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3부]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1부 보기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2부 보기


 


 


 



 


 


 


세상에는 테디베어라는 돈 잘 버는 봉제 곰이 있다. 별로 귀엽지도 않게 생긴 것이 전세계를 무대로 많은 돈을 긁어 모으며 유수의 재력가들과 어깨를 함께하고 있는 곰탱이다. 우리가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기위해 미친듯이 공부하는 동안 이 봉제곰은 멍청한 얼굴로 쇼윈도에 앉아서 억대의 돈을 벌어들이는 참 배알 꼴리는 요지경 세상이다.

 


돈 잘버는 곰탱이 테디베어의 탄생은 봉제인형이라는 태생과는 어울리지 않게 정치사회학적인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옛날 옛적 20세기 초 미국. 업무 차 미시시피에 들렀던 어느 지체 높으신 양반께서는 시간 좀 때울 겸 곰사냥을 나갔다. 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빌빌대고 있자 옆에서 수행하던 이들은 아부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임을 깨닫고 곰을 산채로 잡아와 대령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이 양반에게 당신이 이 곰을 잡은 것으로 하자며 총을 쏘길 권한다.



 


그러나 강태공이 다른 이가 잡은 물고기를 내 낚시바늘에 끼워놓고 “월척이다~!” 하며 소리치는 것만큼 쪽팔리는 짓이 어디 있으랴. 게다가 대부분의 권력자들이 그러하듯 호전적이고 자부심이 강한 이 양반이 그런 낯부끄러운 제안을 수락할 리 없지 않았을까.


 


어쨌든 곰사냥을 왔다는 사람이 불현듯 감수성이 폭발해서 곰이 눈물나게 불쌍히 여겨졌는지 아니면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쪽팔려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양반은 총을 쏘길 거절하고 곰을 놓아주었다.



 

사실 별것도 아닌 사건이었다. 그러나 누가 했느냐에 따라 카페에서 손만 흔들어도 9시 뉴스에 나가는 것처럼 이 양반의 행동은 한 신문사의 시사만화가에게 포착되어 만평으로 그려졌고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러자 신의 계시라도 받았는지 브루클린의 한 장난감 가게 아저씨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박을 친 브루클린의 장난감 가게 아저씨,

모리스 미첨Morris Michtom





 


그는 아내와 함께 곰인형을 만들어 그 지체높으신 양반의 애칭인 ‘테디’라는 이름을 붙여 ‘테디 베어’란 이름으로 만평과 함께 진열하였다. 이 인형은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고 장난감 가게 아저씨는 그 양반에게 편지를 써 테디라는 이름을 곰인형에 정식으로 붙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양반은 흔쾌히 승낙하였고 그 뒤로 광적인 ‘테디 유행’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이 지체 높으신 양반은 바로 미국 26대 대통령을 역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Theodore Roosevelt, 1858~1919)이다.


 


 


 




‘테디’는 루스벨트의 애칭이었다.

대박을 친 테디 베어는


루스벨트 풍자만화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당시 루스벨트는 미시시피와 루이지애나의

주 경계선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미시시피를 방문하고 있었다.


루스벨트의 곰 방생 장면을 포착한 [워싱턴 스타Washington Star]의


시사만화가 클리포드 K.베리먼(Clifford K. Berryman, 1869~1949)은



불쌍한 곰 사냥을 거부하는 내용의 그림을 ‘선을 긋다’는 설명과 함께 신문에 실었다.


이 만평은 곰 사냥에도 일정한 선이 있음을 나타내면서 주 경계선을 갖고 다투는


당시 상황을 다루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25대 대통령 매킨리가 암살로 인해 세상을 하직하자 당시 부통령으로 42세라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에 26대 대통령이 된다. 그는 잘난 집안의 잘난 아들로 일찍부터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미국·스페인 전쟁 발발 시에는 의용기병대 대장으로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워 전쟁영웅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이 꼽는 ‘최고의 대통령’ 명단 중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른바 ‘혁신주의 시대 Progressive Era(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01년 말부터 미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1917년 4월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를 이끈 혁신주의자였다.

