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셉션”, 꿈 속에서는 시간이 압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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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학부시절에, 그게 벌써 20년쯤 전 …
프로이트의 <꿈의 분석> 인가, 아니면 그의 책을 인용한 다른 책에선가
꿈의 특성에 대한 예화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꿈에서는 시간의 압축이 엄청나다고 …

어떤 사람이 꿈 속에서 프랑스 대혁명에 휩쓸려들어서 중요한 사건들을 목격하고는
어쩌다 보니 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마침내 사형 당일날 길로틴 앞에 꿇어앉아 지나간 인생을 회고하고 온갖 감상에 잠기다가 드디어 길로틴 칼날이 자기 목으로 떨어지던 순간에 꿈에서 깼다고 합니다.

그런데 잠에서 깬 순간 실제 자신의 머리 위로 침대 머리판이 떨어지고 있더란 거죠.

그 책에서 프로이트는 이 사례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 꿈은 침대 머리판이 떨어지려고 뿌지직거릴때 시작된 것이라고 …

이를 감지한 무의식이 꿈을 통해 그를 깨운 것이죠,
자다가 머리에 떨어지는 물건에 맞아서 다치지 않도록.

그렇다면 그 뿌지직 삐걱삐걱 거리던 물건이 마침내 떨어지기까지 걸린 몇초의 시간동안,
꿈꾸는 이는 프랑스 혁명의 시작부터 단두대까지에 이르는 수개월 혹은 수년의 시간을 꿈꾼 겁니다.

현실에서의 몇 초가 꿈속에서는 그렇게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죠.

이걸 읽으면서 “맞아, 그래!”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내용은 거의 기억하지 못해도 이 꿈 예시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희미하긴 하지만요.

저는 학부시절부터 수업시간에 잘 졸기로 유명한 인간이었는데,
가끔은 수업을 듣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 꿈 속에서도 졸기도 했고 …
그러다가 흠칫 하고 깨면 순식간에 꿈속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었죠.
남들은 조용히 수업듣는데 저 혼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던 기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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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의 이 영화는 바로 이런 꿈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 소품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정말 간단하고 작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이야기가 꿈의 특성을 치밀하게 활용한 연출을 통해서,
다층구조로 전개가 되니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 됩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 놀란이 아니었으면 만들 수 없었던 영화입니다.
“다크 나이트”의 성공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헐리웃에서 이런 이야기에 이런 투자를 할 리가 없죠.

그리고 영화의 제목인 <인셉션(Inception)>의 뜻은 사전에 나오는 “징조” “조짐” 뭐 그런 의미라기 보다는,

(훔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디셉션(Deception)의 반대로 (생각의 씨앗을) “심는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영화가 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영화 자체가 관객들에겐 하나의 인셉션이죠.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어떤 결실을 맺을지는 각자의 일이고 …


영진공 짱가


 

오바마와 덴트, 너는 내 운명!


<다크 나이트>는 여타 슈퍼히어로물과 비교해 여러 모로 진화한 텍스트다. 볼 때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해 곱씹어보는 재미를 준다. 처음 봤을 때는 미국이 처한 정치적 현실의 은유라고 생각했다. 배트맨의 출현이 더욱 강한 적을 부른다는 설정 때문에 세계 영웅을 자처하다 아랍권의 거센 반발로 오히려 국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미국의 모습과 겹쳐졌다. 두 번째 감상에서는 배트맨과 미국을 동일시,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어둠의 기사가 될 수밖에 없는 미국 영웅주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알레고리로 읽혔다.  

