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보아야 할 영화 다섯 편




최근 미국의 금융위기가 심화되면서 세계 경제 전체에 먹구름이 덮히고 있다.  빚장사치(Debt Trader)들이 대출금 하나에 새끼를 낳고 낳아 이리 넘기고 저리 넘기면서 장부 상의 이익으로 돈 잔치를 벌이다가 급기야는 빵꾸가 나게 된 게 요번 사태의 요약되겠다.

이를 급하게나마 수습하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 물경 840,000,000,000,000 (8 백 4 십 조)원 이란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이 액수도 그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사태가 어찌 전개될지 지금 누구도 섣불리 예측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그 폭발력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여 안절부절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화폐유동성의 위기로 시작된 이번 사태는 아주 빠른 속도로 실물경제의 뿌리를 흔들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리만브라더스는, 한국 경제는 튼튼하며 달러 유동성에 문제가 없다는 타령만 늘어놓으며, 가장 위험하달 수 있는 시기에 ‘종부세 폐지’에 올인 중이다.

자, 여기에서 문제.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달러 가격은 어찌될까?  당연히 약세로 가고 현재 세계 화폐 시장에서도 그렇게 거래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달러 환율은 오르는 게 정상일까, 내려가는 게 정상일까?

한국 경제와 금융이 튼튼하다면 당연히 내려가야지만 지금 환율은 연일 힘차게 산악등반 중이다.  그리고 지난 3개월 간 국제적으로 달러 환율이 오른 나라는 태국과 한국 뿐이다.  환율이 오르면 수출로 인한 이익이 늘어난다고?  원료비는 어떡할 건데? … 유가가 내려갔다고?  석유의 가격은 달러로 매겨지는데 뭔 소리래?

경제와 금융에 대해 잘 모르는 우리 서민들, 작금의 상황이 그저 강 건너 불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몇 번 보지 못했던 위기를 맞고 있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다가오는 삭풍을 견뎌내야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다섯 편을 골라 소개하오니, 끌리시는 분들은 영화를 보시면서 현 상황에 대해 좀 더 이해의 폭을 넓히시기를 바라며 또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시기 바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1. 겜블 (Rogue Trader, 1999)
   * 감독: 존 디어든 (John Dearden)
   * 주연: 이완 맥그리거

닉 니슨(Nick Neeson)은 영국의 거대은행 베어링의 직원이었다.  그는 싱가폴 증시(SIMEX) 선물(Futures) 부문에 파견되어 일하면서, 장부조작 등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선물투자 실패를 숨기고 마치 커다란 이익을 올린 것 처럼 꾸미는 수법으로 막대한 보너스를 챙겼다.

이런 그의 행각으로 인한 손실은 최초에 약 2 백만 파운드 정도였으나, 이 년 만에 2 억 8 백 만 파운드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1995년에 일본 증시에 대한 예측 실패로 그는 무려 8 억 2 천 7 백만 파운드의 손실을 끼치고 도피해 버린다.  이 손실로 베어링 은행은 결국 지불불능을 선언하고 파산해 버렸다.

말레이시아, 태국, 독일 등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하던 그는 추후 검거되어 재판을 받았고, 6년 반의 형기를 선고 받았지만 1999년에 암 진단을 받고 풀려났다.  현재 그는 재혼을 하여 아일랜드의 한 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의 자서전 “Rogue Trader”를 영화화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극 중에서 닉 니슨을 연기한 이완 맥그리거.
사실 베어링 은행의 파산이 온전히 그의 행각 만으로 초래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부 인사들의 여러가지 이해관계와 적절한 감시가 이루어지지 못한 시스템의 문제가 결합하여 재앙을 초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쥐어지는 보너스의 달콤함에 취해, 뻔히 닥쳐 올 엄청난 불행을 더욱 크게 부풀리기에 분주했던 그를 그저 철부지라고만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 마이클 클레이튼
   (Michael Clayton, 2007)

   * 감독: 토니 길로이
   * 주연: 조지 클루니, 틸다 스윈튼

어느 시골 마을의 주민들은 세계 굴지의 농업회사 uNorth (극 중 명칭)를 상대로 6 년간에 걸쳐 피해보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uNorth의 제품이 독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마을의 주민들이 중독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나타난다.

