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데이터는 빅 브라더가 될 것인가?

 

 


 


 


“Who controls the past controls the future.


Who controls the present controls the past.”


(과거를 지배하는 이가 미래를 결정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이가 과거를 결정한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84


 


 








 


 


 


1949년에 나온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굳이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될 이 책에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이 나온다.


그건 바로 “Big Brother”.


 


사회의 모든 활동과 개인의 일상 모든 것이 다 통제되고 지배되는 그런 사회,


그걸 조정하는 한 사람, Big Brother 말이다.


 


한때 요란하게 떠들어지던 이 단어가 요즘은 거의 사용되지 않긴 하지만,


이 이미지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빅 데이터와 흡사하다고 느껴지는 건 나만의 지나친 상상일까.


 


 


 


빅 브라더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소설 “1984”는 1956년과 1984년에 영화화 된 적이 있다.


 


 


 






 


 


 


소설과 영화에서는 강압과 폭력 그리고 인간성의 왜곡을 통한 통제체제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깨어있는 인간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인간들이 협력하고 저항하면 이러한 체제는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역사상 존재해왔던 그리고 계속 새로 생겨나는 전체주의들은 바로 그런 희망에 기반한 노력에 의해 대부분 소멸되었다.


 


1998년 개봉 영화, “에너미 오브 더 스테이트 (Enemy Of The State)”.


심오한 메시지를 전달코자 노력하지는 않는 오락영화이지만, 이 영화는 참으로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통제의 공포를 느끼게 해 준다.


 


 


 





 


 


 


이 영화에서 통제는 첨단 기술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를 행하는 이는 최고 권력층 내의  심각하게 비뚤어진 인사이다.


 


인공위성과 통신기기 그리고 CCTV를 통해 가해지는 통제의 압박은 무척 공포스럽고 끔직하여서, 그 기술과 권력은 반드시 선한 권력층과 건전한 체제 하에서 관리되어야 한다고 절실히 느껴진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 “에이, 정말 저게 가능하기나 하겠어?”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고.


 


그런데 빅 데이터라?


 



이건 말하자면 현존하는 모든 데이터를 파악하고 관계지워서,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 또는 더 나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행위의 총칭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빅 데이터는 누군가의 강압이나 외적인 요소에 의해 강제되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제공한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진 정보에 기반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2011년에 방영을 시작한 미국 드라마 “Person of Interest”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잘 그려져 있다.


 


이 드라마는 9. 11. 테러 이후 미국 정부가 유사한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거대한 시스템을 구축하였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스템을 운영하는 정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범죄는 무시하기에, 이를 못 견딘 제작자가 직접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통제와 관리를 위해 동원하는 주요 도구는 “Digital Footprint”, 즉 온라인 행적이다.


 


온라인 흔적과 통신 내역, 공적 기록에다가 인공위성과 CCTV를 통원하여 한 개인의 행동과 그 행동의 영향을 또 다른 개인들과 연결시켜 분석하면 그 개인에게 어떤 일이 언제 벌어질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가능할까 긴가민가 하면서 그냥 시청하곤 했는데,


빅 데이터라는 개념과 묶어 보니 … 어?! 이거 가능할 수 있겠다 싶어진다.


 


 


 


 




 


 


 


일상의 시시콜콜한 대부분을 SNS에 기록하고, 포탈과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 취득과 의견 피력을 수시로 하며, 인터넷 쇼핑 등으로 대부분의 생활용품을 구매하고 거의 모든 결제를 신용카드로 하는 나는 점점 더 깊고 상세히 데이터의 형태로 규정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특정 개인이 예전에 어떤 단체나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어떤 의견을 내고 누구와 어울렸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어느 계절에 주로 어떤 물건을 사고 전화통화는 어느 시간에 누구와 하는지, 여가는 어떻게 즐기는지, 정치적 성향은 어떤지, 뭘 잘 먹는지, 잠은 언제 자는지 등등 … 모든 걸 순식간에 분석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사람은 단순해서 이전에 형성했던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Digital Footprint에 의해 어딘가에는 기록된 나의 과거를 보고 현재를 모니터링하여 나의 미래를 높은 신뢰도로 예측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온라인 흔적을 찾아 지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어느 순간에 힘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빅 데이터가 빅 브라더로 변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 그리 지나친 걱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기 매우 힘들게 사회적 안전장치를 만들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닐테고,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안다면 이를 탐내지 않을 권력자가 그리 흔하겠는가.


