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결결이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


박민규의 책을 재미있게 읽기는 하지만, 썩 박민규의 팬인 것은 아닌지라 사실 살까 말까 몇번 망설였던 책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결론부터 말하지면, 나는 이 책이 박민규 특유의 ‘판타지’책이 아닐까 싶어 사기를 망설였는데, 누군가 ‘연애소설’이라고 알려주어 사게 되었다. 그리고 주말 내내 몇번을 여기 저기 발췌해 읽을 만큼 나는 이 책이 좋았다.

박민규 소설은 약간 나는 선호를 두게 되는게 “카스테라”같이 상징이 강하고 판타지가 가미된 것보다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방금 수퍼스타스. 라고 표기했다가 고쳤다) 마지막 팬클럽”같이 땅에 발 붙이고 있는 배경과, 땅에 발 붙이고 있는 상징이 있는 소설이 더 마음에 든다. ‘우주적 농담’은 한 두번은 웃을만 한데, 장편소설의 처음 부터 끝까지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암튼, 표지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제목만 보고, 나는 또 ‘우주적이면서 고딕적인’배경의 거대한 농담을 하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내용은 그저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에 있는 그 배경, 제대로 묘사되었다고 믿겨지는 그 시절에 대한 묘사. 그리고 결결이 아름다운 첫사랑 얘기에 그만 확 빠지고 말았다.

사람마다 감상은 아마 다 다를 것이다. 연애담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자기 연애랑 비슷하면 더 감동받기 마련이고, 더 감정이입 하기 마련이고, 또 그렇게 얼마나 자기의 연애를 소환해 내느냐가 소설의 재미의 대부분을 차지 하니까. 게다가 … 내가 남자들이 쓴 첫사랑이나 연애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남자작가들의 연애담은 소영웅의식이나, 자기연민이나, 모성결핍을 지나치게 벌리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처음 도입부에서 주인공 남녀의 선배인 ‘요한’의 현학적인 잘난척이 장광설로 늘어질때는 아 … 이거 데미안 류의 지루한 성장동화인가.(난 데미안 싫어한다) 하고 의심도 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개똥철학을 엄청 읊어대지만 사랑에 대한 추상적이고 자위적인 성찰에 그치지 않는다. 화자의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고, 또 그것이 화자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부여하고는 있지만 그 연애가 다시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자기연민이나, 본능에의 천착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담담하게 주변의 상황을 다 설명하면서도 결국은 사람하는 그 사람들끼리의 얘기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이 문단을 다 쓰고 보니, 내가 참 쉬운 얘기를 어렵게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난 대부분 스토리를 즐겨보고, 어떤 묘사나 글귀를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그 글귀를 옮겨적거나 하지는 않는 편인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는 기억하고 싶은 문구들이 너무 많다. 책을 늘 들고 다닐 수는 없으므로, 좋아하는 글귀들을 여기 블로그에 옮겨놓고 생각날때마다 온라인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실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번도 모리스 라벨과 밥 딜런을 좋아하고, 미셸을 좋아하고, 선인장 꽃과 더스틴 호프만을 좋아하는 여자애들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오빠. 나 오늘 이뻐? 그래 이뻐. 토요일날 행사장에 와 줄거지? 아니 안가. 흥 나 삐진다. 일이 있단 말이야. 그래도 그날 안 오면 절교야. 한번만 봐줘. 정말 집에 일이 있다니까.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 이를 테면. 그녀를 만나기 전의 세계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는 여자애들의 전부였던 것이었다. (p171)

신의 선물이란

아마도 그런 것일 거라,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서서히 회전을 멈추던 두 마리 목마와, 땅으로 돌아와 서로의 손을 잡던 두 사람을 잊을 수 없다. 돌아서 한참을 걸을 때까지 서로의 등에 묻어 있던 색색의 불빛도 잊지 못한다. 어두운 세계를 달려갈 버스를 기다리던 순간까지도… 그때의 불빛들이 숨 쉬듯 깜박이며 우리의 몸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벤치에 앉아 우리는 한 짝씩 이어폰을 나눠 꽂았다. 딸기밭이여. 영원하리. (p202)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p228)

그리고 감사합니다. 당신이 제게 준 빛이 있는 한… 이제 어떤 삶을 살아도 저는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매일 아침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여자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실은 이 길을 택함으로써 끝끝내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그러니까 저… 정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꼭 전하고 싶었어요. (p289)

여름이었을 것이다. 샤워를 하다 문득, 이별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고통보다도, 잠시나마 느껴본 삶의 느낌… 생활이 아닌 그 느낌… 비로소 살아있다는 그 느낌과 헤어진 사실이 실은 괴로운게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었다.
생활
생활
생활 (p301)

곳곳에 배경음악에 대한 설명이 있다는 것으로 ‘하루키적’이라는 평도 많이 올라와 있다. 그렇게 배경음악을 지정하기 시작한게 하루키라 하더라도 난 박민규쪽의 선곡이 훨씬 맘에 든다. 마치 내가 이응준의 단편들을 좋아하는 것 처럼. 이응준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의 장소묘사와 배경음악묘사가. 가끔은. “이 남자 내가 사귀었던 남자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정도로(소설가 이응준님 용서하세요. 그럴리가) 내 취향과 비슷하고 눈과 귀에 착 감긴다.

