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싸이 One Hit Woder 방지 프로젝트

 

 

 

 

“One Hit Wonders”라는 말이 있다.

뜬금없이 대박 히트송을 발표하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린 이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의외로 이런 히트송들이 꽤나 많은데,

Sugar Sugar [Archies, 1969], My Sharona [Knack, 1979], Video Killed the Radio Star [Buggles, 1979], Funky Town [Lipps Inc., 1980], Ice Ice Baby [Vanilla Ice, 1990], Macarena [Los Del Rio, 1996], Barbie Girl [Aqua, 1997] 등이 있다.

 

허나 이들이 모두 다 그냥 사라져버린 건 아니다. 대히트 이후에 여러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었고 이어지는 히트곡들도 꽤나 있었다.

 

하지만 첫 히트가 워낙 대박이다보니까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높았고,

이어지는 작품이 첫 곡의 위력에 눌려 비슷하거나 아니면 아주 달라지다보니까,

어느덧 많은 이들의 관심에서 급격히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첫 히트곡 하나로 ‘새하얗게 불태우고’ 말았달까 ……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글로벌 팝 스타 싸이,

한창 잘 나가는 그를 보며 흐뭇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한다.

 

초를 치자는게 아니라 … 그간 엄청나게 화르르 불타올랐다가 어느 순간 어이없이 사그라드는 아까운 뮤지션들을 많이 봐와서이다.

 

싸이 본인이야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테고 … 매니지먼트 팀이 머리를 쥐어짜며 다음 작품 구상을 하고 있을테니 뭐 다 잘 될 거라고 본다.

 

그러다가 갑자기 잉여력이 상승해서 내 나름대로 다음 뮤직비디오를 제작한다면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고, 그래서 엉성한 아이디어 하나를 도출해내었으니 그냥 재미삼아 읽어봐 주시길~ ^^

 

 

 

○ 제목: Raise Your Voice, Now (소리 질러!)

     ■ 쟝르: Rock + Hip Hop

     ■ 주제: 싸이의 음악에 맞춰 세계인이 함께 뛰고 즐기는 모습을

                 스케치하고, 세계적으로 정치적 변화기를 맞는 이즈음에

                 각자의 목소리를 좀 더 높여보자는 취지.    

 

 

1. 1st Intro (0:00 ~ 0:35)  

 

 

 

 

낯선 세계의 대도시 LA, 뉴욕, 런던, 멕시코시티 등의 밤 거리를 외로이 싸돌아다니는 싸이의 모습이 비쳐지다가,

 

Intro가 잦아들면서 먼 곳에서 아련히,

“I wear my sunglasses at night …”이 들려온다.

 

 

그리고 암전, 

 

알람 시계가 울리면서 어느 도시의 호텔 방에서 홀로 잠을 깨는 싸이,

부시시 일어나 욕실로 가서 문득 거울을 보고는,

자신의 얼굴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선글래스를 찾아 낀다.

 

그리고 자막,

“This is why he wears sunglasses all the time.”

 

 

 

2. 2nd Intro (0:36 ~ 1:17)

 

Bam!!!!!

호쾌한 기타리프와 함께 세계의 무대 위를 방방뛰는 싸이의 모습이 보여지고,

방방곡곡에서 말춤을 추는 세계인들의 모습이 함께 겹쳐진다.

 

 

 

3. Main Song (1:18 ~ 5:00) 

 

 

 

거친 힙합 비트와 함께,

 

경제위기로 지친 세계인들,

정치적 변화기에 들어서는 세계인들,

항상 힘들게 살아가는 세계의 사회적 약자들의,

 

손을 잡고 주먹을 높이 치켜올리며,

겅중겅중 춤을 추고 소리 높여 노래부르는 모습을 담는다. 

 

 

 

4. Outro (5:01 ~ 5:20)

 

 

 

다시 밤이 되어 아까와는 다른 어느 호텔 방으로 돌아온 싸이,

선글래스를 낀채로 침대로 가 그대로 누워 잠든다.

불끈 쥔 두 주먹을 꼭 쥔채로 ……

 

배경에는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Tender Surrender”가 나지막이 흐른다.

 

 

5. Detail

 

옷은 “Vote for Pedro” 티셔츠 정도 입어주는 거다.

 

 

 

뭔지 모른다고?

아래의 동영상을 보라.

 

 

 

그리고 인터뷰할때 엄청 있어보이게 이 정도 말해주는 거다.

“I love this movie, this is probably why I dance like crazy since …”

 

미국 대선 특수도 겨냥해보고,

히스패닉 시장도 고려한 매우 전략적 선택이 될 수 … (뭔 소리냐?)

 

 

암튼, 이쯤에서 매우 서둘러 싸이 One Hit Wonder 방지 프로젝트 제안서 끝!

 

 

 

영진공 이규훈

 

 

 

 

 

 

 

 

 

 

 

 

 

 

 

 

 

 

 

 

 

 

 

 

 

 

 

 

싸이에게 지금 부족한 것은?

