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스드 오프”, 오렌지주스 협주곡의 기억


마치 어딘가 간질간질하긴 한데 정확히 어디가 물린 건지 모르겠어서 그 주변만 긁다가 마침내 ‘결정적 그 부분’을 찾아내고 시원하게 긁을 때처럼 ……

며칠 전 우연히 귀에 들려온 예전 어느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이 그랬다. 그 옛날 내가 어렸을 때나 그 프로그램이 문을 닫을 때도 시그널 뮤직은 계속 그 곡의 그 연주 버전이다. 따다다단 따다다단, 의 약간 빠른 박자로 시작하는.

그러나. 진정으로 내게 당장 다시 듣고픈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킨 음악은 이 곡과 비슷하되 이 곡이 아니다. 그리고 … 미치도록 가려운 느낌의 얼마 뒤, 드디어 생각해냈다. 『브래스드 오프』.

그랬다, 내 깊은 기억과 애정 속에 박혀버린 곡은, 어릴 적부터 무의식 중에 무수히 반복적으로 들어온 토요명화 시그널송의 버전이 아니라, 대학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중반에 극장에서 본 영화에 나오는 브라스 버전이다. 영화 『브래스드 오프』에서 연주되는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


 
『트레인스포팅』이 인기를 끌고서, “이완 맥그리거”를 마치 단독 주인공인 양 전면에 내세운 광고로 비로소 개봉될 수 있었던 바로 그 영화. 나도 그를 보기 위해 극장엘 갔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수많은 주인공들 – 밴드 전원이 주인공이었다 – 중 한 명일 뿐이어서 약간의 배반감도 느꼈지만 이 영화의 음악은 좋았다. 테입으로 OST를 샀고 한동안 잘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때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이 영화와 제대로 교감하지도 못했던 것같다.

신자유주의의 광풍, 소위 대처리즘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대처의 단호한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그 일환으로 영국에서 일어난 연달은 광산 폐쇄, 극심한 실업, 노동자들의 절망 … 같은 걸 알기엔 나는 그때 너무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몇 년 후, 전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풀 몬티』가 나왔고, 이 영화가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아마도, 영국의 광산노동자의 아픔이 묻어있는 영화가 한국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어필하기 시작한 건 『빌리 엘리어트』 때부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때 한국은 IMF를 겪고난 후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의외로 나처럼 이 영화를 또렷이 기억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같다.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을 연주하는 바로 그 장면이 심지어 자막도 있는 동영상 파일로 올라와 있다. 플레이를 해보니 세상에, 이건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장면이 아닌가.

외골수 지휘자 피터 포슬스웨이트가 단원들에게 ‘오렌지주스 협주곡’이라 소개하는 이 곡, 경영진의 한 명으로 실사 조사를 위해 파견온 여주인공이 같이 연주를 하기 위해 오디션을 받으며 협연하면서 음악이 계속 흐르는 가운데, 이들의 연습장면은 어느새 이 광산노동자들의 필사적인 꿈과 기대와 희망과 절망과 눈물과 웃음을 좌우할 경영진과 노조 간 마라톤 협상의 장면, 협상 결과를 취재하며 플래시를 터뜨리는 기자들과 경영진의 장면으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이 연주하고 있는 바로 그 음악에 스스로 푹 빠져있는 지휘자와 악대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역시나 내게 아랑훼즈 협주곡은, 탄광 노동자들이 절망과 꿈과 희망과 삶의 모든 것을 각각의 브라스 악기에 걸고 연주한 『브래스드 오프』의 영화음악 버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장면과 피터 포슬스웨이트의 병실 밖에서 연주한 대니 보이 장면 – 절망에 악기를 팔아먹은 “이완 맥그리거”는 휘파람으로 자신의 파트 연주를 대신한다 – 이, 심지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연주되는 결선 연주 장면과 음악보다도 더욱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콘스탄트 가드너 (The Constant Gardener, 2005), “정치 스릴러냐? 러브 스토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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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에서 랄프 파인즈의 모습은 언듯 톰 클랜시 원작 영화에서의 해리슨 포드를 연상시키지만 <콘스탄트 가드너>에서 그의 실제 캐릭터는 “성난 폭도들에게 머핀 한 조각씩을 권할 법한” 유순한 성격의 하급 외교관일 뿐이다. 화초 기르기가 취미인 그는 다국적 제약/유통 회사들의 반인륜적인 음모로부터 사실상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여행 중 비참하게 살해 당한 이후부터 비로소 사건의 중심부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영국 외무부와 다국적 기업들 간의 결탁을 파헤치는 영웅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 때문이다. 이것이 <콘스탄트 가드너>를 정치 스릴러 액션이기 이전에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 먼저 기억되게 만드는 이유다.

<시티 오브 갓>에서 입증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역동적인 연출 감각이 유감 없이 발휘되는 가운데 전작에서부터 함께 해온 세자르 샬론의 카메라 역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릴 만한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영화 속에 가득 담아냈다. 여기에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의 음악까지 더해지면서 <콘스탄트 가드너>는 시청각적인 풍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 되었다. 배경음악을 자제하고 보다 건조한 영상이 어울릴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콘스탄트 가드너>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균형감을 잃지 않는 잘 연출된 풍성함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랄프 파인즈의 대표 캐릭터는 여전히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다혈질 러버보이지만 <쉰들러 리스트>의 독일군 장교나 <퀴즈쇼>의 대학교수도 있었고 <스파이더>의 정신분열증 환자와 <레드 드레곤>의 연쇄 살인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춘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콘스탄트 가드너>에서는 좀 더 일상적인 인물로서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손쉽게 하여 마침내 영화의 중심적인 정서를 성공적으로 전달한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레이첼 와이즈는 단독 주연작은 드물지만 <미아라>나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콘스탄틴>과 같은 액션물과 <어바웃 어 보이>와 <엔비> 같은 코미디까지 비중 높은 조역을 성공적으로 연기해온 배우인데 <콘스탄트 가드너>에서 그녀의 헌신적인 연기는 이번 수상이 그저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외에도 <콘스탄트 가드너>에는 빌 나이, 피트 포슬스웨이트, 제라드 맥솔비 등 낯익은 영국계 조연들이 함께 출연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이름 없는 아프리카의 단역 배우들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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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