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4부 완결]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1부 보기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2부 보기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3부 보기


 


 


 



누구나 드넓게 펼쳐진 자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에 덕지덕지 껴있는 고뇌와 번민의 찌꺼기들이 옥시크린으로 씻은 듯 말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빌딩 숲 속에서 딱딱한 아스팔트를 딛고 생활하고 있지만 태초에 우리는 자연에서 왔으며, 그래서 편한 도시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연을 동경하고 있다. 부자일 수록 보다 가까이 자연을 곁에 두려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에 대한 로망은 안전이 보장되었을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자연에 던져졌을 때 어떤 고난과 역경이 펼쳐지는지,


몸소 보여주고 있는 베어그릴스 형님


 


 


평온한 겉모습과 달리 자연은 먹으려는 놈과 먹히지 않으려는 놈들의 숨가쁜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 살벌한 전쟁터다. 이렇게 아주 작은 실수가 한 끼 식사로 연결될 수 있는 곳에서 오랜시간 끊임없이 개량된 생물들의 생존전략은 분명 인간들의 전쟁터에서도 매우 유용하게 쓰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세이어는 방어피음과 분단무늬 원리가 전쟁에서도 유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쌈박질이 일어났을 때부터 자연 위장 전문가로서 미국 해군의 요청을 받아 함선의 위장도색법을 제시하였다. 비록 아무런 성과도 없었지만 세이어는 전쟁이 끝난 뒤 이에 관한 특허를 내었다.


 


 





US Patent No. 715,013


1092년 세이어와 제롬 브러시가 함께 특허를 낸,


 배를 비롯한 대상을 눈에 덜 띄게 처리하는 과정의 개선점”.


배에 방어피음 원리를 적용하여 자연적인 빛과 그늘을 상쇄시키기 위한 도색방법이다. 위를 향한 면은 검게, 수직면은 밝게, 아래를 향한 면은 아주 밝고 되도록 흰색으로


칠해야 하며, 곡선 표면 특히 포신과 같은 구조물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조금식 짙은 색에서 밝은 색으로 바림질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20세기의 문을 열어 제끼자마자 인류는 다시 커다란 두 번의 전쟁을 벌이게 된다. 세이어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나대고 싶은 마음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세이어는 오지랖 넓게도 바다건너 영국 전쟁부에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자신의 위장방법을 채택하라고 촉구하기 시작했다. 1915년 세이어는 처칠에게 잠수함을 방어피음 된 고등어처럼 칠하고 배는 하얗게 칠하라고 탄원했다. ..고등어는 그렇다치고 배는 어째서 흰 색으로 칠하라고 한 것일까?



밤 바다에서 물체를 무슨 색으로 칠해야 가장 안보일까? 아마도 언뜻 생각하기에는 검은색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세이어는 이런 범인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흰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12년 타이타닉 호의 침몰사건을 통해 빙하가 흰색이었기 때문에 밤에 더 잘 눈에 띄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흰색은 해상에서 위장의 핵심이라고 믿고 있었다. 세이어의 이 주장은 두 번의 세계대전 내내 열띤 논란거리가 되었다.



 


 





빙하와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

 


 


영국 군부는 세이어의 제안들을 그럴듯한 이론이긴 하지만 그다지 쓸모는 없을 거라고 결론 내렸다. 뚜껑이 열린 세이어는 영국으로 날아가 전국을 돌며 자신의 이론을 수용할 것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 전쟁부는 세이어의 계획을 논의할 준비가 되었다며 빨리 런던으로 오라는 연락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엔 세이어가 영국 전쟁부의 연락을 쌩까 버렸다. 그때 그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행복한 날들을 보내느라 영국에 왔던 목적 따위는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세이어는 글래스고에서 자신의 이론을 공감하고 지지해주는 존 그레이엄 커를 만났다. 세이어는 군바리들 사이에서 시달리느니 말이 통하는 이들 사이에서 영웅처럼 받들어지는 쪽이 훨씬 맘에 들었고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놀다가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물론 미국으로 돌아간 세이어는 몇 달 뒤 제정신이 돌아오자 다시 영국 해군에게 자신의 위장이론을 적용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독일 유보트에 빡친 미국이 뒤늦게 참전하자 이번엔 당시 미해군 차관보를 지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에게 들러붙어 괴롭히기 시작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세이어를 무시해버렸다.


