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오브 워”, 앤드류 니콜 연출의 취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화


『트루먼 쇼』 각본, 『가타카』와 『시몬』 각본/연출이라는 이력에서 바로 보이듯 “앤드류 니콜”의 각본은 어마어마하게 참신한 아이디어를 탄탄한 이야기로 바꾸어내는 가운데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담는, 다소 우화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재능은 아무나 부여받지 못한 것, ‘내러티브의 부재’라는 악질 고질병을 전세계 영화계가 겪고있는 가운데 “앤드류 니콜”이 (아무리 자신의 고국에선 베테랑이었다 한들) 미국에서 짧디짧은 경력으로 감독 데뷔를 하고 필모그래피를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러한 재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트루먼 쇼』는 연출을 남에게 ‘뺏긴’ 케이스다.) 그리고 나는 “앤드류 니콜”의 영화에 대해 항상 ‘눈알 튀어오는 각본, 거기엔 살짝 미치지 못하는 솜씨의 연출’이라고 생각해 왔다.

『로드 오브 워』는 영화보다 시나리오를 먼저 봤는데,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내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기존 세 작품과 너무나 이질적인데, 상상의 영역은 빠졌고 대신 발로 뛴 취재가 자리를 메운다. “앤드류 니콜”도 한번쯤은, 가정된 특수 전제 하에서 펼쳐지는 우화같은 영화가 아닌 직설법으로 현실을 다루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의 연출인데, 기존 영화들에서 워낙의 참신한 이야기가 그의 연출의 취약점을 살짝 가려주었다면, 이번 영화에서 그의 취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인상적인 도입부.
바닥 가득 메운 탄피와 검은 연기, 파괴의 흔적 위에 서 있는 ‘비즈니스맨’

『로드 오브 워』의 야심이 그리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종종 망각하긴 하지만 전쟁도 엄연히 ‘산업’에 기반한 일련의 행위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산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전쟁에서 개죽음을 당하는 젊고 어린 청춘들이나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을 만드는 제조자는 물론 이것을 팔아 먹고사는 (정도가 아니라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걸 국가가 하면 ‘군수산업’이 되고 개인이 하면 ‘무기 암거래상’이 된다. 이러한 무거운 이야기를 한 명의 무기 암거래상을 통해 전개하기 위해, “앤드류 니콜”은 실제 무기 암거래상들을 취재해 이들의 이야기를 녹여내 유리 올로프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자본주의 사회 노동의 핵심인 ‘소외’를 스스로, 적극적으로 체화한 인물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유리 올로프(“니콜라스 케이지”)의 시점으로 진행되면서, 그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덤덤하게 내레이션을 끌어간다. 그의 내레이션, 그의 행위, 그의 말들엔 어떤 인간적인 감정이나 가치판단 같은 것이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묵묵히 ‘사업’을 계속할 뿐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드라이함과 상인으로서 자신이 취급하는 품목에서의 적극적/자발적 소외는 “앤드류 니콜” 특유의 캐릭터라이징 방법을 통해 블랙유머마저 띈다.

문제는 ‘발로 뛴 취재’로 쓴 시나리오가 종종 처하는 함정, 즉 ‘버리기 아깝다보니’ 시나리오에 다 우겨넣고 쳐내질 못하다가 시나리오 전체가 비틀거리는 잘못을 이 영화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고, 유리 올로프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그를 둘러싼 국제 전쟁 환경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에서 균형이 무너져내렸다는 것이다. 시나리오에서는 보다 인물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이, 실제 영화에서는 그 수많은 ‘실제’ 무기들에 영화를 찍는 니콜 자신도 압도를 당해서인지, 무게중심이 많이 이동을 했는데, 그 결과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포지셔닝 속에서 영화가 자주 지루해진다.

게다가 그런 끔찍한 소재는 사실 아무리 극단적으로 물신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관객들이라 한들, 심정적으로 거부감과 영화에 대한 진입장벽을 느끼기 마련이고, 이는 영화를 찍는 “앤드류 니콜” 자신마저도 그랬던 것같다.

