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 어른들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




아이들이 부모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 것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을 4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 부모나 다른 어른들이 부여한 정체성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er) 유형이다. 이 유형은 부모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들어서 부모님의 가치관을 그대로 닮은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이 확고한데다 별로 고민이나 갈등을 하지 않고 열심히 주어진 길을 간다. 성실한 가장, 참한 주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부모가 부여한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확고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고민하는 정체감 확산(identity diffused) 유형이다. 부모님의 기대만을 따르기엔 뭔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자기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자기 길을 갈만한 자신감이나 용기도 없다. 이들은 겉으로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도 하고 시험 준비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꿈과 현실이 다른 곳에 존재하는, 그렇지만 현실에 굴복하여 안주하는 사람들이다. 부모님 말씀만을 따르기엔 너무 생각이 복잡한 지식인들이 보통 이 유형에 해당한다.

세 번째, 일단 부모 말을 따르길 거부하고 보는 유형이다. 하지만 아직 대책은 없다. 단지 지금 당장 뭘 결정하진 않겠다.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주장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정체감 유예(identity moratorium) 유형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최대한 많은 실험과 탐색을 하고 싶어 한다. 이들 중에는 어학연수도 가고, 다른 전공을 부전공으로 이수해보기도 하고, 학교를 휴학하고 임시로 취직해보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탐색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저 판단을 미루고 칩거하는 경우도 있다.

네 번째로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d)가 있다. 이들은 부모나 주변에서 부여한 삶의 목표나 정체성에서 벗어나서 자기만의 삶을 찾아낸 사람들이다. 독자적이면서도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4가지 유형 중에서 어떤 유형이 제일 행복하게 살까?

정체감 성취 유형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정체감 성취 유형인 사람들은 물론 아주 크게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세상과 끊임없이 투쟁을 해왔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몸과 마음이 황폐한 경우도 많았다. 우울증이나 약물중독자도 많았고 자살한 경우도 있었다. 가장 무난하게 잘 사는 유형은 정체감 유실이었고 그 다음이 정체감 확산이었다. 이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라고 부모하고 원수지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단지 마음은 정말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데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는 끼를 가지고 태어나서 도저히 사회의 틀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은 원치 않더라도 정체감 성취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 속의 빌리가 바로 그런 경우다.
영국의 탄광촌에서 태어난 빌리에게 아버지는 광부로서의 인생을 기대한다. 광부들의 남성적인 힘을 키워주기 위해서 권투학원에도 보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권투학원에는 마땅히 연습할 곳이 없어 귀퉁이를 빌려 쓰는 발레학원도 있었다. 빌리는 아버지가 바란 권투가 아니라 발레에 빠지고 만다. 착한 빌리는 나름대로 아버지 말씀을 따르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저 계속 발레에만 눈이 가고 몸은 춤을 추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을 ……

그래 권투는 이 샌드백을 열심히 치는 거지...

하지만 이건 싫어...

이게 좋아~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버지가 일하던 탄광에 폐쇄 결정이 난 것이다. 만약에 탄광이 앞으로도 계속 운영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빌리의 소망을 무시하고 자신의 가치를 강요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추구해 왔고 빌리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삶이 눈앞에서 사라질 지경에 놓이자 그는 빌리의 선택을 실현시켜주기로 결심한다.

그 길은 사내 자식이 계집애처럼 춤을 춘다는 조롱뿐만 아니라, 동료를 배신하고 탄광에 출근한다는 도덕적인 비난을 아우르는 고난의 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 밖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아들은 결국 아무도 생각지 못한 그 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영화는 빌리가 남자들만 출연하는 세계적 발레극의 프리마돈나(?)로서 아버지 앞에서 공연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저 지원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짓바람에 가까운 ...


이게 정체감 성취자의 운명이다. 이들은 일종의 도박을 감행한다. 잘되면 대박, 안되면 쪽박일수도 있는 도박이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어서 변화의 가능성이 적은 세상에서는 정체감 성취자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공은 별로 못하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회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경우에는 정 반대다. 오히려 정체감 유실로 살던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낀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고작 그 결과가 이거냐는 울분이 그들의 몫이다. 하지만 자신의 끼를 못 이겨서, 혹은 주변 상황에 떠밀려서 정체감 성취의 길로 들어선 자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밑져야 본전이고 잘하면 대박인 것이다.

