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조] 최헌


 

 


 


 


 


최     헌



(1948 ~ 2012. 9. 10.)


 


 


 



 



 


 


 


○ 고인의 작품들: 다음 뮤직 링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


 


 


 


 


 


 


 


 


 


 


 


 


 


 


 


 


 


 


 


 


 


 


 


 

[근조] 조미미


 

 


 


 


 


 


조   미   미


[본명: 조미자]


(1947. 1. 17. ~ 2012. 9. 9.)


 


 


 


 




 


 


○ 고인의 작품들: 다음 뮤직 링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2부]



 

 


 


 


* 1부에서 이어집니다. *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수컷 공작의 과시 쩌는 꼬리깃은 마치 3류 로맨스 영화 속 사나이의 순정과도 같다. 오로지 암컷을 꼬셔서 대업(?)을 이루겠다는 마음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화려해서 눈에도 잘 띄고, 무겁고 거추장스러운데다 ‘공기역학이란 먹는건가요 우걱우걱’한 듯한 꼬리깃은 천적을 피해서 날기는 고사하고 뛰어서 도망가기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초창기 진화론자들에게 이런 수컷 공작의 미련 곰탱이 같은 모습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래서는 암컷을 꼬시기도 전에 천적의 한 끼 식사가 될 것은 뻔해 보이는데 대체 왜 수컷 공작은 이렇게 위험천만한 방식을 택한 것일까? 그리고 화려한 깃털을 택한 초창기의 수컷들은 대부분 쉽게 천적들에게 잡아 먹혔을텐데 어떻게 이런 비실용적인 부분들이 진화한 것일까?


 


현재의 진화론은 ‘생존’이란 것도 결국 번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라 수컷 공작의 꼬리깃은 생존보다는 번식에 더 치중한 결과이다. 최근엔 꼬리깃의 화려하고 대칭적인 무늬는 암컷에게 보다 건강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공작새 수컷의 진짜 속사정이야 어찌됐건 이러한 논의들의 당연한 전제는 수컷의 꼬리는 암컷을 꼬시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누구도 이 점에 관해서는 의심치 않았으며 관찰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세이어 형님에게 그건 개풀 뜯어 먹는 소리였다. 세이어의 눈에는 수컷 공작의 꼬리란 위장을 위한 것이었다! 열 번 떠드는 것 보다 한번 jpg파일을 보여주는 게 낫다고 했던가. 세이어는 자신의 주장을 알아먹지 못하는 우매한 이들에게 직접 그림을 그려 눈앞에 펼쳐 보였다.


 


 


 




Abbott Handerson Thayer, Peacock in the Woods, 1907


 


 


 


그런데 공작 수컷이 그토록 위장이 잘 되어 있다면, 칙칙한 암컷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이어를 영구히 조롱거리로 만든 작품은 공작이 아니라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위장한” 채 호수에서 먹이를 찾는 홍학들을 그린 것이었다.


 


 


 




Abbott Handerson Thayer,

White Flamingos, Red Flamingos: The Skies They Simulate, 1909


 


 


 


“전통적으로 ‘눈에 확 띄는’ 이 새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체색을 통해서 완벽하게 자신을 지운다. 그들은 사람이 으레 그들을 보는 위치인 위에서 보았을 때는 대부분 눈에 잘 띄지만, 그들의 체색은 이른 아침과 저녁의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소실되는’데에 경이로울 만큼 적합하다.” (Thayer)


 



 


 

도대체 홍학들은 왜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사라져야 하는걸까? 그저 머릿속이 아득해져 온다.



세이어는 독단이라는 우물에 빠져 그 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인 냥 자기 이론만이 유일한 법칙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물들의 모든 무늬들이 위장과 은폐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이어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그린 또다른 작품들.

그림은 정말 잘그렸는데 …..



 


 


아마존에는 헬리코니드Heliconidae라는 화려한 나비 종이 있다. 이 나비들은 마치 포식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화려한 색깔로 치장한 날개를 펄럭이며 유유자적 날아다닌다.

