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희의 영화”,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옥희의 영화>는 제목에 ‘영화’라는 단어가 들어가서만이 아니라 정말 영화와 영화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영화 일반론이 아니라 홍상수 감독 영화에 관한 영화다. 말하자면 홍상수 영화에 관해 홍상수 감독이 직접 써내려간 해설판 같은 작품이랄까. 홍상수 감독이 생각하는 삶의 반복성과 그것을 담는 영화라는 매체에 관한 유난히도 직접적인 설명서로 받아들여진다.

<옥희의 영화>는 4편의 에피소드로 –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지는 않지만 분명히 동일한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이므로 단편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한 듯 – 구성되었다. 주인공 중에 한 명인 진구(이선균)가 결혼을 하고 영화과 선생이 되어있는 가장 최근 시점의 <주문을 외울 날>이 가장 먼저 배치되었고 진구(이선균)와 옥희(정유미)가 학생 시절이었을 때의 이야기인 <키스왕>, <폭설 후>가 이어진다. 그리고 옥희가 자신이 사귀었던 두 남자와 – 송 선생(문성근)과 진구 – 2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장소에 갔던 기억을 영화로 만든 영화 속 영화가 마지막 <옥희의 영화>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에서 자주 비슷한 사건이나 만남이 반복됨을 통해 제시되곤 했던 ‘댓구의 미학’을 <옥희의 영화>에서는 영화를 만든 이의 목소리를 통해 그 제작 동기를 직접 들을 수가 있다. 물론 홍상수 영화 속 반복의 패턴은 이 보다 훨씬 다양하게 선보였던 바, 이것 하나 만으로 그 반복과 댓구의 미학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옥희의 영화>에 기승전결이란 없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이로서,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이로서의 자의식은 이전의 어느 작품보다 훨씬 더 풍부한 편이다. 첫번째 에피소드 <주문을 외울 날>은 <극장전>에서 동수(김상경)가 스스로에게 되뇌이던 어떤 주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주문이라도 외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는 어떤 날의 이야기다.

<주문을 외울 날>의 하이라이트는 진구가 예전에 자신이 만든 영화의 GV에 참석했다가 4년 전에 만나고 헤어진 여자에 관한 관객 질문을 받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이 홍상수 감독 영화에 언젠가는 나오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번 <옥희의 영화>에서 보게될 줄은 생각을 못했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이보다 민망한 순간이 또 어디 있을까. <옥희의 영화>가 그런 질문에 대한 진술서인 것은 아니지만 몇 년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홍상수 감독에게 던져졌다는 뜬금 없는 질문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있다는 건 분명하다.

최근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갈수록 해학적이 되어간다는 느낌이었고 특히 최근작 <하하하>(2010) 에서는 조문경(김상경)의 꿈 속에 이순신 장군(김영호)이 등장해 선문답 같은 계시를 내려주는 장면이나 어머니(윤여정)에게 종아리를 맞고 조문경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장면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 그렇게 좀 더 많은 관객들과 만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라고 – 생각했었는데 그로부터 고작 5개월 만에 나온 신작 <옥희의 영화>를 보니 그런 식의 단일한 경향성으로 홍상수 영화의 변화를 정의해보려 했던 일 자체가 어리석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변해가는 와중에 잠시 메타 영화를 한 편 만든 것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여전히 변함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끊임없이 변화를 선택하고 있는 중이다.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그램 <어떤 방문>에서 홍상수 감독의 단편 <첩첩산중>을 보았는데 – 주요 출연진이 <옥희의 영화>와 동일해서 혹시나 어떤 연관성이 있지나 않을까 해서 – 내용 상으로는 완전히 다른 영화라는 것을 확인했다. <첩첩산중>의 인물들은 글 쓰는 사람들이고 <옥희의 영화>는 전부 영화를 만들거나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문성근이 연기한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다르다.

<첩첩산중>에서 상옥(문성근)은 거의 위악적인 묘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그려지는 반면 <옥희의 영화>에서의 송 선생은 그의 진심이나 인물 전체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긴 하지만’ 적어도 옥희와의 약속을 지킨 작은 행동 하나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비춰진 송 선생의 일면은 첫번째 에피소드인 <주문을 외울 날>에서 몹시 의심쩍인 인물로 그려졌던 그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게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가 만든 영화나 누군가에게서 들은 뒷말만 갖고 섣불리 판단해버리는 건 역시 삼가하는 편이 현명하다.

영진공 신어지

 

“엉클 분미”, 미술관 영화를 대하는 솔직한 자세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힘입어 국내에서 처음으로 정식 개봉된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장편.

예전에 <디지털 삼인삼색>(2005)에 포함된 단편 <세계의 욕망>을 통해 그 이름 만큼이나 익숙해지기가 어려운 – 거의 실험영화에 가까운 작품들을 만드는 감독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바, 이번 <엉클 분미>에 관한 지인들의 관심어린 언급들과 드디어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단독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도 “저 곳은 내가 갈 곳이 아니다”라며 진작에 마음을 접고 있었데 이 놈의 인연은 나중에 대체 뭐가 되려고 이러는 것인지 결국 감상을 하고야 말았다.

영화를 보러 들어가기 전에 상영관 앞 소파에 앉아 약 20분 정도 단잠을 자두었음에도 상영시간 동안 자주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 쉽게 말해 졸지 않으려고 – 애를 써야했음도 솔직하게 밝혀두고 싶다.

