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라이더 (Easy Rider, 1969), 어린 왕자의 영화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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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서 하도 자주 언급되는 고전이다 보니 어느새 이 영화 언젠가 한번쯤은 본 것도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이지 라이더”는 주말의 극장이나 케이블 TV를 통해 몇 장면 스쳐 지나가듯이 본 일 조차 없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 뉴 시네마 어쩌고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단골 손님인데다가 피터 폰다와 데니스 호퍼의 오토바이 타고 달리는 사진 또한 어렸을 적 미국으로 이민 간 그리운 친척 형들 사진 꺼내 보듯이 너무 자주 봐왔던 터라 ‘아직 한번도 안본 영화인데 이미 다 본 것 같은 착각’의 상당히 높은 수위를 차지하는 영화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보게 된 “이지 라이더”라는 영화는 과연 영화 보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바 대로 피터 폰다와 대니스 호퍼가 오토바이를 타고 줄창 달리는 로드무비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요즘 기준으로는 별로 용납해주고 싶지 않은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가 촌빨 날리는 화면과 편집 기술 위에 제대로 어우러진 진짜 60년대 영화였다 … 까지가 내 미리 알고 있었거나 예상했던 것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직접 보고서야 알게된 부분들은,

잭 니콜슨은 처음부터 같이 달리는 또 하나의 바이커가 아니라 중간에 만나 얻어탔다가 영화 끝까지 가지도 못하고 중간에 사라지는 배역이었다. 그러나 잭 니콜슨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갑자기 엄청난 탄력이 붙는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그의 연기력과 타고난 존재감은 감탄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이지 라이더”에서 잭 니콜슨의 등장은 외롭고 건조한 두 주인공의 로드무비에 혜성 같이 나타났다가 아쉽게도 사라진다는 점에서 “델마와 루이스”에서의 브래드 피트가 했던 강력한 양념장 역할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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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지 라이더”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이게 정말 60년대에 만들어진 씨퀀스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파격적이면서도 비주얼이 매우 놀라웠던 두 창녀와의 공동묘지 장면이다. 물론 상당히 쎈 약을 먹은 네 인물의 환각 상태를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할 수도 있겠고 엄청난 신성모독이라고까지 욕할 수도 있을 내용이지만 이제 이 영화의 이 장면을 본 이상 세상의 모든 비디오아트가 있기 이전에, 그리고 데이빗 린치나 다른 작가들이 하기 이전에 “이지 라이더”가 이미 있었노라고 해야 하게 생겼다.

전통적인 서부극의 플롯을 거꾸로 만들어보자고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내가 본 “이지 라이더”의 전반적인 느낌은 오토바이를 타고 미 서부에서 동부로 여행하는 “어린 왕자”의 영화 버전 같다는 거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그랬듯이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외모와 표정을 지닌 와이어트(피터 폰다)도 길 위에서 다른 이들을 만나며 세상과 살아가는 일들에 대해 무언의 메시지들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리고는 결국 길 위에서 사라지고 마는 결말까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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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무죄추정의 원칙 – 1992년 김모 순경 사건 이야기

세상을 들끓게 한 강호순 연쇄살인 사건에서 피의자 강호순의 얼굴 공개를 놓고 격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아주 일부 – 정말로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런 짐승같은 놈에게 무슨 빌어먹을 인권!”이라면서 당장 얼굴에서 마스크를 벗겨낼 것을 주장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피의자의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 말이다.  이건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벌해서는 안 된다”라는 형사소송법의 이상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얼굴까지 공개하지 말자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너무 과하게 적용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경찰이 잘못된 수사로 멀쩡한 사람을 흉악범으로 만드는 짓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를 알게 된다면 차마 그런 말을 하진 못할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김모 순경 사건이다.

1992년, 김모 순경은 애인 모양과 함께 여관에 투숙한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7시경에 애인을 남겨놓고 먼저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애인이 일하던 직장에서 그녀가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고 여관방에 돌아가 본 김순경은 살해당한 애인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때 법의학자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즉, 사망 시각을 오전 3시에서 5시경으로 추정한 것이다.

