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워3>편을 보며 다시 떠오른 막스 폰 시도우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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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그제 <러시아워3> 를 봤다.
영화가 어땠냐고? 결론만 말하면… 막장이었다.

동거니 형아 스타일의 격려를 얻어 좀더 길게 말하자면,
시나리오 작가가 딱 1g 정도 생각하고 만든 스토리를,
성룡과 크리스터커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망가져주면서,
간신히 아슬아슬 지탱해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 성룡과 크리스터커 아니었으면 정말 어쩔 뻔 했냐….

하지만 역시 이 두 주인공 덕분에 그래도 재미는 있다.
그동안 2편을 거치면서 이 둘이 쌓아온 일종의 공덕이 위력을 발휘하는 거다.
영화 자체도 전편을 우려먹는 에피소드들을 만빵 배치해 놓았다.

그리고 영화가 유도하는 대로 1편 부터 지금까지를 돌이켜 보자면
감회가 새롭기도 하다.

<러시아워> 1편은 분명히 성룡이 주연한 영화이긴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의 색채가 아주 강했다. 영화의 줄거리 자체도 LA에서 벌어지는 일에 생뚱맞게 성룡이 끼어들어서 벌이는 좌충우돌 아니었던가. 전해지는 실제 촬영장 분위기도 홍콩 영화 시스템에 익숙한 성룡이 도무지 홍콩식 무술장면을 찍을 줄 모르는 헐리웃 시스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해야 했던 쪽이었다. 그 결과 1편은 성룡이 나오는 헐리웃 영화로 완성되었다. 이 영화에서 성룡은 크리스 터커에 기대어 힘을 발휘하는 외지인이었다.

하지만 2편에서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진다. 일단 배경이 홍콩으로 바뀌면서 성룡의 영화 장악력이 더 커지고 장쯔이 같은 굵직한 중국쪽 조연이 합류하면서 무게추는  더 그쪽으로 기울었다. 물론 중심 악역인 존론이 상징하듯 여전히 헐리웃 시스템이 전체를 담당했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런데 이번 3편은 거의 완전히 홍콩영화 판이다.
간단히 말해  크리스 터커가 나오는 홍콩영화가 된 것이다.

마지막 에펠탑 액션신을 보라, 그 장면에 등장하는 미국인 배우는 크리스터커 뿐이다.
악역은 일본배우 사나다 히로유키, 나머지 악당들도 죄다 아시아인들, 심지어 위기에 처한 여인마저 아시아인… 분명 배경은 LA에 파리인데 이런 인물 구도는 영화 내내 계속된다.



영화 <링>과 장동건이 출연했던 영화 <무극>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사나다 히로유키

게다가 영화 전체 분위기도 딱 홍콩스럽다. 물론 좋은 뜻은 아니다.
온갖 유명한 영화에서 이것 저것 따와서 대충 짜깁기한 것 같은 이야기 구조,
중간중간 등장하는 말꼬리 잡기 농담(유씨와 미씨를 이용한 농담 같은)들이
딱 80년대의 양산품 막장 홍콩영화 분위기라는 얘기다.

나이트클럽(극장?) 장면은 거의 주성치식 코미디 영화 수준에 근접할 정도로 막나간다. 하지만 그게 재미있으니 어쩌랴. 성룡이 아니었으면 욕 나왔을테지만, 바로 성룡 때문에… 80년대 홍콩영화도 주윤발, 이수현, 장국영, 주성치 등등 지명도 있는 몇몇 배우에 의존해서 했던 얘기 또하는 자가반복의 연속이었지만 당시의 우리들은 그걸 또 충분히 즐겼지 않았나. 딱 그런 분위기다.

간단히 말해 80년대 홍콩영화를 즐기던 마음으로 돌아가면
이 영화는 충분히 무지무지하게 즐길 수 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 장면 직후 성룡이 등장하는 순간이 이 영화의 최고 명장면이라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이 영화에는 또 다른 유명인이 한명 등장한다.
바로 명배우 막스 폰 시도우 옹이시다.


바로 이 분!!!