 

 


 


 


 



 


 


싸이 … 지금 그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세계 최대의 음악시장에서 그는 현재 가장 뜨거운 “싸나이”다.


 


그가 최근 며칠 사이에 출연한 미국 TV 프로그램들을 살펴보자.


Today Show, Good Morning America, VMA, Ellen Degeneres Show, 그리고 SNL 까지.


이건 뭐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단기간에 전방위에 걸쳐있다. (저스틴 비버 측 매니지먼트 힘이 세긴 센 모양이다.)


 


투데이쇼와 굿모닝 아메리카는 50~6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아침방송이고, 엘렌 드제네러스쇼는 오프라가 종영한 이후 그 자리를 넘보는 대표적인 여성 대상 토크쇼이며, MTV의 비디오 뮤직 시상식인 VMA는 미국의 틴에이저를 중심으로 절대적 지지를 받는 시상식이고, SNL은 지난 50년간 미국의 토요일밤을 웃음으로 휘어잡고있는 대표적인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그의 노래 “강남스타일”은 아이튠즈 차트 1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겨우 1주일 동안에 미국내 모든 계층과 연령대를 아우르는 프로그램에는 다 출연한 거고, 프로그램마다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으니 참으로 놀랍다 아니할 수 없는 어쩌면 전체 대중음악역사의 한 페이지에 오르게 될 사건인 셈이다.


 


여기서 잠깐,


그럼 최초로 아시아권 출신으로 미국내 주요 음악차트에서 최초로 1위를 차지한 건 누구의 어떤 노래일까.


 


그 노래는 이거다.


 


 



Sukiyaki, Kyu Sakamoto (1963)

 


 


큐 사카모또(坂本 九)의 1961년 작인데, 이 노래가 1963년 미국의 빌보드차트에서 덜컥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재미있는 건 이 노래의 제목이다. 원제는 “우에 오 무이떼 아루꼬 (上を向いて歩こう)” 즉, “하늘을 보고 걷네”라는 뜻인데, 이게 매우 난감하게시리 일본 음식의 일종인 “스키야키”라는 제목이 붙어서 히트를 한 것이다.


 


왜 그리 되었냐하면, 사실 그 당시에 이 노래를 접한 미국의 라디오 DJ들이 발음도 어렵고 뜻도 모르겠던 노래 제목 대신에 발음하기 편하려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덜컥 음식이름을 갖다붙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런데 이 노래가 이렇게 대박으로 히트한 이유가 무얼까?


정답은 …… 아무도 모른다.


그냥 신기해서, 은근히 멜로디가 친근하게 느껴져서, 뭐 이런 노래가 있나 싶어서 … 등등의 이유를 원하는대로 나열하시면 되겠다.



 


 


도대체 왜 히트를 한 건지 모를 노래를 하나 더 들어보자.   


 


 



Louie Louie, The Kingsmen (1963)

 


 


이 역시 1963년에 나왔고, 그 해 겨울에 차트 2위에 올라서 다음 해 초까지 탑 텐에 머물렀던 노래이다. 문제는 이 노래의 가사인데,


 


솔직히 TOEIC 900점 이상으로 영어에 자신 있다고 뻐기는 분들은 이 노래 가사를 해석, 아니 따라 적어보시라. 분명히 영어니까 해 볼 테면 해 보라.


 


사실 이 노래가 히트하자마자, 미국의 FBI가 수사에 착수했었다. 레알이다.


분명 이 노래의 가사 속에 적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숨겨져있을 거란 이유와,


이런 요상한 발음으로 미국민들을 현혹시키려는 의도가 있지 않을까라는 이유에서이다. 물론 그 수사는 아무 성과없이 끝났지만.


 


자, 이 노래가 대박친 이유는 무얼까.


역시 정답은 …… “아무도 모른다” 이다.


 


 



 


 


 


그래서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강남스타일”이 히트한 이유를 굳이 찾으려하지 말자는 거다.


SNL에서 정확이 짚었듯이, 그냥 신나고 재밌고 맘껏 웃을 수 있어서 열광하는 것일 뿐이다.


 


K-Pop의 우수성이니, 한민족의 저력이니 … 뭐 그런거 없는 거다.


수수한(?) 외모에, 잘 차려입고 나와서, 흥겨운 리듬으로, 마구 웃겨주니까 … 그게 한국말이든, 한국 랩퍼든 상관이 없어진 거다.


 


물론, 그간 대형 기획사들이 뿌려놓은 K-Pop 투자액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한다면 충분히 긍정할 수 있다.(그렇게 따지면 Youtube의 탄생까지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


하지만 그게 싸이에게서 터질 줄은 그 아무도 몰랐던 거고 많은 세월이 흘러도 이런 현상을 의도적으로 다시 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에, 이쯤에서 나쁜 예를 하나 들어보자.