세 번째는 또 달랐다. DVD로 다시 본 <다크 나이트>는 대통령 당선 전 버락 오바마에게 보내는 영국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충고 혹은 경고로 해석됐다. (여담인데, 미국 내부에 대한 가장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 감독은 언제나 외부인이었다.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 <아메리칸 뷰티>(1999)의 감독은 영국 출신인 존 슐레진저와 샘 멘데스였고, <아이스 스톰>(1998)의 이안 감독은 대만 출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다. 첫째, 배경이 시카고이고 둘째, 극중 고담시의 차기 시장 선거가 중요하게 언급되며 셋째, 하비 덴트가 혼란한 고담시를 구원해줄 영웅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크 나이트>가 시카고에서 촬영됐다는 점은 흥미롭다. 전작 <배트맨 비긴즈>는 세트 촬영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실제 로케이션 장소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말 그대로 고담은 허구의 장소였던 셈. 그랬던 고담이 <다크 나이트>에서는 세트를 박차고 나와 시카고 시내에서 영화의 60%를 촬영했다. 놀란의 인터뷰에 따르면, “브루스의 내면에 집중한 <배트맨 비긴즈>와 달리 <다크 나이트>는 한 인물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뤄야 했기에 고담 시의 물리적 범위를 더욱 크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시카고였을까? 고담은 뉴욕의 옛 이름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실제 로케이션 장소는 뉴욕이 돼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나는 <다크 나이트>가 결국 버락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뉴욕이 아닌 시카고를 촬영 장소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시카고는 오바마가 처음 정치를 시작한 곳일 뿐 아니라 정치생명의 꽃을 핀 자궁과 같은 도시다. 이곳에서의 성공적인 정치활동을 등에 업고 백악관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영화는 배경을 시카고로 삼을 뿐 아니라 지방검사로 등장하는 하비 덴트가 고담시의 차기 시장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임을 계속해서 환기시킨다. 심지어 선거가 3년 뒤에 실시됨에도 말이다. (브루스 웨인은 하비 덴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시장 선거 후보로 후원하도록 하지.”라고 말한다. 이에 덴트 왈, “선거는 3년 뒤인데요.” 그러자 웨인 왈, “내가 후원하면 당선이나 다름없다고.”)

안 그래도 덴트는 무너진 고담시의 법치질서 회복에 대한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지역 마피아와 손잡은 공권력의 부패가 고담시를 더욱 나락에 빠뜨리는 상황에서도 원칙과 소신을 강조하며 악의 퇴치에 앞장 설 뿐 아니라 잠시지만 조커를 생포하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고담시를 구원할 차세대 영웅 하비 덴트 등장이요!