1928년 스웨덴 출생, <엑소시스트>의 노 신부님역과 <정복자 펠레>의 참 실감나는 무력한 아버지역으로 유명해졌고, <제7의 봉인> 같은 고전영화부터 최근의 <마이너리티 리포트>같은 대작 영화에까지 골고루 출연한 참 대단한 배우이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 배우를 그렇게 기억하지 못한다.
이 배우만 보면 떠오르는, 절대로 잊지못할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그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우선 영화 <저지 드레드>를 끄집어내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2세기쯤의 싱가폴이 이렇지 않을까 싶은…
플라톤의 <국가론>이 구현된 미래사회를 배경으로한 영화 <저지 드레드>

1995년에 영국에서 제작한, 역시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는
주연으로 당시 거의 인기의 끝물에 도달한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연을,
지명도 높고 매력발 날리던 여배우중 한명인 다이안 레인이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바로 막스 폰 시도우 옹께서는 매우 비중있는 역할인 이 플라톤식 법치국가의 원로 역을 맡으셨다.

영화의 초반부, 스탤론은 법집행자 군단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법집행자이지만
(영화 진행을 위해 당연히) 음모에 빠져들고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스탤론의 혐의를 판결하기 위해 소집된 최고법정

최고재판관들의 법정에 회부된 스탤론을 동료 법집행자인 다이안 레인이 열심히 변호하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변호사 다이안 레인

그만 스탤론의 유죄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등장해 궁지에 몰린다.
그 증거란, 법집행자들의 무기인 로-기버(Law Giver: 번역하니 법 제공기…-_-;;)는 모두 총쏜 사람의 DNA를 저장하는데 살인범죄에 사용된 로-기버에는 분명히 스탤론의 유전자가 기록되어있다는 것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에게 떨어진 선고는 사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뜻밖의 증거에 놀라는 스탤론과 다이안 레인

바로 이 순간, 막스 폰 시도우 옹께서 분연히 일어나 폭탄제안을 하신다.
원로원에게 스탤론의 사형을 유배형으로 감형해준다면 자기가 원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동네에서는 원로직에서 물러나면 전직 원로로 예우하는게 아니라 총 한자루 딸랑 쥐어주고는 범죄자의 땅으로 쫒아낸다. 말로는 거기서 법을 집행하라는 거지만 결국 나가 죽으라는 거다. 그런데 지금 시도우 옹은 바로 그 길을 가겠다고 자청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그 배경이 궁금하면 영화를 직접 보시라…


고뇌하는 막스

그리고 그가 이 놀라운 선언을 하는 장면에서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의 각인을 얻고야 만다.
그의 고뇌에 찬 연기가 인상깊었냐고? 유감스럽게도 그건 아니다. 물론 연기는 훌륭하다면 영화 전체 분위기가 “고뇌에 찬 연기 따위는 그냥 개에게나 줘버려” 분위기라…

그럼 뭐가 문제였냐. 아래 사진을 잘 보시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바로 이 장면

뭔가 눈에 띄지 않는가?
좀더 확대를 해드리겠다.


바로 이 장면!!!!


아직 안보이는가?

좀 더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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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둥!!!


그렇다. 그의 콧구멍 속에 코딱지가 하나 달려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서 무고한 주인공의 생명을 살리겠다는 심각한 선언을 하는 동안, 그의 코에 달려있는 이 코딱지는 그의 고뇌와 콧김의 흐름을 반영하며 미세하게 흔들린다. 이 장면은 거의 1-2분간 계속되는데, 그동안 그의 코딱지는 떨어지지도 않고 끝까지 달려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는 동안 나는 그의 코를 파주고 싶었다.
어찌나 파주고 싶었던지 온몸이 근질근질해질 지경이었다.
어찌나 안타까웠던지 그 장면에서 눈을 감기도 했고
눈을 감고서 이 장면이 버젓이 스크린에 옮겨질 때까지
분장사와 카메라 감독과 편집기사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눈을 떠보면 그런 니를 조롱이라도 하듯,
그 코딱지는 계속 그의 콧구멍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 막스 폰 시도우만 보면 나는 늘 그 코딱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의 코털에 매달려 미세하게 진동하던 그 코딱지…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볼 때도, 떠오르는 것은 그의 코딱지였으며
이번 <러시아워3>에서 그가 등장하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것도
바로 그 코딱지 였다.

