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를 고쳐야 애국심이 생기나?”,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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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로저스는 미국의 상담심리학자로서 인본주의적 심리학이라는 학파를 창설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로저스의 인본주의 심리학의 원칙은 단순합니다. 알고보면 사람들은 전부 착하다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분명히 악인들이 있고 온갖 악행들이 펼쳐집니다. 이 사실에 대해 로저스는 어떻게 설명을 했을까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선의를 가지고 있는데 각자가 보는 올바른 세상, 혹은 선한 세상에 대한 정의가 다 달라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즉, 개개인의 의도는 전부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함이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결과가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심각하게 다르기도 하다는 거죠. 그 결과 어떤 이에게는 최선의 올바른 행동인 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행동이 되거나 심지어는 악행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로저스의 이런 이론은 고대 그리스의 궤변론자 고르기아스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결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요. 마찬가지로 로저스도 우리들 각자의 세계가 다 다르다는 지적을 한다는 점에서 고르기아스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로저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각자 주관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누구의 세계가 더 건강한 세계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죠. 로저스가 내놓은 건강함의 판단기준은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일치도입니다.

우리는 비록 각자의 세상에서 살고는 있지만, 남들이 나와는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즉 내가 보는 세상과 남들이 보는 세상의 차이를 인식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들이기에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남들이 보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배우고 그 세상에 맞춰 살거나 최소한 충돌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보는 세상이 남들이 보는 세상과 너무 크게 다르기 때문에 부적응을 경험합니다.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미쳤거나, 내가 미쳤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겠죠. 두 가지 결론 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고요.

우리의 정신건강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가 얼마나 일치하느냐는 실제로 그 사람의 적응수준을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죠. 이 둘이 너무 일치해도 좋을 것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정말 정확히 알고, 그들이 보는 내가 진짜 나라고 믿어버린다면 우리는 대부분 우울증에 걸리기 딱 좋죠(:-p). 하지만 이 둘이 너무 동떨어져 있으면 그것도 큰일입니다. 자기는 스스로 엄청 잘났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보기엔 한심무인지경인 사람인 경우가 여기에 속하죠. 보통 이런 사람들은 정신병원이나 국회의사당에서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만… 로져스에 따르면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이 두 ‘나’가 어느 정도는 떨어져 있지만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내가 보는 나와 남들이 보는 나가 적당히 떨어져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둘의 차이가 너무 크거나 너무 좁아지는 것일까요? 로저스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나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이 나를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 존중해주고, 그렇지 못하면 존중해주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보다는 그 조건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아예 자포자기해버리는 거죠.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그 어떤 경우에도 조건을 따지지 않고 존중해주는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되면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얻습니다. 이런 확신이 깔리게 되면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여기서 말하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존중해 주는 것을 로져스는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spect)”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로저스에 따르면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필수 비타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우리들 개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회나 문화, 그리고 역사를 보는 관점에도 필요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불거진 역사교과서 수정 논쟁을 보며 저는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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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소위 “좌편향된” 역사교과서로 공부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고, 그 결과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부심 혹은 국가정체성이 부족해질 것을 우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려고 하죠.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의 ‘광복’ 보다는 우리나라를 만들어냈다는 ‘건국’에 방점을 두고, 식민지배과정에서도 일제의 수탈과 탄압,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독립투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한 근대화의 노력도 있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걸 보면서 좀 의문이 생깁니다. 자기가 소속한 국가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부심이 과연 그런식으로 만들어질까요? 저는 우리나라의 식민지 시절역사나 동족상잔의 비극, 민주화 과정에서 벌어진 온갖 부정적인 사건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긴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와 있으니까요. 더구나 세계사를 보면 우리나라 정도의 고난이나 실수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과거사는 우리보다 더 긍정적이던가요? 천만에 말씀이죠. 미국의 건국사는 원주민 학살사이고 영국의 번영기는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제가 알기로 (일정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나라 사람들의 국가정체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건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하듯, 우리나라는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우리나라이니까요.

반면에 자기 나라의 과거사가 부정적이면 자부심이 낮아지고, 과거사가 좀더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면 자부심이 높아진다는 그런 생각은 “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앞서 개인의 정신건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 그러니 저는 우려하게 됩니다. 과연 이렇게 자기 나라를 조건에 맞춰서만 긍정적으로 존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혹시 사실은 이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창피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열심히 과거사에 분칠을 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조건에 맞춰서 성형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일제시대를 기술하면서도 그 와중에도 꾸준히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솔직히 하나마나한 이야기(모든 제국은 자기 식민지를 어느 정도까지는 근대화시킵니다. 그래야 그 식민지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안 그런 식민지가 하나라도 있던가요?)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것이 아닐까요?

