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웨어 스펙을 높이면 잘 팔릴 거라고? 글쎄올시다!




IT 분야에서 이름난 블로그나 커뮤니티 사이트의 하드웨어 리뷰는 거의 예외없이 스펙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기능이 많으면 많을수록 숫자가 높으면 높을수록 열광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1) 이거 봐, 이 PMP는 DIVX에 XVID, WMV9, 거기다가 H.264까지 재생한다는 거야. 이걸 안 사면 도대체 뭘 사겠어?
2) 이건 AMOLED라고. 10000:1이 넘는 명암비를 자랑한단 말야. 엄청난 숫자 아냐? 이건 무조건 질러야 해!

이런 사용자들의 입심에 힘입어 한국의 IT 하드웨어 업체들은 용감하게 신기술을 도입하고 과감하게 수십 가지 기능을 박아넣는 데 아낌없이 돈을 투자했다. 그래, 이거저거 집어넣으면 값이 좀 비싸도 잘 팔릴 거야! 틀림없어!
하지만 그 결과는?
지속적인 마진율 악화와 수출 부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온 내수 시장의 불황으로 자금난에 허덕일 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 이유는 간단하다. 스펙에 열광하는 건 일부 마니아나 얼리어답터에 한정될 뿐이다. 그나마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쉽사리 돈을 쓰지도 않는다. 이거저거 따지고 재는 사람들이 돈지갑을 설렁설렁 열 리가 없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은 기술엔 별 관심 없다. 액정을 AMOLED로 박아넣건, 신기술을 무지막지하게 집어넣건, 그런 건 별로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는 a) 가격이 싸거나, b) 폭풍간지를 불러일으키는 쉬크함과 새끈함을 겸비하거나, 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한국 사람들은 무조건 기능이 많은 걸 좋아한다고? 그런 건 근거 없는 도시괴담 수준의 신화다.

외국 시장의 현실은 이보다 더 각박하다. 미국이나 유럽은 인터넷 쇼핑몰보다 대형 양판 체인이 유통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크다. 애플이나 필립스, 소니 같은 대형가전업체에 비해 이름값이라 할만한 게 없는 한국의 중소 IT 업체가 이런 양판점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따라서 a) 싼 가격으로 승부를 하거나 b) 어쨌건 엄청 싼 가격으로 승부를 해야 하고 c) 뭐가 어찌 됐건 무지막지하게 싼 가격으로 승부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드웨어 스펙을 무지막지하게 올렸기 때문에 가격을 낮추는 덴 한계가 있다. 그나마도 애플 아이폰/아이팟 터치의 성능을 쫓아가기조차 벅차 숨을 헐떡일 지경이다.
일례를 들어 보겠다. 아이폰/아이팟 터치에는 3D 가속 칩셋 외에 주문 제작된 2D 가속 칩셋도 들어가 있다. 이것은 bitblit 함수를 가속 처리하는 칩셋으로 화면 처리속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준다. 터치 스크린에서 아이콘을 끌어당기면 아무런 시간 지연 없이 움직이는 건 순전히 이 칩셋 덕분이다.
하지만 이런 가속 칩셋이 없는 다른 디바이스들은 터치 스크린에서 아이콘을 끌어당기면 0 콤마 몇 초 후에나 반응이 일어나기 일쑤다. 이건 3D 칩셋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지만, 그거 하나 해결하겠답시고 2D 가속 칩셋을 주문 제작한다는 건 보통의 하드웨어 업체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짓이다.
아니, 주문 제작 칩셋이고 뭐고를 왈가왈부하기 이전에 천만이나 억 개 단위로 부품을 구입하거나 라이센스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대형 가전업체의 구매력을 쫓아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이다. 따라서 고만고만한 한국 중소 IT 하드웨어 업체가 원가율을 낮추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동급 가격대에서 대형 가전업체의 최신, 최고 스펙의 제품보다 한 단계 딸리는 제품을 만드는 게 고작이다.

이름값도 없고, 그렇다고 기능이 정말 엄청나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게다가 가격 경쟁력까지 없다면, 해외 시장에서 애플이나 소니, 필립스를 이긴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날개돋친 듯 팔린다는 건 기대할 수조차 없다. 기껏해야 몇 천, 몇 만대를 팔고선 [의미있는 숫자]라고 자축할 뿐인데, 그 정도 숫자로는 해외 법인 유지비도 나올까 말까다.

이런 냉엄한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블로거들은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한국 업체들에게 끊임없이 충고할 것이다. 하드웨어 스펙을 높이라고.
하지만 그 충고가 과연 얼마나 쓸모있는 충고일까 하는 점에선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적어도 여태까지의 결과만 놓고 보면, 정말 무쓸모한 충고였으니까!

영진공 DJ. Han

“하드웨어 스펙을 높이면 잘 팔릴 거라고? 글쎄올시다!”의 5개의 생각

  1. 하하하! 영진공에서 이런 글을 보게 될줄은.. ^^
    스펙만큼이나 중요한건 ‘기본 기능에 충실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아이리버 E100을 구입했던 적이 있는데, 가격과 스펙을 모두 만족시키는 제품이라는 찬사가 줄을 이었지만 곧이어 잦은 프리징과 극악의 속도 (부팅이나 메뉴 이동시에 매우 많은 시간이 걸렸죠) 때문에 곧 잊혀졌지요.

  2. 글을 읽고…공감이 막 가네요..저도 IT 기기 쪽에서 일하는지라…
    하드웨어 스펙 올려 놓고…수출할때 단가 안맞는다고…
    하청업체 납품단가를 살인적으로 낮추는거 보면…ㄷㄷㄷ

  3. 근데 PMP의 코덱 지원은 좀 중욯나 것 같습니다. 다른거야 없어도 그만이지만 코덱 지원은 동영상이 돌아가냐 안 돌아가냐의 문제이니말이지요..;

  4. 이글을 보자 마자 코원 s9이 생각났건..;;; 아 물론 코원이 아무기능이나 쳐넣은 잡기능 mp3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기능이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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