 


 



William Hung

 


 


이 친구의 이름은 윌리암 헝(William Hung), 미국의 대표적인 오디션 프로인 아메리칸 아이돌에 나와서 지지리도 노래를 못 부르는 최악의 참가자로 “뜬” 사람이다. 말장난삼아 떴다고 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앨범을 내고 차트에도 잠깐 올랐을 정도로 떴었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음치들 중에서 왜 이 친구만 떴을까. 그 이유는 뜬금없게도 번듯한 학벌(당시 UC버클리 재학 중)을 가진 친구가 주위의 놀림에도 아랑곳않고, 착하고 겸손하게 “웃겨”주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놀림감 마케팅’이 성공한 대표적 케이스 중 하나로 보면 된다.


 


대중의 선택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며, 그 선택의 이유를 몇 마디 말로 추려서 정리하는 것이 매우 어리석어 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 싸이의 경우, 확실하게 한 가지 분명히 꼽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


그건 그의 춤스텝이다.


소위 “말 춤”, 영어로 “Horse Riding Dance”로 불리는 그 스텝.


 


사실 미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보자면, 댄스스텝으로 인해 노래 한 곡이 한 시기를 휩쓴 예가 의외로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를 보자면,


 


 




마카레나 (1995)

 



람바다 (1989)

 


 


여기서 문제!


위 두 곡과 “강남스타일”의 공통점은?


 


놀랍게도 그 공통점은 …… 미국 대선이다.


 


“람바다”가 나올 때는 아버지 부시의 임기가 시작되는 해였고, “마카레나”는 클린턴이 재선을 향해 뛰던 때였고, 올해는 역시나 오바마가 재선을 위해 열심히 뛰는 시점에 “강남스타일”이 뜬거다.


 


이 어찌 아니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인가 …… 는 페이크고,


그냥 뭐 그렇다는 얘기다.


 


 


이제 얘기를 정리해보자.


 


싸이의 이번 대박은,


여러분이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그런 그럴싸한 이유들이 다 적절히 작용을 하여 발현된 것이다. 특별히 ‘이거다!’라고 꼽을 수 있는 신묘한 비법은 없다.


 


그러니 앞으로 이러한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무엇을 더 하고 무엇을 덜 하면 될 것이다 … 라는 분석도 그리 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춤 스텝으로 유명해진 경우는 이후에 그걸 이어가는 두드러진 성공사례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는데, 싸이의 경우 히트 시점에 맞춰 미국의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팀 중의 하나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으니 그 또한 매우 적절한 행보로 보인다.


 


그래서 제목에 있는 “싸이에게 지금 부족한 것은”에 대한 대답은 …… 그런 것 없다! 이다.


 


 



 


 


말장난 처럼 보이겠지만, 상황이 그렇다.


싸이는 지금 미국 대중문화에서 이렇다할 포지션이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가 댄서로 이름이 나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랩퍼로 뜬 것도 아니고, 더우기 코미디언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 그냥 무척 애매하다는 거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의 의미는 아직 채운 것이 없다는 말이고, 이제 막 채워나가는 과정이니, 지금 시점에서 머리 아프게 이런 거 저런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닥치는대로 다 하고 하자는 대로 다 놀아주면 되는 거다.


 


한류의 미래, 애국, 국가위상, K-Pop 선도자 … 뭐 이런 거로 스스로를 묶지도 말고, 그를 묶으려 하지도 말고 그냥 지 놀고 싶은대로 놀게 놔두자는 거다.


 


그러다보면 대중이 다 알아서 포지셔닝 해주고, 국위선양하게 해주고, 한국문화 전파하도록 해줄 것이니 말이다.


 


 


그럼 이쯤에서 정리하는 의미에서 광고영상 하나 보도록 하.


아래의 동영상은 미국 LA에 있는 한식전문점 소향식당 광고되시겠다.        


 


 



Like A G6, Far East Movement

 


 


개인적으로, Far East Movement나 LMFAO와 싸이의 공동작업을 기대해본다.


 


그리고 병역문제로 국민비호감이었던 싸이, 저간의 사정이 어떻든 현역으로 군대 다시 갔다 온 걸로 나는 퉁쳤으니 ……


 


먼 이국 땅에서 지금부터 갈 데까지 가봐라, 싸이!


 


 


 


 


영진공 이규훈


 


 


 


 


 


 


 


 


  


    


   


 


 


   


 


 


 


 


 


 


 


 


 


 


 


 


 


 


 


 


 


   

“바보들의 행진” OST 다시 듣기 (2)



 바보들의 행진
영화음악 『바보들의 행진』에 실린 송창식의 곡은 이후 그의 행보를 모두 점쳐볼 수 있게한다. 특히 그가 작곡한 두 곡, “왜 불러”와 “고래사냥”은 이미 트로트와 포크의 만남에 싸이키델릭-록의 반주까지 고려한 모습이다. 싸이키델릭으로 만든 고래 소리가 들어있어 콜렉터들의 표적이 되었다는 영화음악 버전 “고래사냥”이 실려있는데, 막상 들어보니 그 고래 소리가 나에겐 별반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 행진곡 풍의 곡에서 하몬드 올갠과 슬라이드 기타가 역동적인 자리(중심은 물론 아니지만)로 위치지웠다는 것은 신선하고 중요한 지점으로 들린다.

