차검증까지 거치며 다듬고, 검토 할만큼 한 책입니다.

** 원제보다 번역본의 제목이 더 그럴듯한 책은 보기 드문데, 이 책이 그렇네요. ^_^
원래 제목은
How We Know What Isn’t So 라는, 적확하지만 우리말로는 임팩트가 좀 약한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