그리고 경찰들 또한 결정적인 실수를 한다. 그것은,
1) 현장의 휴지에서 김모 순경 외에 다른 사람의 정액이 발견됐는데도 불구하고 이걸 무시해 버리고,
2) 애인의 지갑에서 상당액의 수표가 사라졌는데 이를 김모 순경의 소행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김모 순경을 다그치고 협박하여 자백을 받아낸다.

물론 재판정에서 김모 순경은 자신의 자백을 번복한다. 하지만 뒤이은 검사와 판사들의 삽질도 장난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1)번의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증거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김모 순경이 구치소에 구류된 사이에 신림동 일대에서 애인이 가지고 있던 수표가 사용됐다는 증거가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 김모 순경은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인정받아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다음해 열린 3심에서도 김모 순경에서 불리한 판결이 나올 공산이 높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3심이 한참 진행되던 도중에 진범이 잡힌 것이다!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힌 서모군(당시 18세)이 취조를 받던 도중, 자신이 작년에 있었던 경찰관 애인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한 것이었다. 실제 사건은 사망 추정시각인 오전 3시에서 5시 사이가 아니라 오전 7시에 김모 순경이 여관을 나간 직후에 저질러졌다. 그 때, 서모군이 여관방에 침입해 혼자 자고 있던 애인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금품을 빼앗아 도주한 것이다.
 

10년전 경찰관에게 애인을 죽였다는 누명을 씌웠던 살인범이 최근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고도 친구에게 어머니를 죽였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운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서울 노원경찰서는 지난달초 노원구 공릉동에서 발생한 70대 노파 손모(76.여)씨 살해사건의 진범이 용의자로 지목돼 구속된 손씨의 아들 강모(36)씨가 아니라 강씨의 친구 서모(28)씨인 사실을 밝혀내고 서씨를 살인혐의로 구속했다고 29일 밝혔다.

<한겨레신문, 2002년 7월 29일, 경찰관에게 살인누명, 이번에는 친구 차례”>

요컨대 사망 시각을 잘못 추정한 게 이 사건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간 결정적인 실수였다.  하지만 현장에 남아 있던 휴지에 남아 있던 정액의 DNA를 분석하고(당시 이미 DNA 분석기법이 도입되어 있었다), 신림동 일대에서 사용된 수표의 흔적을 추적했더라면 어렵잖게 진범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 못해 재판정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에 입각해서 판결을 내렸더라면 이런 식으로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범인이라고 추정되는 사람의 자백’에만 의존하여 무죄추정의 원칙 따윈 어딘가 멀리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탓에, 이 사건은 두고두고 경찰과 검찰의 무능함과 법정의 게으름에 대한 비웃음 꺼리로 남게 되었다.

이 사건은 내가 잘 알고있는 분에게는 무척 기억에 남는 건이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1심과 2심에서 김모 순경의 변호사를 맡으셨기 때문이다.  그 분은 상당한 추리소설 팬이기도 한데, 이 사건에선 도난당한 수표의 자취를 뒤쫓아 실제 수표가 사용된 건 김순경이 체포된 뒤란 사실을 알아내고, 그 수표를 사용한 게 누군지도 알아내서 그 증거를 법정에 제출하는 등 다방면으로 많은 노력을 하셨다. (수표를 사용한 사람은 진범인 서모 군의 친구였다. 만일 이 친구를 추적했라면 진범은 쉽게 잡혔을 것이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와 판사에 대한 그 분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그 분: “그런데 말이지 … 이 검사놈들하고 판사놈들이 그 증거를 보지도 않더라고! 근데 더 웃긴 게 뭔줄 아냐? 난 진범이 잡힌 뒤에 이 놈들이 짤릴 줄 알았거든? 근데 나중에 부장검사, 부장판사로 줄줄이 출세를 하더라고, 거 참!”

나 : “세상이 다 그런 거죠, 뭐.”

김순경은 진범이 잡힌 이후에도 보강 수사니 뭐니 하는 이유로 한참 뒤에나 출옥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면취소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뒤에야 겨우 복직할 수 있었다.