스토리 자체보다도 배경과 음악이 익숙해서도 소설을 좋아할 수 있다는 면을 생각해 보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나에게 참 좋은 소설이다.

영진공 라이

“나비효과”, 박민규 식 후회의 역설







뒤돌아 생각해보면 인생의 고비고비 갈림길마다 어디 한 곳 디뎌 똥물 아닌데가 있었을까? 맞다. 절절한 똥물에 우린 늘 좀 더 나은곳을 바라보고 후회하고 절망하고 도전하면서 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박민규가 절규했던 “프로”의 도전정신으로 발버둥을 쳐 대고 있었다. 아뿔사, 저런, 니미, 조또, 씨발, 젠장, 우라질 따위의 조건부 감탄사를 연발하며(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거의확정적조건부 감탄사) 인생의 갈림길에 대한 후회를 해내고야 말지 않았던가? 우리의 근엄한 대한교과서, 지령1호는 바둑아 놀자, 영희야 놀자 였건만 이 땅 어디에 한뛔기 놀만한 땅 한번 있던적 있더냐?

 

 

스포일러 듬뿍이라능 !!!!!

1.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자본주의의 노동갈취 공식인 프랜차이즈를 벗어나는 방법은 안싸우는 것이듯 『나비효과』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안후회 하는 것이었다.

2.
극장판대신 디렉터스 컷을 보긴 했어도, 이 영화가 왜 혹평 일색이었는지 대충 눈치 깔 수 있었다.

영화의 한줄 요약은 이렇다.
“씨바, 암만 발버둥 쳐봐야 지금 최악이라고 느낀 상황이 최선이다!”

아, 이 얼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후달리는 소리더냔 말이다.

에반은 과거의 상처에 고통받는 캐릭터다. 그는 어린시절 성추행을 당했으며 폭탄으로 살인(미필적 고의)도 저질렀고, 폭행, 흡연은 물론 살인의 충격으로 인한 친구를 정신이상으로 몰고가게 한 주인공이다.

두둥~ (이건 에반의 극도로 불안한 과거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온 ME로 이해해 주시면 된다)

이제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후회를 하나씩 되돌려 놓는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욱 비참해지는 과거이며 그 과거를 또다시 돌려놓기 위한 과거로의 여행은 에반을 더욱 깊숙한 파멸로 몰고갈 뿐이다.
(극장판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고 한다만 디렉터스 컷에서는 자궁속으로 들어간 에반이 탯줄로 목을 감아 자살함으로써 뱃속에서 유산되는 걸로 끝난다.)

3.
노력과 경쟁만을 강요하는 세상.
대립과 제로섬게임에 익숙해진 자본주의의 속성은 이땅의 피지배계급에게 ‘로또도 노력하면 될 수 있다’는 황망한 환상만 마약처럼 공급하는 중이다.
박민규는 차라리 버리면서 사는게 자본주의를 이기는 길이라고 이야기 했고 나비효과는 아무리 후회해봐야 지금 이상은 없다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유려하게 곱씹어 낸다.

결국, 우리는 지금은 만족하던가, 지금을 내던져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닝기리~ (이건 임계점을 목전에 둔 사회에 대한 비아냥조의 후렴구로 이해해 주시라)

이런 후달리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후벼내는 영화에 미국 평단의 혹평은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쓰레기, 과다한 폭력, 변덕스러운 각본, 코메디 쯤으로 치부하기엔 영화가 너무 좋다.

4.
문제는 아직 살아내야할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포지션으로 있어야 하느냐다 …

영진공 그럴껄

 

“고려대와 삼미 슈퍼스타즈”

고대 경영대 거센 개혁바람…등록금 차등책정 

고려대 경영대학이 내년도부터 성적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해 ‘개혁실험’에 대한 논란이 증가되고 있다.
고려대 경영대학에 따르면  2009학년도부터 성적 하위 10~15%인 학생에 대해서는 등록금을 지금보다 두 배가량 높이는 반면 상위 33%에 해당하는 학생에게는 전액 장학금을 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고려대 경영대 관계자는 “이 같은 방안은 교수회의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수 학생 유치를 위해 일단 경영대 내부에서 논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방안에 따르면 하위 10~15% 학생은 등록금을 현행 346만원에서 두 배인 650만원 수준으로 내야 돼 큰 부담을 안게 된다. 반면에 상위 3분의 1 학생들은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 또한 중위권에 해당하는 학생은 지금과 동일한 등록금을 책정받을 수 있다.


