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콘서트”, 감동적인 음악 영화의 정석





음악 영화 장르의 특징적인 패턴으로서 주인공이 음악을 연주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과 대체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주인공의 연주회 장면으로 마무리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래서 못마땅하다거나 반대로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건 아니고 그저 자주 그러고들 있더라는 얘기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이를 근거로 올리버 스톤 감독의 <도어스>(1991)나 올해 초에 개봉했던 크리스틴 스튜어트, 다코타 패닝 주연의 <런어웨이스>(2010)와 같은 작품들은 이미 훌륭한 음악 영화이기도 하지만 내러티브상 전기 영화에 좀 더 가깝다고 판단할수 있다.

전기 영화처럼 보였던 <카핑 베토벤>(2006)의 경우 사실은 픽션이었던 작품이었는데 ‘마지막 콘서트’ 이후에도 상당한 러닝타임을 할애하며 드라마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음악 영화의 컨벤션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난 모습을 추구했던 독특한 경우였다고 할 수 있다.




장르물로서의 음악 영화에서 마지막 연주회 장면은 대체로 하나의 곡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되면서 그 장면만을 따로 들어낸 비디오클립으로 감상을 해도 좋을 만큼 완결성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 대부분의 음악 영화들은 바로 이 마지막 연주 장면을 위해 달려나가고 마침내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식의 고유의 형식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 화려한 꽃봉오리만을 따로 떼어서 보는 것과 2시간의 러닝타임을 할애해서 풀버전의 장편 영화로 보는 방식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일까. 마치 한 편의 뮤직비디오처럼 해당 연주 장면만을 따로 보아도 눈과 귀가 충분히 즐거울 수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장편 영화를 통해 보았을 때 그 노래와 그 연주를 하는 이벤트에 어떤 사연이 담겨있는지를 좀 더 알 수 있다고 할까, 그래서 감동의 폭과 깊이는 자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









영화 내용과는 관련이 없는 얘기만 앞서 늘어놓긴 했지만 <더 콘서트>를 보면서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이라 어쩔 수가 없다. 이제 앞에서 언급했던 일반론에 맞추어 다시 풀어보자면, <더 콘서트>는 매우 대중적인 타입의 음악 영화이고 그래서 음악 영화의 장르적 패턴을 답습하는 작품이다. 주인공들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니나 다를까, 유명한 차이코프스키의 콘체르토를 연주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연주 장면만을 따로 떼어서 보더라도 짧은 감상의 가치는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볼쇼이 교향악단의 올드 멤버들과 지휘자, 그리고 프랑스의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파리의 콘서트홀에서 이뤄내는 감동적인 드라마의 맥락을 알지 못하면 이 연주 장면에서 눈시울까지 뜨거워질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 콘서트>는 이 마지막 연주 장면에 준비된 감동의 힘으로 작품 전체의 가치가 로켓처럼 단번에 수직 상승하는 작품인데 그런 감상을 제대로 받길 원한다면 반드시 장편 영화의 형태로 봐주어야만 한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더 콘서트>는 웃음과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아낸 음악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웃음의 포인트는 주로 싸구려 자본주의 국가로 전락해버린 현재의 러시아에 대한 풍자에서 주로 나오고 있는데, 돈을 주고 사지 않으면 거리 집회에서 사람들을 모을 수가 없는 공산당의 모습이나 볼쇼이 교향악단의 올드 멤버들이 파리까지 갈 수 있도록 스폰서가 되어주는 젊은 석유재벌에 대한 풍자도 재미있고 – 그의 어머니가 “차라리 PSG(파리 생제르망 축구단)을 싸게 사라. 그리고 메시도 사라”고 한다 – 우여곡절 끝에 파리에 도착해서 콘서트 준비 보다는 외화벌이에 정신이 없는 러시아 사람들(유태계라서 더 그런 점도 있긴 하지만)의 모습도 아주 터무니없게 보이지만은 않기 때문에 나름 ‘의미있는 웃음’을 선사해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중심 인물들의 음악과 삶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음악이라는 감옥에 갇힌 인생”이라는 대사처럼 일반적인 음악 애호의 수준을 뛰어넘는 진지함으로 작품 전체의 균형을 잘 잡아가고 있는 작품이 <더 콘서트>이기도 하다. 거의 광기의 수준에 가까운 음악가의 모습을 자주 영화 속에서 발견하곤 하지만 – 많은 음악 영화들이 그런 세계를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일에 집중하곤 한다 – <더 콘서트>의 인물들은 진지한 음악가들의 면모가 세밀하게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서 감정 이입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런 이유로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주인공들의 음악적 열정, 특히 엄청난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파리에서 콘서트를 갖고자 하는 동기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니 그 모든 준비 과정을 상당 부분 남의 일처럼 지켜보게 되는 측면이 있다.



