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4부 완결]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1부 보기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2부 보기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3부 보기


 


 


 



누구나 드넓게 펼쳐진 자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에 덕지덕지 껴있는 고뇌와 번민의 찌꺼기들이 옥시크린으로 씻은 듯 말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빌딩 숲 속에서 딱딱한 아스팔트를 딛고 생활하고 있지만 태초에 우리는 자연에서 왔으며, 그래서 편한 도시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연을 동경하고 있다. 부자일 수록 보다 가까이 자연을 곁에 두려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에 대한 로망은 안전이 보장되었을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자연에 던져졌을 때 어떤 고난과 역경이 펼쳐지는지,


몸소 보여주고 있는 베어그릴스 형님


 


 


평온한 겉모습과 달리 자연은 먹으려는 놈과 먹히지 않으려는 놈들의 숨가쁜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 살벌한 전쟁터다. 이렇게 아주 작은 실수가 한 끼 식사로 연결될 수 있는 곳에서 오랜시간 끊임없이 개량된 생물들의 생존전략은 분명 인간들의 전쟁터에서도 매우 유용하게 쓰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세이어는 방어피음과 분단무늬 원리가 전쟁에서도 유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쌈박질이 일어났을 때부터 자연 위장 전문가로서 미국 해군의 요청을 받아 함선의 위장도색법을 제시하였다. 비록 아무런 성과도 없었지만 세이어는 전쟁이 끝난 뒤 이에 관한 특허를 내었다.


 


 





US Patent No. 715,013


1092년 세이어와 제롬 브러시가 함께 특허를 낸,


 배를 비롯한 대상을 눈에 덜 띄게 처리하는 과정의 개선점”.


배에 방어피음 원리를 적용하여 자연적인 빛과 그늘을 상쇄시키기 위한 도색방법이다. 위를 향한 면은 검게, 수직면은 밝게, 아래를 향한 면은 아주 밝고 되도록 흰색으로


칠해야 하며, 곡선 표면 특히 포신과 같은 구조물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조금식 짙은 색에서 밝은 색으로 바림질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20세기의 문을 열어 제끼자마자 인류는 다시 커다란 두 번의 전쟁을 벌이게 된다. 세이어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나대고 싶은 마음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세이어는 오지랖 넓게도 바다건너 영국 전쟁부에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자신의 위장방법을 채택하라고 촉구하기 시작했다. 1915년 세이어는 처칠에게 잠수함을 방어피음 된 고등어처럼 칠하고 배는 하얗게 칠하라고 탄원했다. ..고등어는 그렇다치고 배는 어째서 흰 색으로 칠하라고 한 것일까?



밤 바다에서 물체를 무슨 색으로 칠해야 가장 안보일까? 아마도 언뜻 생각하기에는 검은색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세이어는 이런 범인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흰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12년 타이타닉 호의 침몰사건을 통해 빙하가 흰색이었기 때문에 밤에 더 잘 눈에 띄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흰색은 해상에서 위장의 핵심이라고 믿고 있었다. 세이어의 이 주장은 두 번의 세계대전 내내 열띤 논란거리가 되었다.



 


 





빙하와 부딪혀 침몰한 타이타닉호

 


 


영국 군부는 세이어의 제안들을 그럴듯한 이론이긴 하지만 그다지 쓸모는 없을 거라고 결론 내렸다. 뚜껑이 열린 세이어는 영국으로 날아가 전국을 돌며 자신의 이론을 수용할 것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 전쟁부는 세이어의 계획을 논의할 준비가 되었다며 빨리 런던으로 오라는 연락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엔 세이어가 영국 전쟁부의 연락을 쌩까 버렸다. 그때 그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행복한 날들을 보내느라 영국에 왔던 목적 따위는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세이어는 글래스고에서 자신의 이론을 공감하고 지지해주는 존 그레이엄 커를 만났다. 세이어는 군바리들 사이에서 시달리느니 말이 통하는 이들 사이에서 영웅처럼 받들어지는 쪽이 훨씬 맘에 들었고 결국 스코틀랜드에서 놀다가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물론 미국으로 돌아간 세이어는 몇 달 뒤 제정신이 돌아오자 다시 영국 해군에게 자신의 위장이론을 적용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독일 유보트에 빡친 미국이 뒤늦게 참전하자 이번엔 당시 미해군 차관보를 지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에게 들러붙어 괴롭히기 시작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세이어를 무시해버렸다.


