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그 미 투 헬’,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공포영화

원래 <다크맨>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 님이셨던,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로만 알려지셨던 바로 그 님하께서 오랜만에 만드신 공포영화, <드래그미투헬>을 봤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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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형적인 귀신 공포영화다.
어디서 본 듯 한 것들로 착실하게 구성되어 있다. 얼핏 전설의 고향 필도 풍긴다.
그래서 이걸 “전형적”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전형적인” 것들이 의외로 드물다. 게다가 전형적인 것들만 모아놓다보면 진부해지기 십상인데, 이 영화는 전형적이면서도 참신하고 생생하다.

2. 그리고 고전적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피가 별로 안나온다. 사지절단? 그런거 별로 없다.
폭력 조차도 거의 드물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포영화라 할 수 있느냐?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공포는 폭력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추함과 더러움에서도 온다는 사실을 … 그렇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느냐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말은 사실은 자기 기만이다. 그 더러운 똥이 내게 묻을 것을 생각하면 매우 무섭지 않던가.
더러운 것은 무섭다. 이 오래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고전적인 영화다.
이 영화, 진짜, 징하게 … 드럽다 …

3. 의외로 쿨하다.
요즘 영화들은 클라이맥스 강박에 빠져있다.
더 크게, 더 놀랍게, 더 웅장한 결말을 제공하려고 절박하다.
게다가 영화 끝나고 나서도 뭔가 할 말이 남았는지 쿠키니 뭐니 숨겨놓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영화, 걍 쿨하게 끝낸다. 뭘 더 바래? 원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더냐? 라고 묻는 눈빛을 던지며 …
그 쿨한 결말은 또 다른 의미에서 고전적이라 하겠다.

쥐 잡아다주면 안 잡아먹쥐~

이 영화 참 짧고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지만
그래도 생각해볼 거리들은 몇가지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

의문 1. 왜 저주는 그런 집시 노파 같은 존재의 것일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게도, 이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저주를 내리는 이는 말 그대로 더럽고 추한 노파다. 생긴게 말 그대로 마녀가 따로 없다. 이 노파, 이름도 괴상한데다 추접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추접들 중에서도 테이블에 놓인 사탕까지 쓸어담는 추접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냉정한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데 일익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이거다. 왜 하필이면 그런 노파가 저주를 내려야 할까? 안그래도 할머니들은 어디서나 구박댕이들인데, 이런 영화가 그런 노파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하나 덧씌우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실제로 저주는 바로 그런 이들의 것이었다.
집시는 소수집단이다. 그리고 집시 노파는 소수집단 중에서도 소수집단이다.
잠재적 범죄자, 도덕적 타락의 근원, 불순한 미신의 병원체로 취급받던 집시,
늙어서 아무 힘도 권한도 없고, 남편조차 없이 혼자 살아가는 노파,
이 둘이 합체했으니, 이 얼마나 열악한 존재인가.
군대이야기와 축구이야기가 합쳐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가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런 소수 속의 소수가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피해를 입었을 때 무슨 대책이 있겠나.
아무것도 없다. 저주라도 없다면…
그들에게는 저주 말고는 다른 어떤 무기도 없기 때문에 저주를 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우를 범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는 저주 말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무엇보다 … 투표권이 있지 않은가.
그런 우리가 저주에 매달리면, 집시 노파들이 화낸다.

의문 2. 왜 하필 크리스틴이 저주의 대상일까?
이 영화 평들을 보면 롤러코스터 처럼 즐길 수 있는 영화라는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더라.
왜냐면 저주에 시달리는 주인공 크리스틴(앨리슨 로만)이 참 안쓰러워보였거든.
생각해보라. 그 노파가 당한 일에 있어서 그녀는 몸통도 아니고 깃털, 그 중에서도 맨 꽁지에 해당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녀라고 그러고 싶었겠나.

그녀의 행동은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만한 것이다.
그런 일은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체제속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늘 닥치는 것이다.
가슴에 손 얹고 생각해보라. 댁들은 그런 힘든 결정(Tough Decision) 한번 내려본 적 없나? 백번 양보해 그녀가 잘못을 했다고 치자, 그래도 그 잘못에 비하면 저주의 내용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녀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다. 왜냐고?

첫 번째 이유,
그녀가 어설프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냉혹한 제도에 충분히 동화되지 않았다.
시골스러운 출생 탓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녀의 그 양심 탓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저주는 양심의 토양에서나 가능한 거다.
심리학적으로는 양심의 목소리, 죄책감이 외부로 나타난 것이 저주거든.

실제로 어떤 인간말종들은 저주도 안먹힌다. 왜냐면 양심이 없거든.
그런 인간들은 실제로 지가 다 잘했다고 믿는다. 그러니 떳떳하고 당당하다.
그러면 저주가 파고들 틈이 없다.
(내가 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주가 아니라고 말한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거는 아닌게, 그들은 이미 지옥에 있는 셈일지도 모른다.
지들만 모를 뿐이지. 나는 솔직히 그런 애들이 죽어서 가는 곳에는
정말 같이 가고 싶지 않다. 거기가 지옥이지 어디가 지옥이겠나.