사실은 마지막 연주 장면 중간의 나레이션과 플래쉬백조차도 등장 인물들의 음악적인 열정을 충분하게 묘사해주지는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대신 음악 보다 훨씬 더 보편적일 수 있는 감동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는 작품이 <더 콘서트>다. 그것은 다름아닌 30년 전 브레즈네프와 KGB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던 주인공들의 삶이 마침내 복원되는 극적인 순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코미디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볼쇼이 교향악단에서 쫓겨났던 연주자들이 다시 모여 파리에서 콘서트를 하게 된다는 설정 자체가 불가능했겠지만 이런 정도의 드라마라면 코믹한 요소를 제거하고 진지한 접근으로만 일관했더라도 – <타인의 삶>(2006)이 그랬듯이 – 얼마든지 의미있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으리란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더 콘서트>는 대중적인 음악 영화로서 대체로 허허실실하는 코미디 요소를 통해 전개되고 있는 영화이지만 마지막 연주 장면을 통해 놀라운 인간 드라마를 완성해내는 의외의 감동을 전해주는 작품이다.





영진공 신어지



“바스터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천재성의 재확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동시대의 몇 안되는 영화 감독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대중 영화에 있어 2시간에 걸친 일관된 내러티브의 틀이 반드시 필요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자신의 초기작들을 통해 이를 증명해낸 장본인이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었습니다. 영화 고유의 형식을 찾거나 조금이라도 새로운 영화 문법을 찾기 위한 형식 실험은 지금 이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이전과 다른 형태의 영화 형식을 선보이는 동시에 대중 영화로서 일반 관객들의 호응까지 모두 얻어내고 있는, 최근 20년 간 가장 성공적인 영화인으로 쿠엔틴 타란티노를 꼽는 데에 주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작품들의 성공에는 새로운 형식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기술적인 면에서 흠 잡을 데가 없는 탄탄한 연출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완전한 난장 영화를 선보이겠다고 해놓고선, 막상 만들어진 <데쓰 프루프>(2007) 를 보면 로베르토 로드리게즈 감독과 달리 그 꼼꼼하신 성격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70년대의 팝 컬처나 홍콩과 일본의 무협 영화들에서 끌어들인 자양분들을 새로운 관객들에게 선보이며 충분한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는 점들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특징 짓는 요소들이 되고 있습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쿠엔틴 타란티노 역시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진짜 천재는 아닐런지 모릅니다. 아카데믹한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던 덕에 기존의 영화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가 자신의 작품들에서 선보여온 새로운 취향의 컨텐츠들 역시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지역적으로나 계층적으로 한정되어 있었던 것을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와 재현해낸 것에 불과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일반 관객들의 눈높이에서 벗어난 책상 머리 위의 천재 보다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과 같이 – 여전히 모든 관객들과는 아닐지라도 – 영화 관객들의 입맛에 적절히 부응하는 동시에 새로운 경지로 선도해나가는 재능이 사실은 그 유효성 면에서는 훨씬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라인드 하우스>(2007) 프로젝트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새 영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Inglorious Basterds)>은 무엇보다 1940년대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2차 대전 영화라는 점, 그리하여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할 때 완전히 새로운 컨텐츠를 선보이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문제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롭다 할 수 있는 내용들이 일반 관객들의 시선에도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생각됩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스타 캐스팅을 마다하지 않는 대중영화 감독입니다. 데뷔작부터 줄곧 함께 해온 배우들도 있지만 <펄프 픽션>(1994)의 브루스 윌리스나 <킬 빌>(2003 ~ 2004) 시리즈의 우마 서먼과 같이 개봉 초기에 많은 관객들을 상영관으로 모아줄 수 있는 동시에 작품의 완성도에 공헌할 수 있는 스타들을 기꺼이 출연시키곤 했습니다. 관객들의 시선에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요소는 역시 브래드 피트가 출연한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꽃미남 배우에서 그치지 않고 좋은 연기자로 거듭나고자 노력해온 브래드 피트의 이력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새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서로가 윈-윈하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에서 한 명의 배우가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는 방식은 <킬 빌>에서의 우마 서먼이 유일했고 나머지 작품 속에서는 수많은 배우들이 떼거리로 몰려나와 제 역할을 마친 후에는 뜬금없이 죽어버리곤 해왔습니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서 브래드 피트의 역할도 작품 전체를 혼자 이끌어가는 식이 아니라 여러 출연진 가운데 한 명 – 일종의 관찰자이자 감독과 관객들의 대리인이기도 하지만 – 에 불과합니다. 