부모들의 세상이 자녀들의 세상으로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청소년 자녀에게 부모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요구해도 된다. 그게 그들을 위하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 세상이 10년 후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면, 자녀의 바람과 엉뚱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자녀들 하자는 대로 따르란 얘긴 아니다. 부모 세대의 지혜는 언제나 유효하니 말이다. 빌리 엘리엇이 성공한 이유는 결국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인데, 그건 “능력있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하지 못한다”는 옛 말씀에서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결말 아닌가.

영진공 짱가

“브래스드 오프”, 오렌지주스 협주곡의 기억


마치 어딘가 간질간질하긴 한데 정확히 어디가 물린 건지 모르겠어서 그 주변만 긁다가 마침내 ‘결정적 그 부분’을 찾아내고 시원하게 긁을 때처럼 ……

며칠 전 우연히 귀에 들려온 예전 어느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이 그랬다. 그 옛날 내가 어렸을 때나 그 프로그램이 문을 닫을 때도 시그널 뮤직은 계속 그 곡의 그 연주 버전이다. 따다다단 따다다단, 의 약간 빠른 박자로 시작하는.

그러나. 진정으로 내게 당장 다시 듣고픈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킨 음악은 이 곡과 비슷하되 이 곡이 아니다. 그리고 … 미치도록 가려운 느낌의 얼마 뒤, 드디어 생각해냈다. 『브래스드 오프』.

그랬다, 내 깊은 기억과 애정 속에 박혀버린 곡은, 어릴 적부터 무의식 중에 무수히 반복적으로 들어온 토요명화 시그널송의 버전이 아니라, 대학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중반에 극장에서 본 영화에 나오는 브라스 버전이다. 영화 『브래스드 오프』에서 연주되는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


 
『트레인스포팅』이 인기를 끌고서, “이완 맥그리거”를 마치 단독 주인공인 양 전면에 내세운 광고로 비로소 개봉될 수 있었던 바로 그 영화. 나도 그를 보기 위해 극장엘 갔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수많은 주인공들 – 밴드 전원이 주인공이었다 – 중 한 명일 뿐이어서 약간의 배반감도 느꼈지만 이 영화의 음악은 좋았다. 테입으로 OST를 샀고 한동안 잘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때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이 영화와 제대로 교감하지도 못했던 것같다.

신자유주의의 광풍, 소위 대처리즘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대처의 단호한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그 일환으로 영국에서 일어난 연달은 광산 폐쇄, 극심한 실업, 노동자들의 절망 … 같은 걸 알기엔 나는 그때 너무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몇 년 후, 전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풀 몬티』가 나왔고, 이 영화가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아마도, 영국의 광산노동자의 아픔이 묻어있는 영화가 한국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어필하기 시작한 건 『빌리 엘리어트』 때부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때 한국은 IMF를 겪고난 후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의외로 나처럼 이 영화를 또렷이 기억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같다.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을 연주하는 바로 그 장면이 심지어 자막도 있는 동영상 파일로 올라와 있다. 플레이를 해보니 세상에, 이건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장면이 아닌가.

외골수 지휘자 피터 포슬스웨이트가 단원들에게 ‘오렌지주스 협주곡’이라 소개하는 이 곡, 경영진의 한 명으로 실사 조사를 위해 파견온 여주인공이 같이 연주를 하기 위해 오디션을 받으며 협연하면서 음악이 계속 흐르는 가운데, 이들의 연습장면은 어느새 이 광산노동자들의 필사적인 꿈과 기대와 희망과 절망과 눈물과 웃음을 좌우할 경영진과 노조 간 마라톤 협상의 장면, 협상 결과를 취재하며 플래시를 터뜨리는 기자들과 경영진의 장면으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이 연주하고 있는 바로 그 음악에 스스로 푹 빠져있는 지휘자와 악대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역시나 내게 아랑훼즈 협주곡은, 탄광 노동자들이 절망과 꿈과 희망과 삶의 모든 것을 각각의 브라스 악기에 걸고 연주한 『브래스드 오프』의 영화음악 버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장면과 피터 포슬스웨이트의 병실 밖에서 연주한 대니 보이 장면 – 절망에 악기를 팔아먹은 “이완 맥그리거”는 휘파람으로 자신의 파트 연주를 대신한다 – 이, 심지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연주되는 결선 연주 장면과 음악보다도 더욱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이명박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꼭 보아야 할 몇 편의 영화들