브루스 웨인/배트맨이 하비 덴트를 후계자 삼아 고담시의 평화를 회복하려 했듯 부시 정권 하에서 미국적 가치의 끝없는 추락을 목격한 국민들은 버락 오바마라는 새로운 영웅이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놀란 감독은 극중 고담시의 차기 시장 선거를 전략적(?)으로 언급하며 미국 대선이 실시됐던 해에 개봉한 <다크 나이트>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임을 은연 중에 환기시킨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추측해 보건데,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는 버락 오바마를 모델로 했을지 모른다는 심증을 들게 한다. 그리고 오바마는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며 새 시대의 포문을 열었다. 그런 점에서 <다크 나이트>는 2008 미국 대선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한 셈이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런 의문도 든다. 오바마를 모델로 했다면 덴트 역의 배우를 백인인 애론 엑하트가 아니라 흑인으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냐는. 그럴지도. 사실 내가 덴트와 오바마를 연결시킬 수 있었던 건 이미 미국 대통령이 결정되고 난 후 <다크 나이트>를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론적 관점일 뿐이다. <다크 나이트>의 전 세계 동시 개봉일은 2008년 8월 6일.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맞붙은 민주당 전당대회는 한 달 뒤인 9월에 있었으니 정말로 놀란 감독이 오바마를 모델로 덴트를 캐릭터화했다면 그것은 모험에 가까웠을 터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촬영 당시의 미국적 상황을 고려하건데 부시의 이념과 반대되는 인물을 차기 대통령으로 예측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을 거다. 덴트 역에 애론 엑하트를 캐스팅한 것에 대해 놀란 감독이 “미국의 이상주의를 실현할 영웅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 건 그런 맥락이었으리라. 그러니까 덴트 역의 모델은 현 시점에서 보면 버락 오바마이지만 개봉 당시를 고려하면 미국 차기 대통령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글 초반에 ‘<다크 나이트>는 대통령 당선 전 버락 오바마에게 보내는 영국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충고 혹은 경고’라고 말했다. 여기서 잠시 덴트와 오바마의 연결성은 제쳐두고 질문을 다시 해보자. 크리스토퍼 놀란은 미국 차기 대통령에게 무엇을 충고하고 싶었던 걸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도 무방하다.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 구도만으로도 충분했을 영화에 굳이 하비 덴트를 끌어들인 이유는 뭘까. 극단적인 가치 추구는 광기와 같다, 즉 “진실만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조커의 말을 빌린 놀란 감독은 흡사 ‘흑과 백’의 구도로 흐르는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 사이에 ‘투 페이스’ 하비를 끼워 넣고 윤리적 딜레마를 일으켜 현실 정치의 회색빛 진실을 알려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조커와 배트맨은 서로 정반대에 위치한 인물들이다. 조커가 절대 악을 상징하고 배트맨이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외형상으로 드러나는 특징들은 정확히 대립을 이룬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과 검은색 슈트, 질서의 파괴와 수호, 익살스러움과 심각함, 부랑아와 부자, 그리고 과장과 은신까지. 극단적인 선은 악과 닮은꼴이듯 조커와 배트맨은 노골적으로 다르지만 그래서 같은 인물이다. (극중 조커가 배트맨을 향해 “넌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라고 말한 대사를 상기하라!)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대고 있는 두 캐릭터는 어느 면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현상의 출발점인 셈이다. 그리고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하비 덴트, 즉 투 페이스다. 원래 대통령과 같은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물며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계정세의 판도가 달라질 것임은 자명하다. 당신이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앞면? 뒷면?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전 세계가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인가?
<다크 나이트>가 흥미로운 텍스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크 나이트>는 세계의 혼돈에 대한 영화적 탐구다. 진실만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며 맹목적인 믿음을 버리라고 한다. 맹목적인 믿음이란 광기와 같아서 한 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괴물을 잡기 위해 자신까지 괴물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고담의 미래를 책임질 영웅이었다가 희망이 꺾이자 곧바로 조커의 영역에 투신하는 하비, 아니 투 페이스의 행보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바꿔 말해, 현실은 이상과 달라서 악을 뿌리 뽑을 필요가 없다. 굳이 뿌리 뽑지 않아도 되니 적절히 용인하는 가운데 그 스스로가 악역을 맡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중도(中道)의 묘를 발휘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배트맨처럼. 누구에게? 미국 차기 대통령에게. 그러니까, 버락 오바마에게.

이와 관련, 최근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좋은 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무차별 공습을 감행하며 죄 없는 민간인을 사살하자 세계의 이목은 다름 아닌 오바마에게로 향했다. 동전 앞면을 선택해 말 그대로 이상적인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것인지, 뒷면을 선택해 전쟁을 묵인하며 자국의 이익을 추구할 것인지. 이스라엘에 대한 전 세계의 비난이 폭주하는 가운데 오바마는 “미국은 이스라엘의 안전을 약속합니다. 위협에 대한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합니다”라고 이스라엘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것이 바로 정치요, 현실이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하게 ‘배트맨’이 제목에 들어가지 않은 경우다. ‘어둠의 기사’(Dark Knight)라는 별명과 함께 배트맨을 지칭하는 또 하나의 이름은 바로 ‘망토 입은 십자군’(Caped Crusader)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이슬람에 파견한 군대. 세계 평화를 가져오겠다며 대선 전부터 기염을 토한 현실의 하비 덴트는 어둠의 기사가 되어 고담으로 변모한 가자 지구에서 망토 입은 십자군으로서의 맹활약을 예고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바마를 향한 충고는 멋지게 들어맞은 셈이 됐다. <다크 나이트>는 보면 볼수록 무시무시한 영화다.