앞으로도 막스 폰 시도우는 나에게 코딱지로 기억될 것이다.

여기에 이 글을 남기는 것도 (내가 변태라서가 아니라)
이렇게라도 하면 어떻게 시도우 옹에 얽힌 트라우마를 벗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아무래도 헛된 소망이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글을 쓰고 사진을 캡춰하면서 각인은 더욱 깊어졌다.

어쨌거나 그의 코딱지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P.S. <저지드레드>에는 조안첸도 나오고 

나중에 <듀스 비갈로> 등으로 유명해진 롭 슈나이더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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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짱가

이순신의 리더쉽과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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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인간 일반에 해당되는 것이든, 아니면 민족주의적 사고든 간에 한국인 혹은 한국문화 고유의 특성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국인의 장단점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한 인물, 이순신 장군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순신 장군은 한국인을 움직여서 불멸의 업적을 남긴 최고의 리더라 할 수 있다. 그는 17번의 주요 해전에서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 그 해전 중에는 12척 대 300여척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명랑대첩도 포함된다.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적이었고, 동시대의 그 어떤 해군조직보다도 강력했다. 그런 그가 한국인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한국인의 전통적 특성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인은 원거리 대면을 선호한다.

이순신은 절대로 부하들이 직접 적과 마주치치 않게 했다. 실제로 당시 전투기록을 보면 조선군은 성안에서 활을 쏠때는 강했으나 직접 적과 마주치는 전투에서는 거의 언제나 졌다. 조선군의 무기체제에는 활만 있을뿐 창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았다. 즉, 조선군은 먼거리에서 쏘기에 능했고, 적과 마주보고 육박전을 펼칠 각오는 절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순신 역시 거의 모든 해전을 원거리 포격전으로 해결했다. 일본의 해전은 육박전을 지향하는데, 그들의 장기인 육박전을 할 기회를 아예 주지 않은 것이다.

둘째, 한국인은 카리스마에 약하다.

임진왜란때 전사를 보면 앞서 말했듯 전면 격투전을 벌이면 조선군은 대부분 졌으나, 신기하게도 사상자는 별로 없다. 말 그대로 그저 사라져버렸다. 즉, 조선군은 직접 적과 대면하면 싸우기 보다는 그냥 도망쳤다. 예외는 곽재우나 권율같은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휘관이 있을때 뿐이다. 이런 명장의 지휘하에서 조선군은 그 누구보다도 악착같이 싸워 이겼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만약 지휘관이 죽으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모두 도망쳤다. 원균이 죽었다는 칠천량 전투에서도 사실 주요 장수들은 모두 죽지 않고 도망쳤다가 이순신이 부임하자 다시 기어나왔다. 이순신은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노량해전에서도 자신의 전사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천하무적 조선수군이 순식간에 종이호랑이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히딩크가 사라진 한국축구의 무기력 처럼 말이다.

셋째, 한국인은 이기적이고 실리적이다.

앞서 조선군이 질 것 같으면 다 도망가버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랬을까? 그들은 어쩌면 전쟁의 목적 같은 것을 공유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에서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내세우는 깃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체면은 중시했으나 명분은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명분이고 명예고 내가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이것이 그들의 모토였다. 한국인은 애초부터 이기주의자이자 실리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이순신은 자기 부하들이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가족의 안전을 자기 군의 안전이나 승리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부하를 믿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부하들을 늘 닦달했다. 그는 부하를 엄하게 처벌하고, 확실하게 포상했다. 훈련만큼이나 이 상벌체계의 유지에 최선을 다했다. 이 시스템을 통해서 이기적이고 실리적인 부하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덧붙여, 이 시스템을 거꾸로 이용한 이들도 많다. 선조가 대표적인 인물. 그가 임진왜란 내내 저지른 일이라고는 몰래 도망가기와 전공을 세운 이들 역적으로 몰아 죽이기 뿐이었다. 그 덕분에 단 한번도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는 원균이 수군통제사까지 되는 말도 안되는 일도 벌어지고, 그 원균이 당대 최강 조선수군을 단 한큐에 말아먹어버리는 블랙코미디가 벌어졌다. 어쩌면 이런 인간들이 위에서 오래 오래 군림한 탓에 한국인이 더 실리적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 유성룡이 선조의 미친 짓을 어느 정도라도 제어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그때 끝장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한국인의 성격이 디지털 매체로 인해서 변화했을까?
그렇지 않은 듯 하다.