 

얼마 전에 영화 블로그 “네오이마주”에 취임 100일 대통령에게 권하는 몇 편의 영화들이라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이 글의 취지와 그 권고사항에 적극 공감하는 바이며,
이 대통령은 잠도 안 자는 새벽에 꼭 한 편 씩 챙겨서 보아주길 바라는 바이다.

각설하고, “영진공”에서는 이명박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시민들에게 몇 편의 영화를 추천하고자 한다.
 
그 전에 하나 읽어볼 게 있다.

“①복지를 위한 공공지출의 삭감과 세금인하, ②국영기업의 민영화, ③노동조합의 활동규제, ④철저한 통화정책에 입각한 인플레이션 억제, ⑤기업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⑥외환관리의 전폐와 빅뱅(big bang) 등을 통한 금융시장의 활성화 등”
“작은 정부의 실현, 산학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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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심의 교육정책”

이거 많이 듣는 거다.  이명박이냐고?  아니다.
따라쟁이 대통령이 롤모델로 삼고있는 대처와 레이건의 정책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 대통령이 실시하고자 하는 이 정책들이 30여년 전에 이미 실행되어 어떤 결과를 낳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실례를 보면서 알고 배울 수가 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여담이지만, 대처는 재임 중 하루 다섯 시간만 수면하며 업무에 임했다고 한다 … 이것도 따라하는 거냐긔 … >_<

그때 영국에선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그리고 미국에선 …
경제부흥? 선진국으로의 재도약? 공공서비스 개선? 감세? 소득증대? 실업감소????????

일단 신나는 음악 하나 듣고 시작하자.


<영화 “브라스트 오프” 中 윌리암 텔 서곡> 

이 영화는 1997년 개봉작으로,
대처리즘으로 인해 노조가 와해되고 아예 탄광이 폐쇄된 지역 탄광노동자들의 생활상을,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낸 <브라스트 오프 (Brassed Off)>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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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한 물 갔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암튼 꽃미남 훈남 이완 맥그리거가 주연으로 나오며 마크 허먼이 감독한 영화이다.
꼭 챙겨보시길 권한다.

요즘 공기업 민영화에 대해서 말들이 많다.
그런데 한 가지 심각한 의문점은 “공기업 민영화 = 경제부흥”이라는 공식이 어떻게 성립한다는 것일까?
공기업을 팔아서 국가재정을 확보하여 이를 공적인 사업에 투자하여 경제를 살리고 고용을 늘리겠다는데, 도대체 이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공기업을 팔아서 돈을 만들어 다시 공적사업을 하겠다는 얘긴데 … 이 무신 …
그리고 한국 공기업 매출이 한 해에 얼만지 계산은 해 보았는가?
기껏 몇 십조 벌겠다고 매년 몇 십조를 그 기업들에 국민이 갖다바치는 건 계산 안하냐?

공기업 개혁, 필요하고 절실하다.
그런데 빈대를 잡으려고 집을 태울 것인가?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

*참고
[[공기업 개혁 해외 사례] ①영국]
http://news.mk.co.kr/newsRead.php?sc=30000022&cm=%B0%F8%B1%E2%BE%F7&year=2008&no=333631&selFlag=sc&relatedcode=  (매일경제 인용)
[공기업 개혁과 민영화 구분부터 하라]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80604105951&s_menu=%EC%84%B8%EA%B3%84 (프레시안 인용)

다음으로 추천하는 영화는 다들 잘 아시는 2000년도 개봉작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이다.