영진공 나뭉

“다크 나이트”, 슈퍼 히어로는 필요한 것일까?

 


슈퍼히어로를 보면 나는 언제나 미국을 떠올린다. 안전하고 자유로운 자본주의 자유세계를 위협하는 빨갱이 베트콩이여,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라 일갈하며 그들과 전쟁에 나선 미국.
이런 미국의 영화 속 분신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슈퍼맨이었다.

당시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당시가 아니라 아직도 많다. 광복절날 시청 앞에서 성조기 흔드는 영감들은 여전히 지구를 지키는 슈퍼 미국을 신념으로 받들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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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말 미국이 슈퍼맨처럼 순수하게 의로운 목적만을 가지고 그 많은 전쟁을 벌였던 것일까? 단지 지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베트콩들은 정말 지구의 평화를 파괴하는 악의 무리고,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아프가니스탄, 후세인과 이라크는 정말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우주 몬스터일까?

그러나 미국이 물리치지 못한 베트남은 여지껏 지구를 정복하려는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악의 무리 이라크는 지구 평화를 파괴한다는 대량살상무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라크는 배럴당 석유생산비용이 가장 적다는 다이아몬드를 갖고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슈퍼맨으로 상징되는 슈퍼히어로 미국은 지구의 평화를 지키려는 순수한 의도 따윈 없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자신의 슈퍼파워를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우주 악당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우주 악당들은 사라졌지만 지구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뉴스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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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 정도까지 와버렸다. 부시 미 대통령의 지지율은 계속 바닥을 치고 있고 사람들은 의심하고 있다. 과연 슈퍼한 히어로라는 존재가 정녕 우리 평범한 시민들의 삶에 필요한 것일까?

그래서 <스파이더맨2>가 나온다. 슈퍼 파워를 지니고 있는 피터는 집세도 못 내고 있다. 슈퍼 파워를 가지고 있으면 뭐하나? 공립학교 지원금은 줄어들고, 복지예산은 삭감되고, 각종 보조금은 폐지되고, 길거리엔 노숙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피터는 그래서 슈퍼 히어로 미국의 내부를 돌아보는 최초의 히어로였다. <스파이더맨3>에 기대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슈퍼 파워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드러나려나? 하지만 피터는 역시 슈퍼 미국의 피를 물려받은 히어로답게 성조기를 휘날리며 악의 무리 샌드맨을 두드려 팼다. 그리고 자신의 고민을 ‘젊은 시절 잠깐 방황이야말로 슈퍼한 인간의 매력이지’라는 뉘앙스로 포장하며 끝내 히어로 본연의 모습으로 리턴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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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우리의 질문도 바뀌지 않았다. 과연 슈퍼 히어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

이때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줄 흑기사를 자처하며 브루스 웨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다크 나이트>.

어쩌면 고담시와 배트맨으로 상징되는 미국이야말로 현실의 미국과 가장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시민들은 의료보험이 없어서 손가락이 날아가고 있는데, 정부는 최신 무기로 돈지랄 중이다. 그리고 이 시민들을 지켜야 하는 법은 투페이스 번트처럼 자본에 좌지우지되는 ‘두 얼굴의 사나이’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기존 배트맨의 만화 같은 영상을 벗고 고담의 리얼리티를 살려놨다. 현실 같은 고담은 미국의 현실이다.

지구의 평화를 지키려면 물론,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도 있어야 한다. 처음 등장하는 악당은 갱들. 이들의 무기는 돈줄, 바로 현금이다. 배트맨과 경찰은 이 대량살상무기 현금을 찾아내려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량살상무기 현금을 찾아내 없애버리는 사람은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슈퍼 악당 ‘조커’다.

