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 저먼의 ‘가든’, 영화 예술에 대해 다시 묻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많은 제작 인원과 시간, 자본이 들어가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성을 목표로 하는 상업성을 띄게 된다. 이런 주류 영화들은 지난 100년의 시간 동안 관객들과 익혀온 문법의 틀을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다. 너무 고답적인 방식으로 찍어서 식상한 느낌을 주는 영화들이 있는 한편 기존의 장르적 관심을 비틀거나 해서 신선한 감을 주는 영화들이 있긴 하지만 그 차이는 별반 다르지 않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지금까지 진정한 영화는 없었으며 나 자신 역시 그런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주 파격적인 영화들을 찍는 그 역시도 영화 이전부터 존재해온 소설이나 연극과 같이 내러티브에 의존하지 않는 ‘기존 문예 장르와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영화만의 영화’는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과연 그런 영화가 필요한 건지, 가능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간혹 상업적인 목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영화, 즉 실험 영화들이 만들어져 소개된 일이 있기는 하다. 영화 학교 학생들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장편 영화가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파격적인 형식 실험을 하고 극장 상영까지 했던 경우는 그러나 진짜 영화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에 의해 시도되곤 했었다. 앤디 워홀이 그랬었고 데릭 저먼(Dereck Jarman, 1942 ~ 1994)이 그런 영화를 만든 이들이다.

국내 개봉시 펫샵 보이즈의 뮤직비디오와 함께 상영되었던 “가든”은 데릭 저먼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상영 시간이었음에도 어떤 일관된 내러티브가 일절 없는 영화이다. 당시 영화가 끝나고 내 뒤를 따라 나오던 어떤 여자 관객은 함께 관람한 남자 친구에게 ‘또 한번 이런 영화 보자고 그러면 절교’라고 낭랑한 목소리로 선언을 하더라. 어떤 불쾌감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보는 동안에 도무지 정리가 안되고 관객으로서 따라갈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보면서 졸고 또 졸았다. 가끔씩 영화관에서 조는 경우가 있긴 했어도 이 영화처럼 중간에 그냥 일어 서고 싶었던 일은 아마 내 생애 처음이었던 것 같다. 계속 지켜본다고해서 뭔가 달라질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전 최야성의 “로켓트는 발사됐다”를 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를 재미있게 보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재미있으라고 만든 영화가 아닌데 재미있게 보는게 오히려 이상한거 아닌가. “가든”은 아담과 하와의 에덴 동산과 그 자신이 정원사이기도 했던 데릭 저먼의 개인적 모티브를 기반으로 두 명의 게이 커플이 등장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인물들이 나왔다 사라졌다 하는 기묘한 영화다. 제작 방식 역시 상업 영화들과는 판이하게 달라 자연스러운 편집, 음향 등의 기본적인 기술들조차 가볍게 무시되고 있었다.

이런 영화는 대중들이 보고 즐기는, 영화라는 장르의 발전적 흐름과 상관 없이 만들어진 작품이다. 오히려 활동 사진이라는 매체로 구현된 미술과 문학의 형식 실험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지 않겠나 싶다. “가든” 하나만 가지고 데릭 저먼의 영화가 전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위험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언급되는 “카라바조”나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영화를 보고서 평가해 볼 일이다.

영진공 신어지

최진실과 바스키아 … 예술가의 짧은 생


 

최진실의 자살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이가 비단 나 뿐은 아닐 거다. 90년대 CF 한편으로 스타덤에 올라 대한민국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해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던 톱스타이자 언제나 옆집 언니 같았던 그녀. 최근 출연한 드라마의 연속 히트로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숨기고 싶었을 폭력과 외도로 얼룩진 결혼생활과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얽힌 사연들은 최근까지도 매스컴의 단골 메뉴였다. 대중의 대단한 사랑을 받음과 동시에 꼭 그만큼의 루머와 악의적인 덧글을 얻어야 했던 그녀는 예상처럼 수년간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며 우울증을 견뎠다. 그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괴로우랴 싶었거늘.. 두 아이의 엄마로 웬만한 일은 씩씩하게 버텨내길 바랐거늘.. 그녀는 대중의 마음을 저버리고 그렇게 떠났다.

“유명해 진다는 건 분명 근사한 일이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알아보고, TV와 신문이 예사로 자신의 얼굴을 싣고, 영화배우나 가수와 연인이 되고, 쉽사리 큰 돈을 벌고…말 그대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는 것, 얼마나 낭만적인가”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 중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 거리 곳곳과 지하철역사에 그림을 그렸고, 엔디워홀의 친한 친구이자 동료로 20세기 말 미국 미술계에서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은 ‘검은 피카소’ 장 미셸 바스키아. 하지만 그는 27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세상을 등진 또 한 명의 불운한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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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Michel Basquiat, "The Dingoes At The Park"




이미 20대 초반에 몇 만 달러를 호가하는 작품을 그린 위풍당당한 화가. 그라피티(Graffiti)라고 불리는 스프레이 낙서화로 일약 미술계를 장악한 이 젊은 화가는 두려울 게 없었다. 미국 화단에 나타난 최초의 흑인이자, 클럽 DJ를 즐겼고, 양성애자이기도 한 그에게 80년대 초 새로운 재능의 출연을 기다리던 미국의 화랑가는 열광했다.



당시 젊은 부자들은 투자의 일종으로 미술품을 사들였다. 그들은 바스키아가 더욱 유명해지도록 힘썼다. 그의 몸값이 올라야 그림값 또한 오르기 때문이다. 바스키아는 순식간에 유명세를 타게 되고, 스타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흑인이라는 손가락질과 비평가들의 냉담한 혹평에 혼란스러워한다. 아무리 천재라고 한들.. 겨우 20살, 갓 소년 티를 벗은 청년이던 그는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코카인과 헤로인을 선택한다. 그리고 1888년 약물 과용으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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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 Portrait as a Heel

배우 최진실과 바스키아의 생은 언뜻 비슷하다. 원하는 대로 유명해졌지만,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은 현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무섭고 아찔한 성공의 이면들. 하늘이 내려준 재능에 힘입어 화려한 삶을 살게 되지만, 그 끝은 고통의 낭터러지였을 그들의 삶에 어떤 말로 이해를 또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생의 시간을 어쩌면 훨씬 길고 힘겹게 느꼈을 예술가들에게 짧은 생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면 부디 하늘에서는 마음껏 꿈을 펼치고 환히 웃으며 살아가길 빈다.


영진공 애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