이에 uNorth의 신임 법무팀장 카렌과 회사측 소송대리인의 해결사인 마이클 클레이튼이 해당 사건 속으로 휘말려들게 되는데 …


사용자 삽입 이미지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카렌.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던 불행한 사태 뒤에는 꼭 이런 사람이 있다.
사실 그녀는 이 사건에 있어서 메인 플레이어가 아니다.
그녀에게 돌아올 이익이라곤 경영진의 칭찬과 이후 혹시나 주어질지도 모르는 파트너 자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몇몇 경영진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주저없이 실행에 옮긴다.

요새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람들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작년까지만 해도 “종부세”의 당위성을 역설하기에 바쁘다가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종부세”가 징벌적 세금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내느라 바쁘신 공무원분들.
밥줄 때문에, 애들 교육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겠지만 … 과연 아이들이 그런 부모들에게서 뭘 보고 배울지 …


사용자 삽입 이미지3. 인사이더 (The Insider, 1999)
   * 감독: 마이클 만
   * 주연: 러셀 크로우, 알 파치노

1996년에 미국의 “60minutes”(한국의 “PD수첩”과 비슷한 성격의 TV 고발 프로그램)에서 방영되었던 어느 전직 담배회사 중역의 인터뷰로 인해 촉발된 대규모 소송에 대한 실화를 극화한 영화.

담배회사 Brown&Williamson의 연구개발분야 부사장으로 근무하던 제프리 위간드(실명)는 어느 날 갑자기 해고를 당한다.  그에 의하면 해고사유는 담배의 유해성을 줄이고자 했던 그의 연구 때문이었다 한다.  즉, 암모니아 공법을 적용해 니코틴이 보다 빠르게 인체에 흡수되게하여 담배의 중독성을 심화시키려했던 경영진의 의도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당시 담배와 화재의 연관성을 취재하던 유명 기자 로웰 버그만(실명)이 기술적인 문제로 조언을 구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둘의 인연은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기에만 급급한 담배회사들의 비리에 대해 파고 들어가는 단계로까지 진행된다.

여러가지 어려움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프리 위간드의 인터뷰는 방송을 타게 되고, 이를 계기로 미국 내에서 2,460 억 달러의 합의금이 도출된 소송이 벌어지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러셀 크로우가 연기한 제프리 위간드와 알 파치노가 연기한 로웰 버그만.

우리는 제프리와 같은 사람을 “내부고발자”라 부르고, 영어로는 “Whistle Blower”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건전한 사회와 기업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 조직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나 나쁜 의도를 가진 배신자로 치부된다.
 
로웰 버그만 같은 이는 “외부고발자”라고 할 수 있겠다.  조직의 바깥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방향을 제시하는 Whistle Blower가 바로 기자의 모습 중 하나 아닌가.

그런데 최근의 우리 사회는 호루라기를 불면 너무 시끄럽다고 불순하다며 꾸짖고 처벌을 들먹인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다.


4. 어 퓨 굿맨
   (A Few Good Men, 1992)

   * 감독: 롭 라이너
   * 주연: 톰 크루즈, 데미 무어, 잭 니콜슨

풋내기 군법무관 대니얼 키프는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에 주둔 중인 해병대 병영 내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두 피고인에 대한 변론을 맡게 된다.  살해 당한 이는 평소 불만이 많고 전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병사였는데, 사건이 있던 무렵에 그는 배치 부대를 변경시켜 달라고 요구하며 들어주지 않으면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하던 중이었다.

해군 수사관 조앤 갤로웨이와 함께 사건의 실체를 조사하던 대니얼은, 이 건이 단지 동료 병사의 우발적 범행이 아니라 고위급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소위 “코드 레드” 사건 임을 파악하게 된다.

결국 그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코 부대 지휘관인 네이선 제습 대령을 증언대에 세우게 되는데 …


잭 니콜슨이 연기한 네이선 제습 대령.