1. 한국인은 원거리 대면을 선호한다:
디지털 매체는 원거리/간접 대면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한국인은 그걸 매우 좋아한다.

한국문화는 직면해서는 대화나 토론을 하는 일과 잘 맞지 않는다. 누군가는 조선시대의 활발한 당쟁이나 상소들을 예로 들면서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때의 논쟁도 서로 자신의 입장을 견고히하는 논쟁이었지, 관심사를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토론은 아니었다. 성에 들어가서 원거리 전투를 해야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나,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서 간접적인 논쟁에 실력이 발휘되는 것이나 어쩌면 비슷하다. 그리고 이런 특성은 보다 확실한 원거리 활동을 보장하는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에서 더 잘 발휘되었을수도 있다. 한국인은 애초부터 대면 만남보다는 원거리 만남을 선호하는 것이다.

2. 한국인은 대세와 카리스마에 약하다:
한국인은 주류를 매우 중시한다. 디지털매체에서도 결국 주류만 남기를 바란다.
멱함수의 법칙은 한국에서 더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한국의 3대일간지 점유율이 외국에 비해서 독과점수준임에도 아무도 그것을 문제시 하지 않는 이유, 이동통신이 결국 4자에서 3자로 조만간 2자 체제로 변화해가는 현상, 어떤 분야에서든 2개 이상의 강자가 남지 못하는 현상도 아마 이런 특성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은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확실한 강자와 그 라이벌 체제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오히려 불안해 한다. 한국인은 선택의 여지가 많아지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선택을 해야 하면 대부분 그냥 도망치고 만다.

3. 한국인은 이기적이다:
한국인의 유일한 신념은 자기 자신이다.
대부분의 매체는 결국 사적인 연결을 위해 사용된다.
공적인 의사소통은 매체 사용의 주류가 아니다.

한국인은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한다. 개인이 조금 확산된 가족 이상을 원치 않는다.
또한 한국인은 명분을 내세울지는 몰라도 절대로 그 명분을 믿지는 않는다.
집단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수 있을만큼 신념이 강한 사람은 한국문화에서 결코 정상이 아니다. 노사모가 완전히 수용되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런 지점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핵심은 결코 공적인 메시지나 학술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 배후에 깔린, 혹은 그 메시지의 사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책이나 어떤 선언이 발표되면, 그 선언의 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 공유자(가족, 친지)와 이를 공유하는 활동이 작동한다. 그것은 80대 20의 비율이상일 것이다.

4. 한국인은 이기적이되, 개인적이지는 않다:
언제나 대세를 따르기를 바라고, 대세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한다.
모든 정보기관의 촉각은 거기로 향한다.

개인주의는 신념을 필요로한다. 하지만 한국인은 신념을 믿지 않는다. 고로 이기주의자이지만 개인주의자는 아니다. 한국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 신념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대세이냐이다. 왜 한국 부자들이 한국에서는 돈을 쓰지 못하고 외국에 나가서 돈을 쓸까? 튀고 싶어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제대로 튈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취향이 없다. 그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 취향을 집단의 눈총속에서도 주장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자기의 취향이 소수인 곳에서 자기를 주장하기 보다는, 그것이 대세인 곳을 찾는다. 아니 대부분은 개인취향 자체가 없으므로 그냥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하는대로 따라서 외국으로 갈 뿐이다.

5. 한국인은 실리적이다:
질 보다는 양이 우선이다. 적은 비용은 카리스마 다음으로 중요하다.