두 번째 이유,
동조자의 죄는 결코 작지 않다.
왜냐하면 동조자가 없으면 그 어떤 악도 저질러질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가 혼자 행동을 할 수는 없다. 손과 발이 머리의 생각을 따라줘야 가능하다.
고대 형법은 도둑질을 한 자는 (도둑질을 생각한) 머리가 아니라
(도둑질을 실제로 행한) 손을 자르게 한다. 마찬가지 이유다.
그녀가 아무리 깃털이라도 탐욕스런 금융자본이라는 몸통에 협조한 것은 사실 아닌가. 실제로 저주는 몸과 몸을, 얼굴과 얼굴을 직접 마주치는 자에게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잊지 말라.
“위에서 시킨대로 했을 뿐이라고?” 바로 그런 변명이 저주를 부른다.

검색창에 '노덕술'을 ...

그럼 몸통이나 머리는?
그들에게는 저주가 아니라 심판이, 단죄와 처벌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영화는 꽤 재미있다.

물론 트랜스포머 같은 스펙타클은 기대하지 마시라.
이 영화를 즐기는 비결은,
웬지 내가 살면서 언젠가 본 듯한 장면들,
그리고 심지어는 언젠가 나도 한번쯤 저질렀을 법한 잘못들을 보며
그게 얼마나 무서운 댓가를 불러올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영진공 짱가

“사랑은 비를 타고”, 고전 뮤지컬이자 멋진 메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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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비 차림의 세 남녀, 신나게 춤을 추다.
<사랑은 비를 타고>는 무성영화 시대에서 유성영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해프닝을 배우인 세 남녀의 갈등과 사랑을 통해 보여주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고전 뮤지컬이다. 또한 한편으로, 그 전환기에 있어 이전 영화에서는 결코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사운드’가 어떻게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하는가, 그럼에도 그 ‘사운드’ 역시 영화의 다른 요소와 마찬가지로 얼마나 기만적인가(즉 트릭으로 관객을 속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메타-영화, 즉 영화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시작은 당대 최고의 스타 커플인 돈 록우드(진 켈리)와 리나 라먼(진 헤이건) 주연의 새로운 영화 시사회장이다. 돈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최고급 교육을 받았고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는 공연을 해왔으며, 덕분에 어딜 가나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고 급기야 영화사에서도 그를 ‘모셔갔다’고 소회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이때 스크린에 흐르는 화면은 돈의 발언과는 정반대되는 광경들이다. 그는 단짝친구이자 피아노 연주자인 코스모(도널드 오코너)와 어른들의 담배연기가 뿌옇게 날리는 당구장에서 공연을 시작해 그리고 각종 시골의 가난한 무대를 떠돌았던 싸구려 댄서였고, 그가 스타가 된 기회를 잡은 것 역시 기절해서 실려나간 스턴트맨 대신 땜빵 스턴트맨 역할을 처절할 정도로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충돌은 일차적으로 관객들에게 아이러니에 기반한 웃음을 안겨주기 위한 코믹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앞으로 다루게 될 내용, 즉 이미지 중심이었던 무성영화에서 사운드가 결합하는 유성영화로 넘어가면서 영화란 것이 어떤 의미를 새로이 갖게 되는가, 아울러 영화 안에서 이미지와 사운드가 어떤 관계를 갖게 되는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들려주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이런 식의 이미지와 사운드 간 모순은 이후 다시 한번 반복된다. 새 (무성)영화를 촬영하는 촬영장에서 돈 록우드는 캐시(데비 레이놀즈)가 해고당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리나 라먼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돈 록우드와 리나 라먼은 카메라 앞에서 다정한 연인 연기를 펼치면서 실제로는 격렬한 말다툼을 벌인다.