영화에서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영국의 탄광노동자인데, 이들은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받기 위해 파업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 파업은 노동자 내부의 분열과 대체근로자(미국에서는 strike breaker, 즉 파업파괴자라고도 부른다.)의 투입으로 위기를 맞는데, 이 와중에서 빌리는 발레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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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들 보셨겠지만, 자꾸 봐도 좋은 영화이다.
감독은 스테판 달드리, 제이미 벨이 빌리 엘리어트 역을 맡았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

1982년에 나온 영화 <더 월 (The Wall)>은 한 편의 거대한 뮤직비디오랄 수 있다.  락 그룹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1979년 앨범 <The Wall>을 그대로 영화로 옮겨놓은 독특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경쟁에 얽매이고 치여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소외되고 파괴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걸작 뮤직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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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 Floyd, Another Brick In The Wall (1979)>

감독은 알란 파커이고 각본은 그룹의 멤버인 로저 워터스가 맡았으며 음악은 당근 핑크 플로이드이다. ^^

아래의 클립 역시 대처 시절의 영국 노동자의 삶을 그린 영화 중 한 장면인데, 사실 이 장면은 여러 광고에서 패로디 하기도 하였다.

 


<영화 “풀 몬티(Full Monty)”의 한 장면>

이 영화는 1997년 개봉작인 <풀 몬티 (Full Monty)>이다.
감원조치로 철강공장에서 해고된 이들이 생활방편으로 선택한 것은 … … 스트립쇼!
영화의 제목 풀 몬티는 홀랑 벗는다는 뜻이라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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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카타니오 감독에 로버트 칼라일 주연 작품이다.

<식코(Sicko)>, <화씨 9/11(Farenheit 9/11)>의 감독으로 유명한 도큐멘타리 영화제작자인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  그의 데뷔작은 1989년의 <로저와 나(Roger&Me)>이다.

미시간주 플린트에서 대학신문의 편집자로 일하던 청년 마이클 무어는 고향에 있던 제너럴 모터즈(GM) 자동차가 공장을 폐쇄하면서 3만명이나 되는 고향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되자 당시 GM의 사장인 로저 스미스(Roger Smith)에게 해명을 듣겠다고 길을 나선다.
이 영화는 그 여정과 에피소드를 담고있다.


<영화 “로저와 나(Roger & Me)”의 예고편.  여기에도 윌리암 텔 서곡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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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미디 영화 한 편을 소개할텐데,
그전에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했던 대규모 정전사태에 대해 공부하고 넘어가자.

* 참고
[캘리포니아 정전사태]
http://www.changbi.com/webzine/content.asp?pID=204 (창비 인용)
[한전 노사 ‘미 정전사태’ 해몽 따로따로]
http://www.donga.com/docs/magazine/weekly_donga/news277/wd277dd020.html
(주간동아 인용)

1983년 개봉작 “에디 머피의 대역전(Trading Places)”은 국내 제목 그대로 에디 머피가 주연을 맡은 영화이다.
이 영화 무지 웃기고 재밌다.

그런데 웃다보면 ㅆ ㅂ 욕이 저절로 나온다.
자본가들이 그리고 졸부들이 소위 서민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 또 어떤 가치를 매기고 있는지 신랄하게 꼬집고 코후비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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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존 랜디스이고 에디 머피 뿐만 아니라 댄 애크로이드, 제이미 리 커티스, 제임스 벨루시, 덴홀름 엘리어트 등 초호화 캐스팅이다.

준비한 클립은 동 영화의 한 장면인데, 자막은 없지만 잠깐 맛만 보시기 바란다.

자, 여기까지이다.

일하랴, 교제하랴, 가족 챙기랴, 배우랴, 놀랴, 바쁘고 바쁜 우리들에게,
나라 걱정이라는 거대한 숙제를 떠넘기고 있는 현 집권세력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우리 국민들,

그리고 촛불의 행진에 동참하느라, 또는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를 생방송으로 지켜보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우리 국민들이,

위에 추천한 영화들을 보며 잠깐이라도 마음의 위로와 휴식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면,
우리 영진공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그럼, Good night and good luck~