“고래사냥”은 기본적으로 마칭 드럼(꽹과리 소리를 흉내냈다고 해도 좋다)-행진곡 풍의 작곡에 촛점이 있다. 그러나 그는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슬라이드 기타로 흥을 돋군다. 흥 돋구기는 트로트를 대놓고 차용한 “왜 불러”의 가창법에서 더 절정이다. 후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의 하나가 되는 트로트이면서도 송창식의 것으로 귀결되는 이 ‘흥'(을 돋구는 창법)과 기발함이 이미 이때부터 충분히 실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되는 점이 있다. 송창식의 이러한 시도들이 1970년대 초반에 들어 앞서 나간다는 가수들이라면 한번씩 머리 속에 그려보거나 (거칠게)시도했다는 데 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한 바 있는 신화 – 신중현은 논외로 치더라도 키브라더스(윤항기)는 산타나의 음악을 리메이크하면서, 한대수(두 번째 음반)는 자작곡에 농악과 타령을 집어넣었다. 포크와 록의 만남은 1974,5년 봇물터지듯 여기 저기서 시도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르면 젊은 음악인들 사이에 장르를 넘어선 다양한 실험이 여기저기서 마구 시도될 만큼 무르익었었다는 얘기다.

또한 『바보들의 행진』음반에는 임희숙, He5, 김세환, 이장희, 투 코리언스의 노래가 더해진다. 조합만 봐도1970년대 초반 새로운 음악으로 등장한 쏘울, 록, 포크가 하나로 모인 느낌이지 않은가? 특히 주목할 이는 포크 계열이라고 하나, 특유의 반항적 이미지와 록을 대담하게 수용했던 이장희(그리고 그의 곡 “한잔의 추억(음반에는 ‘한장’으로 오기되어 있다)”을 부른 더욱 위악스런 목소리로 부른 김도향과 손창철 – 투 코리언스)의 가세이다.

포크 음악인에서 막 새로운 음악으로 전진하는 송창식과 그 보다 앞서 록을 받아들였던 이장희가 한 음반에서 만나는 장면은 1970년대 중반 청년 문화/대중음악이 하나의 모습을 완성해가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음반 전체를 넘실대는 음악은 (이미 단속과 규제의 대상이 된 저항적 포크는 많이 탈색되었지만) 록, 소울, 포크가 휘감겨 들어와 판을 차리고 아예 그 이전 대중음악 판 자체를 뒤집어 버릴 듯 기세를 올리고 있다. 미국 음악의 여러 요소가 파편적이지만 직접적으로 젊은 세대를 자극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기존의 주류였던 트로트마저 품어서 새롭게 주물럭 거릴 수 있을 만큼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고 또 다른 색깔마저 찾은 것이다.

3. 그래서 더 답답한
『별들의 고향』에 이어, 『바보들의 행진』은 단순히 잘 나가던 음악인들의 편집 음반이 아니다. 젊은이들의 새로운 시도들이 하나의 움직임으로 모이고 마무리 단계로 나가고 있음을 슬금슬금 드러낸 것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정권은 더욱 미친듯이 이들을 찍어누르고 마침내 질식사 시키긴 하지만.

사실 이 음반은 폭발하지 않는다. 영화 만큼이나 넘치는 음악을 자신 안에서 고사시킨다. 이 기운은 그렇게 그 해(1975년)를 다 넘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청년문화로 칭송되던 음악은 대마 연기와 함께 그렇게 금지곡으로, 활동 금지로, 미국행(추방에 가까운 이민)으로 사라진다. 새로운 기운에 찔끔해서 부랴부랴 눌러 죽이기 바빴던 박정희와 그 밑의 똘마니 새끼들은 자기 색을 찾기 시작한 젊은 음악밭을 락스로 싹 행구고 그래도 남은 애들은 뿌리까지 파 내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박정희가 좋아했던 그 5음계(요나누끼 음계)로 작곡된 “새마을 운동가”와 트로트로 채워놨다. 젊은 음악이 피어오리기 전, 딱 10년 전 음악으로 타임머신을 돌려버린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TV 속에는 트로트 가수만 나왔다. 그 때 난 그게 한국 대중음악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날 즈음엔 그와 전혀 다른 그리고 완성되어가던 다른 음악이 있었음을 전혀 알수 없었다. 그저 외삼촌이 들려주는 음악들이 신기하고 좋아 보였을 뿐.

『바보들의 행진』 O.S.T.나 1970년대 초반의 한국 가요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유입인)힙합을 제외한 한국 대중음악은 이 때 이미 다 시도되었다는 것이다. 록 밴드 중에는 라틴 록이나 레게를 지향하는 밴드들이 있었고, 포크 진영에도 고급스런 발라드를 지향하던 이들이 있었다. 아마 이들이 모두 박정희 덕분에 압사 당했기에 1980년대 조용필 신화는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조용필 자신도 대마초의 피해자였지만 꾸준히 살아남았던 반면, 대부분은 정권의 짓밟힘에 트로트로 근근히 유지하거나 아예 음악을 꺽었다. 말도 안되는 상상이지만 이들이 모두 계속 음악을 했다면 ……? 조용필급 뮤지션, 혹은 그 이상으로 대중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음악인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을까? 재즈나 록이 한국 대중음악의 영원한 음지식물로 남지 않았을런지도.