일단 영화에서 주로 나오는 전쟁들, 즉 유리 올로프가 주로 무기를 팔아먹었던 전쟁의 무대가 되는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등의 그 참혹한 내전들은 국제사회에서도 관심을 덜 받는 곳들일 뿐만 아니라 열 서너살짜리 아이들이 (어설프게) 무장을 하고 또 죽고마는 그 끔찍한 장면들을, 감독은 냉혹한 냉소로 있는 독하게 그대로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역설의, 무언의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고자 했던 것 같지만, 그런 장면들에서조차 종종 말하자면 ‘감독의 안절부절함’이 느껴지면서 결과적으론 관객들에게 별다른 충격도, 그렇다고 혐오감도 안겨주지 못하는 듯하다.

 
“내 취급품목엔 손대지 않는다”
자발적인 소외는 원래 자본가들의 것이다.


게다가 유리 올로프라는 인물도 별 매력없기는 마찬가지. 미국의 혹자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를 한껏 칭찬했다지만, 내가 보기엔 글쎄올시다다. 유리 올로프는 관객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혐오감을 주면서도 , 현대 관객들마다 가지고 있는 양심과 지책감을 자극하면서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아니 그의 일련의 행위들을 불편한 마음으로 묵인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죄책감 어린 ‘공범체제’를 구축하게 만드는 악당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느물거리는’ 태도는 블랙유머뿐 아니라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해야 했다)

그 면에서 완전히 실패한 듯 보인다. 유리 올로프라는 인물을 보며 ‘그래서 어쩌라고?’와 같은 냉소밖에 안 드는 것, 나아가 그가 내면적으로는 꽤 충격이고 괴로웠으나 그걸 의식의 차원에서 계속 억누르고 계속 두텁게, 두텁게 방어막을 치느라 더욱 드라이해질 수밖에 없는 몇몇 장면들(예컨대 동생의 죽음, 선배 암거래상인 와이즈 살해 등)에서조차 별다른 동정심도, 응당 뿜어져 나와야 할 ‘비극적 인물’의 아우라에 대한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각본에서부터 문제가 있었고 연기 측면에서 더욱 문제가 심화됐다.

그러니, 영화 막판에 이르러서, 결국 인터폴 잭 발렌타인의 집념의 성과로 그가 체포된 뒤 ‘전세계 최고의 무기 거래자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덤덤한 사실 진술이나 재판도 없이 풀려나는 장면이 응당 줘야 할 감정적인 클래이맥스는 그저 맥빠지고 심심한 장면들이 되고 만다. 전세계 최고의 전범이 미국 대통령이란 건 누구나 다 아는(그러나 아무도 공식적으로는 말하지 않는) 사실인데, 이것이 거기서 직접적인 대사로 언급되면서 감독이 노렸던 효과, 그 직설법의 대사가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공식적으로 선언’되면서 마땅히 가져야 할 울림을 갖는 데에 실패하는 것은, 영화가 계속 갈팡질팡한 결과인 것이다.

시나리오를 먼저 읽고 영화를 본 만큼, 나는 애초에 “앤드류 니콜”이 각본에서 했던 대로 철저히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영화 찍는 도중 갖게 되는 이러저러한 욕심들을 단호하게 자르고 버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스펙터클을 소비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개인적으로 그 류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전쟁의 이면, 그것이 얼마나 철저한 자본주의적 법칙을 따라가는 비즈니스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각종 실제 무기들의 스펙터클에 인물이 눌려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그런 무기들의 스펙터클은 그저 자주 보여준다고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보여주고자 하는 ‘스펙터클’의 효과는 오히려 ‘감추는’ 데에 있다.


ps1. 니콜라스 케이지는 정말 무색무취의 배우다.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건 그 인물의 고뇌와 내면의 밀도 같은 게 이젠, 안 느껴진다. 하긴 그 점이 그를 자꾸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으로 끌어당기게 하는 힘이 되는 건지. <아리조나 유괴사건>이나 <광란의 사랑>에서의 니콜라스 케이지는 완전히 죽어버린 것같다.

ps2. 제레드 레토는 언제나 누군가의 동생, 이구나 …

ps3. 우리의 이안 홀름 아저씨는 아무리 카리스마 넘치는 무기상으로 나와도 걍 ‘빌보 배긴스’로 보인다. -_-;;;

영진공 노바리



“데이브레이커스”, 매트릭스는 아무나 하나

에단 호크가 오랜만에 액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섰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의 앳된 소년으로 출연했을 때에는 존재감이 그리 큰 편은 아니었었죠. 하지만 지금은 당시에 함께 출연했던 모든 배우들 가운데 – 심지어 로빈 윌리엄스까지 포함해서 –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인상이 그리 강해보이지 않은 탓에 출연작들 대부분이 드라마 쪽이고, 그나마도 저예산 영화에 자주 출연하면서 이제는 ‘독립영화의 친구’쯤 되어 보이기도 합니다.