영진공 이규훈

주변 인물들을 향한 영화 속 시선에 관하여

최근에 영화 속 주변 인물들에 대한 카메라의, 그러니까 연출자의 의도된 시선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시선이라 함은 간단히 말하자면 관객들 앞에서 스크린에서 비춰지는 것들입니다. 관객들은 연출자에 의해 취사 선택된 장면들을 의도된 각도와 표현 방식에 따라 바라보게 됩니다. 따라서 영화 속 시선은 곧 연출자의 의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바꿔 말하자면 영화 속 시선란 반드시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 속 시선은 자연스럽게 중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에게 우선적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시선을 할애하면서 주인공의 감정이나 행동을 설명하고 부각시키곤 합니다. 때로는 정의의 사도인 주인공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주변 인물들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영화의 시선은 그런 주변 인물들에게 몹시 차가운 시선을 보내곤 합니다. 관객들이 악당들에게 감정이입을 해서는 곤란한 일이 될테니까요.

제가 최근에 주목하는 영화들은 그와는 반대로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주인공 못지 않은 시선을 보내주는 영화들입니다. 때로는 이런 부분들 때문에 영화가 산만하게 흐트러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영웅이거나 반영웅거나,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일정 정도의 시선을 보낸다는 것은 각본가나 감독이 그 주변 인물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영화 전체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더라도 중간에 잠깐 떨궈준 주변 인물에 대한 시선 때문에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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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nieszka Holland directing Matthew Goode & Diane Kruger @ Copying Beethoven (2006)

최근에 본 <카핑 베토벤>(2006) 은 국내외에서 두루 낮은 평가를 받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큰 감동을 받은 영화였습니다. 베토벤의 음악과 그의 삶이나 안나 홀츠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베토벤과 같이 살고 싶은 자’의 입장을 잘 보여준 측면이 중심이긴 합니다만 <카핑 베토벤>이 저의 호감을 샀던 부분 중에 하나는 주인공인 베토벤과 안나 홀츠의 주변 인물들을 다루는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카핑 베토벤>은 기본적으로 득도한 자와 득도하기를 원하는 자의 이야기로 특히나 두 인물이 대부분의 컷을 차지하는 영화입니다. 두 사람의 주변 인물들이 별도의 에피소드를 구성하거나 심지어 씨퀀스 하나를 만들어내는 법이 없습니다. 베토벤의 조카, 술친구, 필사가, 이웃들 그리고 안나 홀츠의 애인, 이모 등은 모두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설명하고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활용됩니다. 특히 베토벤의 아랫층에서 사는 불쌍한 가족들은 베토벤의 괴팍하고 안하무인하는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채택된 단역들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한 주변 인물의 얼굴이 스크린에 자세히 비춰지지 않는 건 기술적으로 너무 당연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제가 발견한 <카핑 베토벤>의 특이한 시선은 안나 홀츠와 베토벤의 이웃 할머니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창문도 없는 방 답답한 공간을 참고 사는 그 할머니는 세상 누구보다 베토벤의 새 작품을 먼저 들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득도한 자와 득도하기를 원하는 자 뿐만 아니라 도를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알며 그것을 기꺼이 가까이 하려는 자에게까지 <카핑 베토벤>의 시선은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편집 과정에서 그대로 거둬낸다 하더라도 중심 내러티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야말로 곁가지에 불과한 장면이었습니다. 오히려 영화 전체를 산만하게 만들 우려까지 있는 이런 선택을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은 왜 고집했을까요. 정확한 이유야 본인과 편집 스텝만이 알고 있겠지만 저는 이 장면이, 그리고 이 장면 속 주변인에게 시선을 보낸 <카핑 베토벤>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아마도 영화를 좋아해왔으면서도 정작 한번도 영화 만들기나 그쪽 일에 직접 참여해볼 기회가 없었던 저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카핑 베토벤>의 시선을 염두해두고 보니 합창 교향곡 초연 장면에 불쑥 나타난 조카의 울먹이는 모습마저도 저에게는 불필요한 방해물의 삽입이 아니라 이 영화가 가진 내러티브의 풍성함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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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i Yu & Matsuyuki Yasuko @ Hula Girls (2006) by Lee Sang-Il

이상일 감독의 <훌라걸스>(2006)는 일본에서 크게 흥행했던 영화였지만 국내 관객들에겐 별로 어필하지 못했던 작품이었습니다. 같은 폐탄광촌을 배경으로 하는 춤 영화라는 점에서 <빌리 엘리어트>의 일본판, 여성판에 불과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던 작품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훌라걸스>는 일본 관객들이 좋아하는 요소들로 가득한 내수용 영화였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을 향수하며 오늘날의 삶에 용기를 얻곤 하는 『우동 한 그릇』식의 내러티브와 관점은 처음 한 두 번 접했을 때에는 나름 감동적인 구석이 있지만 그 이상 자주 보면 ‘또 그 얘기냐?’라는 식이 되버립니다.