상상은 상상일 뿐, 현실은 여전히 지랄맞고 짜증난다. 차라리 이런 음반들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답답함이 생기지나 않았을텐데.

4. 지금은 뭐 다르나
임희숙이 부른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쏘울과 스탠다드 팝이 섞인 듯한 저 멋진 노래를 거미에게 부르라고 하면 밑도 끝도 없는 한국식 알앤비 아닌가하는. 물론 30년 전 연주이니 악기 소리는 꽤 낡았지만, 그것도 사운드만 지금 가요 세션 악기 소리로 바꿔주면(연주 패턴은 그대로 놔둬도) 그냥 알앤비(R`n B 얘기하는게 아니다 그냥 알앤비!!!)다.

그 뿐인가. 김세환이나 He5의 곡도 사운드와 목소리만 바꾸면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빛이 될 듯 떠들던 인디 씬의 록/포크 성향의 누구 누구가 떠오른다.

오히려 송창식이나 이장희의 통속적이고 실험적인 곡들은 지금도 신기할 만큼 신선하지 않은가? “한잔의 추억”을 봄여름가을겨울이 다시 불렀을 때 원곡에서 무엇이 그리 바뀌었던가? 김종진도 어디선가 얘기한 것처럼, 그저 그 기억으로 그렇게 부르자 음악이 되더라.

그렇다. 이게 한국 가요의 현실이다. 뭐 외국은 다르냐고? 다를 거 하나도 없다. 블루스는 비비킹에서 에릭 클랩튼으로 존 메이어로 자니 랭 손을 통해 지금도 꾸준히 그렇게 연주된다. 메탈리카가 롤링스톤즈를 서포트하고 AC/DC가 여전히 무대에서 그 음악을 짱짱거린다. 걔들도 늘 그렇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걔들은 30년 전 음악도 여전히 듣고 있고 가치를 찾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고 나면 새로운 음악이, 어제 음악을 유치하다고 비웃으며 나타난다. 근데 그 새로운 음악도 어제 음악도 실은 똑같은 놈들이다. 어디서 미국, 영국, 일본 노래의 화려한 효과들만 베껴다가 똑같은 곡에 덮어 씌운다.

Soul 뮤지션이 R`n B 뮤지션(그/그녀는 또한 Rock`n Roll 뮤지션이며 Blues 뮤지션이다)이고 그가 Hip-Hop 뮤지션과 연결되어 있음을 걔들은 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하나 하나가 다 잘나서 지 혼자 깨달은 부처들이다. New Wave와 Synth Pop이 클럽에서 House로 또 그 MC와 DJ 손을 통해 Acid로 Electonica로 이어지는 것을 걔들은 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애시드로 핌프록으로 재림하신 예수들이다.

30년이 훨씬 넘어가는 동안 우리는 하나도 다르지 않은 음악을 마치 새로운 무엇이 계속 나오는 냥 그렇게 살았다. 정권이 찍어 누르지 않으면 자본이 이어가면서 …… 오히려 우리의 음악은 겉 모양새만 화려해졌지 알맹이는 과거만도 못해지는 거 아니었을까? 돈도 안되는데 힘들게 음악하는 사라들에게 왜 더 음악 잘하지 못하냐고 욕하지 말라고들 한다. 그러나 난 묻고 싶다. 비틀즈에 꾸준히 감동하는 당신들, 귀 비우고 찬찬히 당신과 우리가 해온 것들을 다시 살펴 보라고. 도대체 뭐가 얼마 만큼 진보했는지. 아니, 최소한 솔직하긴 했는지.


영진공 헤비죠



 

“바보들의 행진” OST 다시 듣기 (1)




2006년 쯤에 CD로 복각 된 1975년 작
『바보들의 행진』과 1974년 작인 『별들의 고향』O.S.T.  송창식, 이장희 1970년대 초반 포크 계열이면서도 이단아적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각각 영화 주제가를 불렀고,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던 음반들이다.

1. 가물가물한 기억
사실 내가 태어나던 때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겠다. TV를 통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전편을 본 것인지 아니면 편집된 장면만을 본 것인지 가물가물하다. 대놓고는 못해도 1970년대의 억눌린 상황을 잘 묘사했던 것 같다. 장발 단속, 군 입대, 그리고 마침내 동해 바다로 자전거 타고 뛰어드는(이렇게 짓눌려서는 죽는게 낫다!!!)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음악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75학번으로 우리집에서 대학을 다니시던 외삼촌 덕분에 ‘엄마 – 아빠’하기 전부터 오디오를 통해 최신곡(비틀즈, 사이먼 앤 가펑클에서 김도향, 산울림까지)을 들었기 때문인 듯 싶다. 외삼촌이 인정하는 몇 안되는 한국 가수 중 하나가 바로 송창식이었고, 당근 이 “왜 불러”도 그렇게 들었다. 여튼, 『바보들의 행진』을 다시 들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 놀라운 음악들이라는 것이다.