명품바람이나 고급소비성향들이 부각되면서 사람들이 착각하게 된 것이 한국인의 소비취향이 고급화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양을 우선시한다. 같은 조건이면 가장 싸게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짝퉁을 선호하는 것, 공짜를 선호하는 것, 불법복제가 일상화되어 있는 것이 한국문화의 기본이다. 명품을 찾고, 프리미엄 서비스를 선호하고, 저작권에 예민한 것은 한국문화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중국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제품의 소구지점은 결국 카리스마와 가격 뿐임을 의미한다.


영진공 짱가

<일루셔니스트>, “우리나라에도 지존급의 마술사가 한분 계셨다.” <영진공 71호>

짱가의 ‘너 사이코지?’
2007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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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셔니스트

원래는 볼 생각이 없었는데, 최근 DC에서 아주 훌륭한 <프레스티지> 영화평을
읽고 흥미가 생겼다. 그 글을 쓴 이가 두 영화를 쌍둥이에 비유했거든….

본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무빅 기사 채울꺼리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일단 만족했고
영화의 이야기 자체도 특히 그 열린 결말도 만족스러웠다.

마술을 다루는 영화지만 정말로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프레스티지가 Trick을 부각시키는 반면
일루셔니스트는 Story를 전면에 내세운다.

프레스티지를 보면서는 저 마술은 어떻게 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계속 되지만
일루셔니스트는 그렇지 않다. 첨부터 아예 불가능한 마술만 잔뜩 나오니까.
영화는 대놓고 “이건 마술이 아니라 CG야.” 라고 말한다 .

문제의 팬던트 조차,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아이템이다.
그건 아예 CG를 쓰는게 아니라 두 장면을 이어붙였더군.
(그러고 보면 이 영화, 정말 돈 적게 들인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은 만든 이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이야기라는 점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영화의 주인공이 라이벌로 삼는 마술사는 동료마술사가 아니라 그 나라의 왕자다.
중간에 등장하는 엑스칼리버의 신화가 상징하듯, 왕권이라는 것도 결국 마술이라는 얘기다.
(전설에서도 그 엑스칼리버 신화에 마술사 멀린이 한 몫 하지 않았던가?)

결국 똑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왕족이고
누구는 평민이어야 하는 이유를 대중에게 납득시키는 것

결국은 국민들의 노력과 기술로 이룩한 업적을
(기여라고는 그 일이 되는 과정을 덜 방해하거나 아주 멍청하지 않았다는 점 밖에 없는)
지도층에게로 귀인시키게 하고, 자신들의 성취가 아니라 지도층의 위업으로
떠받들게 만드는 것

이 얼마나 대단한 마술인가!!!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도 지존급의 마술사가 한분 계셨다.

박정희 총통 각하…
(아, 북한에도 같은 급의 마술사가 대를 이어 통치하고 계시지.
김일성, 김정일 총통 각하)

저승 가신지 수십년인데 아직도 백성들은 그분을 신격화 하고 있으니
아이젠하임 따위는 그분 발끝에도 못미친다.

추가1: 저 포스터를 보면서 나는 자꾸 일루셔니스트illusionist를
일루미네이셔니스트illuminationist와 헷갈린다.
무관하진 않은 것 같더만…

추가2: 요즘 한반도 정세 돌아가는 것을 보면
김정일이야 말로 참 대단한 마술사라는 생각이..

사실 지난번 핵실험이 진짜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냥 TNT 잔뜩 모아놓고 터트린 다음, 방사능 물질 좀 근처에 뿌려주고 말았어도 똑같았을테니.
하지만 그 ‘실험’으로 전쟁주의자 부시에게서 타협을 끌어낸 것 아닌가.
이제 와서 “실험 가짜였어” 해도 아무도 안믿을거고
마치 “제가 한 건 전부 눈속임이었어요.” 라고 말해도 안믿던 일루셔니스트 사람들처럼 말이지…
결국 안하고서도 한 것과 다름없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이게 마술이 아니고 뭔가.