 


 


 






존 그레이엄 커John Graham Kerr(1869~1957)



 


 



한편 세이어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만났던 존 그레이엄 커는 스코틀랜드 동물학자로 1902년부터 1935년까지 글래스고 대학교의 동물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사직한 뒤에 스코틀랜드 대학교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배를 무척 좋아했는데 칙칙한 회색으로 칠한 전함을 보고서 동물 위장술에는 발톱의 때 만큼도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허접한 위장술에 개탄을 하며 새로운 임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커는 당시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을 시작으로 당국자들에게 위장에 관한 조언을 쏟아내기 시작하며 위장 전도사의 길을 걷게 된다.


 


커는 방어피음과 분단무늬라는 세이어의 두 원리를 강하게 옹호했다. 커는 세이어와 마찬가지로 배를 상부는 어둡게, 그늘지는 곳은 밝게 칠하기를 주장했다. 그리고 분단무늬 원리를 적용해 얼룩말처럼 윤곽을 흰색 덩어리로 나누라고 권했다.


 


해군부는 커의 권고안 역시 효용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배를 다시 칙칙한 회색으로 칠해버렸다. 그러나 커는 단념하지 않았다. 끼리끼리 논다고 커는 세이어 못지 않은 독단쟁이에 떼쟁이 였다. 그는 처칠에게 자기 말이 진리인냥 적은 편지를 계속해서 보내 귀찮게 만들었고 결국엔 아무도 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개무시를 당하며 굴욕의 시간을 보내던 커는 1917년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것을 들고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화가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커와 세이어가 개무시당했던 것과 달리 모든 것을 아주 손쉽게 이뤄내며 부와 명예를 거머쥔다.


 


 


 





노먼 윌킨슨Norman Wilkinson (1878 – 1971)



 


 



노먼 윌킨슨은 배를 사랑한 전통 화풍의 해양 화가이자 삽화가다. 1차 대전이 터지자 그는 해군에 입대해 여러 임무를 수행한 바다의 사나이였다. 비록 생물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이어나 커의 이론을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해상에 관한 많은 경험들이 그를 통찰로 이끈 듯하다.


 


1917년 낚시를 하던 윌킨슨의 뇌 안에서는 불현듯 경험과 생각들이 서로 강렬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위장도색에 관한 영감을 얻게 된다.


 


윌킨슨은 주먹구구식으로 땡깡이나 부리는 커나 세이어 와는 달리 요령있게 일을 처리하는 센스가 있었으며 많은 연줄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발빠르게 자신의 계획을 전쟁부에 제출했으며 해군과 예술계 모두 접촉하여 일을 추진하였다.


 


윌킨슨은 전쟁부에서 위장 부대를 설치할 권한을 따내자 런던에 사무소를 차리고 동료화가를 모았으며 왕립 아카데미는 그의 일손을 도울 여학생을 지원해주었다그렇다고 일이 일사천리로 술술 풀린 것은 아니었다. 전쟁부는 커와 세이어에게 했던 것처럼 윌킨스에게도 그 괴상한 도색이 실용성이 있는지 보고서를 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윌킨슨은 달랐다. 그는 한마디로 사회생활을 할 줄 알았다. 게다가 해군에서 복무했었기 때문에 일이 돌아가는 상황도 잘 알고 있었다. 커와 세이어의 제안들이 서류철 안에서 화석이 되어가고 있는 동안 윌킨슨은 막후교섭을 통해 결국 위장 도색과라는 공식부서를 설립할 수 있었다.



 


 


 







윌킨슨의 위장도색 디자인들


 


 


 


이렇게 세이어가 영국으로 출정시위를 벌이고 커가 안그래도 바뻤을 처칠을 괴롭히며, 윌킨슨이 왕립 아카데미까지 움직일 정도로 노력을 하였던 위장 도색은 실전에서 얼마만큼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영국에서는 1918년 상선의 위장 도색에 관한 공식 보고서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9186월 말 기준으로 2,367척이 위장 도색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보고서의 통계는 위장 도색의 효용을 보여주기에는 자료로서 결정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생포된 유보트 승무원들은 위장 도색 선박을 조준하는 데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고까지 증언했다.