 


그는 이 시기 동안 국민들의 편에서 서서 행동거지가 불량한 대기업의 코를 매섭게 비틀어 쥐었다. 대기업과 노조의 평화공존을 꿈꾸며 외쳤던 공정거래 the Square Deal는 그의 별명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그는 파나마 운하 건설에 착수하여 미국인들의 오랜 바람이었던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단시간 항로로 연결시켰다.



 

하지만 그는 미국인들에게나 좋은 대통령이었다. 그는 인종주의자이자 전쟁광에 제국주의자였다. 그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는, 철저한 사회 진화론자였다. 그는 전쟁을 추종했고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국은 거의 전쟁광의 경지에 도달했다. 혁신주의는 더욱 강력하고 위대한 미국을 만들려는 계획의 일환일 뿐이었고 파나마 운하를 착수하기 위해서는 아주 더러운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이런 그간의 노고(?)를 치하 받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이렇게 제국주의자였던 루스벨트의 재임기간 내내 그의 반대편에서 서서 그의 신경을 박박 긁고 있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었다. 그는 루스벨트의 제국주의 노선에 강경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며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많은 글들을 쏟아내었다. 트웨인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가리켜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 내린 가장 강력한 재앙‘이라고 선언하였다.



 

마크 트웨인이나 그 밖의 사람들이 그의 제국주의 성향에 계속해서 딴지를 건 것은 그가 정치인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의외의 분야에서 의외의 인물과도 엮이게 된다. 그 인물은 바로 자뻑에 빠진 화가 세이어였다.

 


루스벨트가 전쟁광에 제국주의자, 인종주의자라고 하면 ‘역시 단순무식한 예비역 군인들은 어쩔 수 없어’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루스벨트는 똑똑하고 왕성한 독서가였다. 21세 때 첫 저서를 발간한 이래 역사, 자연, 여행,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38권을 집필하여 미 대통령 중에서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인물이다.



 

이렇게 잘나고 똑똑한 인물의 눈에 세이어의 자뻑은 눈꼴시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퇴임후에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동물 사냥에 많은 시간을 보내며 지냈고 이것을 엮어서 [아프리카 수렵여행African Game Trails](1910)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부록 20 쪽을 할애하여 세이어의 위장 개념을 공격하였다. 그 뒤로 둘은 잡지와 서신을 통해서 몇 년 동안 논쟁을 벌였다.


 

루스벨트는 곤충과 같은 작은 동물의 탁월한 위장술에 대해선 동의했지만 큰 동물들의 무늬가 위장술에 효과적인지에 대해선 의구심을 가졌다. 그는 움직임이 아주 느리고 신중하지 않은 동물들이 움직일 때는 어떤 색 배열이든 위장에는 별 쓸모가 없다고 말했고, 그러므로 얼룩말의 줄무늬 역시 포식자의 눈에는 늘 잘 띌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이어는 얼룩말을 1미터 앞에서 보는 것과 1.5미터 앞에서 보는 것은 너무나 다르다고 반박하였다.

 


 

 



세이어는 가지뿔영양 Antilocapra americana의 엉덩이에 있는 두 개의 하얀 반점이 

윤곽을 지우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이에 루스벨트는,


 “열 걸음 물러나든 열 걸음 다가가든 간에



그 반점은 그 사냥감을 잡은 적이 있는 가장 시력 나쁜 늑대나 


쿠거의 눈에도 즉시 뛸 것이다.”라고 답해주었다.




 


 

루스벨트는 세이어가 위장이 탁월하다고 주장하는 생물들 중 상당수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시간은 생애 중 일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세이어는 사자는 생애의 대부분을 빈둥거리며 보내므로 사자의 이빨과 발톱은 거의 쓰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그런 기관이 먹이를 잡아먹는 데에 쓸모가 없다는 뜻이냐고 반박했다.

 


이처럼 그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논쟁을 벌였지만 루스벨트가 세이어를 진심으로 인정한 측면이 하나 있었다.