 


 


 






존 그레이엄 커John Graham Kerr(1869~1957)



 


 



한편 세이어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만났던 존 그레이엄 커는 스코틀랜드 동물학자로 1902년부터 1935년까지 글래스고 대학교의 동물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사직한 뒤에 스코틀랜드 대학교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배를 무척 좋아했는데 칙칙한 회색으로 칠한 전함을 보고서 동물 위장술에는 발톱의 때 만큼도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허접한 위장술에 개탄을 하며 새로운 임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커는 당시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을 시작으로 당국자들에게 위장에 관한 조언을 쏟아내기 시작하며 위장 전도사의 길을 걷게 된다.


 


커는 방어피음과 분단무늬라는 세이어의 두 원리를 강하게 옹호했다. 커는 세이어와 마찬가지로 배를 상부는 어둡게, 그늘지는 곳은 밝게 칠하기를 주장했다. 그리고 분단무늬 원리를 적용해 얼룩말처럼 윤곽을 흰색 덩어리로 나누라고 권했다.


 


해군부는 커의 권고안 역시 효용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배를 다시 칙칙한 회색으로 칠해버렸다. 그러나 커는 단념하지 않았다. 끼리끼리 논다고 커는 세이어 못지 않은 독단쟁이에 떼쟁이 였다. 그는 처칠에게 자기 말이 진리인냥 적은 편지를 계속해서 보내 귀찮게 만들었고 결국엔 아무도 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개무시를 당하며 굴욕의 시간을 보내던 커는 1917년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것을 들고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화가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커와 세이어가 개무시당했던 것과 달리 모든 것을 아주 손쉽게 이뤄내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다.


 


 


 





노먼 윌킨슨Norman Wilkinson (1878 – 1971)



 


 



노먼 윌킨슨은 배를 사랑한 전통 화풍의 해양 화가이자 삽화가다. 1차 대전이 터지자 그는 해군에 입대해 여러 임무를 수행한 바다의 사나이였다. 비록 생물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이어나 커의 이론을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해상에 관한 많은 경험들이 그를 통찰로 이끈 듯하다.


 


1917년 낚시를 하던 윌킨슨의 뇌 안에서는 불현듯 경험과 생각들이 서로 강렬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위장도색에 관한 영감을 얻게 된다.


 


윌킨슨은 주먹구구식으로 땡깡이나 부리는 커나 세이어 와는 달리 요령있게 일을 처리하는 센스가 있었으며 많은 연줄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발빠르게 자신의 계획을 전쟁부에 제출했으며 해군과 예술계 모두 접촉하여 일을 추진하였다.


 


윌킨슨은 전쟁부에서 위장 부대를 설치할 권한을 따내자 런던에 사무소를 차리고 동료화가를 모았으며 왕립 아카데미는 그의 일손을 도울 여학생을 지원해주었다그렇다고 일이 일사천리로 술술 풀린 것은 아니었다. 전쟁부는 커와 세이어에게 했던 것처럼 윌킨스에게도 그 괴상한 도색이 실용성이 있는지 보고서를 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윌킨슨은 달랐다. 그는 한마디로 사회생활을 할 줄 알았다. 게다가 해군에서 복무했었기 때문에 일이 돌아가는 상황도 잘 알고 있었다. 커와 세이어의 제안들이 서류철 안에서 화석이 되어가고 있는 동안 윌킨슨은 막후교섭을 통해 결국 위장 도색과라는 공식부서를 설립할 수 있었다.



 


 


 







윌킨슨의 위장도색 디자인들


 


 


 


이렇게 세이어가 영국으로 출정시위를 벌이고 커가 안그래도 바뻤을 처칠을 괴롭히며, 윌킨슨이 왕립 아카데미까지 움직일 정도로 노력을 하였던 위장 도색은 실전에서 얼마만큼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영국에서는 1918년 상선의 위장 도색에 관한 공식 보고서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9186월 말 기준으로 2,367척이 위장 도색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보고서의 통계는 위장 도색의 효용을 보여주기에는 자료로서 결정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생포된 유보트 승무원들은 위장 도색 선박을 조준하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고까지 증언했다.