국립과학연구소장
짱가(jjanga@yonsei.ac.kr)

외과의사 봉달희: 한국에서 의사에게 부여된 코드는? <영진공 70호>

짱가의 ‘너 사이코지?’
2007년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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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테르 라파이유의 책 <컬처코드>에 따르면 미국인들에게 의사는 ‘영웅’이라는 코드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사람을 살려내는 사람, 죽음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알고 보면 3D 직종에 가까운 직업임에도 유능한 젊은이들이 의사가 되려고 몰려드는 이유도 이런 이미지와 관계가 많다. 이들에게 의사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기 이전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 그래서 돈과는 상관없이 가장 어려운 수술을 감당하는 심장이나 신경외과 의사들에 대한 동경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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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성에 대한 연구서 컬처코드, 내용은 좀 뻔하지만...


또한 영웅 이미지에는 자동적으로 인간적인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이 세상에 몰인정한 영웅은 없지 않은가. 따라서 의사들은 굳이 인간적일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자기 일을 제대로 하는 모습 그 자체가 이미 가장 인간적인 영웅의 모습이 되니까. [ER]이나 <하우스>, <그레이아나토미> 같은 의학드라마들이 인기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드라마에 등장하는 의사들은 죽음의 위험에 맞서 생명을 살려내는 짜릿함을 즐기는 전문가들이다. 하키로 부상당한 환자 옆에서 ‘하키시즌은 외과 의사들에게는 크리스마스’라고 흥얼거리는 의사나, ‘환자의 말은 절대 믿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괴팍한 진단의사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괴팍하더라도 남들은 찾아내지 못하는 병의 원인을 알아내고 정확한 진단을 내려서 환자를 살려내기만 하면 충분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전문가이기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는다. 애초부터 의사란 그런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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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하우스가 성격 좋아서 인기 있던가...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의사는 어떤 의미 혹은 코드가 부여되어 있을까?
<외과의사 봉달희>를 보면 아무래도 ‘전문가 영웅’은 아닌 것 같다. 이 드라마에서 거의 유일하게 설득력을 가진 캐릭터 봉달희를 보자.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전형적인 캔디 캐릭터이지만, 그녀는 뚜렷한 목표의식과 동기가 있으며 그에 걸맞게 움직인다. 물론 신참이기 때문에 실수연발이지만 그 실수를 통해서 성장한다. 이렇게 불완전하면서도 잠재력이 충만하고 선의로 가득찬 캐릭터는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이전세대의 캔디와는 달리 이 신세대 캔디는 자신의 감정에도 충실해서 마음에 드는 직장 상사에게는 적극적으로 대시를 해댄다. 현대여성의 감성까지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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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버젼 캔디'라지만, 그래도 생동감은 있으니



하지만 안중근이나 이건욱, 조문경은 얘기가 다르다. 분명히 외과 전문의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전문가적인 침착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감정 과잉이라는 것이다. ‘버럭중근’ 이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왜들 그렇게 버럭버럭, 쉽게 흔들리고 오바를 연발하는지… 하는 짓들만 보자면 이들은 전문의가 아니라 십대청소년들 같다. 물론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지만, 그 이유들이란 게 전부 ‘출생의 비밀’ 수준이다. 내 생전 이렇게 기구한 팔자를 가진 의사들만 모여 있는 병원은 처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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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기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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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만 그런게 아니라, 하나 같이 기구해...

어째서일까. 나는 이 드라마의 작가가 건드리고자 하는 의사에 대한 코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계속 ‘감정이 철철 넘치고,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권력관계와 상관없이 애정을 남발하는’ 의사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의사들에 대한 원래 이미지가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권력자’ 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의사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아예 <하얀거탑> 처럼 냉정한 권력자의 모습을 곧이곧대로 보여주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과장되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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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차라리 <하얀거탑>이 더 그럴듯 하다는... 이런 의사들만 봐서 그런지...

