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공 62호]첫 사랑의 미니홈피에 갔다가..

재외공관소식
2006년 10월 31일

자주 가는 동호회에 갔더니, 첫 사랑의 미니홈피 이야기가 올라와.. 옛날 생각이 나서 그냥 끄적끄적. 마눌님은 내 블로그에 오지 않으니 이 글을 볼 리 없고, 봐도 어차피 10년도 훨씬 이전의 이야기다 보니, 그냥 이해하리라 생각에 적어 본다. ( 그래도 무지하게 조심스럽다. 아내가 애를 낳더니 폭력 성향이 되어 툭하면 발길질인지라. -.- )

첫사랑은 고3 여름에 동네 독서실에서 만난 동갑내기 여자였다. 예쁘다기 보다는 늘씬했고, 착하다기 보다는 똑똑했고, 무엇보다 무지하게 웃겼다. 딱 내 이상형이었는데, 독서실에 붙어있는 휴게실에서 혼자 사발면 먹고 있고 있기에, 내가 집에서 김치를 가져다주면서 사귀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 가지고 있는 여성관.. 이라고까지 하면 거창하고. 여자를 대하는 방법이나 여자들의 생각 같은 것은 다 그 친구에게 배운 것이지 않을까 싶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를 봤을 때 물어 봤었다.
“저렇게 치마 짧은 여자들을 보면, 어디다가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겠어.”
“다리에다가 시선을 둬.”
“헉. 그러다 변태 소리 들으면?”
“침 흘리면서 보지 말고, 감탄과 존경의 눈빛으로 보면 되. 저 여자 다리를 다시 봐봐.”
마침 지나가던 여자의 다리를 쳐다보는 내 얼굴을 그 친구가 보더니.
“안 되겠다. 그렇게 쳐다보면 따귀 맞겠다.”
그러고는 그 다음 날인가. 짧은 치마를 입고 와서
“자 이제 내 다리를 봐봐.. 아니, 아니, 그런 밥 먹다가 밥풀 튈 때 짓는 표정 말고. 그래. 그래. 아름다운 예술품을 감상하는 그런 표정. 됐어. 그렇게 보는 거야.”
이런 걸 가르쳐 줬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웃긴 친구였다. 어디서 바바리맨이 출연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현장검증을 한다며 사진기를 들고 나를 끌고 가기도 했고, 공부 잘하는 암시를 걸어 준다며 로프로 내 두 손을 묶은 채 한 시간 동안 반야심경을 틀어주기도 했었다. 심지어는 여자 꼬시는 법도 알려 주기도 했고, 여자들에게 호감을 얻는 방법 등에 관한 시나리오를 작성해서 나와 모의 훈련을 하기도 했었다. 나중에 개그우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친구에게서 배운 아이들의 인생이 걱정도 되지만, 더불어 그 아이들이 자라면 이 세상을 보다 즐겁게 만드는데 일조할 것 같은 믿음도 생긴다.

나에게 영어 과외를 시켜줄 정도로 공부 잘 하던 친구였는데, 어쩌다보니 나만 대학에 들어갔고, 그 친구는 재수를 하게 되었다. 대학 1학년 때는 누구에게나 전성기 아니던가? 날마다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 가다보니, 새벽까지 도서실에서 악착같이 공부를 하던 그 친구와 만나는 일이 뜸해졌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한 달에 한두 번 만나게 되며 우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어느 날 서클에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생겼고, 그 여학생과 사귀기 전에 말을 해야 될 것 같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대학교 1학년 여름, 도서실 앞, 놀이터에서 그 친구에게 헤어지자고 말을 했다.

그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늘 유쾌한 커플이었다. 둘이 있으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각자, 혼자 있을 때는 썰렁하다는 소리를 듣는 우리였지만, 같이 있으면 어떤 모임에 참석하건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개그 콘테스트에 커플로 나가 보라는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날. 참 우울했다. 내가 아무리 웃겨도, 그 친구는 웃지 않았으니까. 뜨거운 여름 밤,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내가 일어서자, 나를 바라보며 “안녕”이라고 말하며 짓던 아픈 미소가. 그리고 얕게 앉아 있던 촉촉한 그 눈물이.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참을 아른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해에 그 친구가, 정말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아무쪼록 즐거운 대학생활이 되기를 가슴 속 깊이 바랬었다. 그렇지만 뒤에 들은 이야기로, 그 친구는 도서실을 나가며 내 욕을 진탕 했단다. 저주를 섞어서. -.-

남자는 첫 여자를 평생 기억하고, 여자는 마지막 남자를 평생 생각한다고 했던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까지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아직도 가끔 생각나는 사람은 그 친구 하나다. 처음 사귀어 봤던 여자였고,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았던 나이였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도 넘쳐났던 시기였다. 내가 그 친구에게 잘못한 것이 있었다면, 채 익지 못했던 내 배려 때문이었으리라. 몇 년 전, 갑자기 그 친구 생각이 나서 그 친구의 미니 홈피에 들어갔는데, 사랑에 관한 50항목 정도의 설문조사를 적은 글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 내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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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형 -> 키 크고, 잘생긴데다, 돈 많은 남자 ( 그런데 그런 남자는 나를 싫어함 ㅡ.ㅡ)
첫사랑 -> 고3때 그 놈.. 배 나오고, 못 생긴데다, 돈도 없었는데.. 그런데… 그 놈에게 차였음. -.-
그래서 1년간 그놈 인형을 만들고 매일 바늘로 찔러 줬음. 그 놈.. 그때 살았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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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20살때.. 1년간..
죽도록 머리 아픈 날이 많았더랬다. -.-;

* 이제 장사꾼이 다 되었나 보다. 그 친구의 미니홈피를 뒤지던 기억을 회상하며 “부두인형을 파는 쇼핑몰을 만들어 볼까.”라는 생각이나 하다니. 찾아 보니 한국엔 쇼핑몰이 없어 보인다. 커플용품 파는 분들이라면 참고해 보시길.

* 결혼을 하니까, 그 이전의 모든 기억은 꺼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된다. 사실,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아내와 연예할 때 “다 용서해 줄 테니까, 첫사랑 이야기를 해 줘봐.”라는 꼬임에 빠져서 아내에게 해 준 이야기다. 덕분에 한 달간 두들겨 맞았다. 미혼 남성들이여 참고하시라.

영진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산하
성역사연구회 과장
짬지(http://zzamziblo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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