그가 남긴 명대사가 있었으니 … “너는 진실을 알 자격이 없어! (You cannot handle the truth)”

그의 말인즉슨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는 직업군인들에게 일반의 기준을 적용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자신들 덕분에 후방에서 편하게 사는 나약한 국민들은 자신들을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그가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하는 게 과연 나라와 국민일까?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은 결국 제 손에 쥐어진 권력일 뿐이다.  나라와 국민이 있어 그에게 권력이 위임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거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 요새 너무 많이 본다.  잠시 주어진 권력을 이용해 그간 자신들이 받았다고 생각한 설움(?)에 대한 한풀이를 하는 모양인가 본데 … 아서라, 그러다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권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 (You cannot handle the power)


5. 땡큐 포 스모킹
(Thank You For Smoking, 2006)

   * 감독: 제이슨 라이트만
   * 주연: 아아론 엑크하트

닉 네일러는 담배 관련 연구기관의 부사장이다.  이 연구기관의 목적은 흡연과 폐암의 연관관계를 밝혀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 이 단체는 담배회사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으며 흡연과 폐암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데이타를 만들어내 담배회사를 지원하는 로비단체이다.

이런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알리고 흡연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을 맡고있는 닉 네일러는 주류업계의 로비스트인 폴리와 무기산업의 로비스트인 제이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하다.  세 사람은 그들의 직업이 그리 자랑스럽지만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스스로 “죽음의 상인 (the Merchants Of Death squad)”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담배갑에 해골 표시를 해야 한다는 법안이 상정되자 닉은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어 이를 저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렇게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악착같이 행하던 닉에게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는데 …


극 중에서 투 페이스 … 아니, 닉 네일러를 연기한 아아론 에크하트

그에게는 흡연권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담배회사로부터 커다란 이익을 보장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그리고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윤리, 사명감, 역사적 의무 … 이런 거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일하느라 바쁘고 피곤한 사람인 것이다.

그의 모습이 왠지 친숙하지 않은가.  그대와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런 그를 비겁하다고, 어리석다고 맘껏 비난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할까.

조금 서글프지려 한다.


끗.


영진공 이규훈


 

<마이클 클레이튼>, 계시가 되고자 했던 스릴러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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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나 정부의 비리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둘 중에 하나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거대 조직의 비리와 폭력성을 실감나게 보여주던가 아니면 비리에 맞선 주인공의 활약상을 멋지게 그려주던가. 물론 실제의 영화들은 두 가지 요소가 적절히 혼합되어 있으면서 작가의 지향성에 따라 어느 한쪽에 좀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마련입니다. 글로벌 제약 회사가 아프리카 사람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설정의 <콘스탄트 가드너>(2005)와 같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방점은 주인공의 멜러에 찍어주는 작품도 있습니다. <마이클 클레이튼>의 감독 토니 길로이가 시나리오를 썼던 제이슨 본 3부작은 주인공의 사실적이고도 통쾌한 액션을 앞세우면서도 CIA 조직의 음모를 파헤치고, 여기에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묵직한 주제까지 전달하며 스릴러 장르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토니 길로이의 감독 데뷔작인 <마이클 클레이튼>은 극중 주인공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제목으로 정한 것부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주인공은 조지 클루니입니다. 그가 TV 시리즈 <ER>에서 소아과 의사 역을 할 때 그 눈빛과 표정, 목소리에 반하지 않은 시청자는 없었을 겁니다. 본 시리즈의 토니 길로이가 데뷔작을 내는데 조지 클루니가 원톱 주인공으로 나섰으니 기대가 클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마이클 클레이튼>은 제이슨 본 3부작을 비롯해서 이제껏 토니 길로이가 각본을 쓴 여러 히트작들(<돌로레스 클레이본>, <데블스 애드버킷>, <아마겟돈>, <프루프 오브 라이프>, <베이트> 등)과는 그 궤도를 완전히 달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즉, 앞에서 언급한 거대 조직의 비리와 주인공의 활약을 앞세운 단순한 장르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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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이클 클레이튼>도 기본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U/노스라는 글로벌 회사가 만든 제초제로 인해 농부들이 죽었습니다. 이 때문에 7년 간에 걸친 소송이 진행 중이고 주인공은 회사 측 변호를 맡은 KBL 법률회사의 사고 전담 변호사입니다. U/노스가 악당이고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건 너무 뻔합니다.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람마저 죽일 수 있다는 점 역시 충분히 납득됩니다. 주인공은 이 위험에 맞서 진실의 편에 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토니 길로이와 같은 작가가 전형적인 스릴러를 만들고자 했다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모를리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토니 길로이의 데뷔작 <마이클 클레이튼>은 스릴러의 공식을 거부합니다. 주인공 마이클 클레이튼이 경험하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 영화 초반에 먼저 보여집니다. 죽을 뻔 했는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체험을 통해 살아납니다. 그리고 영화는 4일 전으로 돌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던 내러티브가 다시 현재 시점과 만나는 순간은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입니다. 그리고 통쾌한 역전 만루 홈런을 때리며 순식간에 끝나버립니다.(사실 이 장면의 플롯 조차 너무 뻔하게 읽힙니다) 택시 뒷좌석에 탄 마이클 클레이튼의 얼굴을 롱테이크하며 엔딩 크리딧이 올라갑니다. 여운은 깊으나 스릴을 만끽할 겨를이 없습니다. <마이클 클레이튼>은 스릴러가 아닌 인간 드라마로 기억되고자 하는 영화입니다. 시종일관 의도적인 촌티를 냅니다. 80년대 TV 연속극이나 B 무비를 보는 듯한 미장셴입니다.1) 카메라는 마이클 클레이튼 뿐만 아니라 거의 광인처럼 행동하는 선배 변호사 아서(톰 윌킨슨)와 U/노스사의 법무팀장(틸다 스윈튼)의 모습까지, 스릴러의 구성에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지켜봅니다. 모두들 거대 자본과 조직의 불가항력 아래 짓눌린 인생들입니다. <마이클 클레이튼>은 이들의 갈등 구조를 부각시키기 보다 각 인물들의 개별성에 주목하는 영화입니다.