* 그레이 아나토미의 캐릭터들도 기구하긴 마찬가지이지만, 그 기구한 과거를 대하는 방식은 천양지차. 어떻게 된게 전문의들이 인턴 보다도 더 유치한건지…

국립과학연구소장
짱가(jjanga@yonsei.ac.kr)

<달콤, 살벌한 연인> – 두 가지 후회

짱가의 ‘너 사이코지?’
2006년 9월 13일


영화 <니모를 찾아서> 에서 아버지 멀린이 이렇게 한탄한다.
“나는 그 애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준다고 약속했었다구”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그건 불가능한 약속이야. 그리고…정말 아무 일도 안일어나면 더 큰일 아냐?”

이 영화를 보며 떠올린 대사다.

배리 슈워츠가 쓴 유명한 책 <선택의 패러독스>에 따르면 선택에 따르는 후회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지?” 라는,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잘못 저질렀다는 후회이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했어야 하는 일을 못했다는, “내가 왜 그걸 선택하지 않았지?” 후회다. 그런데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해버린 후회는 길어야 6개월만 지나면 사라지는 반면에,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다는 후회는 오래간다. 잘못 열어젖힌 문으로 인한 후회는 잠깐이지만, 열어보지 않았던 문은 끝까지 마음속에 남아서 나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이 책, 재미있습니다. 현대인의 심리를 이해하는 열쇠

이 영화에서 주인공 황대우(“박용우”)는 여자와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혈액형 성격론’ 같은 한심한 얘기만 읇어댈 뿐이라서 상종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더 나은 선택인 것처럼 보였다. 책도 안 읽고 인터넷 포털에 나오는 연예인 기사나 보는 유치한 여자들과 엮인다는 것은 그에겐 피하고 싶은 사고(accident)일 뿐이었다.

이 장면은 강의할 때 써도 될 듯, 신세대 비판론 핵심요약정리라고나 할까...

하지만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침대를 혼자 옮기다가 허리를 다친 이후 그는 우울증에 빠진다. 예전에는 그렇게 유치하게만 보였던 연애하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워 보이고, 쿨하게 혼자 지내는 줄 알았던 자신이 그저 외롭게만 느껴진다. 갱년기 증상도 아니고 요통이 원인도 아니다. 그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사이에, 지금까지 자기가 선택하지 않았던 길들에 대한 뒤늦은 후회가 쌓여서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야 그는 자신이 단 한 번도 사고를 치지 않았다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임을 깨닫는다. 이제는 연애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여자 앞에서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하는지,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연애백치가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일단 시작한 다음에는 평균이상의 지능을 가진 그는 충분히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처음에 연애를 시작하는 열쇠를 찾지 못했을 뿐.

백치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장면

그러나가 그는 미나(“최강희”)를 만나 마침내 연애를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여자는 하지 않아서 하는 후회보다는 잘못 사고를 저질러서 하는 후회를 더 많이 끌고 다니는 유형이니, 30세 이전의 그였다면 펄쩍 뛰면서 피했을 상대였다. 하지만 거침없이 다가와 첫 키스를 선사한 그녀 덕분에 그는 우울증에서 벗어나 행복을 경험하고 자신감을 되찾는다. 이 영화의 절반쯤은 첫 연애가 주는 황홀감에 취해 해롱거리는 황대우의 행태로 채워져 있는데 이게 정말 실감난다. 황대우와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쳐본 경험자로서 하는 말이다.

온갖 미친 짓은 다 하고...

영화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선택은 인생 최대의 사고였음이 밝혀지고, 덕분에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에 휘말린다. 하지만 무사고 인간 황대우에겐 미나가 가져다준 일련의 사고가 충분히 ‘좋은 일’이었다. 덕분에 그는 성장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녀 앞에서 말도 꺼내지 못해 벌벌 떨던 황대우와 2년 후 싱가폴에 도착한 황대우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영화, 애초부터 다 까발려져 있다. 제작비 9억이라니 별로 욕심도 안 낸 듯...

심지어 상대가 연쇄살인범이라 할지라도 연애를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 않아서 하는 후회는 평생 남는다.
사고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영화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을 잔뜩 쌓아둔,
서른이 한참 넘은 사람의 하나로서
나는 이 교훈에 100%로 동의한다.

국립과학연구소장
짱가(jjanga@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