2. 왜 놀라나
귀에 익은 친숙한 멜로디들이기에 때문만은 아니다. 멜로디만 기억날 뿐 악기 소리에 관심없던 어린애 귀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에 놀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중현, 김추자, He6, 키브라더스 등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반 음반의 복각판에서 느끼는 것의 연장이기도 하고, 그와는 또 다른 경험이기도 하다.

◎  1960년대 말부터 이어지는 신화
몇 명되지 않는 한국 대중음악 연구자들에 의하면 1950년대부터 주한 미군을 상대로 한 클럽 무대(미 8군이 무대로 통칭되는)가 생겨났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 8군 무대 쑈를 담당하는 전문 연예 회사들이 생기고 이 무대에 서고자 전국에서 음악 좀 한다는 친구들이 몰려들었단다. 이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미군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컨트리에서 화려한 무희들과 어우러지는 신나는 재즈까지 다양한 장르였다고 한다. 특히 1960년대가 되면서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록큰롤이 중요한 레파토리의 하나가 되었다.

정식 악보보다 귀로 듣고 하나 하나 따서 연주하던 이들의 음악성은 본토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정교했단다. 라이브 클럽의 현장성을 변수로 고려하더라도 한국인들이 연주하는 팝 음악을 미군들이 큰 위화감 없이 즐길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미 8군 무대의 한국인들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좋은 악기를 구할 수 있던 것도 아니고 보면 …..

여튼, 미 8군 무대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쌓인 자신감은 그 무대에 서던 뮤지션 일부로 하여금 (한국의) 일반 대중 앞으로 나설 용기를 갖게 만들었다. 트로트가 엘리트의 음악에서 일반 대중 모두에게 사랑받는 장르로,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의 전부로 자리매김하던 1960년대 초, 미 8군 무대에서 스텐다드 팝과 재즈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반 대중음악 무대로) 정식 데뷔하기 시작했다. 손석우, 이봉조, 길옥윤, 등의 곡과 반주(그들의 악단) 위에 한명숙, 이금희, 패티 김, 현미 등이 트로트와는 전혀 다른 곡 스타일, 창법, 목소리 톤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이 되면 미 8군 무대에서 비틀즈의 록큰롤을 흉내내던 친구들도 하나, 둘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바로 키보이스, 에드 포, 샤우터스, 등이다. 이들은 이미 대중음악계에 자리 잡고 있던 미 8군 선배들과는 또 다른 모습과 음악을 들고 나타났다. 록큰롤에서 시작 점차 쏘울, 싸이키델릭, 하드 록으로 발전한 이 젊은 음악인들은 스텐다드 팝을 추구하던 선배들과 달리 전자 악기로 무장했다는 것부터 달랐다. 또한 굉음(당시로선)에 가까운 파격적인 사운드를 내새운 채 클럽(살롱, 고고장, 등) 무대를 통해 젊은 팬들과 직접 만났다는 점도 새로웠다. 당시 일반 청중이 음악을 만날 수 있던 두 경로, 즉 방송을 통해서 혹은 코메디(촌근, 원맨쑈), 무용 등과 음악이 섞여있는 악단 무대 이외의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음악을 듣는 청자가 아닌 음악을 즐기러 (단단히 맘 먹고) 클럽을 찾은 대중과 직접 교감하는 뮤지션이 한국 시장에 처음 생겨난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뒷골목 살롱이나 떼로 몰려다니는 양아치로 취급되었지만 …..

미국 음악에 대한 무비판적인 반영일 뿐이라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이때 처음 시작된 록 음악의 파격성은 두고 두고 한국 대중음악 전반(놀랍게도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가 바로 트로트이다)에 영향을 끼친다.

여튼 고고장에서 놀던 양아치와 시대의 유행으로만 치부되던 1960년대 한국 록의 시조들을 재조명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서구 대중음악의 역사 속에서 록 음악의 의미와 가치를 받아들인 일군의 대중음악 연구자/평론가들은 196,7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 공간 속에서 신중현을 찾아냈다. 그는 1964년 4인조 록큰롤(이라 부를 수 있는) 밴드 애드 포의 순수 창작음반을 발매한 것을 시작으로 (잠시 미 8군 무대로 돌아갔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싸이키델릭 성향과 대중성을 잘 머무린 한국적 록-쏘울 음악을 쏟아내었다. 특히 그가 발굴한 실력있는 여가수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사에 빛나는 명곡들이 발표되었다. 마침내 1960년대의 한국 록(꼭 록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은 신화가 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도 키보이스 출신의 He6(후엔 He5), 키브라더스, 신중현 사단 가수들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미국 음악을 그대로 재현하는 시대를 지나 대중의 구미를 기막히게 파악하는 능력을 갖춘 록(쏘울-싸이키델릭)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런지도 모르겠다)으로 주류 장르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송창식이라는 (영원한) 미완의 작가
미 8군 무대 출신의 음악인들의 세련되고 빤딱빤딱한 연주가 서서히 주류로 진출하던 시점에, 이러한 전문성에 반기를 든 음악들이 하나 둘 대학가를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밥 딜런, 존 바에즈, (저 멀리) 우디 거스리까지 짚어가며 통기타의 자유로움과 저항성을 칭송하기 시작한다. 김민기, (본인도 이 정도로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양희은, 한대수로 대표되는 포크 음악인들은 저항 가요로 이어지는 한국 대중 음악의 한 맥이다.