DNA 검사로 강간혐의를 벗고 18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 James C. Tillman (2007. 5. 16)

아무튼간에 경찰과 검찰의 무능함과 법정의 게으름은 1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별로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바보들의 행진’으로 끝난 제과점 납치사건).  그런즉슨 무죄추정의 원칙을 조금 과하게 적용한다고 해서 큰일날 건 없지 않을까.

영진공 DJ Han

 

‘불만합창단’ 단원을 모집합니다!



<멋대로 ‘불만합창단’ 제 2기 단원 모집>


점점 사는게 재미가 없는 분!
되는 일이 없어서 허구헌날 화가 나는 분!
매일 아침 적잖이 속이 쓰려오며 이건 뭔가 아니다 싶은 분!
예전엔 안그랬는데, 요즘들어 자꾸 불만이 쌓이는 바로 그런 분!

빈소년 합창단처럼 꾀꼬리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저 목소리 높여 나의 불만을 외칠 수 있는 건강한 목청만 가지고 계시다면 대 환영!

지난해 전격 결성된 <불만합창단>은 소리없는 인기를 몰아 신촌길거리 공연, 나라걱정가요제 공연, 스트레스없는 직장인을 위한 공연 등등을 거쳐 바로 지금 제 2기 단원을 모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시대의 <멋대로 불만합창단>에서 새로운 얼굴을 찾습니다.
“지금 세상을 향해 불만을 터뜨릴 바로 당신! 어서오십시오-”

초간단 신청하는 방법
여기로 가서 댓글 달기!!!

기타 문의 사항은 쪽지, 메일(boolman@hanmail.net),
불만합창단 카페 (http://cafe.daum.net/boolman)

많이 애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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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표출하는 것의 즐거움을 아는가? 모른다면 당신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행운아다.
그렇지 않다면 그 즐거움을 알수 있는 기회가 코 앞으로 다가 왔으니!
처음 겪게될 그 즐거움은, 그동안 경험했던 즐거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벅참’을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정을 긍정으로 변화시키는 힘, 불만합창이다.

세계 각국의 불만합창단의 공연을 봐도 그러하고, 우리의 공연을 봐도 그러하다.
그리고 당신이 참여할 다음의 공연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까 늦기전에, 다시 없을 이 즐거움에 모두 참가하시라!

멋대로 불만합창단에서 제 2기 단원을 모집 중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그 즐거움을 느껴봤던 사람 중에 한사람으로서, 불만을 큰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당신의 삶에 얼마나 큰 활력소가 되어줄지를 보증한다!

 


사진만 봐서 모르겠다구?
그럼 이걸 보셈~~

                        

                                         

모이자, 노래하자, 소통하자. 웃고 떠들고 찡그리고 목소리 높이자. 불만을 노래하면 불만이 희망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걸 믿어보자. 그리하여 부정이 가득한 우리의 현재를 희망찬 노래로 채워보자. 우리의 노래로 현재가 조금씩 바뀌길 희망하며. 우리에겐 그럴만한 힘이 있다. 연대라는 거창한 단어를 끄집어 내지 않고서라도, 모여서 놀며 소통할 만한 힘이 있다.

가능한 일이다, 모두가.

초간단 신청하는 방법
여기로 가서 댓글 달기!!!

기타 문의 사항은 쪽지, 메일(boolman@hanmail.net),
불만합창단 카페 (http://cafe.daum.net/boolman)

많이 애용해주세요~!

영진공 앨리스

“벤자민 버튼”, 시간이 거꾸로 간다 한들 세상은 그대로인데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원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이고 F.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집에 끼어있던 한 단락의 이야기입니다.  원작이 단편인 이야기들이 대부분 그렇듯, 한 남자의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이 이야기는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한 한 편의 간단한 구라입니다.  길이가 길지도 않고 디테일한 이야기도 아니죠.  주인공 이름을 보세요.  단추 만드는 집안이라고 성이 [버튼]입니다. (물론 이런식으로 지어진 이름들이 많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_-;;)

어쨌든 이 짧은 이야기를 가지고 한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수많은 설정들과 에피소드, 온갖 놀라운 특수효과가 도우 위에 피자치즈처럼 흩뿌려졌습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한 남자라는, 환타지스런 설정에 약발을 더하기 위해서죠.  이런 장치들은 당대 최고수의 테크니션이라고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는 데이빗 핀처 감독의 섬세한 손길을 타고 이야기에 깊숙히 스며들어갑니다.