(스포일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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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클레이튼>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논란이 될만한 부분은 주인공이 기밀 유지 서약을 저버리고 U/노스의 중역들을 경찰에게 넘기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입니다. 사실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마이클 클레이튼이 자신에게까지 밀고 들어온 죽음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8만 달러에 팔린 자신의 양심을 끝내 저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결국 그와 같은 극적인 반전은 생각해내지 않았을런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마이클 클레이튼을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낸 언덕 위의 그 말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들이 추천하고 아서가 죽기 전에 줄쳐가며 읽던 붉은 표지의 판타지 소설2) 속 삽화 중에 말 한 마리가 들어있긴 했습니다. 그리고 마이클은 아들에게 “넌 강하니까 이겨낼거야. 난 알아.”라고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폐인이나 다름 없는 주인공, 아버지와 아들, 어린 아들이 좋아하는 판타지, 그 판타지를 좋아하던 광인, 판타지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언덕 위의 종마 세 마리, 그리고 구원. 그와 같은 계시적인 체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체제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는 걸까요? 절반쯤 광인이 되어야만 사무실 밖으로 나와 세상을 다시 둘러볼 수 있게 되는 건가요? 자발적인 용기과 결단을 통해서는 결코 진실의 편에 설 수가 없는 걸까요? 영화는 단지 마이클 클레이튼과 같은 처지의 미국에게 그와 같은 계시적 체험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을까요? <마이클 클레이튼>이 대중 영화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부분은 스릴러의 공식을 벗어던진 독특한 내러티브 구성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모호하게 형상화된 현실 인식과 주제 의식에 있습니다. 분명한 한 가지는 스릴러의 달인 토니 길로이의 감독 데뷔작에서는 모든 것이 의도적인 선택이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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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 점에서 토니 길로이의 시나리오를 기초로 많은 영화를 감독한 테일러 핵포드의 지극히 단조로운 화법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토니 길로이의 연출은 다른 감독의 스타일을 따라했다고 하기 보다는 의도적인 화법 선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좀 더 박진감 넘치는 스릴러의 연출을 원했다면 얼마든지 제이슨 본 시리즈의 스텝들을 불러모으거나 유사한 스타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요구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촬영 감독인 로버트 엘스위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보아도 연출자가 원했다면 얼마든지 더욱 박진감 넘치는 화면을 보여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제가 단기 기억상실증이 있어서 이름이나 책 제목 같은 건 절대 외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테판님 포스트에서 찾아왔습니다. <마법의 영토>(Realm and Conquest)라는 제목의 책인데 실제로 존재하는 책은 아니라고 하네요.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