영진공 짱가

 

[대안 교과서] 이런 걸 교과서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현 집권세력의 핵심 지지기반이라는 ‘뉴라이트’가 주도하여 출간했다는 대안교과서.
나온지 꽤 되었다는데 최근에야 그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일단 몇 대목을 살펴보자.

“일제의 한국 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 체제였다.
국내외의 한국인들은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의 권리를 끝내 쟁취하였다.
그 시기는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게 뭔 소리냐?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에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의 권리를 끝내 쟁취했다고?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었으면 우리 스스로는 근대국가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없었다는 거냐?
게다가 “근대국민국가”는 어디서 나온 용어냐? 
내용은 둘째 치고라도 글이 앞뒤가 안 맞고 한 쪽의 논리에 지나치게 편향되어있다.

우리가 근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기르고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로 인해 빼앗기고 폭력으로 지체되어 근대국가의 형성이 왜곡되고 더뎌졌다는 걸 부인하자는 것인가. 







“한편 일본군은 한국, 만주, 중국, 동남아, 남양군도에 이르는 전 주둔지에서 군 시설의 일부로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그곳에 한국, 일본, 중국, 동남아 출신의 여인들이 위안부로 노예처럼 수용되어 일본군에 성적 위안을 제공하였다. 일본군은 노예제를 금한 국제 협약을 위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한국 여성이 위안부가 된 사정에 관해 당시 심문을 맡았던 미국군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942년 5월 상순 일본인 대리업자가 ‘위안봉사’를 시킬 한국인 여성을 모집할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이 대리업자가 여인들에게 제시한 것은 큰 돈벌이, 가족의 빚 갚기, 쉬운 일,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새로운 삶 등이었다. 이러한 꾐에 빠져 많은 여성이 해외 취업에 지원하고, 몇 백 엔의 전대금을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무지했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었다. 대개 800여 명이 이렇게 모집되어 1942년 8월 20일까지 랑군에 도착하였다.””


위 내용에 분개하기 이전에 지은이들에게 묻는다.  저렇게 기술하게된 근거가 뭐냐?

여전히 형언하기 힘든 고통을 겪고 계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당시 단순히 민간업자의 꾐에 빠져 자발적으로 나선 거라고 판단하게 된 근거가 있으면 제시해 달라.  그리고 이러한 범죄가 그저 민간 대리업자에 의해 저질러지고 일본군과 정부는 노예처럼 수용한 죄만 있다고 기술하게 된 근거도 있으면 함께 제시해 달라.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하였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여진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 또한, 위안서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 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이 인용문은 1993년 8월 4일 일본국 고노 요헤이 내각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 중 일부이다.
소위 “대안교과서”에 따르자면 저 담화문의 내용은 사실을 왜곡한 거다.  그리고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나 미국 하원본회의 위안부 결의안 등도 잘못된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참고 링크)

이 교과서의 지은이들과 지지자들은 그걸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대답해보라. 





“김구(1876~1949), 황해 해주 출생, 호는 백범(白凡) … 1896년 민왕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상인을 군인으로 오인하여 살해하였다. 체포되어 복역 중에 탈출하였다 …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테러활동을 시작하였다. (중략)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수많은 후진국의 정치적 지도자 가운데 이승만처럼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의 비타협적 반공주의는 신생 대한민국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동질적 국민의식을 배양하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반공의 이름으로 반대파가 탄압되거나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인권이 부정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그의 반공주의는 보통사람의 의식속에서 두려움으로 내면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2차 세계대전후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 공산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올바로 잡는데 동시대 어느 느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는 건 인정하는 바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과서는 여느 단체의 조직원 교육자료가 아니다.  적어도 기술방식의 형평성은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에게는 미사여구와 변명거리를 덕지덕지 덧붙이고 그렇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시각만 단정지어 제시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 식의 기술방식을 보통 윤색, 왜곡, 편향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런 내용과 기술방식의 서적을 정녕 교과서라고 해야 하는 건지 참으로 당혹스럽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와 인물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존재할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보여줄 “교과서”에는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근거가 희박한 주장, 일부의 극단적 시각, 정치적 의도, 편향과 왜곡 등은 특히나 피해야 할 것들이다.

역사 교과서는 우리의 아이들이 역사를 배우고 익혀 스스로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행동방식을 결정하는 걸 돕는 책이어야 한다.  어느 특정 세력이나 단체의 일방적 시각을 호도하고 이를 주입시키고자 하는 도구로 쓰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들과 지지자들이 혹여라도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 중단하고 범사회적 협의와 합의에 의한 교과서 저술 및 발간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라고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