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걸>, 이해와 공감을 넘어 새로운 연대와 실천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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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가 끝난 캘리포니아의 어느 포도밭에서 젊은 여자의 시신 하나가 발견됩니다. 영화는 시체를 처음으로 발견한 여자(The Stranger), 시체를 부검하는 여자(The Sister), 그 젊은 여자를 죽게 만든 연쇄살인범의 부인(The Wife), 죽은 여자의 엄마(The Mother), 그리고 죽은 그 여자(The Dead Girl)의 이야기를 차례로 보여줍니다.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진행 중에 교차하지는 않고 단순 배열되는 구성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 혼란을 느끼거나 할 일은 없습니다. 연쇄살인에 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범인을 밝혀내고 응징하는 과정을 그린 스릴러물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의 삶과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석의 여지에 따라서는 사회성 강한 여성 영화로도 충분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정 사건과 관련이 있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병렬해서 보여주는 방식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아모레스 페로스>(2000), <21그램>(2003), <바벨>(2006))의 그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데드걸>의 에피소드들은 죽은 여자와 관련성이 가장 적은 인물로부터 시작해 점점 가까워지다가 결국 죽은 여자 본인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끝맺는 나선형 플롯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관련성이 적은 인물들의 이야기에서는 빛과 어두움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인물 각자의 감정을 드러내고 전달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는 반면 사건의 전말에 좀 더 가까운 인물과 죽은 여자 본인의 이야기를 다룰 때에는 훨씬 밝은 색감으로 전체 내러티브를 명확하게 마무리 하는 데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데드걸>을 보면서 떠올리게 되는 또 한 편의 영화는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의 <나인 라이브즈>(2005)인데요, 마찬가지로 여러 등장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을 병렬하는 구성 방식과 무작위로 채택된 듯한 각 에피소드들이 결국 하나의 동일한 감정과 주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데드걸>은 후반부로 갈수록 전체 내러티브의 완결성에 신경을 쓰면서 초반에 일궈놓은 감정의 깊이를 많이 깎아먹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바꿔 말하자면, 토니 콜레트와 로즈 번, 그리고 메리 베스 허트가 연기한 3개의 에피소드가 서로 간의 연관성을 깊게 갖고 있지 않는 대신 각자의 이야기와 감정을 좀 더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는 반면 마샤 게이 하든(죽은 여자의 어머니)과 브리트니 머피(죽은 여자)의 이야기는 전체 내러티브의 발단에 좀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면서 사건의 후일담과 경위를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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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다섯 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동일한 주제와 감정으로 수렴됩니다. <데드걸>은 미국 사회, 나아가 남성 중심 사회와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공통된 구조적 모순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데에까지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영화는 그런 상황 안에 놓여진 여성들의 입장과 감정을 전달하는 일에 주력합니다. 벌어지는 현상은 많은 여성들이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버림 받거나, 버림 받는 것이나 다름없이 가정 내에서 소외되거나, 그 중 일부는 납치되거나 살해되거나 때로는 매춘을 하며 온갖 위험 앞에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지만 <데드걸>이 담아내고 있는 내용들은 현상의 일부이거나 그로 인한 결과들일 뿐이지 근원적인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와 가정 내에서 소외되고 상처받는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 그 감정을 전달받고 공감하는 일은 결코 가벼이 생각될 부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무엇인가를 해나갈 수 있게 만드는 진정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데드걸>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대 담론을 꺼내놓기 보다는 이해와 공감, 그리고 여성들 스스로의 각성과 연대를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죽은 여자의 팔뚝에 새겨진 12:13이라는 문신은 창세기 12장 13절의 앞부분인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The Sister)라 하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죽은 여자의 어린 딸이 태어난 12월 13일을 의미하는 숫자였습니다. 여성의 탄생과 자매애를 연결시키는 이 영화는 죽은 여자의 어머니가 버려진 손녀를 찾아 거둬들이는 후일담을 보여줌으로써 비극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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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걸>의 등장 인물들은 죽은 여자를 중심으로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처해진 상황과 해결 방식이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처참하게 살해된 시체를 보고 그런 모습으로 죽어서라도 발견되어지길 원했던 여인(토니 콜레트)이나 과거의 것들을 모두 불태워버림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여인들(로즈 번, 메리 베스 허트)은 자기 삶의 주체로서의 각성과 새로운 출발을 보여주거나 암시합니다.(out of being “Taken”) 그리고 자동차 앞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 조차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던, 그래야 한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그녀(브리트니 머피)는 비록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지만 그녀가 낳은 새로운 생명은 누군가 나서기만 한다면 급한 대로 방치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고 여건이 되는 대로 좀 더 안전한 카시트에 태워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데드걸>의 시도는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수준의 ‘재발 방지’ 내지는 ‘비극적 결과의 최소화’라고 평가 절하될 필요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작더라도 바로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 방식일테니까요.

모두에 언급한 ‘영화 초반의 감정적 깊이가 후반으로 가면서 점차 희석되고 내러티브의 구체화에 비중을 둔다’는 인상은 어쩌면 <데드걸>의 여성 감독 카렌 몬크리프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였다고 생각됩니다. 관객에게 전달해놓은 감정의 골을 지속시키기 보다는, 그리하여 눈물을 글썽이며 카타르시스만 경험하고 끝내기 보다는 영화가 끝난 이후에 좀 더 이성적인 해석과 판단을 해주기를 바랬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안 감독 영화의 제목을 빌려 다시 표현해보자면 관객의 색을 건드린 이후에 새로운 계를 얻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데드걸>이 선택한 플롯 상의 전략이라는 생각입니다. <데드걸>이 전달해준 색과 계를 제대로 받아들인 관객이 극장 밖에서 기시감을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런 이슈들을 접했을 때에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될 것인지를 예상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데드걸>이 사건의 전말이나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응징하는 과정을 제쳐놓고 여러 주변 인물들의 감정과 후일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이유입니다.


영진공 신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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