이번 방안은 실제 적용이 되기까지 재학생은 물론 본부 등 대학 내부 논의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향후 논란이 예상된다. 한편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은 “몇 년 안에 고려대 경영대를 아시아 3대 경영대학으로 만들겠다” 며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를 위해 파격적인 실험을 대학에 적용시켰고, 최근 그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영국 ‘더 타임스’가 선정한 세계 사회과학분야 단과대 순위 66위에 올랐고,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100대 대학’ 에 드는 성과를 냈다.  (2007.10.2 / 아시아경제 김수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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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기사다. 고려대 경영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자라면서 ‘수재’ 소리도 몇 번 들어봤을 테고, 고등학교 때도 전교에서 순위를 다투는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을 텐데. 저대로 된다면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하면, 거기 모인 학생들 중 하위 10~15%에 드는 순간 그 대가로 등록금을 두 배로 내야 하는 것이다. 억울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몇 년 안에 아시아 3대 경영대학’이 될 곳이기 때문이다. 등록금 인상에 발끈하려던 학부모들도 저 말에 움찔할 수 있을 거다. 똑똑한 우리 아들이 고려대 경영대학에 입학해서 더 똑똑한 애들 때문에 등록금을 두 배 내며 다니는 게 억울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 과정을 거치면 고려대 경영대학 출신이 되니까…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다음 학기에 두 배의 등록금을 내게 되어 울분을 터뜨리던 학생도 이내 마음을 추스릴 것이다. 편입 따위는 생각지 않는다. 그래야 고려대 경영대학 출신이 된다. 고려대에서 이런 정책을 검토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사실을 학교측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시쳇말로 ‘듣보잡’ 대학에선 감히 이런 얘길 꺼낼 수도 없을 거다. 잘못 했다간 총장이 석궁테러 받기 십상이지.

역시 소속이란 건 중요하다. 그리고 <경쟁력>이란 단어는 만능 포장재가 될 수 있다.

기사를 읽고 있자니 박민규의 장편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떠올라서 일부를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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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나는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해온 내 인생이 알게 모르게 삼미 슈퍼스타즈와 흡사했던 것처럼, 삼미의 야구 역시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야구였단 사실이다. 분명 연습도 할 만큼 했고, 안타도 칠 만큼 쳤다. 가끔 홈런도 치고, 삼진도 잡을 만큼 잡았던 야구였다. 즉 지지리도 못하는 야구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야구를 했다는 쪽이 확실히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

  평범한 야구를 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이란 말인가. 그러나 거기서 파생하는 또 하나의 의문. 확실히 평범한 야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삼미는 그토록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걸까. 그것은 아마 기록과 순위의 문제 때문이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으나, 곧 평범한 야구라면 최하위를 기록할 이유가 없다는 쪽으로 다시 생각의 흐름이 바뀌어갔다. 그렇다. 평범한 야구란 6개의 팀 중에서 3위나 4위를 달리는 팀의 야구를 일컫는 말일 테지. 그럼 왜?

  결론은 프로였다.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 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로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프로야구 원년의 종합 팀 순위로 그것을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6위 삼미 슈퍼스타즈: 평범한 삶
  5위 롯데 자이언츠: 꽤 노력한 삶
  4위 해태 타이거즈: 무진장 노력한 삶
  3위 MBC 청룡: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한 삶
  2위 삼성 라이온즈: 지랄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한 삶
  1위 OB 베어스: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 노력한 삶

  아아, 실로 무서운 프로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고 16살의 나는 생각했다. 그럼 평범한 삶보다 조금 못하거나 더 떨어지는 삶은 몇 위를 기록할 것인가? 몇 위라니? 그것은 야구로 치자면 방출이고, 삶으로 치자면 철거나 죽음이다. 그런 삶은 순위에 낄 자리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니까.

  찬찬히, 나는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위의 순위는-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일종의 최면처럼 거대한 오해와 착시를 유발한다. 위의 순위를 다시 성적순으로 나열해보자면-

  1위 OB베어스
  2위 삼성 라이온즈
  3위 MBC 청룡
  4위 해태 타이거즈
  5위 롯데 자이언츠
  6위 삼미 슈퍼스타즈

  아무리 봐도 3위와 4위가 그럭저럭 평범한 삶처럼 보이고 6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하위의 삶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해봐야 할 만큼 한 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 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 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꽤 이상한 일이긴 해도 원래 프로의 세계는 이런 것이라고 하니까.

(중략)

  나는 다시 슈퍼스타즈를 생각했다. 그리고 삼미의 팬이었던 나의 유년과, 현재를 생각했다. OB와 삼성, 혹은 MBC나 해태의 팬이었던 또래의 소년들에 비해 확실히 나는 염세적인 소년이었고, 자신감이 없었으며, 세상을 어둡게 바라보고 있었다. OB의 팬이 아니라면, 삼성의 회원이 아니라면, 아니 프로야구가 없었다면- 그 소년들과 나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국 문제는 내가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던 데서 출발한 것이라고, 16살의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다, 소속이 문제였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담은 소년이 왜 전철 안에서 조롱을 받는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잠바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동창인 조부장에게 왜 굽실거려야 하는가.
  삼류 대학을 나왔기 때문이다.
  삼촌이 사는 남동구는 왜 개발이 되지 않는가?
  소속구의 국회위원이 여당 소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속이 인간의 삶을 바꾼다.
  소속이 인간이 거주할 지층을 바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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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도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