 


 


 


“내친 김에 나는 세이어 집안의 여러분들이 새와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탄복할 일을 했음을 증언하고 싶다. 그 분들이 그 일을 계속한다면 보호색 문제에서도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믿어도 될 자격이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루스벨트가 세이어의 야생동물 보호 활동에 탄복한 것은 루스벨트 역시 대통령 재임 시절 열정적으로 자연보호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 부인과 부친을 한날에 병으로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 시골 목장에서 카우보이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곳 생활을 통해 그는 자연을 동경하게 되었고 방치된 채 손상돼가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가 국립공원 시스템을 창안한 동력이 되었다.



 

루스벨트는 1905년 산림청의 권한을 강화하였고 자연보호정책에 따라 수많은 댐 건설을 취소시켰다. 1억 9000만 에이커의 광대한 숲을 국유화시키므로서 그의 재임 중에 국립공원은 2배로 늘어났고 16개의 국립명소, 51개의 야생 서식처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자연보호운동은 인디언에겐 치명타였다. 

보호지역에 살던 모든 인디언 부족들은 강제퇴거를 당해야 했다.


 


 



 

세이어는 야생동물 보호에 앞장섰고 특히 조류 보호에 있어서 선구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20세기로 들어설 무렵, 새의 깃털은 여성 모자의 장식품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 바람에 해오라기와 제비갈매기 같은 몇몇 종은 멋진 깃털을 가진 덕분에 멸종될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세이어는 그들의 번식지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자는 운동을 앞장서서 펼쳤고 우리가 그 조류들을 지금도 볼 수 있는 것은 세이어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이후 미국 오듀본 협회 National Audubon Society와 영국 왕립 조류 보호협회 같은 현대의 대규모 보전단체의 창설에 영감을 준 인물이었다.



 


세이어가 생물의 위장이론을 놓고 사냥꾼과 논쟁을 벌였다면, 위장이론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분야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참고 및 발췌

○ 강준만 저, [미국사 산책 4], 인물과 사상사, 2010

○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1부]

 


 

 


 


 


 





애벗 핸더슨 세이어(Abbott H. Thayer, 1849~1921)


 


 

일찍부터 그림에 눈을 떠 무려 열여덟 살에 화가생활을 시작한 뉴잉글랜드 출신의 화가 세이어는 여느 남자들이 그렇듯 여자에 참 관심이 많았다. 그는 많은 여학생과 여조교들에 둘러쌓여 있었고 사실주의적인 화풍으로 신비하고 영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는 여성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리고 1887년 자신의 딸 메리의 초상화를 그리며 천사의 날개를 그려 넣은 것을 계기로 여성의 등에 천사의 날개를 그려 넣기 시작하였다. 

 


 

  




Abbott Handerson Thayer (18491921), Angel.




 


 

그러나 세이어는 자나깨나 머릿속에 여자생각만으로 꽉 차있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여자 말고도 또 하나의 관심사가 있었다. 그것은 술도 아니고, 축구도 아니었다. 바로 ‘자연’이었다.

 

 




Abbott Handerson Thayer (18491921), Monadnock in Winter.




 


 

세이어는 어린 시절 뉴햄프셔의 깡촌에서 자연에 푹 빠져서 지냈으며 오듀본의 [아메리카의 새 Bird of America]를 탐독하는 등 자연친화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랬기에 그는 여자도 좋아했지만 자연도 즐겨 그리곤 하였다.