 

실제로 헤리코니드 종은 아주 강한 냄새를 풍기며, 몸이 잘리면 강한 냄새의 체액이 나온다. 이 체액은 피부에 닿으면 염증을 일으킨다. 헬리코니드는 시계꽃passiflora종의 꽃만을 먹는데 이 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시안화물을 포함한 독소를 만들어낸다.

 


헬리코니드는 이 꽃을 먹음으로써 유독한 성질을 획득한 것이다. 이렇게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비들이 포식자들에게 잡혀 비명횡사하는 순간에도 헬리코니드 종 나비들은 자유롭게 꽃밭을 노닐 수 있었다.


 


 


 




시계꽃 종인 Bluecrown Passionflower


 


 


 


그런데 아마존에는 헬리코니드와 비슷한 무늬를 가진 레프탈리스Leptalis 나비가 있다. 이 나비는 상대적으로 맛이 좋기 때문에 포식자들이 환영하는 나비였다. 본의 아니게 맛있게 태어난 이 나비들은 난처해졌다. 힘이 센 것도 아니요 독이나, 침이 있는 것도 아니니 뭐든 하지 않으면 종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질 판이었다.


 


그래서 이 나비들이 택한 것은 의태였다. 맛대가리 없는 헬리코니드의 무늬를 따라함으로서 포식자가 자신들을 맛대가리 없는 헬리코니드라고 착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 이 이론은 당시 연구했던 과학자인 베이츠의 이름을 따 ‘베이츠 의태Batesian mimicry’라고 부른다.


 


즉, 맛이 없거나 독이나 침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거친 녀석들의 무늬와 색깔을 흉내내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의태의 예, 꿀벌과 꽃등에.

어린 시절 종종 꿀벌이 꽃등에 인 줄 알고 잡았다가 쏘였던 적이 있다.

 






 

당연히 세이어는 의태 개념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는 헬리코니우스 무늬도 경고색이 아니라 앉아 있을 때 잎으로 위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비 따위가 어디서 건방지게 경고색 따위를 가지고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게다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판단을 한단 말인가. 발끈한 세이어는 1903년, 베이츠의 의태 이론을 논박하겠다는 목적으로 가족을 데리고 헬리코니우스가 있는 섬으로 탐사를 갔다. 그의 딸 글래디스는 이렇게 적었다.



 


 



“아버지의 특수 임무는 나비를 맛보는 것이었다! …

(중략) … 아버지는 실제로 나비들을 맛보았는데, 맛에서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행동거지가 얄미워도 분명한 점은 세이어는 입만 싼 멍청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건방을 떠는 와중에도 그는 위장의 또하나의 메커니즘인 분단색disruptive coloration 이론을 발견하였다.


 


 


 




 


 



 

사물마다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윤곽은 그 사물을 알아차리는데 쉽고 간단하면서도 매우 큰 정보를 준다. 만약 원시인이 길을 가다 사자를 마주쳤는데 이게 내가 기억하는 사자인가 싶어서 그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간 단숨에 뼈와 살이 분리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도 이놈이 사자인지 아님 내가 사냥해야 할 사슴인지 빠르게 알아채야만 했다.

 


이때  사물의 고유한 윤곽은 멀리서도 그 사물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래서 많은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사물의 윤곽을 기억하고, 자신이 아는 사물의 윤곽과 끊임없이 비교한다. 은폐색의 메커니즘은 바로 이 윤곽을 없애는 것이다. 배경과 비슷한 색깔과 무늬를 이용해 자신의 윤곽을 배경과 섞어 버림으로써 눈 앞에서 사라지는 착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큰 동물과 작은 동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작은 동물일수록 윤곽을 없애는 것은 쉽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오랜시간을 꼼짝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큰 동물은 다르다. 커다란 형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윤곽들은 왠만해선 은폐하기 힘들다. 그들이 제아무리 노력해도 대부분은 바로 들키고 말 것이다. 그래서 큰 동물들은 작은 동물과는 다른 메커니즘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분단색이다. 분단색은 어떤 의미에서 방어피음이나 위장색과는 정반대이다. 분단색이란 커다란 윤곽을 없앨 수 없다면 상대가 인식하기 어렵게 윤곽을 임의적인 덩어리로 쪼개는 것이다.


