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인물들을 향한 영화 속 시선에 관하여

최근에 영화 속 주변 인물들에 대한 카메라의, 그러니까 연출자의 의도된 시선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시선이라 함은 간단히 말하자면 관객들 앞에서 스크린에서 비춰지는 것들입니다. 관객들은 연출자에 의해 취사 선택된 장면들을 의도된 각도와 표현 방식에 따라 바라보게 됩니다. 따라서 영화 속 시선은 곧 연출자의 의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바꿔 말하자면 영화 속 시선란 반드시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 속 시선은 자연스럽게 중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에게 우선적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시선을 할애하면서 주인공의 감정이나 행동을 설명하고 부각시키곤 합니다. 때로는 정의의 사도인 주인공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주변 인물들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영화의 시선은 그런 주변 인물들에게 몹시 차가운 시선을 보내곤 합니다. 관객들이 악당들에게 감정이입을 해서는 곤란한 일이 될테니까요.

제가 최근에 주목하는 영화들은 그와는 반대로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주인공 못지 않은 시선을 보내주는 영화들입니다. 때로는 이런 부분들 때문에 영화가 산만하게 흐트러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영웅이거나 반영웅거나,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일정 정도의 시선을 보낸다는 것은 각본가나 감독이 그 주변 인물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영화 전체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더라도 중간에 잠깐 떨궈준 주변 인물에 대한 시선 때문에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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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nieszka Holland directing Matthew Goode & Diane Kruger @ Copying Beethoven (2006)

최근에 본 <카핑 베토벤>(2006) 은 국내외에서 두루 낮은 평가를 받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큰 감동을 받은 영화였습니다. 베토벤의 음악과 그의 삶이나 안나 홀츠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베토벤과 같이 살고 싶은 자’의 입장을 잘 보여준 측면이 중심이긴 합니다만 <카핑 베토벤>이 저의 호감을 샀던 부분 중에 하나는 주인공인 베토벤과 안나 홀츠의 주변 인물들을 다루는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카핑 베토벤>은 기본적으로 득도한 자와 득도하기를 원하는 자의 이야기로 특히나 두 인물이 대부분의 컷을 차지하는 영화입니다. 두 사람의 주변 인물들이 별도의 에피소드를 구성하거나 심지어 씨퀀스 하나를 만들어내는 법이 없습니다. 베토벤의 조카, 술친구, 필사가, 이웃들 그리고 안나 홀츠의 애인, 이모 등은 모두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설명하고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활용됩니다. 특히 베토벤의 아랫층에서 사는 불쌍한 가족들은 베토벤의 괴팍하고 안하무인하는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채택된 단역들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한 주변 인물의 얼굴이 스크린에 자세히 비춰지지 않는 건 기술적으로 너무 당연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제가 발견한 <카핑 베토벤>의 특이한 시선은 안나 홀츠와 베토벤의 이웃 할머니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창문도 없는 방 답답한 공간을 참고 사는 그 할머니는 세상 누구보다 베토벤의 새 작품을 먼저 들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득도한 자와 득도하기를 원하는 자 뿐만 아니라 도를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알며 그것을 기꺼이 가까이 하려는 자에게까지 <카핑 베토벤>의 시선은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편집 과정에서 그대로 거둬낸다 하더라도 중심 내러티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야말로 곁가지에 불과한 장면이었습니다. 오히려 영화 전체를 산만하게 만들 우려까지 있는 이런 선택을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은 왜 고집했을까요. 정확한 이유야 본인과 편집 스텝만이 알고 있겠지만 저는 이 장면이, 그리고 이 장면 속 주변인에게 시선을 보낸 <카핑 베토벤>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아마도 영화를 좋아해왔으면서도 정작 한번도 영화 만들기나 그쪽 일에 직접 참여해볼 기회가 없었던 저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카핑 베토벤>의 시선을 염두해두고 보니 합창 교향곡 초연 장면에 불쑥 나타난 조카의 울먹이는 모습마저도 저에게는 불필요한 방해물의 삽입이 아니라 이 영화가 가진 내러티브의 풍성함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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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i Yu & Matsuyuki Yasuko @ Hula Girls (2006) by Lee Sang-Il

이상일 감독의 <훌라걸스>(2006)는 일본에서 크게 흥행했던 영화였지만 국내 관객들에겐 별로 어필하지 못했던 작품이었습니다. 같은 폐탄광촌을 배경으로 하는 춤 영화라는 점에서 <빌리 엘리어트>의 일본판, 여성판에 불과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던 작품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훌라걸스>는 일본 관객들이 좋아하는 요소들로 가득한 내수용 영화였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을 향수하며 오늘날의 삶에 용기를 얻곤 하는 『우동 한 그릇』식의 내러티브와 관점은 처음 한 두 번 접했을 때에는 나름 감동적인 구석이 있지만 그 이상 자주 보면 ‘또 그 얘기냐?’라는 식이 되버립니다.