 


반면 미국의 선박 위장 결과는 더 결정적인 듯했다. 상선과 전함 총 1,256척이 191831일에서 1111일 사이에 위장 도색을 했다. 2,500톤이 넘는 배 중에 96척이 침몰했는데, 그중 위장 도색된 배는 18척에 불과했고 모두 상선이었다. 위장된 전함은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나는 듯한 당시의 위장도색 전함들

 


 


19191차대전은 막을 내리지만 커에게는 위장 도색의 발명에 관한 우선권 문제라는 또다른 전쟁이 남아 있었다. 커는 1917년에 채택된 체계를 자신이 1914년 해군부에 제시했다는 영예를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해군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윌킨슨은 발명의 대가로 2,000파운드를 손에 쥐었다.


 


그렇다면 윌킨슨과 커의 위장 도색은 어느 부분에서 2,000파운드의 차이점이 발생한 것일까? 커의 위장 도색 디자인은 얼룩말의 곡선 무늬였던 반면 윌킨슨의 위장 도색 디자인은 흑백에 때로는 파란색과 녹색을 섞은 띠무늬를 엄격한 기하학적 패턴으로 배열한 거의 모든 변이 형태를 포함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은 시각적인 것에서가 아닌 단어의 함의 차이,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말장난에서 판가름이 났다.


 


먼저 커의 위장 도색은 윤곽을 쪼개어 정체성을 파괴하기 위한 “비가시성(invisibility)” 이 목적으로, 함선의 장거리 포 공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윌킨슨은 잠수함에서 잠망경으로 배를 겨냥해 어뢰를 쏠 때 배의 거리와 이동방향에 혼란을 주기위한 “인식불능성(unrecognizability)”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비가시성과 인식불능성은 결국 같은 말이다윤곽을 쪼개면 당연히 거리와 이동방향에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그러나 영국 해군부는 위장 도색의 주된 목적이 유보트의 위협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윌킨슨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윌킨슨의 인맥이 작용한 결과일 거라고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흑백 무늬가 눈을 혼란시키는 힘은 1960년대 옵 아트Op art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커는 이 문제를 왕립 위원회로도 들고 갔지만 거기서도 인정 받지 못했다. 커는 동물학 연구를 계속하며 윌킨슨과 위장 도색의 우선권에 관해 수차례 공방을 벌였으며 왕립 위원회의 평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변호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세이어는 군 당국과 실랑이질을 하면서 더욱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말년에 그는 자신이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애벗 세이어는 19215월에 사망하였다.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4부작 끝]


 


 


 



Abbott Handerson Thayer ‘Monadnock Angel’ 


 


 


 


 



▒ 발췌 및 편집: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3부]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1부 보기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2부 보기


 


 


 



 


 


 


세상에는 테디베어라는 돈 잘 버는 봉제 곰이 있다. 별로 귀엽지도 않게 생긴 것이 전세계를 무대로 많은 돈을 긁어 모으며 유수의 재력가들과 어깨를 함께하고 있는 곰탱이다. 우리가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기위해 미친듯이 공부하는 동안 이 봉제곰은 멍청한 얼굴로 쇼윈도에 앉아서 억대의 돈을 벌어들이는 참 배알 꼴리는 요지경 세상이다.

 


돈 잘버는 곰탱이 테디베어의 탄생은 봉제인형이라는 태생과는 어울리지 않게 정치사회학적인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옛날 옛적 20세기 초 미국. 업무 차 미시시피에 들렀던 어느 지체 높으신 양반께서는 시간 좀 때울 겸 곰사냥을 나갔다. 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빌빌대고 있자 옆에서 수행하던 이들은 아부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임을 깨닫고 곰을 산채로 잡아와 대령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이 양반에게 당신이 이 곰을 잡은 것으로 하자며 총을 쏘길 권한다.



 


그러나 강태공이 다른 이가 잡은 물고기를 내 낚시바늘에 끼워놓고 “월척이다~!” 하며 소리치는 것만큼 쪽팔리는 짓이 어디 있으랴. 게다가 대부분의 권력자들이 그러하듯 호전적이고 자부심이 강한 이 양반이 그런 낯부끄러운 제안을 수락할 리 없지 않았을까.


 


어쨌든 곰사냥을 왔다는 사람이 불현듯 감수성이 폭발해서 곰이 눈물나게 불쌍히 여겨졌는지 아니면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쪽팔려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양반은 총을 쏘길 거절하고 곰을 놓아주었다.