 


 


  




가봉살무사Bitis gabonica를 보면,

납작한 머리가 들쑥날쑥한 두 덩어리로 쪼개지고


굵은 밧줄이 등을 따라서 뚜렷이 뻗어 있는 것 같다. 


낙엽이 깔린 땅에서는 이 뱀의 윤곽이 사라지기 쉽다.


 





세이어는 분단색을 “동물의 몸에 아무렇게나 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엄격한 변장 법칙에 따라서 배치된, 대비되는 그늘과 색깔 덩어리들이 이루는 뚜렷한 무늬”라고 정의했다.



세이어는 이처럼 동물들의 무늬를 위장과 은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이어의 법칙은 자연의 위장 중 한 측면만을 가리킬 뿐이다. 세이어의 문제점은 자연의 어떤 타당하고 진정한 원리가 반드시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가정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꼭 그렇지는 않은데, 생물학은 예외의 사례로 가득한 과학이다. 생물들의 무늬 역시 위장의 기능 뿐만 아니라 경고색이나 의태(다른 동물의 무늬를 모방하는 것) 기능을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세이어는 위장을 제외한 다른 주장들을 돌파리 의사의 처방전으로 보았다. 스컹크나 말벌과 같은 동물들의 무늬들도 경고색이 아닌 위장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벌은 햇빛과 그늘에 잠긴 녹색 식생과 노란 꽃이라는 평균 배경에 놓일 때 근원적으로 그리고 아주 철저히 지워진다.
” (Thayer, 1909)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세이어는 숙이기는 커녕 고개를 바싹들고 끊임없이 떠들며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 과시를 하는 밥맛 중에도 ‘상밥맛’이었다.


 


당연히 이런 행동거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법이다. 세이어는 세계적으로 자신의 적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기어코 그는 미국 전직 대통령의 혐오 대상이 되고야 말았다.   



 


발췌 및 편집: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


 


 


 


 


 


 


 


 


 


 


 


 


 


 


 


 


 


 


 


 


 


 


 


 



 

[근조] 마이클 클락 던컨


 

 


 


 


 


마이클 클락 던컨


[Michael Clarke Duncan]


(1957. 12. 10. ~ 2012. 9. 3.)


 


 


 


 



 


 


 


고인의 출연작: 다음 영화 링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


 


 


 


 


 


 


 


 


 


 


 


 


 


 


 


 


 


 


 


 


 


 


 


 


 


 


 


 


 


 


 


 


 


 

대관절 공부는 어따 써먹는 것일까?


 


 

 


 








 



난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개인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직업 덕택에 계속해서 이 호사스런 취미를 누릴 수 있었다. 나의 독서취향은 시절에 따라 바뀌어갔다. 10대에는 소설책을, 20대에는 인문학 책을, 30대인 지금은 과학서에 푹 빠져 있다. 특히 과학서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요즘엔 그림은 뒷전에 던져두고 열독하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 과거엔 방문자의 90%가 여성이었던 그림작가의 아기자기한 블로그(http://bung015b.egloos.com/)였지만 지금은 자연과학 전공자의 고비사막 같은 블로그로 전락하였고, 방문자의 90%가 남자라는 씁쓸한 통계가 선물로 주어졌다.


 


그렇게 많이 읽어왔고 또 읽고 있지만 누군가 나에게 유식해졌냐고 묻는다면 난 쥐구멍이 아니라 우주로 도망칠지도 모르겠다. 분명 20대 때부터 지금까지 인문학서나 과학서를 읽은 것은 책을 통해 지식을 쌓으려는 것이었다. 솔직히 다른 사람 앞에서 유식한 말로 잘난 척도 하고 싶었고 누군가 질문을 하면 막힘없이 술술 답해주는 전문가스러운 자태도 뽐내고 싶은 속물적인 욕심도 있었으리라.


 


근데 나이가 들어선지,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아님 그냥 머리가 후져서인지 도무지 여태까지 읽었던 수많은 인문서, 과학서들의 내용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은 고사하고 혼자 집구석에서 글을 쓸 때도 분명 읽었고 공부했던 내용임에도 또다시 책을 찾아 정리해야만 한다. 그럴때면 정말 짜증스럽지 않을 수 없다.