그럼에도 <훌라걸스>는 저에게 무척 좋은 인상을 남긴 작품입니다. 그 역시 주변 인물을 대하는 시선 때문입니다. <훌라걸스>는 영화 전체가 주인공 키미코(아오이 유우)만을 비춰주는 영화가 아니라 훌라 댄스의 선생이나 주인공과 함께 춤을 배우는 동료들에게까지 고루 시선을 보내는 작품이긴 합니다. <훌라걸스>의 주변 인물을 향한 시선이 유난했던 부분은 애초에 훌라 댄스를 배우자고 먼저 주인공을 부추겼던 친구 사나에가 가족들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고 영화 초반 중심 내러티브로부터 완전히 사라진 이후,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주인공의 언급을 통해 그 존재를 관객들에게 다시금 상기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주인공과 다시 재회를 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나에가 직접 카메라의 시선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만 이 장면에서 <훌라걸스>의, 그리고 이상일 감독의 의도는 분명히 잊혀진 주변 인물을 다시금 관객들의 의식 속으로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성공 스토리가 있어왔고 앞으로 만들어질 것입니다만 이처럼 영화 초중반에 그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인물에게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을 두고 있던 영화가 또 있었던 가요? 이런 것이 바로 영화를 만든 이들의 태도이고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까지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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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ie Bell & Gary Lewis @ Billy Elliot (2000) directed by Stephen Daldry

마지막으로 한 작품만 더 언급하자면 다름아닌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 입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대처 정부 시대의 탄광촌 소년 빌리의 성공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유난한 감동을 전해주는 건 소년의 성공담 때문이 아닙니다. 영화는 이 소년이 어떻게 발레리노의 꿈을 이뤄나가게 되었는지의 배경 설명에 집중하고 이후 발레를 정식으로 배워나가는 과정은 싹뚝 잘라낸 채 마지막 백조의 호수 씨퀀스로 끝내버리는 영화입니다. 즉, <빌리 엘리어트>는 주변 인물을 향한 시선 자체가 영화의 중심 내러티브로 자리 잡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빌리 엘리어트>의 감동은 매튜 본의 발레극에서 주인공으로 서게 된 빌리의 성공 이면에 깔린 빌리의 아버지와 형의 희생 속에 담겨있습니다. 사내 새끼와 권투를 배워야지 무슨 발레냐던 완고한 아버지가, 자신의 젊음을 다 바친 탄광이 폐쇄되는 것을 막기위해 파업 전선에 앞장 서던 그 아버지가, 어린 막내 아들에게 “인생의 기회를 주기 위해” 동료들을 배신하고 다시 작업장에 나서던 그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눈 앞을 가립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 전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 자체가 세상의 많은 성공담 이면에 감추어진 더 많은 주변 인물들을 돌아보자는 의도의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이쯤되면 더이상 주변 인물이 아니라 그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해야겠지만요)

영화는 소재도 좋고 내러티브와 플롯의 구성도 좋아야 하고 표현 방법 또한 훌륭해야 합니다. 특히 표현 방법에서 하나의 혁신을 이룬 작품들은 영화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 취급하는 영화의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작품들도 기억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좋은 영화’를 정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요소를 더해주고 싶습니다. 그것은 영화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화를 만든 이들의 태도입니다. 인간과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만든 영화인지는 생각보다 구분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제한된 시간 내에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영화가 주변 인물들에게 전부 시간을 할애한다면 영화가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할 수가 없겠죠. 하지만 중심 인물들을 위주로 다루면서도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곁눈질하는 영화 속 시선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영화의 만든 이들, 특히 연출자와 편집자의 태도를 알아챌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 만든 영화와 훌륭한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영화도 소중하지만 삶에 대한 따뜻한 배려의 시선을 갖춘 영화도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영진공 신어지

축산과 낙농산업의 매트릭스 (Welcome to the Meatrix …)

아래의 동영상들은 미국의 비영리단체 “GRACE”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 “sustainable table”(http://www.sustainabletable.org/)에서 제작한 작품들이다.

작품의 제목은 영화 “Matrix”를 패로디한 “Meatrix”인데, 영어로 고기를 뜻하는 “Meat”와 “Matrix”를 합성한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동영상의 제작목적은 소비자들에게 산업화한 축산과 낙농의 문제점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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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의 내용이 비록 한 비영리단체의 일방적 시각일 수도 있겠으나, 쇠고기수입과 광우병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있는 지금 시점에서 분명 짚어보아야할 내용을 담고있는 작품이라 생각하여 소개하는 바이다.

1. The Meatrix 1 (http://www.themeatrix.com/intl/korean/)

2, 3편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세요.