 

사실 별것도 아닌 사건이었다. 그러나 누가 했느냐에 따라 카페에서 손만 흔들어도 9시 뉴스에 나가는 것처럼 이 양반의 행동은 한 신문사의 시사만화가에게 포착되어 만평으로 그려졌고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러자 신의 계시라도 받았는지 브루클린의 한 장난감 가게 아저씨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박을 친 브루클린의 장난감 가게 아저씨,

모리스 미첨Morris Michtom





 


그는 아내와 함께 곰인형을 만들어 그 지체높으신 양반의 애칭인 ‘테디’라는 이름을 붙여 ‘테디 베어’란 이름으로 만평과 함께 진열하였다. 이 인형은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고 장난감 가게 아저씨는 그 양반에게 편지를 써 테디라는 이름을 곰인형에 정식으로 붙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양반은 흔쾌히 승낙하였고 그 뒤로 광적인 ‘테디 유행’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이 지체 높으신 양반은 바로 미국 26대 대통령을 역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1858~1919)이다.


 


 


 




‘테디’는 루스벨트의 애칭이었다.

대박을 친 테디 베어는


루스벨트 풍자만화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당시 루스벨트는 미시시피와 루이지애나의

주 경계선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미시시피를 방문하고 있었다.


루스벨트의 곰 방생 장면을 포착한 [워싱턴 스타Washington Star]의


시사만화가 클리포드 K.베리먼(Clifford K. Berryman, 1869~1949)은



불쌍한 곰 사냥을 거부하는 내용의 그림을 ‘선을 긋다’는 설명과 함께 신문에 실었다.


이 만평은 곰 사냥에도 일정한 선이 있음을 나타내면서 주 경계선을 갖고 다투는


당시 상황을 다루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25대 대통령 매킨리가 암살로 인해 세상을 하직하자 당시 부통령으로 42세라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에 26대 대통령이 된다. 그는 잘난 집안의 잘난 아들로 일찍부터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미국·스페인 전쟁 발발 시에는 의용기병대 대장으로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워 전쟁영웅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이 꼽는 ‘최고의 대통령’ 명단 중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른바 ‘혁신주의 시대 Progressive Era(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01년 말부터 미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1917년 4월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를 이끈 혁신주의자였다.

 


그는 이 시기 동안 국민들의 편에서 서서 행동거지가 불량한 대기업의 코를 매섭게 비틀어 쥐었다. 대기업과 노조의 평화공존을 꿈꾸며 외쳤던 공정거래 the Square Deal는 그의 별명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그는 파나마 운하 건설에 착수하여 미국인들의 오랜 바람이었던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단시간 항로로 연결시켰다.



 

하지만 그는 미국인들에게나 좋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인종주의자이자 전쟁광에 제국주의자였다. 그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는, 철저한 사회 진화론자였다. 그는 전쟁을 추종했고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은 거의 전쟁광의 경지에 도달했다. 혁신주의는 더욱 강력하고 위대한 미국을 만들려는 계획의 일환일 뿐이었고 파나마 운하를 착수하기 위해서는 아주 더러운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이런 그간의 노고(?)를 치하 받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이렇게 제국주의자였던 루스벨트의 재임기간 내내 그의 반대편에서 서서 그의 신경을 박박 긁고 있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었다. 그는 루스벨트의 제국주의 노선에 강경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며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많은 글들을 쏟아내었다. 트웨인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가리켜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 내린 가장 강력한 재앙‘이라고 선언하였다.



 

마크 트웨인이나 그 밖의 사람들이 그의 제국주의 성향에 계속해서 딴지를 건 것은 그가 정치인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의외의 분야에서 의외의 인물과도 엮이게 된다. 그 인물은 바로 자뻑에 빠진 화가 세이어였다.

 


루스벨트가 전쟁광에 제국주의자, 인종주의자라고 하면 ‘역시 단순무식한 예비역 군인들은 어쩔 수 없어’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루스벨트는 똑똑하고 왕성한 독서가였다. 21세 때 첫 저서를 발간한 이래 역사, 자연, 여행,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38권을 집필하여 미 대통령 중에서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인물이다.



 

이렇게 잘나고 똑똑한 인물의 눈에 세이어의 자뻑은 눈꼴시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퇴임후에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동물 사냥에 많은 시간을 보내며 지냈고 이것을 엮어서 [아프리카 수렵여행African Game Trails](1910)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부록 20 쪽을 할애하여 세이어의 위장 개념을 공격하였다. 그 뒤로 둘은 잡지와 서신을 통해서 몇 년 동안 논쟁을 벌였다.