<데이브레이커스>의 초반부는 몇 편 안되는 에단 호크의 액션물 또는 SF 출연작들 중에서 특히 <가타카>(1997)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미래 사회이긴 한데 어딘지 모르게 카프카의 느낌이 나는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10년이니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일에 불과하건만 사람들이 중절모를 쓰고 다니질 않나 참 묘한 느낌을 전달해줍니다. 이것을 굳이 어색하다고 하기 힘든 것은 <데이브레이커스>의 세상이 뱀파이어들 – 굳이 부류를 지정하자면 <트와일라잇>의 착한 뱀파이어가 되겠네요 – 의 것으로 바뀌었다는 설정 덕분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세상이 온통 좀비들로 넘쳐나가된 상황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몇 편 있었지만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윌 스미스 주연의 < 나는 전설이다>(2007)는 변종 인류들로 창궐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아 해독제를 찾고자 하는 주인공의 외로운 사투를 그린 작품이었는데 이 변종 인류들을 뱀파이어라기 보다는 역시 좀비에 가까운 존재들이었죠.

여기에 비하면 <데이브레이커스>의 뱀파이어들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트와일라잇>에 등장한 착한 – 또는 착하려고 노력하는 – 뱀파이어에 가까운 존재들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영생을 얻었지만 인간의 피를 먹어줘야 하는 관계로 새로운 인류 역사가 시작된지 10년 만에 전세계적인 식량난(?)이 닥쳐오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시급히 대체재를 만들어만 하는 상황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빈부격차로 인해 인간의 피를 섭취하지 못한 뱀파이어들이 서서히 변이를 일으켜 끔찍한 괴물 뱀파이어 – 서브사이더 – 로 바뀌게 된다는 점입니다.

<데이브레이커스>의 테마는 뱀파이어에서 다시 인간으로의 회복입니다. 우연히 그 과정을 겪게된 라이오넬(윌렘 데포)을 만난 에드워드(에단 호크)는 자신도 다시 인간이 되고자 기꺼이 실험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완전히 망가져가는 뱀파이어 세상에서 인간으로의 복귀를 통한 구원의 희망을 전해주는 메시아의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중심 내러티브 보다 오히려 더 흥미로운 부분은 마치 아우슈비츠에서의 유태인 학살을 재연하는 듯한 괴물 뱀파이어들의 화형식 장면입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탐욕 추구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한 씨퀀스라고 하겠지만 어찌보면 마이클 & 피터 스피어리그 형제 감독이 독일 출신으로서의 자의식을 투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좀비가 되었든 뱀파이어가 되었든, 너무 번성하면 수요 공급의 문제 때문에 다시 쇠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역설적이면서도 참으로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28일 후…>(2002)의 속편으로 만들어진 <28주 후…>(2007)가 바로 이런 설정에서 시작하는 작품이었죠. 그러고 보면 <데이브레이커스>는 기존의 여러 공포물과 SF 영화들로부터 많은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재구성한 듯한 느낌이 역력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 의외로 전체적인 줄거리에 있어서는 <매트릭스>와 비슷합니다.

물론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발상의 작품을 내놓는 것은 아주 해내기 어렵고 관객 입장에서도 극히 보기 드문 경험이기 때문에 <데이브레이커스>와 같은 시도가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얼마나 신선한 재해석과 설득력 있는 연출을 보여주느냐가 될 뿐이지요.

주제도 좋고 배우들 연기도 좋고, 전반적인 연출도 그리 흠잡을 데가 없는 ‘기술적인 완성도가 훌륭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데이브레이커스>가 그닥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역시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 그로 인한 공포나 신비로움과 애절함을 –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인류와 뱀파이어가 공생하는 상황을 그린 TV 시리즈 <트루 블러드>도 그래서 재미가 없었습니다. 좀비 세상은 뭐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서스펜스가 있어 좋고 그 자체로 풍자극이니까 괜찮습니다. 하지만 벰파이어 세상이란 건 일단 설정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데다가 그 비밀스러운 맛이 없어서 그야말로 김 빠진 콜라 같은 게 되는 거 아닐까요. <렛 미 인>(2008)과 < 트와일라잇>(2008)의 중요한 차이점 역시 바로 그 점이라 생각합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