그럼에도 <훌라걸스>는 저에게 무척 좋은 인상을 남긴 작품입니다. 그 역시 주변 인물을 대하는 시선 때문입니다. <훌라걸스>는 영화 전체가 주인공 키미코(아오이 유우)만을 비춰주는 영화가 아니라 훌라 댄스의 선생이나 주인공과 함께 춤을 배우는 동료들에게까지 고루 시선을 보내는 작품이긴 합니다. <훌라걸스>의 주변 인물을 향한 시선이 유난했던 부분은 애초에 훌라 댄스를 배우자고 먼저 주인공을 부추겼던 친구 사나에가 가족들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고 영화 초반 중심 내러티브로부터 완전히 사라진 이후,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주인공의 언급을 통해 그 존재를 관객들에게 다시금 상기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주인공과 다시 재회를 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나에가 직접 카메라의 시선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만 이 장면에서 <훌라걸스>의, 그리고 이상일 감독의 의도는 분명히 잊혀진 주변 인물을 다시금 관객들의 의식 속으로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성공 스토리가 있어왔고 앞으로 만들어질 것입니다만 이처럼 영화 초중반에 그 과정에서 떨어져나간 인물에게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을 두고 있던 영화가 또 있었던 가요? 이런 것이 바로 영화를 만든 이들의 태도이고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까지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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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ie Bell & Gary Lewis @ Billy Elliot (2000) directed by Stephen Daldry

마지막으로 한 작품만 더 언급하자면 다름아닌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 입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대처 정부 시대의 탄광촌 소년 빌리의 성공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유난한 감동을 전해주는 건 소년의 성공담 때문이 아닙니다. 영화는 이 소년이 어떻게 발레리노의 꿈을 이뤄나가게 되었는지의 배경 설명에 집중하고 이후 발레를 정식으로 배워나가는 과정은 싹뚝 잘라낸 채 마지막 백조의 호수 씨퀀스로 끝내버리는 영화입니다. 즉, <빌리 엘리어트>는 주변 인물을 향한 시선 자체가 영화의 중심 내러티브로 자리 잡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빌리 엘리어트>의 감동은 매튜 본의 발레극에서 주인공으로 서게 된 빌리의 성공 이면에 깔린 빌리의 아버지와 형의 희생 속에 담겨있습니다. 사내 새끼와 권투를 배워야지 무슨 발레냐던 완고한 아버지가, 자신의 젊음을 다 바친 탄광이 폐쇄되는 것을 막기위해 파업 전선에 앞장 서던 그 아버지가, 어린 막내 아들에게 “인생의 기회를 주기 위해” 동료들을 배신하고 다시 작업장에 나서던 그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눈 앞을 가립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 전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 자체가 세상의 많은 성공담 이면에 감추어진 더 많은 주변 인물들을 돌아보자는 의도의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이쯤되면 더이상 주변 인물이 아니라 그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해야겠지만요)

영화는 소재도 좋고 내러티브와 플롯의 구성도 좋아야 하고 표현 방법 또한 훌륭해야 합니다. 특히 표현 방법에서 하나의 혁신을 이룬 작품들은 영화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 취급하는 영화의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작품들도 기억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좋은 영화’를 정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요소를 더해주고 싶습니다. 그것은 영화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화를 만든 이들의 태도입니다. 인간과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만든 영화인지는 생각보다 구분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제한된 시간 내에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영화가 주변 인물들에게 전부 시간을 할애한다면 영화가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할 수가 없겠죠. 하지만 중심 인물들을 위주로 다루면서도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곁눈질하는 영화 속 시선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영화의 만든 이들, 특히 연출자와 편집자의 태도를 알아챌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 만든 영화와 훌륭한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영화도 소중하지만 삶에 대한 따뜻한 배려의 시선을 갖춘 영화도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영진공 신어지