서유석, 양병집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본다면 한국 포크는 해학과 풍자의 정신이 살아있다. 그러나 한국에 이식된 포크는 저항성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었다. 밥 딜런과 함께 한국에서 포크의 중요한 축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게 바로 사이먼 앤 가펑클이었고, 가사보다 그들의 아름다운 화음이 중요했다. 1960년대 록 진영이 도어스를 카피해도 기성 세대에 대한 전복을 꿈꾸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크도 저항성 보다 통기타 소리와 화음으로 인식되었다.

‘튄(트윈) 폴리오’로 데뷔한 송창식은 한국 포크 후자의 경향으로 시작했으나 시대는 그에게(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자와 후자 모두에 걸치며 동시에 걸치지 않는 인물로 만들었다. 본인은 음악에 저항성을 입히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김민기(물론 윤형주, 김세환도)와 어울려 노래 짓고 부르는 청년의 하나였다. 아마 전자의 혐의가 씌워지는 것은 이 음반 『바보들의 행진』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후자로 인식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데뷔 모습보다는 1975년 대마초 파동 후 살아남은 유일한 가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찜찜함으로 얼룩진 대마초 파동을 거치면서 록에서 포크에 이르는 젊은 음악인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던 것과 대조적으로 송창식은 이후 더욱 커다란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물론 인기만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깊이 파내려가는데도 성공했지만.

송창식의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반 음악은 트로트, 포크, 록, 국악(적)의 요소들을 이리 섞고 저리 뭉친 후 송창식 표 발성으로 감싸 안은 독특하지만 매력 넘치는 세계이다. “왜 불러”에서 “토함산”을 거쳐 “마의 태자”에 이르기까지 송창식은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완성했고, “참새의 하루”, “가나다라”, “사랑이야”, “우리는” 등과 같은 소탈함과 대중성을 모두 아울렀다. 하지만 그는 1986년 이후 더 이상의 음반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물론 엄청 많은 편집 음반이 나오긴 했다).

송창식 음악의 흠은 솔로로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음반까지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겼다고 생각되는 필사의 무엇이 없었다는 데 있다. 예술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대중이 보지 못하는 색채와 질감으로 표현해야 한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작품을 통해 시대의 소리와 올바름에 대한 방향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송창식이 존경한다는)모짜르트도 베토벤도 그 음악 속에 시대의 모습과 정신이 담겨있지 않은가…..! 하지만 송창식의 음악에는 시대와 유리된 듯한 미학만이 담겨있다. 그래서 너무 훌륭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허무하다. 그래서 송창식은 (영원한) 미완의 대가일 수 밖에 없다. 사실 이 문제는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대가라 불리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다. 대곡, 명곡은 있지만 진정한 명반은 찾기 힘든 현실이라고나 할까 ……



영진공 헤비죠

 

표절이든 애매하든 아무튼 하지마라!

표절(剽竊)
남의 창작물(創作物)(문학(文學)ㆍ음악(音樂)ㆍ미술(美術)ㆍ논문(論文) 등)을 그 내용(內容)의 일부(一部)를 취(取)하여 자기(自己) 창작물(創作物)에 제 것으로 삼아 이용(利用)하는 것  [다음 한자사전에서 인용]

표절의 정의는 확실하다. 그래서 이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대부분의 경우에 범죄가 되는 것이다. 물론 모방이나 오마쥬 또는 패로디 등 여러 형태의 유사행위가 있지만 표절과는 달리 이런 행위는 직간접적으로 원작자를 인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권리를 함께 하기도 한다.

어찌된 일인지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이 놈의 표절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소위 지도층입네 대표자입네 학자입네 하는 이들이 앞다퉈 다른 이의 글과 말과 아이디어를 베끼거나 살짝 변형하여 원래 제 것이라 하고 있고, 설령 들통이 나도 그렇지 않다는 궤변을 지나 뭐 어쩌라는 말이냐며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우리의 대중음악계에서도 이런 사정은 다를 바가 없어서, 표절에 관한 논란은 쉬지 않고 터져나오고 그러다가는 이내 사그라든다. 물론 유독 거기만 그러는 게 아니라 사회 전반이 그 모양이나 자꾸 얘기해서 뭐하겠냐만 그래도 한 번 씩 짚어는 봐야 할 터이다.

1. 아가씨

90년대 후반에 유럽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은 노래 ‘엘렝의 춤 (La danse d’Hélène by Méli-Mélo feat. Miss Hélène)’ … 일단 들어보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노래일텐데, 요즘도 노래방 등에서 흥겹게 불리고는 하는 ’97년도에 나온 ‘아가씨’의 원곡이다. 노래를 들어보나 악보를 보나 두 노래는 같은 노래다.