그렇게 조커는 말한다.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악당을 찾아 없애면 지구의 평화가 올 거라고 생각해? 후세인이 사라졌지만 지구에 평화는 오지 않았어. 그루지아와 러시아는 전쟁을 시작했고, 중국은 티베트를 유혈 진압했으며,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아닌 소수민족이 중국에서 테러를 일으켰어. 끊임없이 우주 악당을 만들어내 자신의 슈퍼함을 과시하는 것으로 지구의 권력을 장악한 네가 까먹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지. 우주 악당이 없다 해도 지구는 평화로운 동네가 아니야. 혼란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 바로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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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구는 평화로운 동네가 아니다. 슈퍼 악당이 있건 없건 간에 혼란은 있기 마련이다. 조커는 지구 정복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슬프지만 혼란이란 그런 거고 우리 사는 삶이 그런 거다. 그런데도 슈퍼 히어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슈퍼 악당을 찾아내 평화를 지키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혼란을 슈퍼 악당이라고 부추기며 전세계에 전쟁을 일으키는 미국. 그리고 덤으로 배럴당 생산비용이 가장 싼 석유까지 챙겨가는 미국. 그렇다면 과연 누가 슈퍼 히어로고, 누가 슈퍼 악당일까? 과연 슈퍼 히어로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조커는 그래서 배트맨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너의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고담시는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다. 미국이 슈퍼 히어로라는 가면 속 정체를 밝히지 않고 슈퍼 악당을 찾는 전쟁을 계속하는 한 지구촌 역시 혼란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그리고 배트맨은 이제 고민해야 한다. 정체를 밝힐 것인가, 말 것인가.

배트맨은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굉장히 상식적인 답을 한다. 이제 혼란을 바로잡는 일은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법을 지키는 검사 하비 덴트가 맡아야 된다는 답. 비록 그 법이라는 것이 고담시에서는, 그리고 고담 같은 미국에서는 ‘투페이스 던트’처럼 두 얼굴의 법이지만 그래도 혼란을 바로잡는 일은 슈퍼 파워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법이 맡아야 한다는 상식적인 답. 자신의 슈퍼 파워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게 도울 뿐, 진정한 슈퍼 히어로는 배트맨이 아니라 ‘법’이여야 한다는 답. 상식을 뛰어넘는 슈퍼한 놈들만 판치는 히어로의 세상에서 만나는 상식적인 답이란 그래서 놀라운 것이다.

“슈퍼 히어로는 과연 필요한 것일까?”

결국 우리의 질문에 대한 배트맨의 답은 이런 것이다.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배트맨, 스파이더맨, 슈퍼맨처럼 슈퍼 파워를 가진 히어로가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과 일반인의 정서를 담은 이 시대의 법이 바로 슈퍼 히어로가 돼야 한다.”

그래서 <다크나이트>는 슈퍼 히어로 미국을 부정하는 가장 진보한 슈퍼 히어로다.

*

미국은 이처럼 영화가 정치를 앞서간다. 이라크 전이 한창일 때는 남의 집구석 걱정하지 말고 우리 집구석이나 잘 챙기라며 집세를 걱정하는 슈퍼 히어로 <스파이더맨2>가 나오더니, 맥케인과 오바마의 대선을 앞두고는 미국은 슈퍼 히어로가 되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놓고 질문을 던지는 <다크나이트>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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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게 있다면 그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이런 것 아닐까? 시대를 앞서 먼저 상상하고 창조하는 이정표의 역할. 게다가 이 영화는 진지하게 각잡고 사색하는 영화가 아니라 남녀노소 단체관람에 무리없는 블록버스터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정치를 앞서는 영화를 만나기 어렵다. 밤 12시까지 보습학원 보내고 입시학원 보낸다고 인간의 창의력이 늘어나진 않는다. 놀란 감독은 7살 때부터 영화를 찍었고, 문학을 전공했다.