 

루스벨트는 곤충과 같은 작은 동물의 탁월한 위장술에 대해선 동의했지만 큰 동물들의 무늬가 위장술에 효과적인지에 대해선 의구심을 가졌다. 그는 움직임이 아주 느리고 신중하지 않은 동물들이 움직일 때는 어떤 색 배열이든 위장에는 별 쓸모가 없다고 말했고, 그러므로 얼룩말의 줄무늬 역시 포식자의 눈에는 늘 잘 띌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이어는 얼룩말을 1미터 앞에서 보는 것과 1.5미터 앞에서 보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고 반박하였다.

 


 

 



세이어는 가지뿔영양 Antilocapra americana의 엉덩이에 있는 두 개의 하얀 반점이 

윤곽을 지우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이에 루스벨트는,


 “열 걸음 물러나든 열 걸음 다가가든 간에



그 반점은 그 사냥감을 잡은 적이 있는 가장 시력 나쁜 늑대나 


쿠거의 눈에도 즉시 뛸 것이다.”라고 답해주었다.




 


 

루스벨트는 세이어가 위장이 탁월하다고 주장하는 생물들 중 상당수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시간은 생애 중 일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세이어는 사자는 생애의 대부분을 빈둥거리며 보내므로 사자의 이빨과 발톱은 거의 쓰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그런 기관이 먹이를 잡아먹는 데에 쓸모가 없다는 뜻이냐고 반박했다.

 


이처럼 그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논쟁을 벌였지만 루스벨트가 세이어를 진심으로 인정한 측면이 하나 있었다.


 


 


 


“내친 김에 나는 세이어 집안의 여러분들이 새와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탄복할 일을 했음을 증언하고 싶다. 그 분들이 그 일을 계속한다면 보호색 문제에서도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믿어도 될 자격이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루스벨트가 세이어의 야생동물 보호 활동에 탄복한 것은 루스벨트 역시 대통령 재임 시절 열정적으로 자연보호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 부인과 부친을 한날에 병으로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 시골 목장에서 카우보이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곳 생활을 통해 그는 자연을 동경하게 되었고 방치된 채 손상돼가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가 국립공원 시스템을 창안한 동력이 되었다.



 

루스벨트는 1905년 산림청의 권한을 강화하였고 자연보호정책에 따라 수많은 댐 건설을 취소시켰다. 1억 9000만 에이커의 광대한 숲을 국유화시키므로서 그의 재임 중에 국립공원은 2배로 늘어났고 16개의 국립명소, 51개의 야생 서식처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자연보호운동은 인디언에겐 치명타였다. 

보호지역에 살던 모든 인디언 부족들은 강제퇴거를 당해야 했다.


 


 



 

세이어는 야생동물 보호에 앞장섰고 특히 조류 보호에 있어서 선구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20세기로 들어설 무렵, 새의 깃털은 여성 모자의 장식품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 바람에 해오라기와 제비갈매기 같은 몇몇 종은 멋진 깃털을 가진 덕분에 멸종될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세이어는 그들의 번식지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자는 운동을 앞장서서 펼쳤고 우리가 그 조류들을 지금도 볼 수 있는 것은 세이어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이후 미국 오듀본 협회 National Audubon Society와 영국 왕립 조류 보호협회 같은 현대의 대규모 보전단체의 창설에 영감을 준 인물이었다.



 


세이어가 생물의 위장이론을 놓고 사냥꾼과 논쟁을 벌였다면, 위장이론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분야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참고 및 발췌

○ 강준만 저, [미국사 산책 4], 인물과 사상사, 2010

○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2부]



 

 


 


 


* 1부에서 이어집니다. *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수컷 공작의 과시 쩌는 꼬리깃은 마치 3류 로맨스 영화 속 사나이의 순정과도 같다. 오로지 암컷을 꼬셔서 대업(?)을 이루겠다는 마음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화려해서 눈에도 잘 띄고, 무겁고 거추장스러운데다 ‘공기역학이란 먹는건가요 우걱우걱’한 듯한 꼬리깃은 천적을 피해서 날기는 고사하고 뛰어서 도망가기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초창기 진화론자들에게 이런 수컷 공작의 미련 곰탱이 같은 모습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래서는 암컷을 꼬시기도 전에 천적의 한 끼 식사가 될 것은 뻔해 보이는데 대체 왜 수컷 공작은 이렇게 위험천만한 방식을 택한 것일까? 그리고 화려한 깃털을 택한 초창기의 수컷들은 대부분 쉽게 천적들에게 잡아 먹혔을텐데 어떻게 이런 비실용적인 부분들이 진화한 것일까?