헌데 이것도 처음에는 국내 작곡자의 작사, 작곡으로 등록이 되어 출시되었다. 그리고 이내 표절 논란이 벌어졌고 우여곡절 끝에 작사는 장본인이 작곡은 외국곡, 즉 번안곡으로 수정을 하였다. 그랬음에도 웹을 뒤져보면 여전히 이 곡의 작곡자는 지금도 활발히 활동 중인 그 분의 이름으로 명기되어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경우는 표절을 넘어서서 아예 통째로 베꼈는데도 그냥 버젓이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사실 냉정히 말해 원곡이 희대의 명곡도 아니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곡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냥 처음부터 번안곡, 요즘 말로 리메이크라고 했으면 누구 하나 뭐라 안 하고 즐겨 들었을 터인데.

2. 조영남

Tom Jones의 대표곡 ‘Delilah’ [작사곡: Barry Mason, Les Reed] (딜라일라, 삼손과 데릴라의 그 데릴라) … 로 당시 그야말로 충격적인 데뷰를 한 가수 조영남.

그가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기 이전에 대표곡으로는 ‘제비’와 ‘고향의 푸른 잔디’ 그리고 좀 지나서 ‘내 고향 충청도’가 있다. 그는 이 곡들로 장장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버텼다. 헌데 ‘제비’는 멕시코 민요 ‘La Golondrina’가 원곡이고 ‘고향의 푸른 잔디’는 ‘Green Green Grass Of Home’, 그리고 ‘내 고향 충청도’는 미국 민요 ‘Banks Of The Ohio’가 원곡이다.

그는 처음부터 모두 번안곡이라 밝혔고 이에 누구도 그걸 문제 삼지 않았으며 모두 즐겨 그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다. 만약 그가 이 중 한 곡이라도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면 안 그래도 곡절 많고 안티 많은 그의 가수생활은 진작에 끝났을 것이다.

3. 슬퍼지려 하기 전에 …

노래 한 곡 더 들어보자.


 
  
굳이 설명 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 노래는 쿨의 ‘슬퍼지려 하기 전에’의 원곡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곡이 좋으면 원작자에게 곡을 받아서 당당하게 불러라.
요새는 친분이 없다고 해도 원작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작권협회에 일정 비용만 지불하면 거의 모든 곡을 사용할 수 있다.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같은 곡으로도 얼마든지 색다르고 좋은 느낌을 전해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니까 대박나고 좋잖냐 …

4. Creep

’90년대 팝계를 대표하는 명곡 중의 명곡, Radiohead의 ‘Creep’.
이 노래도 ‘The Air That I
Breathe’와 코드 전개와 멜로디가 유사한 부분이 일부 있어서 처음에는 표절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실은 Radiohead가 앨범 노트에 이 곡의 작사곡자인 Albert Hammond와 Mike Hazlewood에 대해 언급을 해 놓았었다. 그리고 표절 논란이 나온 이후에는 위 두 사람이 공동 작곡자로 등록이 되었다.

처음부터 저작권에 등록을 안 한게 그냥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약간 비슷하다고 느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후에라도 그걸 바로 잡았기에 이 노래는 명곡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5. 찜찜하기만 해도 하지마라! 

표절 논란이 있을 때마다 대부분의 해당 작곡자는 변명하기에 바쁘다.

‘그런 노래가 있는 줄도 몰랐다’
‘우연의 일치다’
‘스타일이 비슷할 뿐 전혀 다른 노래다’
‘요즘 트렌드를 반영한 거다’
‘일부 소절이 닮았지만 표절은 아니다’ 등등 …

그러나 대중음악은 어떤 경우에는 스타일이나 느낌이 전부일 경우가 있다. 그럴때 몰랐다느니, 반음이 낮고 높다느니, 전개가 차이가 난다느니 등의 과학적(?) 해명은 별로 납득이 되질 않는다.

혹시라도 정말 우연의 일치로 매우 닮은 곡이 이전에 있었다는 게 밝혀진다면 그냥 쿨하게 인정해라. 몰랐지만 이제 알았으니 원작자의 양해를 구하겠다고. 영감을 얻은 거라면 그랬다고 표시하고 오마쥬라면 오마쥬라고 얘기하고 패로디라면 확실히 비틀고 그랬게 해라. 그래도 원작자는 언제나 밝히고 인정하고 말이다.

어떤 경우든 남의 곡에서 몇 구절을 슬쩍 가져오거나 아예 통째로 베낀 거는 사실 그냥 범죄다. 그러나 이 범죄는 고개 숙여 사과하고 권리를 포기하면 그닥 큰 처벌 없이 용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걸리기 전에 애초부터 하지를 말고 어리석은 마음에 일을 저질렀다가 걸렸으면 머리 조아려 사과해라.

대중은 느낌으로 음악을 듣는다. 그런 대중들을 향해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 작곡기법을 강의하려들고, 당신들이 음악을 잘 몰라서 그런다고 따져드는 이들은 이제 좀 그만 보았으면 하는게 작은 소망이다.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