핀처 감독은 “조디악”때 처럼 불필요한 감성의 자극이나 화려한 테크닉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영화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위해 판을 마련하는 작업에 집중합니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시대상황을 훌륭하게 연출해 내고,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벤자민 버튼을 스크린 위에 소환하기 위해 온갖 특수효과를 동원하지만 이는 영화의 배경과 설정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불필요하게 노출되어 꼴사나운 특수효과 자랑 쇼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핀처 감독은 말도 안되는 구라일수록 시치미 뚝 떼면서 해야 약발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검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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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미 뚝!

영화는 유려한 영상을 타고 한 마리의 고래가 유영하듯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런닝타임이 꽤 긴 편이지만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이야기의 완급조절과 배분이 적절히 이루어졌다는 반증이겠지요.   전통적으로 아카데미가 일방적으로 편애해 마지 않는 ‘대서사시 + 러브스토리 + 삶에 대한 긍정적인 교훈’에다가 헐리웃 영화기술의 발달을 저렴해 보이지 않게 자랑하는 특수효과 퍼레이드를 골고루 시연하시니, 과연 아카데미에 최대 노미네이트 “될만 하다.”라는 인상을 짙게 주고 있습니다.  작정하고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당 영화, 칭찬만 하기에는 여러가지로 민망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것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원작의 성격과, 데이빗 핀처의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야심작과의 간격이 자연스럽게 좁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가 존재해야 할 당위성을 그닥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는 남들과는 반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는 80대 노인이면서 어린아이의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고, 20대 소년의 머릿 속에 80대 노인을 품고 있지요.  하지만 영화는 이런 그의 캐릭터를 잘 살리지 못하고 그저 한 인간의 성장담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벤자민 버튼은 늙은이로 태어났지만 남들과 비슷한 성장과정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첫사랑을 겪고, 여행을 하며 자아를 찾고 … 이건 그가 굳이 벤자민 버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가 점점 젊어지는 것을 제외하곤 주인공의 인생은 지나치게 평범합니다.  평범한 인생에선 평범한 교훈이 나오는 법이지요.

시간은 소중하다고요? 인생에서 젊음은 잠깐 뿐이고 유한하다고요? 그건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점차 늙어가는(갑자기 슬퍼진다…흑)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려고 거꾸로 살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냥 살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에요.

벤자민 버튼의 캐릭터와 그의 이야기가 충분히 강렬하지 못한 덕에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 버튼의 모습은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20대 브래드 피트의 모습을 다시 리와인드 시켜 보는 것은 남자인 저로서도 혹할만큼 매혹적인 장면이었지만, 그것으로 다입니다.  분장쇼 하려고 그를 부른것은 아닐 터인데.

또한 당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작가인 에릭 로스의 터치가 너무나 강하게 느껴집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던 제가 영화를 보는 동안 자꾸 “포레스트 검프”와의 기시감이 느껴졌을 정도로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그가 각색을 했더군요.  그럴 정도로 이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것은, 주인공인 벤자민 버튼만의 이야기가 강렬하지 못했다는 앞의 이야기와도 일맥이 상통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나 매혹적인 영화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출연배우들도 적절한 연기로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무려 발레리나 역을 소화하면서 전혀 위화감을 주지 않는 케이트 블랑쳇도 그렇고, 틸다 스윈튼도 인상적인 조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배우는 여성적인 역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군요.
 
그리고 주인공인 브래드 피트는 무난하게 전 연령대에 걸친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소리의 톤 조절이나 늙은이처럼 걷는 연기도 능수능란하게 잘 하고 있구요.  다만 늙은이라고 보기엔 너무 각잡힌 그의 체격이 가끔 거슬릴 때는 있습니다.  특수효과를 하지 않고 늙은이 연기를 하기엔 아직 피트는 몸이 너무 좋아요.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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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피트는 케이트 블랑쳇보다도 머리가 작더군요. 졸리보다도 작고 ... 도대체 이 넘은 외계인인 걸 까요???

