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행진” OST 다시 듣기 (1)




2006년 쯤에 CD로 복각 된 1975년 작
『바보들의 행진』과 1974년 작인 『별들의 고향』O.S.T.  송창식, 이장희 1970년대 초반 포크 계열이면서도 이단아적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각각 영화 주제가를 불렀고,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던 음반들이다.

1. 가물가물한 기억
사실 내가 태어나던 때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겠다. TV를 통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전편을 본 것인지 아니면 편집된 장면만을 본 것인지 가물가물하다. 대놓고는 못해도 1970년대의 억눌린 상황을 잘 묘사했던 것 같다. 장발 단속, 군 입대, 그리고 마침내 동해 바다로 자전거 타고 뛰어드는(이렇게 짓눌려서는 죽는게 낫다!!!)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음악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75학번으로 우리집에서 대학을 다니시던 외삼촌 덕분에 ‘엄마 – 아빠’하기 전부터 오디오를 통해 최신곡(비틀즈, 사이먼 앤 가펑클에서 김도향, 산울림까지)을 들었기 때문인 듯 싶다. 외삼촌이 인정하는 몇 안되는 한국 가수 중 하나가 바로 송창식이었고, 당근 이 “왜 불러”도 그렇게 들었다. 여튼, 『바보들의 행진』을 다시 들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 놀라운 음악들이라는 것이다.

2. 왜 놀라나
귀에 익은 친숙한 멜로디들이기에 때문만은 아니다. 멜로디만 기억날 뿐 악기 소리에 관심없던 어린애 귀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에 놀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중현, 김추자, He6, 키브라더스 등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반 음반의 복각판에서 느끼는 것의 연장이기도 하고, 그와는 또 다른 경험이기도 하다.

◎  1960년대 말부터 이어지는 신화
몇 명되지 않는 한국 대중음악 연구자들에 의하면 1950년대부터 주한 미군을 상대로 한 클럽 무대(미 8군이 무대로 통칭되는)가 생겨났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 8군 무대 쑈를 담당하는 전문 연예 회사들이 생기고 이 무대에 서고자 전국에서 음악 좀 한다는 친구들이 몰려들었단다. 이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미군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컨트리에서 화려한 무희들과 어우러지는 신나는 재즈까지 다양한 장르였다고 한다. 특히 1960년대가 되면서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록큰롤이 중요한 레파토리의 하나가 되었다.

정식 악보보다 귀로 듣고 하나 하나 따서 연주하던 이들의 음악성은 본토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정교했단다. 라이브 클럽의 현장성을 변수로 고려하더라도 한국인들이 연주하는 팝 음악을 미군들이 큰 위화감 없이 즐길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미 8군 무대의 한국인들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좋은 악기를 구할 수 있던 것도 아니고 보면 …..

여튼, 미 8군 무대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쌓인 자신감은 그 무대에 서던 뮤지션 일부로 하여금 (한국의) 일반 대중 앞으로 나설 용기를 갖게 만들었다. 트로트가 엘리트의 음악에서 일반 대중 모두에게 사랑받는 장르로,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의 전부로 자리매김하던 1960년대 초, 미 8군 무대에서 스텐다드 팝과 재즈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반 대중음악 무대로) 정식 데뷔하기 시작했다. 손석우, 이봉조, 길옥윤, 등의 곡과 반주(그들의 악단) 위에 한명숙, 이금희, 패티 김, 현미 등이 트로트와는 전혀 다른 곡 스타일, 창법, 목소리 톤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이 되면 미 8군 무대에서 비틀즈의 록큰롤을 흉내내던 친구들도 하나, 둘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바로 키보이스, 에드 포, 샤우터스, 등이다. 이들은 이미 대중음악계에 자리 잡고 있던 미 8군 선배들과는 또 다른 모습과 음악을 들고 나타났다. 록큰롤에서 시작 점차 쏘울, 싸이키델릭, 하드 록으로 발전한 이 젊은 음악인들은 스텐다드 팝을 추구하던 선배들과 달리 전자 악기로 무장했다는 것부터 달랐다. 또한 굉음(당시로선)에 가까운 파격적인 사운드를 내새운 채 클럽(살롱, 고고장, 등) 무대를 통해 젊은 팬들과 직접 만났다는 점도 새로웠다. 당시 일반 청중이 음악을 만날 수 있던 두 경로, 즉 방송을 통해서 혹은 코메디(촌근, 원맨쑈), 무용 등과 음악이 섞여있는 악단 무대 이외의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음악을 듣는 청자가 아닌 음악을 즐기러 (단단히 맘 먹고) 클럽을 찾은 대중과 직접 교감하는 뮤지션이 한국 시장에 처음 생겨난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뒷골목 살롱이나 떼로 몰려다니는 양아치로 취급되었지만 …..