 


반면 미국의 선박 위장 결과는 더 결정적인 듯했다. 상선과 전함 총 1,256척이 191831일에서 1111일 사이에 위장 도색을 했다. 2,500톤이 넘는 배 중에 96척이 침몰했는데, 그중 위장 도색된 배는 18척에 불과했고 모두 상선이었다. 위장된 전함은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나는 듯한 당시의 위장도색 전함들

 


 


19191차대전은 막을 내리지만 커에게는 위장 도색의 발명에 관한 우선권 문제라는 또다른 전쟁이 남아 있었다. 커는 1917년에 채택된 체계를 자신이 1914년 해군부에 제시했다는 영예를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해군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윌킨슨은 발명의 대가로 2,000파운드를 손에 쥐었다.


 


그렇다면 윌킨슨과 커의 위장 도색은 어느 부분에서 2,000파운드의 차이점이 발생한 것일까? 커의 위장 도색 디자인은 얼룩말의 곡선 무늬였던 반면 윌킨슨의 위장 도색 디자인은 흑백에 때로는 파란색과 녹색을 섞은 띠무늬를 엄격한 기하학적 패턴으로 배열한 거의 모든 변이 형태를 포함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은 시각적인 것에서가 아닌 단어의 함의 차이,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말장난에서 판가름이 났다.


 


먼저 커의 위장 도색은 윤곽을 쪼개어 정체성을 파괴하기 위한 “비가시성(invisibility)” 이 목적으로, 함선의 장거리 포 공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윌킨슨은 잠수함에서 잠망경으로 배를 겨냥해 어뢰를 쏠 때 배의 거리와 이동방향에 혼란을 주기위한 “인식불능성(unrecognizability)”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비가시성과 인식불능성은 결국 같은 말이다윤곽을 쪼개면 당연히 거리와 이동방향에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그러나 영국 해군부는 위장 도색의 주된 목적이 유보트의 위협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윌킨슨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윌킨슨의 인맥이 작용한 결과일 거라고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흑백 무늬가 눈을 혼란시키는 힘은 1960년대 옵 아트Op art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커는 이 문제를 왕립 위원회로도 들고 갔지만 거기서도 인정 받지 못했다. 커는 동물학 연구를 계속하며 윌킨슨과 위장 도색의 우선권에 관해 수차례 공방을 벌였으며 왕립 위원회의 평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변호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세이어는 군 당국과 실랑이질을 하면서 더욱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말년에 그는 자신이 실패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애벗 세이어는 19215월에 사망하였다.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4부작 끝]


 


 


 



Abbott Handerson Thayer ‘Monadnock Angel’ 


 


 


 


 



▒ 발췌 및 편집: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


 


 


 


 


 


 


 


 


 


 


 


 


 


 


 


 


 


 


 


 


 


 


 


 


 


 


 


 


 

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1부]

 


 

 


 


 


 





애벗 핸더슨 세이어(Abbott H. Thayer, 1849~1921)


 


 

일찍부터 그림에 눈을 떠 무려 열여덟 살에 화가생활을 시작한 뉴잉글랜드 출신의 화가 세이어는 여느 남자들이 그렇듯 여자에 참 관심이 많았다. 그는 많은 여학생과 여조교들에 둘러쌓여 있었고 사실주의적인 화풍으로 신비하고 영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는 여성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그리고 1887년 자신의 딸 메리의 초상화를 그리며 천사의 날개를 그려 넣은 것을 계기로 여성의 등에 천사의 날개를 그려 넣기 시작하였다. 

 


 

  




Abbott Handerson Thayer (18491921), Angel.




 


 

그러나 세이어는 자나깨나 머릿속에 여자생각만으로 꽉 차있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여자 말고도 또 하나의 관심사가 있었다. 그것은 술도 아니고, 축구도 아니었다. 바로 ‘자연’이었다.

 

 




Abbott Handerson Thayer (18491921), Monadnock in Winter.




 


 

세이어는 어린 시절 뉴햄프셔의 깡촌에서 자연에 푹 빠져서 지냈으며 오듀본의 [아메리카의 새 Bird of America]를 탐독하는 등 자연친화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랬기에 그는 여자도 좋아했지만 자연도 즐겨 그리곤 하였다.