브래드 피트의 몫은 <트로이>(2004)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가 아니라 코엔 형제 감독의 <번 애프터 리딩>(2008)에서의 비중 정도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의 프러덕션 초기 캐스팅에는 마이클 매드슨과 팀 로스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만, 중간에 판이 커지면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배우들이 빠지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수많은 유럽계 배우들이 출연하는 다국적 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는 최근 헐리웃 영화에도 자주 출연하고 있는 다이앤 크루거를 비롯해서 다니엘 브륄, 틸 슈바이거, 오거스트 딜, 미카엘 파스벤더와 같은 특히 주연급 독일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고 여기에 멜라니 로랑, 줄리 드레이푸스, 크리스토프 왈츠, 그리고 일라이 로스 감독과 마이크 마이어스까지 배역의 비중에 상관없이 등장해 허구에 불과하긴 하지만 히틀러와 괴벨스를 비롯한 나치의 수뇌부들을 파리 시내의 영화관 안에서 화형에 처해버리는 이 신나는(?) 프로젝트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게릴라 조직 ‘바스터즈’를 전면에 내세웠던 전쟁 영화가 어찌하여 영화관 안에 나치 일당들을 몰아넣고 유태인들의 원혼을 달래는 불놀이 영화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과 제작자인 와인슈타인 형제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 되겠습니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 참여한 수많은 배우들 중에서 깐느 영화제가 남우주연상을 선사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배우 크리스토프 왈츠는 유태인 색출 전문가 출신의 나치 경호대장 한스 란다를 연기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악역이긴 하지만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서는 히틀러나 괴벨스 보다 오히려 비중이 높은 인물로 등장하고 있지요. 한스 란다는 나치의 일당으로 최일선에서 유태인을 잡아들이는데 앞장 섰던 전범이면서도 나치 독일의 패전이 임박하자 연합군 측에 기밀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미국 시민권 등을 얻어 신분을 숨긴 채 목숨을 부지해온 진짜 ‘불명예스러운 바스터즈’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은 기록에 남겨진 역사적 사실 보다는 나치 독일에 대한 악감정을 노골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상상 속의 역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구에 불과하지만 인화성이 높은 350개의 영화 필름을 이용해 극장 안에 모인 나치 수뇌부를 불태움으로써 2차 대전을 끝낸다는 설정이나 연합군의 계획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호의호식하고자 하는 뻔뻔한 인물 한스 란다의 이마에 나치의 상징을 칼로 새겨넣는 마지막 장면은 2차 대전과 나치의 유태인 학살 문제를 바라보는 영화인 쿠엔틴 타란티노의 시각(또는 심판하고 싶은 욕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깐느가 크리스토프 왈츠에게 남우주연상을 시상한 것은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저수지의 개들>(1992)에서 팀 로스의 활약을 연상케 하는 탁월한 연기력을 인정해서만이 아니라 영화제가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 담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의도에 동조해준다는 의미, 그리하여 이 영화가 전세계 극장에 걸려 조금이라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봐주기를 바란다는 깐느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전후 50년을 넘기면서 전범 국가로서의 오명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는 최근의 독일 입장에서는 동조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프랑스인의 시각을 반영하는 깐느에서라면 충분히 납득을 할 수 있는 선택을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의 러닝타임은 152분으로 상당히 긴 편입니다. 영화가 들려주고자 했던 이야기의 분량을 고려했을 때 반드시 이 정도의 긴 러닝 타임이 필요했느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쪽입니다. 누군가 이 영화를 2시간 분량으로 줄여보라고 한다면 몇 군데 지나치게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던 씨퀀스를 대폭 줄이거나 또는 완전히 들어내더라도 전체 흐름에는 지장을 주지 않을 부분들을 충분히 짚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장만옥이 출연하는 장면도 있었으나 그나마 편집에서 잘려나가는 바람에 일반 관객들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는 – DVD 부록에서 확인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노릇이 되고 만 걸 보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가졌던 원래의 욕심은 152분 보다도 훨씬 더 크고 길었다는 점입니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특유의 씨퀀스들 – 관객에 따라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길고 긴 대화 장면들 – 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번 영화에서는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존 영화의 컨벤션에 매이지 않는 스타일 상의 자유분방함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영화의 강점이긴 하지만 이번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서 만큼은 누군가가 자제시켰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루함을 안겨주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코미디입니다. 근사한 폭력 미학을 새롭게 설계하는 측면도 있긴 하지만 그의 영화에 기반이 되어주는 코믹함을 배제한다면 현재까지 일궈왔던 관객들의 호응도 줄어들 수 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도 코믹한 요소들이 많은 작품이긴 하지만 그다지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필요한 만큼의 호응을 얻어내고 있지는 못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은 이제까지 다뤄보지 않았던 새로운 소재에서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특유의 독창성과 자유분방함을 잘 살려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작품인 동시에 그것이 적절히 통제되지 않았을 때에는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그리 멀지는 않지만 1940년대 나치 독일과 유럽 유태인의 잔혹사에서 건져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새로운 도전이 유태계 헐리웃 영화 제작사와 프랑스 영화계를 넘어서 전세계의 일반 관객들에게까지 공감과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런지는 지켜봐야 할 일입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