영진공 철구

“다크 나이트”, 변두리 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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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람은 누구나 칭찬하고 저도 손가락 아프게 칭찬을 해서 더 덧붙일 게 없는 <다크나이트>, 그러나 이 영화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레이첼이 별로 예쁘지 않다’는 둥의 시비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약간 아슬아슬하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전편부터 좀 지나치게 사실성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 전체에서 배트맨이라는 존재의 괴상함이 갈수록 눈에 띄게 되지요.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에서는 지극히 만화적인 주인공 배트맨과 전혀 만화 같지 않은 상황설정 사이의 긴장이 흐릅니다. 지금까지는 놀란 감독의 놀란 연출력으로 그 부조화가 적절히 통제되어 왔지만 앞으로 영화가 사실적이 되면 될수록 배트맨은 더욱 더 이 세계에 안 어울리게 될 겁니다.

요즘 웹에서는 배트맨의 그 낮게 깔아대는 목소리를 풍자한 동영상이 인기던데, 이것도 그 어색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보시려면 여기로 http://dory.mncast.com/mncHMovie.swf?movieID=10088538620080812161322&skinNum=1)

이번 영화에서도 초반부 배트맨의 등장과 액션을 돌이켜보면 “도대체 쟤는 왜 사서 저런 고생을 한다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혼자서 그 잔챙이 마약범죄자들과 자경단까지 상대하면서 투닥거려야 할까요. 아무리 힘이 세고 무술을 잘 하고 돈과 기술로 처발랐을지라도 결국 개인에 불과한 배트맨이 그 넓디넓은 고담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잔챙이 악당들도 “고담에서 배트맨을 만날 확률은 로또 당첨확률 수준”이라지 않습니까. 하지만 웨인 군은 굴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들을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서 해결하려고 매달리죠. 홍콩에서의 액션은 그 백미입니다. 웨인 군은 자신의 놀라운 헹글라이딩 기술 + 최첨단 EMP 공격기술 + 냉전시대에 CIA가 개발했던 ‘스카이후크’ 까지 써가며 마피아의 돈세탁 업자를 홍콩에서 납치해 옵니다. 멋지긴 합니다만, 좀 과하다는 생각도 들죠. 그 스카이후크 수송기 복원 및 운용비용이라면 아마 고담시의 마피아 조직 한 두개를 사 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사실 부르스 웨인의 재력이라면 팔코니 조직 전체를 사 버릴 수도 있겠고, 사회보장제도와 인프라를 확충해서 그런 범죄자들의 이익을 빼앗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마피아를 잡아먹는 것이 도시의 정의 구현에는 오히려 훨씬 효과적이겠죠. 하지만 배트맨은 늘 일인 자경단으로 나서는 고생을 사서 합니다. 왜? 그래야 하니까…


원래 내가 좀 그래…

게다가 이 배트맨의 돈지랄은 마음이 가난한 악당 조커의 등장으로 더욱 더 그 삽질스러움을 노출하고 맙니다. 배트맨과 조커는 말 그대로 대척점에 있습니다. 배트맨에게는 지킬 것만 잔뜩 있는데, 조커는 바로 그것을 모두 파괴하려고 하죠. 배트맨이 믿음에 매달린다면 조커는 불신을 키우려 헌신합니다. 그리고 배트맨이 결국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하이테크 무기로 전쟁을 벌일 때, 조커는 돈을 불태우며 지극히 로우테크 무기로 달려듭니다.


자~알 놀고 계십니다 …

이 하이테크 돈지랄 vs 로우테크 막장정신 대결의 대표적인 장면이 호송차량을 둘러싼 액션이죠. 배트맨의 수천만 달러짜리 배트모빌 텀블러에 대결하기 위해 조커가 내놓은 무기는 자그마치 RPG입니다. 2차 대전 막판에 막장까지 몰린 독일이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대전차무기, ‘판저파우스트’에 크게 데었던 소련이 이걸 충실히 계승, 발전시켜 만든 로켓발사기죠. 막장무기의 후예답게 값도 싸고, 만들기도 쉽기 때문에 이 RPG는 베트남에서부터 아프리카와 중동의 거의 모든 전쟁터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고, 늘 기대이상의 활약을 했습니다. 멀리는 1970년대 4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 전차부대를 괴멸시켰고, 근래 들어와서는 아프간에서 러시아 기갑부대를 괴롭혔고, 최근에는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블랙호크 헬기를 2대나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며, 지금도 이라크 전쟁터에서 미국과 영국이 자랑하는 신형전차 M1A2 나 챌린저2 들에게 뜻밖의 일격을 가하고 있죠.