<엉클 분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 한 편을 보고 재미가 있다/없다, 잘 만들었다/못 만들었다는 식으로 감상평을 하는 범주의 바깥에서 태어난 영화다.

물론 여전히 <엉클 분미>가 무지하게 졸린다,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왜 중간에 다른 이야기가 끼어드는 것인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식의 직관적인 반응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애초에 이 영화를 선택해서 감상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니 (특히 나와 같은 경우 뻔히 알면서도) 그 선택을 했던 스스로를 탓하는 수 밖에 – 라고 쓰고 누워서 침 뱉는다고 읽습니다 – 없는 일이다.

<엉클 분미>는 내가 알던 그런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둘러 단정을 내릴 필요는 없다. <엉클 분미>가 깐느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서가 아니라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영화는 언제든지 다시 나타나고 경우에 따라 기존의 영화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장 <엉클 분미>가 고민스러운 것은 그 새로움이 내가 알던 세계와 너무 동떨어진 곳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없는 영화입니다 *

분미 아저씨의 시골 농장처럼 느릿한 시간 위를 걷는 영화 <엉클 분미>의 줄거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신장 질병을 앓고 있는 농장주 분미(타나팟 사이새마르)를 도시에 사는 처제(제니라 퐁파스)와 조카 통(사크다 카에부아디)이 방문했는데, 저녁 식사시간에 19년 전에 죽은 분미의 아내와 비슷한 시기에 집을 나갔다가 숲 속의 유인원이 되어버린 – 검은 털과 붉은 눈의 츄바카 – 아들 분쏭이 나타난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분미는 가족들과 함께 밤늦게 숲 속 동굴 안으로 들어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남겨진 가족들은 분미의 장례식을 치른 후 (아마도)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메인이다.

그 중간에 오랜 옛날 못생긴 공주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몸에 걸친 장신구들을 모두 물 속에 남긴 채 메기와 한 몸이 된다는 이야기의 단편, 숲 주변의 젊은이들과 군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컷들, 그리고 분미의 장례식이 끝나고 처제와 딸이 조의금을 정리하던 호텔 방에 스님이 된 조카가 찾아와 야식을 먹으러 나가자고 하는데 이때 유체이탈을 하듯 등장 인물들은 호텔 방 안과 식당 안에 동시에 존재를 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분미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환생에 관한 나레이션과 함께 소 한 마리가 숲으로 도망왔다가 주인에게 끌려가는 장면도 있다. 마지막 식당에서 흘러나오던 현대적인 팝 음악은 엔딩 크리딧으로 이어지는데 영화 전편에 가득하던 원시적인 적막함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말로 정리된 <엉클 분미>의 내용은 핵심이 되는 분미의 죽음을 중심으로 의문의 이벤트와 그 맥락을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현상들이 중첩되면서 완전한 이해 불가의 영역으로 날아가버린 느낌이다.

사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영화 관객들과 약속된 문법의 범위 내에서 이야기를 서술하고 감정을 표현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 그리하여 주어진 시간 동안 얼마나 재미있게 관객들의 흥미를 유도해나가느냐로 판가름되는 작품이 아니라 –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 개인의 독자적인 정의와 표현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기준으로 감독이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만 문제는 어느 세계가 진실에 좀 더 가까운 것인지는 아마도 영원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가 영화인 것이 아니라 <엉클 분미>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표현되는 영화들이 좀 더 영화답다고 받아들여지게 될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마디로 <엉클 분미>와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영화들의 옆에 나란히 서기 보다 그 영화라는 매체, 또는 예술 형식의 존재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나름의 새로운 정의에 따라 창조된 세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영화에 대한 지식을 통해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를 나름대로 해석해보려는 시도들조차 어쩌면 무의미한 작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한 시도 속에서 작가의 이력이나 인터뷰 내용들, 그리고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감독의 전작들과 다른 장르(설치 미술 등)의 작품들에 관한 정보, 심지어는 완전히 생소한 세계관에 대한 해설이 곁들여지게 되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의미를 묻고 새로운 정의를 시도해나가는 작품이 아무리 위대한 작품으로 추앙을 받는다 한들 지금 내가 추구하는 영화 감상의 목적에 부합하는 면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굳이 내키지 않는데 거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서사의 골격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표현 방식 안에서 기존의 것들로부터 조금씩 색다른 재미 찾기를 추구하는 것이 좀 더 유익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감독이나 평론가로부터 별도의 부연 설명을 들어야만 하는 영화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재미없는 노릇인 것은 사실이다. 홍상수 감독의 최근작 <옥희의 영화>(2010) 와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엉클 분미>는 매우 낯선 구조를 통해 –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지 않는 에피소드의 모음 – 새로운 영화 문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닮은 꼴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엉클 분미>와 달리 <옥희의 영화>를 비교적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오랜 시간 동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봐오면서 감독이 이야기하는 방식에 나름대로 익숙해진 편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엉클 분미>는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서사가 가장 명확한 편이라고 하는데 반대로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실험적인 서사 방식을 취하고 있으면서 마침내 두 작품이 어떤 경계선에서 맞닥뜨린 셈이 아닌가 싶다.

영화관 보다 미술관이나 실험실이 좀 더 어울릴 법한 영화 보다는 내게 익숙한 언어로 말 걸어주는 영화가 훨씬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