 


대체 그 오랜 시간 책을 읽어서 얻은 것이 결국 방문자의 90%가 남자라는 통계치 뿐이란 말이던가.


 


 



 


 



이런 망각의 저주(?)는 영혼을 쥐어짜며 공부했던 우리의 순수했던 학창시절마저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아오지 탄광의 강제노역에 버금가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했지만 그 수많은 지식들은 학교를 졸업하면서 모두 깡그리 휘발되어 날아가 버린다. 왜 우린 어김없이 까먹고 말 것을 알면서 그렇게 애써 공부하는 것인가.


 


가장 큰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 시대에서 공부의 목적은 대학 진학과 취업의 수단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학교 당국이 앞장서서 어린 시절부터 ‘공부=대학=성공=돈’이라고 끊임없이 주입시켜주고 있지 않던가. 그 결과 우리는 과정이야 어떻든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대를 가진 나라가 되었지만 더불어서 가장 책 안 읽는 어른들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공부가 실용적인 목적으로 국한되면서 사람들은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직을 하고 나서는 대부분 책을 놓아 버린다. 우리 출판시장의 판매량은 이러한 세태를 확연히 보여 준다. 유아책에서 성인책으로 올라갈수록 판매량은 뚝뚝 떨어지며 그 중에서도 인문학서와 특히 자연과학서는 고사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인문학서 쪽은 언제나 위기라고 떠들지만 자연과학서 쪽은 위기라고 떠드는 사람조차 없다.)


 


기껏 공부해도 시간이 지나면 싸그리 까먹게 되고 그나마 취업하고 진급하는데 말고는 필요없는 공부를 우린 왜 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은 앞으로 내가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나보다 공부할 시간이 더 창창히 남아있는 내 딸을 위해서도 꼭 풀어야만 할 문제다. 나 스스로도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면서 딸아이에게 공부를 권할 배짱은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본의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이런 나의 고민을 알았다는 듯 멋진 책을 집필하여 출간하였다.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을 수상한 저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그의 저서 ‘학문의 즐거움’에서 공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지혜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결코 손해 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단 잊어버린 것을 필요에 의해 다시 한번 꺼내려고 할 때, 전혀 배워 본 적도 없고 들어 본 경험도 없는 사람과는 달리, 최소한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고,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면 별 고생 없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혜에는 그런 측면이 있다. 나는 그것을 ‘지혜의 넓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지혜에는 대상을 깊이 살펴보는 ‘깊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결단력을 유도하는 ‘힘’이라는 측면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참 좋은 말이다. 내가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도 앎에서 오는 즐거움을 통해 많은 지식을 쌓고자 함이었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지식들을 통해 좀 더 현명해지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뭔가 2% 부족함을 느낀다.

 

우리는 지식이 지혜로움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책 한 권 더 읽었다고 내일부터 책 한 권 분량만큼 더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주위에 널려있는 학력 좋은 바보들이나 책은 많이 읽어 유식한데 언행은 시정잡배와 다름없는 이들을 우린 쉽게 볼 수 있다. 나부터도 그렇게 많은 책들을 읽고 있지만 딸아이의 작은 도발에도 이성을 잃는 저질 인격의 소유자이지 않던가.


 




 


 


2012년 6월 TED강연에서 Margaret Heffernan (http://www.mheffernan.com/biography.shtml) 는 매우 인상깊은 강연을 하였는데 특히 마지막에 언급한 구절은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채워주지 못한 2%를 채워주었다.


 


정보의 개방은 환상적입니다.


오픈 네트워크는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을 이용할 기술과 습관을 익히고 

재능을 계발하며 그리고 도덕적 용기를 내기 전까지는

진실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방’이 끝은 아닙니다.

그건 ‘시작’입니다.

 


지혜로운 말들은 보편성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구절에서 몇 단어만 바꾸면 또다른 깨달음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우리가 지식을 이용할 기술과 습관을 익히고 



재능을 계발하며 그리고 도덕적 용기를 내기 전까지는



지식이 우리를 현명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끝은 아닙니다.



그건 ‘시작’입니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