 


현재의 진화론은 ‘생존’이란 것도 결국 번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라 수컷 공작의 꼬리깃은 생존보다는 번식에 더 치중한 결과이다. 최근엔 꼬리깃의 화려하고 대칭적인 무늬는 암컷에게 보다 건강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공작새 수컷의 진짜 속사정이야 어찌됐건 이러한 논의들의 당연한 전제는 수컷의 꼬리는 암컷을 꼬시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누구도 이 점에 관해서는 의심치 않았으며 관찰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세이어 형님에게 그건 개풀 뜯어 먹는 소리였다. 세이어의 눈에는 수컷 공작의 꼬리란 위장을 위한 것이었다! 열 번 떠드는 것 보다 한번 jpg파일을 보여주는 게 낫다고 했던가. 세이어는 자신의 주장을 알아먹지 못하는 우매한 이들에게 직접 그림을 그려 눈앞에 펼쳐 보였다.


 


 


 




Abbott Handerson Thayer, Peacock in the Woods, 1907


 


 


 


그런데 공작 수컷이 그토록 위장이 잘 되어 있다면, 칙칙한 암컷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이어를 영구히 조롱거리로 만든 작품은 공작이 아니라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위장한” 채 호수에서 먹이를 찾는 홍학들을 그린 것이었다.


 


 


 




Abbott Handerson Thayer,

White Flamingos, Red Flamingos: The Skies They Simulate, 1909


 


 


 


“전통적으로 ‘눈에 확 띄는’ 이 새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체색을 통해서 완벽하게 자신을 지운다. 그들은 사람이 으레 그들을 보는 위치인 위에서 보았을 때는 대부분 눈에 잘 띄지만, 그들의 체색은 이른 아침과 저녁의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소실되는’데에 경이로울 만큼 적합하다.” (Thayer)


 



 


 

도대체 홍학들은 왜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사라져야 하는걸까? 그저 머릿속이 아득해져 온다.



세이어는 독단이라는 우물에 빠져 그 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인 냥 자기 이론만이 유일한 법칙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물들의 모든 무늬들이 위장과 은폐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이어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그린 또다른 작품들.

그림은 정말 잘그렸는데 …..



 


 


아마존에는 헬리코니드Heliconidae라는 화려한 나비 종이 있다. 이 나비들은 마치 포식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화려한 색깔로 치장한 날개를 펄럭이며 유유자적 날아다닌다.

 

실제로 헤리코니드 종은 아주 강한 냄새를 풍기며, 몸이 잘리면 강한 냄새의 체액이 나온다. 이 체액은 피부에 닿으면 염증을 일으킨다. 헬리코니드는 시계꽃passiflora종의 꽃만을 먹는데 이 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시안화물을 포함한 독소를 만들어낸다.

 


헬리코니드는 이 꽃을 먹음으로써 유독한 성질을 획득한 것이다. 이렇게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비들이 포식자들에게 잡혀 비명횡사하는 순간에도 헬리코니드 종 나비들은 자유롭게 꽃밭을 노닐 수 있었다.


 


 


 




시계꽃 종인 Bluecrown Passionflower


 


 


 


그런데 아마존에는 헬리코니드와 비슷한 무늬를 가진 레프탈리스Leptalis 나비가 있다. 이 나비는 상대적으로 맛이 좋기 때문에 포식자들이 환영하는 나비였다. 본의 아니게 맛있게 태어난 이 나비들은 난처해졌다. 힘이 센 것도 아니요 독이나, 침이 있는 것도 아니니 뭐든 하지 않으면 종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질 판이었다.


 


그래서 이 나비들이 택한 것은 의태였다. 맛대가리 없는 헬리코니드의 무늬를 따라함으로서 포식자가 자신들을 맛대가리 없는 헬리코니드라고 착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 이 이론은 당시 연구했던 과학자인 베이츠의 이름을 따 ‘베이츠 의태Batesian mimicry’라고 부른다.


 


즉, 맛이 없거나 독이나 침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거친 녀석들의 무늬와 색깔을 흉내내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의태의 예, 꿀벌과 꽃등에.

어린 시절 종종 꿀벌이 꽃등에 인 줄 알고 잡았다가 쏘였던 적이 있다.