바야흐로 워너사의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가 개봉돼 큰 성공을 거두고, 돈 록우드와 리나 라먼의 새 영화도 급작스럽게 유성영화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목소리가 워낙 깨는 하이톤인 데다 발음도 후지고 상스러운 리나 라먼의 목소리 연기가 문제가 된다. 강력하게 스타파워를 행사하고 있는 데다 안하무인 공주병인 리나 라먼은 돈 록우드와 사랑하는 사이게 된 캐시를 구박하고 쫓아내는 한편, 형편없고 성의없는 목소리 연기로 스튜디오에 막대한 고민을 안겨주면서도 그 해결에 있어서는 별다른 대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완성된 영화의 첫 시사회에서 영화가 그토록 혹평을 받았던 것은 리나 라먼의 형편없는 목소리와 영화 전체의 어설픈 사운드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영화의 스타일이 유성영화에 걸맞지 않은, 사운드만 있을 뿐 무성영화의 패턴을 그대로 답습하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즉 사운드라는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었을 때 그에 걸맞는 새로운 영화문법을 선보이지 못하면서 이미지와 사운드 간 어마어마한 괴리를 관객들에게 그대로 노출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사운드 사고가 나면서 영화는 더욱 엉망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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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기막힌 아이디어를 내게 되는 세 사람.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들은 이미 찍어놓은 영화를 뮤지컬로 각색하는 한편 리나 라먼의 목소리 대역으로 캐시를 투입하는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사실, 그러니까 무수한 영화의 장르에 있어 코미디든 드라마든 액션 어드벤처든 호러든 시대극이든, 모든 장르들이 무성영화 시절에도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춤과 함께 음악을 기본으로 하는 이 뮤지컬이란 장르만큼은 유성영화의 발명에 힘입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사실 영화사상 첫 유성영화라 일컬어지는 <재즈싱어>가 음악영화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무성영화 시절에 음악은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스크린 바깥에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부수적 도구에 불과했지만, 유성영화가 도래하면서야 음악은 비로소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게 되며, 사운드의 일부로서 비로소 영화의 스토리와 플롯 및 캐릭터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영화의 주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캐시가 리나의 목소리를 대신하게 되는 과정에서 또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운드의 제작의 기술 중 ‘동시녹음’, ‘더빙’과 ‘후시녹음’ 기술의 발전상이다. 지금이야 많은 영화들이 커다란 붐마이크를 대동한 붐맨의 활약과 함께 동시녹음으로 영화를 촬영하기 마련이고, 한국의 영화인들은 대체로 동시녹음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제대로 만드는 것이란 편견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헐리웃에서는 (의외로) 지금도 후시녹음이 적지 않은 비율로 채택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뮤지컬을 기본으로 하는 인도의 발리우드 영화들은 연기하는 배우와 노래 더빙을 해주는 가수-배우의 분리가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한국은 물론 헐리웃에서도 다른 가수에 의한 노래 더빙은 그렇게 드물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배우가 직접 노래를 부른 것이 여전히 뉴스거리가 되기도 하고.) 무성영화 시절, 카메라가 이동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자마자 카메라 이동과 동선에 관한 무수한 영화기술들이 단기간에 쏟아졌듯, 사운드 역시 일단 유성영화라는 게 가능하다라는 사실이 발견되자마자 다양한 사운드 제작 기술이 우후죽순 발명되며 영화에 적용되었던 것. <사랑은 비를 타고>는 이것을 영화에서 내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마침내 완성된 영화의 시사회 파티날 리나의 목소리가 실은 다른 배우에 의해 더빙된 것이라는 사실이 대중 앞에서 폭로될 때, 이 장면은 파렴치한 리나의 악행을 고발하는 장면일 뿐만 아니라, 제작과정에는 별 관심이 없을 관객 대중에게 영화 사운드의 기술 트릭이 공개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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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빙 및 후시녹음의 기술이 대중에게 소개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첫 유성영화가 나온지 25년만에 만들어진 <사랑은 비를 타고>는 그 25년간 영화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 존재 스스로가 증명하며 사운드의 도래를 예찬하는 영화다. 사실 유성영화의 도래는 수많은 영화감독과 영화배우를 실업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의 본질을 해친다는 측면에서 일부 영화감독들의 격렬한 저항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버스터 키튼 역시 유성영화의 도래와 함께 완전히 퇴출돼버린 감독 중 하나다.) 그러나 <사랑은 비를 타고>가 보여주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뮤지컬의 세계는, 마치 “거봐, 유성영화는 이런 즐거움을 주잖아.”라며 으시대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사운드와 영화의 힘을 최대한 살리며 아주 아름답게 연출된 이 영화는, 실제로는 노래가 먼저 만들어지고 그 노래에 맞춰 스토리가 만들어졌을 만큼 음악과 춤이 먼저였던 영화다. 유성영화 시대에 기득권을 잃고 밀려날 수밖에 없는 목소리 나쁜 스타의 비애가 아주 조금은 드러날 법도 하건만, 리나가 그저 제멋대로의 성격으로 악당 노릇을 하며 희화화만 되는 것도 이 영화가 ‘유성영화 예찬’의 입장을 강하게 견지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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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史상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즉 비가 오는 거리에서 진 켈리가 우산을 든 채 춤을 추는 장면은 단 4컷으로 씬이 구성되는 동안 유려하고 완숙한 카메라 동선과 앵글을 선보이며 더없이 아름다운 비주얼을 선사한다. 블리치바이패스 같은 기술이 발명되기 훨씬 전인 이 시절, 빗물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스탠리 도넌이 사용한 방법은 (imdb의 trivia 페이지(새 창으로 열기)에 의하면) 무려 물에 우유를 섞는 것이었다고도 하고.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에 새로 추가된 사운드라는 기술을 예찬하고는 있지만, 그 유성영화라는 것이 그저 사운드가 이미지와 병치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변증법적 투쟁을 통해 합으로 나아감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나온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의 모순 장면도 실은 이 ‘합’의 힘을 강조하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ps. 탭댄스 배우고 싶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