[영진공 추천] 가정의 달 5월, 온가족이 함께 볼만한 영화들 (1)

 

작년 12월 “크리스마스에 다시 보고싶은 영화 10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며 엄선했던 영화 10편을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온가족이 함께 볼만한 영화들로 우려먹는 글입니다. 그것도 2부로 나누어 우려먹습니다. 대부분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들이고 연소자관람가 1편과 12세 이상 관람가가 1편 있습니다. 연령대에 상관없이 온가족이 함께 보아도 남사스러울 일이 없고 오직 감동과 훈훈함만 안겨주는 영화들을 5편씩 소개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때마침 월요일 휴일을 낀 연휴가 2주 연속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적어두셨다가 잘 한번 써먹어 보세요. 단, 비디오/DVD 가게에서도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작품들도 있으니 너무 뭐라고 하지는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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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크리스마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 팀 버튼 감독의 1990년작 <가위손>입니다. 온가족이 함께 볼만한 영화로도 전혀 손색이 없죠. 포스터가 다소 썰렁합니다만 저 못생긴 총각이 바로 젊은 시절의 조니 뎁입니다. 지금도 엄청나게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지만 저는 지금도 조니 뎁 하면 <가위손>의 에드워드를 떠올리게 됩니다. 한 편의 동화 같은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면 겨울마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애틋한 사연을 알 수 있게 되죠. 눈만 내리면 <가위손>이 생각난다 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튼 겨울 영화 No. 1, 저에게는 크리스마스 영화로도 No. 1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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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편의 조니 뎁 주연작이네요. 보신 분들은 다들 최고의 완소 영화로 꼽아주시는 <베니와 준>(1993)입니다. 가족애만 강조하는 작품이 아니라 사람이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조니 뎁의 귀여운 괴짜 연기는 거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구요 여주인공 매리 스튜어트 매스터슨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그녀의 오빠로 출연한 에이단 퀸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가 스스로를 먼저 자유롭게 하는 법을 배우는 순간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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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비장의 무기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크리스챤 슬레이터와 마리사 토메이가 주연한 <언테임드>(1993)라는 영화입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심장, 가슴, 마음… 원 제목부터 참 근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절대 액션 영화는 아니구요, 아주 자그마한 멜러물입니다. 작은 식당에서 같이 일하게된 두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데 결말이 조금 슬프긴 합니다. 크리스챤 슬레이터 주연의 멜러 영화로 <미스터 플라워>(1996)가 좀 더 알려지지 않았나 싶은데요 여러모로 이 영화가 더 낫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멜러로까지 꼽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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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비교적 최근 영화이기 때문에 구해보시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이 영화도 안갖다 놓은 비디오/DVD 가게라면 당장 거래를 끊으시고요. 작년 이맘때 국내 개봉했던 <미스 리틀 선샤인>(2006)입니다. 어느 콩가루 집안이 어린 막내 딸의 미녀 선발대회 출전을 돕기 위해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겪는 이야기입니다. 그렉 키니어, 토니 콜레트, 스티브 카렐 정도가 알려진 배우들이고 나머지는 이 영화를 통해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습니다만 금방 친숙해지더군요. 아들로 출연했던 폴 다노가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연기 대결을 펼쳤죠. 작품 자체가 베스트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가족 영화로는 딱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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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드라마의 거의 끝장을 보여주는 작품이죠. 애들이 이 영화의 깊은 뜻을 알려나 모르겠습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2002) 입니다. 개인적으로 제 인생의 영화 세번째 작품이기도 하고요. 80년대 대처 시대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과 그의 가족들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장면의 감동은 10만 볼트 감전이고 그 앞에 펼쳐지는 가족애는 정말 오래토록 기억에 남습니다. 가족이 세상에서 젤 중요하다고 해서가 아니라 기왕 가족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 영화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이상 5편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그럼 “온가족이 함께 볼만한 영화들 (2)”에서 나머지 5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