 


그런 세이어에겐 언제부턴가 야생동물들을 그리면서 자꾸 뭔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많은 동물들이 등은 짙은 색이고 배는 흰색이나 옅은 색으로 되어있는데, 햇볕 아래서는 등이 무슨 색깔이든 간에 털이 빛을 반사시켜 하얗게 빛나고, 반대로 배는 그늘이 지면서 본래의 보다 더 짙은 색을 띄었다. 이러한 효과로 인해 동물들은 보다 평평하게 보이며 윤곽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웠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동물들이 평평하게 보인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세이어의 눈에는 이것이 유독 더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나 보다. 세이어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동물들의 이러한 배색과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몰두하였고 1896년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정리하여 [오크 The Auk]라는 자연사 잡지에 [보호색의 기본 법칙 The law which underlies protective coloration]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동물들의 배가 밀가루라도 바른 듯 하얗색을 띄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 방어피음 원리


 


 



동물들은 그늘이 지는 배 쪽의 색깔은 밝게 하고, 어두운 색의 등은 빛을 반사시켜 새하얗게 함으로써 빛이 비칠 때 대비효과를 줄인다. 그 결과 배경과 더 구분이 되지 않고 상쇄시키는 배색을 띄도록 진화한 것이다. 이런 동물들의 배색을 방어피음(防禦被陰, countershading)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생물학자는 세이어의 방어피음 개념을 환영했고, 세이어의 이론은 1902년에 [네이처]를 통해 영국 대중에게도 전해졌다.



 


 


 


“자연은 하늘의 빛을 가장 많이 받는 경향이 있는 부위는 가장 검게 하고 그 반대쪽은 가장 희게 하는 식으로 동물을 칠한다.” (Thayer, 1909)


 


 


세이어는 회화와 생물학이라는 은하 두세 개는 너끈히 들어갈 법한 학문 간의 거리를 꿰뚫으며 화가로서 생물학적 성찰을 이룬 것이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평생을 연구에 매달려도 과학법칙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는 것에 비해, 그는 화가의 신분으로 ‘세이어의 은폐색 법칙’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붙어있는 과학법칙을 가지게 되었다.

 


본업이 아닌 이들이 본업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성과를 이루는 이런 뭐같은 상황은 정말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상황을 외면하기 위해서 일명 ‘신은 공평하다’라는 회피기제를 보인다. 이쁜 애들은 머리가 나쁘다던가 저 잘생긴 놈은 분명 발냄새가 고약할것이라는 편견을 만들어내어 심신의 안정을 찾으려는 생존본능 말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런 편견들은 일정부분 들어맞는다. 완벽한 사람이란 신조차 용서하기 힘든 존재였던 것이다. 그럼 세이어는 어땠을까? 암내가 심했을까? 성격이 심한 무좀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면 인정하기 싫지만 그림도 잘그리고 머리도 좋은 외계인이었을까?


 


 


 




연기, 감독, 그림, 노래, 작사, 작곡 등 못하는게 없는 구켈란젤로 구혜선양. 

그녀는 외계인일까? 


 



 


 


다행(?)스럽게도 세이어가 중대한 과학법칙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는 과학자적인 기질과는 매우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넘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상주의에 빠져있었고 심각한 열등감에 따른 자기과시와 자만심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자연계의 원리인 ‘방어피음’ 개념에 심취하여 자신이 고고한 식견을 가진 화가라는, 걸리면 약도 없다는 왕자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뿌듯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고 종종 망언을 내뱉고는 했다.


 


 


 


“물론 그런 모방을 판단하는 사람은 예술가이다. 따라서 나는 전문가로서 모방 여부를 판결한다.” (Thayer, 1911)


 


 


 


아들인 제럴드와 함께 쓴 대작 [동물계의 은폐색](1909)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때쯤, 그의 왕자병은 정점에 이르렀고 듣기에도 민망한 자화자찬이 이어졌다.


 


 


 


“우리 책은 이론이 아니라 라듐의 엑스선처럼 명백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계시를 전한다.” (Thayer, 1909)


 


 


 


세이어는 알다시피 화가다. 그는 다른 과학자들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내 글에 들어가는 그림을 직접 그려 넣듯이 세이어도 자신의 재능을 썩힐 리가 만무했다.

 


그는 생물들의 무늬는 오로지 은폐색 기능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그런 주장과는 달리 현실에선 그 동물들 대부분은 1킬로미터 밖에서도 뚜렷이 보였지만 말이다.


 


 



-발췌 및 편집-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