 


그런 세이어에겐 언제부턴가 야생동물들을 그리면서 자꾸 뭔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많은 동물들이 등은 짙은 색이고 배는 흰색이나 옅은 색으로 되어있는데, 햇볕 아래서는 등이 무슨 색깔이든 간에 털이 빛을 반사시켜 하얗게 빛나고, 반대로 배는 그늘이 지면서 본래의 보다 더 짙은 색을 띄었다. 이러한 효과로 인해 동물들은 보다 평평하게 보이며 윤곽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웠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동물들이 평평하게 보인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세이어의 눈에는 이것이 유독 더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나 보다. 세이어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동물들의 이러한 배색과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몰두하였고 1896년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정리하여 [오크 The Auk]라는 자연사 잡지에 [보호색의 기본 법칙 The law which underlies protective coloration]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동물들의 배가 밀가루라도 바른 듯 하얗색을 띄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 방어피음 원리


 


 



동물들은 그늘이 지는 배 쪽의 색깔은 밝게 하고, 어두운 색의 등은 빛을 반사시켜 새하얗게 함으로써 빛이 비칠 때 대비효과를 줄인다. 그 결과 배경과 더 구분이 되지 않고 상쇄시키는 배색을 띄도록 진화한 것이다. 이런 동물들의 배색을 방어피음(防禦被陰, countershading)이라고 한다. 대다수의 생물학자는 세이어의 방어피음 개념을 환영했고, 세이어의 이론은 1902년에 [네이처]를 통해 영국 대중에게도 전해졌다.



 


 


 


“자연은 하늘의 빛을 가장 많이 받는 경향이 있는 부위는 가장 검게 하고 그 반대쪽은 가장 희게 하는 식으로 동물을 칠한다.” (Thayer, 1909)


 


 


세이어는 회화와 생물학이라는 은하 두세 개는 너끈히 들어갈 법한 학문 간의 거리를 꿰뚫으며 화가로서 생물학적 성찰을 이룬 것이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평생을 연구에 매달려도 과학법칙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는 것에 비해, 그는 화가의 신분으로 ‘세이어의 은폐색 법칙’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붙어있는 과학법칙을 가지게 되었다.

 


본업이 아닌 이들이 본업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성과를 이루는 이런 뭐같은 상황은 정말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상황을 외면하기 위해서 일명 ‘신은 공평하다’라는 회피기제를 보인다. 이쁜 애들은 머리가 나쁘다던가 저 잘생긴 놈은 분명 발냄새가 고약할것이라는 편견을 만들어내어 심신의 안정을 찾으려는 생존본능 말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런 편견들은 일정부분 들어맞는다. 완벽한 사람이란 신조차 용서하기 힘든 존재였던 것이다. 그럼 세이어는 어땠을까? 암내가 심했을까? 성격이 심한 무좀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면 인정하기 싫지만 그림도 잘그리고 머리도 좋은 외계인이었을까?


 


 


 




연기, 감독, 그림, 노래, 작사, 작곡 등 못하는게 없는 구켈란젤로 구혜선양. 

그녀는 외계인일까? 


 



 


 


다행(?)스럽게도 세이어가 중대한 과학법칙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는 과학자적인 기질과는 매우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넘치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상주의에 빠져있었고 심각한 열등감에 따른 자기과시와 자만심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자연계의 원리인 ‘방어피음’ 개념에 심취하여 자신이 고고한 식견을 가진 화가라는, 걸리면 약도 없다는 왕자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뿌듯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고 종종 망언을 내뱉고는 했다.


 


 


 


“물론 그런 모방을 판단하는 사람은 예술가이다. 따라서 나는 전문가로서 모방 여부를 판결한다.” (Thayer, 1911)


 


 


 


아들인 제럴드와 함께 쓴 대작 [동물계의 은폐색](1909)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때쯤, 그의 왕자병은 정점에 이르렀고 듣기에도 민망한 자화자찬이 이어졌다.


 


 


 


“우리 책은 이론이 아니라 라듐의 엑스선처럼 명백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계시를 전한다.” (Thayer, 1909)


 


 


 


세이어는 알다시피 화가다. 그는 다른 과학자들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내 글에 들어가는 그림을 직접 그려 넣듯이 세이어도 자신의 재능을 썩힐 리가 만무했다.

 


그는 생물들의 무늬는 오로지 은폐색 기능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그런 주장과는 달리 현실에선 그 동물들 대부분은 1킬로미터 밖에서도 뚜렷이 보였지만 말이다.


 


 



-발췌 및 편집-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