제 3세계 게릴라들의 2대 필수요소, RPG와 AK47


이것이 나의 무기라능 …

바로 그 RPG7과 텀블러, 이 대결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최신형 복합장갑으로 무장한 전차에게도 타격을 입히는 RPG7인데 경장갑 장갑차에 불과한 텀블러가 뭐 어쩌겠습니까. 물론 텀블러 쪽이 좀 더 적극적인 공격을 했다면 승부는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만, 배트맨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는 지키는 쪽이고 조커는 공격하는 쪽이거든요.

변두리 산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플래툰이라는 잡지에서 읽은 건데 직접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싸구려 구식 라이플이나 구식 권총도 최신식 소총과 마찬가지로 당신을 확실히 쓰러뜨릴 수 있다.”
아무리 구식이고 낡은 총이라도 발사만 될 수 있다면 인명을 살상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 상대가 수백만원짜리 무기로 무장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총에 맞으면 누구나 죽거든요.
로우테크면 어떻습니까? 장갑차를 부실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데요.


작동 불량인 리모컨이라도 결국 폭탄 터트리면 되는 거 아니냐능 …

이 영화에서 조커와 배트맨의 대결은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변두리 산술 + 막장 정신으로 무장한 조커가 장비나 기술이나 정보력 모두 우위에 서 있는 배트맨을 계속 골탕 먹입니다. 조커는 더 이상 빼앗길 것도 망가질 것도 없는 존재이고 배트맨은 모든 것이 손실의 대상이거든요. 세상이 원래 그렇습니다. 많이 가진 자일수록 빼앗길 것이 많아 약점이 늘어나고, 가진 것이 없을수록 더 잃을 것도 없기에 오히려 약점이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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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패라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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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테면 쳐봐!!!


참고로 이때 들고 나온 총은 S&W에서 만든 M76이라는 싸구려 기관총인듯 …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일도 결국 조커와 배트맨의 대결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배트맨처럼)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미군들이 (조커의 드럼통 폭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원격조종폭발물에 끊임없이 죽거나 불구가 되고 있습니다. 침략자를 죽이기 위해 내가 죽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은(오히려 그렇게 죽으면 저승에 가서 신이 내리는 큰 상을 얻는다고 믿는) 그들 앞에 미군은 약점투성이의 배트맨일 뿐입니다. 작금의 사태를 유발한 911 테러부터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 경악스런 테러를 실현하기 위해 테러범들에게 필요했던 장비는 커터칼 몇 자루 뿐이었죠. 나머지 테러 장비는 미국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로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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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와 원격조종급조폭발물에 당한 미군의 비싼 탱크와 장갑차들 …


이건 아무래도 911 테러를 연상시키는 …

우석훈 박사의 <88만원 세대>를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럽의 그 선진적인 사회보장제도나 소수자를 배려한 정치제도가 완성된 시기가 대부분 우파 정부 시절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우파정부는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들이 왜 좌파 정부가 할 법한 일을 했을까요. 그게 바로 부자들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죠. 가진 것이 많을수록 약점이 늘어나고, 인생 막장에 몰린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자신들이 위험해지거든요. 그래서 부자들이, 권력자들이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에게 신경을 써야 하는겁니다.


니 랑보르기니나, 내가 탈취해 타는 경찰차나 산쾌하기는 마찬가지고 …
속은 내가 더 편하다능 …


영진공 짱가

추신: 요즘 꼴을 보아하니 우리나라 부자들은 별로 그럴 생각이 없더군요.
자기들이 먼저 막장테크를 타거나 아예 우리나라를 떠버리는 쪽을 선택하데요.
참 잘 하는 짓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커 패러디 광고 … 근데 나는 버거킹이 더 좋다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