 


 


 






 


 


 


이번 보스턴 폭발(또는 테러)의 경우를 보아도,


<보스턴 사고의 사상자와 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언젠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나도 모르게 빅 브라더의 존재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빅 브라더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강렬히 저항하게 될지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영진공 이규훈


 


 


 


 


 


 


 


 


 


 


 


 


 


 


 


 


 


 


 


 


 


 


 


 


 


 


 


 


 


 


 


 


 


 


 

[영진공 64호]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재외공관소식
2006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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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조지 오웰, 정영목 역, 민음사
아주 오래 전, 이 책을 읽고 감격에 겨워 감상문을 알라딘에 썼던 거 같은데 찾을 수가 없다. 감격에 겨워하다 결국 안
썼나?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을 보고, 뭔가 써보고 싶다며 끄적이다가 지우다를 반복하다가, 책장을 뒤져 이
책을 찾아내 다시 읽었다. 역시나 감동, 새삼 오웰에게 버닝, 기타 등등은 예전 읽었을 때와 같지만, 세월이 흐른 탓에 달라진
것들은… 결국 책은 그대로이니, 내가 변했다는 얘기일 터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당시, 난 스페인 내전에 대해 잘 몰랐다. 아니, 스페인 내전에 대해 뭔가 조금 알게 된 게 이 책을
통해서였다. 그때도 <랜드 앤 프리덤>을 본 뒤 막연하게 스토리의 얼개만 겨우 따라잡은 상태였고, 정치적 노선 따위는
내 알 게 뭐냐! 수준이었다. 전선에서의 생활 묘사 부분은 오히려 좀 지루해 했던 것같고, 오웰의 문체는 참 건조하구나, 하면서
별 감흥없이 넘어갔던 것같다. 다같이 좋은 뜻으로 일어났으면서 왜 내분으로 치달을까,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내분으로
망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보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같다. 물론 혁명이 감돌고 있는 바르셀로나에서, 의용군의 장교와 사병은
있어도 이들의 계급적 차별은 철폐되어 오히려 존대에 장교가 당황해한달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손님들에게 ‘당당’한 그
분위기의 묘사를 보고 이게 실제로 가능하구나, 흥분했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러나 그간 나는 소위 정치와, 이념에 대해 좀더 많은 걸 알게 되었고, 흔히 좌파라 불리는 무리의 가치관을 조금 갖게
되었고, 그럼에도 점점 밥벌어먹고 생계를 이어가는 데에 대한 걱정을 키워가며 자본주의에 순응해 가고 있는 중이다. 오웰의 책을
좀더 아프게 받아들인 것도, 내전에 함께 한 세력들이 각자 정치적 입장 차이 때문에 갈라지고 또 한쪽이 탄압당하는 것도,
‘정치적 역학 관계’에 대한 이해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정치적 노선과 단체의 이름들 – 조지 오웰이 “무슨 못쓸 머릿글자
전염병이라도 휩쓴 줄 알았다”고 묘사한 – 의 이름도 별 어렵지 않게 구분하게 된 것도, 이전처럼 흥분에 휩싸여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희열을 맛보지는 않게 된 것도, 조지 오웰의 문체에 감탄하며 종종 살짝 드러나는 그의 유머감각을 캐치하며 간간이
웃음을 터뜨린 것도, 그간 나의 변화 때문이리라.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그리고 똑같은 사물을 다른 것으로 보게도 만든다.