 






 

당연히 세이어는 의태 개념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는 헬리코니우스 무늬도 경고색이 아니라 앉아 있을 때 잎으로 위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비 따위가 어디서 건방지게 경고색 따위를 가지고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게다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판단을 한단 말인가. 발끈한 세이어는 1903년, 베이츠의 의태 이론을 논박하겠다는 목적으로 가족을 데리고 헬리코니우스가 있는 섬으로 탐사를 갔다. 그의 딸 글래디스는 이렇게 적었다.



 


 



“아버지의 특수 임무는 나비를 맛보는 것이었다! …

(중략) … 아버지는 실제로 나비들을 맛보았는데, 맛에서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행동거지가 얄미워도 분명한 점은 세이어는 입만 싼 멍청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건방을 떠는 와중에도 그는 위장의 또하나의 메커니즘인 분단색disruptive coloration 이론을 발견하였다.


 


 


 




 


 



 

사물마다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윤곽은 그 사물을 알아차리는데 쉽고 간단하면서도 매우 큰 정보를 준다. 만약 원시인이 길을 가다 사자를 마주쳤는데 이게 내가 기억하는 사자인가 싶어서 그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간 단숨에 뼈와 살이 분리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도 이놈이 사자인지 아님 내가 사냥해야 할 사슴인지 빠르게 알아채야만 했다.

 


이때  사물의 고유한 윤곽은 멀리서도 그 사물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래서 많은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사물의 윤곽을 기억하고, 자신이 아는 사물의 윤곽과 끊임없이 비교한다. 은폐색의 메커니즘은 바로 이 윤곽을 없애는 것이다. 배경과 비슷한 색깔과 무늬를 이용해 자신의 윤곽을 배경과 섞어 버림으로써 눈 앞에서 사라지는 착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큰 동물과 작은 동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작은 동물일수록 윤곽을 없애는 것은 쉽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오랜시간을 꼼짝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큰 동물은 다르다. 커다란 형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윤곽들은 왠만해선 은폐하기 힘들다. 그들이 제아무리 노력해도 대부분은 바로 들키고 말 것이다. 그래서 큰 동물들은 작은 동물과는 다른 메커니즘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분단색이다. 분단색은 어떤 의미에서 방어피음이나 위장색과는 정반대이다. 분단색이란 커다란 윤곽을 없앨 수 없다면 상대가 인식하기 어렵게 윤곽을 임의적인 덩어리로 쪼개는 것이다.


 


 


  




가봉살무사Bitis gabonica를 보면,

납작한 머리가 들쑥날쑥한 두 덩어리로 쪼개지고


굵은 밧줄이 등을 따라서 뚜렷이 뻗어 있는 것 같다. 


낙엽이 깔린 땅에서는 이 뱀의 윤곽이 사라지기 쉽다.


 





세이어는 분단색을 “동물의 몸에 아무렇게나 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엄격한 변장 법칙에 따라서 배치된, 대비되는 그늘과 색깔 덩어리들이 이루는 뚜렷한 무늬”라고 정의했다.



세이어는 이처럼 동물들의 무늬를 위장과 은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이어의 법칙은 자연의 위장 중 한 측면만을 가리킬 뿐이다. 세이어의 문제점은 자연의 어떤 타당하고 진정한 원리가 반드시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가정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꼭 그렇지는 않은데, 생물학은 예외의 사례로 가득한 과학이다. 생물들의 무늬 역시 위장의 기능 뿐만 아니라 경고색이나 의태(다른 동물의 무늬를 모방하는 것) 기능을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세이어는 위장을 제외한 다른 주장들을 돌파리 의사의 처방전으로 보았다. 스컹크나 말벌과 같은 동물들의 무늬들도 경고색이 아닌 위장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벌은 햇빛과 그늘에 잠긴 녹색 식생과 노란 꽃이라는 평균 배경에 놓일 때 근원적으로 그리고 아주 철저히 지워진다.
” (Thayer, 1909)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세이어는 숙이기는 커녕 고개를 바싹들고 끊임없이 떠들며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 과시를 하는 밥맛 중에도 ‘상밥맛’이었다.


 


당연히 이런 행동거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법이다. 세이어는 세계적으로 자신의 적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기어코 그는 미국 전직 대통령의 혐오 대상이 되고야 말았다.   



 


발췌 및 편집: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