2. The Meatrix 2: Revolting (http://www.themeatrix2.com/korean/subtitled/)

3. The Meatrix 2 1/2 (http://www.moremeatrix.com/)


영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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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가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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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대가 특정한 당을 열렬히 지지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최소한의 정치적인 행동을 하기 바랄 뿐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삶은 정치와 뗄래야 뗄 수 없으니 스스로 거기에 영향을 미쳐야 하거든요.

예를 들자면,
투표율은 그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을 정하는 가장 확실한 지표입니다.
왜 거의 모든 정당(김부선을 내세운 진보정당 빼고)이 지난 총선에서 “어르신”을 외쳤을까요?
그 어르신들의 투표율이 열라 높거든요.
그 어르신들의 움직임이 자기들의 향후 4년을 결정짓는데 꽤나 비중이 높거든요.

근데 투표율이 낮은 집단은 그런 대접을 못받아요.
자기들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사람들에게 뭐하러 신경을 쓰겠습니까.
그 시간에 “어르신”들께 한번 더 인사하는게 남는 장사죠.

그러니까 뭐 한나라당을 찍든, 민주당을 찍든, 뭐를 찍든, 가서 낙서를 하든
어쨌든 참여를 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전체 투표자 중에서 자기들이 속한 집단의 비중을 높여야
나중에 뭔 일이 있을 때 나름의 대접(혹은 경계)을 받을 것 아닙니까.

바로 그게 이유입니다.
나라를 위해서라거나, 남들을 위해서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는 거죠.
사실 투표가 매우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는데요 … 이미 지난 얘기니 어쩔 수 없고요 …

현실적으로 현재 청소년과 청년정책의 비중이 매우 매우 약할 뿐만 아니라 있다고해도 현실성이 매우 떨어집니다.
그래도 정치권에서는 별 관심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들은 뭘 해도 가만히 있는 집단이니까요.
더 어린 애들은 학부모라도 난리를 치죠…

뭐 어찌되었든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만,
참여하거나 간섭하지 않으면 존재감도 사라지고 당연히 대접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두셔야 한다는 거죠.

20대가 정치에 참여하여야 하는 이유요?  간단합니다.
바로 내 자신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 어제 있었던 청계천 집회에 많은 10, 20대 분들이 참여하여 평화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고  합니다.  집회의 성격이나 주장의 내용을 떠나서 이러한 참여는 정말로 소중한 행동입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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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짱가

도착(THE ARRIVAL), 흑백 무성영화처럼 흘러가는 가슴 아련한 동화.


글,그림_숀 탠

펴냄_사계절 출판사




현대 사회에서의 고독한 개인을 그렸던 ‘빨간 나무’나 유럽의 제국주의 혹은 산업화의 횡포를 이야기한 ‘토끼들’에서 어린이 책을 넘어선 주제들을 기발한 아이디어와 그림으로 풀어냄으로 어린이를 비롯 어른들에게까지 큰 감동을 주었던 숀 탠은 이번엔 직접 스토리까지 쓰며 4년간의 노력 끝에 신작 ‘THE ARRIVAL’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번 작품은 여러모로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가 없는데 (물론 그가 발표하는 작품을 접할 때 마다 나는 매번 충격에 휩싸였지만!) 무엇보다 동화책이 아닌 그래픽 노블이라는 점입니다. 동화책이라는 매체의 한계(12~15장)를 벗어나 그는 무려 781컷의 그림을 통해 보다 마음껏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숀탠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유려한 그림실력과 기발한 상상력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간과 사회를 이야기하는 주제의식과 자칫 어둡게 빠질 수 있는 이야기를 아름답고 유쾌한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능력에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이민, 난민이라는 인류의 어둡고 슬픈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책은 따스하고 아련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과 같은 그림들이 뭉클하고 아련하게 다가온다.


그가 ‘이민, 난민’을 주제로 택한 이유가 그의 아버지가 이민자였다는 개인적 가정사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이민자들로 세워진 호주 대륙의 역사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과 호주라는 대륙을 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책 속에는 가난을 피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떠나야만 했던 부모님 세대, 지금 코리아 드림을 꿈꾸며 하루 12시간 이상을 노동하고 있는 우리 주변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가난과 전쟁, 폭력을 피해 고국을 버리고 낮선 나라에 정책해야만 했던 가슴 아픈 이들의 상처를 저채도의 정성스런 소묘화를 통해 따스한 손길로 그려내었습니다. 물론 그의 기발한 상상력은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그의 상상력은 이 어둡고 슬픈, 그래서 딱딱하거나 신파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부드러운 한편의 동화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대사가 없는, 빛바랜 사진처럼 그려진 그림들은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흘러갑니다. 



아픈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싹은 언제나 피어난다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저는 국내 출판은 어렵지 않을까 해서 원서로 구입하였는데 이번에 사계절 출판사를 통해 국내에서도 정식출판이 되었습니다. 출판사의 좋은 안목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이들이 좋은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어 기쁘지만 아쉽게도 동화책으로 분류되어 서점에서는 동화책 코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