실천적/참여적 지식인이었던 조지 오웰의 존재 자체가 빛나는 것도, 사실은 이 책 때문이다. 그는 그저 먼 곳에서 신문이
찍어내는 거짓말과 추측에 의존해 다른 사람들의 죽음과 상처를 하룻밤 조금 고민해 문자로 바꿔놓고는 거들먹거리는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 사실 조지 오웰은 삶과 작품들 자체가 반성과 성찰과 실천의 일관성을 이루고 있다.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하다
“제국주의의 개”라는 자신의 신분에 환멸을 느끼고 사직한 결정은 [코끼리를 쏘다]의 1부(원래 이 책은 오웰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출판된 산문 모음집이다)와 [제국은 없다 (원제는 버마의 나날들 Bermese Days, 현재 품절)]로 이어졌고, 유럽에 돌아와 파리와 런던에서 하층민 생활을 한 경험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로 이어진다. 물론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국에선 한때 ‘반공우화’로 잘못 선전됐던 [동물농장]과 자본주의 – 파시즘 체제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1984]
등이긴 하다. 또한 [1984년]은 ‘디스토피아를 그린 미래소설’이라는 점만 가지고 올더스 헉슬리의 [훌륭한 신세계]에는
떨어진다며 (부당하게) 수직 비교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올더스 헉슬리와 조지 오웰은 정치적 노선이 다르며, 조지 오웰의 책은
그 책을 읽은 ‘반공사회’의 ‘중학생’마저 공산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도 Big Brother가 존재할 수 있음을(아니,
파시즘 체제는 오히려 자본주의에서 더 잘 나타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줄 정도로 훌륭하다. 스페인 내전이 벌어졌을 때, 조지
오웰은 스페인으로 건너와 의용군으로서 직접 전선에 참가했고, 아내와 무사히 스페인을 탈출한 뒤 6개월 후 통일노동자당 소속
의용군에 대한 부당한 모함에 분노하며 [카탈로니아 찬가]를 써내려갔다. 이 책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어가
스스로 총을 잡은 사람의 기록이다. 비록 그의 본분은 소설가, 평론가, 에세이스트, 저널리스트이지만, [카탈로니아 찬가]는
‘글쟁이’로서의 관찰이 아닌, 그 자신 혁명에 참여한 경험을 마침 그가 글쟁이기에 더욱 생생히 풀어놓은 책이란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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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교수의 조지 오웰 평전
역시 탄생 100주년 기념출판작
사실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으며 느꼈던 감동과 흥분은,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에 대한 흥분과 떼어놓을
수 없고, 그래서 저 감상문을 쓰면서 이미 다 말해버린 것같다. 오웰 같은 사람 앞에서 나는 그저 머리를 숙이고 내 자신을
반성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의 비겁함과 나약함에 쪽팔림과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새삼 그의 겸손함과 진실한
인물됨에 반할 수 없다. [카탈로니아 찬가]에는 허위와 자기포장, 자기연민 같은 게 없다. 꾸밈없는 솔직함, 건조한 영국식
유머, 날카로운 통찰력, 빛나는 겸손함, 그리고 뜨거운 분노. 아내를 고향에 둔 채 – 그녀는 나중에 바르셀로나로 와서 조지
오웰을 ‘보좌’한다 – 직접 총을 들기로 결심한 사람이 스페인 내전의 성격, 정치적 노선 등에 대해 “전혀 모르기도 했고 관심도
없었”을 리가 없다. 나중에 비해 좀 나이브하게 생각했던 건 사실이겠지만. 또한 그는 어떤 글이든 어떤 사람이든 하나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으며, 최대한 사실대로 쓰겠지만 자신 역시 하나의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하여 자신의 글이 ‘편향될 수
있’고 또한 무의식적으로 왜곡이나 기타 잘못이 있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객관성이라 생각하는데 –
자신이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이라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대체로 강자의 편에 이미 붙어있는 것이다 – , 아마도 순수문학 타령을
너무나 좋아하는 한국에서 조지 오웰의 진가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 건 오웰의 이런 태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의 역사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었던 혁명의 실패는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사건이다. 그러나 혹자들은
이 책이나 켄 로치의 영화를 보며 혁명의 타락이니 권력싸움의 허망함이니 같은 말들을 하지만, 난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이 ‘그러므로 혁명은 허망한 것이다’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썼을 리도 만무하지 않는가. 오히려 나는, 혁명을
향한, 그리고 자신을 역사의 ‘주체’로 자각하며 스스로 일어나 앞을 향해 싸워나가는, 인간의 고귀함을 본다. 물론 품에 대한
왜곡과 모함, 그리고 품을 포함한 모든 진영의 그 거짓말과 근거없는 공격에는 분노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역사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달려가며 그 과정에서 싸우고 타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비록 스페인 혁명은 실패했지만, 그 기록은 실패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언제까지고 반복될 혁명과 이상을 향한 인간의 꿈과 도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이상과 신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스러져간 선배들의 희생은 고맙고 귀한 것이다. 비록 내가 그런 희생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재외공관 독서권장위원회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