미국 음악에 대한 무비판적인 반영일 뿐이라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이때 처음 시작된 록 음악의 파격성은 두고 두고 한국 대중음악 전반(놀랍게도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가 바로 트로트이다)에 영향을 끼친다.

여튼 고고장에서 놀던 양아치와 시대의 유행으로만 치부되던 1960년대 한국 록의 시조들을 재조명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서구 대중음악의 역사 속에서 록 음악의 의미와 가치를 받아들인 일군의 대중음악 연구자/평론가들은 196,7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 공간 속에서 신중현을 찾아냈다. 그는 1964년 4인조 록큰롤(이라 부를 수 있는) 밴드 애드 포의 순수 창작음반을 발매한 것을 시작으로 (잠시 미 8군 무대로 돌아갔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싸이키델릭 성향과 대중성을 잘 머무린 한국적 록-쏘울 음악을 쏟아내었다. 특히 그가 발굴한 실력있는 여가수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사에 빛나는 명곡들이 발표되었다. 마침내 1960년대의 한국 록(꼭 록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은 신화가 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도 키보이스 출신의 He6(후엔 He5), 키브라더스, 신중현 사단 가수들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미국 음악을 그대로 재현하는 시대를 지나 대중의 구미를 기막히게 파악하는 능력을 갖춘 록(쏘울-싸이키델릭)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런지도 모르겠다)으로 주류 장르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송창식이라는 (영원한) 미완의 작가
미 8군 무대 출신의 음악인들의 세련되고 빤딱빤딱한 연주가 서서히 주류로 진출하던 시점에, 이러한 전문성에 반기를 든 음악들이 하나 둘 대학가를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밥 딜런, 존 바에즈, (저 멀리) 우디 거스리까지 짚어가며 통기타의 자유로움과 저항성을 칭송하기 시작한다. 김민기, (본인도 이 정도로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양희은, 한대수로 대표되는 포크 음악인들은 저항 가요로 이어지는 한국 대중 음악의 한 맥이다.

서유석, 양병집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본다면 한국 포크는 해학과 풍자의 정신이 살아있다. 그러나 한국에 이식된 포크는 저항성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었다. 밥 딜런과 함께 한국에서 포크의 중요한 축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게 바로 사이먼 앤 가펑클이었고, 가사보다 그들의 아름다운 화음이 중요했다. 1960년대 록 진영이 도어스를 카피해도 기성 세대에 대한 전복을 꿈꾸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크도 저항성 보다 통기타 소리와 화음으로 인식되었다.

‘튄(트윈) 폴리오’로 데뷔한 송창식은 한국 포크 후자의 경향으로 시작했으나 시대는 그에게(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자와 후자 모두에 걸치며 동시에 걸치지 않는 인물로 만들었다. 본인은 음악에 저항성을 입히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김민기(물론 윤형주, 김세환도)와 어울려 노래 짓고 부르는 청년의 하나였다. 아마 전자의 혐의가 씌워지는 것은 이 음반 『바보들의 행진』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후자로 인식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데뷔 모습보다는 1975년 대마초 파동 후 살아남은 유일한 가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찜찜함으로 얼룩진 대마초 파동을 거치면서 록에서 포크에 이르는 젊은 음악인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던 것과 대조적으로 송창식은 이후 더욱 커다란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물론 인기만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깊이 파내려가는데도 성공했지만.

송창식의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반 음악은 트로트, 포크, 록, 국악(적)의 요소들을 이리 섞고 저리 뭉친 후 송창식 표 발성으로 감싸 안은 독특하지만 매력 넘치는 세계이다. “왜 불러”에서 “토함산”을 거쳐 “마의 태자”에 이르기까지 송창식은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완성했고, “참새의 하루”, “가나다라”, “사랑이야”, “우리는” 등과 같은 소탈함과 대중성을 모두 아울렀다. 하지만 그는 1986년 이후 더 이상의 음반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물론 엄청 많은 편집 음반이 나오긴 했다).

송창식 음악의 흠은 솔로로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음반까지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겼다고 생각되는 필사의 무엇이 없었다는 데 있다. 예술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대중이 보지 못하는 색채와 질감으로 표현해야 한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작품을 통해 시대의 소리와 올바름에 대한 방향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송창식이 존경한다는)모짜르트도 베토벤도 그 음악 속에 시대의 모습과 정신이 담겨있지 않은가…..! 하지만 송창식의 음악에는 시대와 유리된 듯한 미학만이 담겨있다. 그래서 너무 훌륭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허무하다. 그래서 송창식은 (영원한) 미완의 대가일 수 밖에 없다. 사실 이 문제는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대가라 불리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다. 대곡, 명곡은 있지만 진정한 명반은 찾기 힘든 현실이라고나 할까 ……



영진공 헤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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