영진공 거의없다

“역사교과서를 고쳐야 애국심이 생기나?”,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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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로저스는 미국의 상담심리학자로서 인본주의적 심리학이라는 학파를 창설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로저스의 인본주의 심리학의 원칙은 단순합니다. 알고보면 사람들은 전부 착하다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분명히 악인들이 있고 온갖 악행들이 펼쳐집니다. 이 사실에 대해 로저스는 어떻게 설명을 했을까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선의를 가지고 있는데 각자가 보는 올바른 세상, 혹은 선한 세상에 대한 정의가 다 달라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즉, 개개인의 의도는 전부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함이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결과가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심각하게 다르기도 하다는 거죠. 그 결과 어떤 이에게는 최선의 올바른 행동인 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행동이 되거나 심지어는 악행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로저스의 이런 이론은 고대 그리스의 궤변론자 고르기아스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결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요. 마찬가지로 로저스도 우리들 각자의 세계가 다 다르다는 지적을 한다는 점에서 고르기아스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로저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각자 주관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누구의 세계가 더 건강한 세계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죠. 로저스가 내놓은 건강함의 판단기준은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일치도입니다.

우리는 비록 각자의 세상에서 살고는 있지만, 남들이 나와는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즉 내가 보는 세상과 남들이 보는 세상의 차이를 인식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들이기에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남들이 보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배우고 그 세상에 맞춰 살거나 최소한 충돌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보는 세상이 남들이 보는 세상과 너무 크게 다르기 때문에 부적응을 경험합니다.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미쳤거나, 내가 미쳤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겠죠. 두 가지 결론 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고요.

우리의 정신건강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가 얼마나 일치하느냐는 실제로 그 사람의 적응수준을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죠. 이 둘이 너무 일치해도 좋을 것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정말 정확히 알고, 그들이 보는 내가 진짜 나라고 믿어버린다면 우리는 대부분 우울증에 걸리기 딱 좋죠(:-p). 하지만 이 둘이 너무 동떨어져 있으면 그것도 큰일입니다. 자기는 스스로 엄청 잘났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보기엔 한심무인지경인 사람인 경우가 여기에 속하죠. 보통 이런 사람들은 정신병원이나 국회의사당에서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만… 로져스에 따르면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이 두 ‘나’가 어느 정도는 떨어져 있지만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내가 보는 나와 남들이 보는 나가 적당히 떨어져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둘의 차이가 너무 크거나 너무 좁아지는 것일까요? 로저스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나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이 나를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 존중해주고, 그렇지 못하면 존중해주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보다는 그 조건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아예 자포자기해버리는 거죠.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그 어떤 경우에도 조건을 따지지 않고 존중해주는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되면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얻습니다. 이런 확신이 깔리게 되면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여기서 말하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존중해 주는 것을 로져스는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spect)”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로저스에 따르면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필수 비타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우리들 개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회나 문화, 그리고 역사를 보는 관점에도 필요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불거진 역사교과서 수정 논쟁을 보며 저는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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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소위 “좌편향된” 역사교과서로 공부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고, 그 결과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부심 혹은 국가정체성이 부족해질 것을 우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려고 하죠.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의 ‘광복’ 보다는 우리나라를 만들어냈다는 ‘건국’에 방점을 두고, 식민지배과정에서도 일제의 수탈과 탄압,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독립투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한 근대화의 노력도 있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걸 보면서 좀 의문이 생깁니다. 자기가 소속한 국가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부심이 과연 그런식으로 만들어질까요? 저는 우리나라의 식민지 시절역사나 동족상잔의 비극, 민주화 과정에서 벌어진 온갖 부정적인 사건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긴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와 있으니까요. 더구나 세계사를 보면 우리나라 정도의 고난이나 실수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과거사는 우리보다 더 긍정적이던가요? 천만에 말씀이죠. 미국의 건국사는 원주민 학살사이고 영국의 번영기는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제가 알기로 (일정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나라 사람들의 국가정체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건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하듯, 우리나라는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우리나라이니까요.

반면에 자기 나라의 과거사가 부정적이면 자부심이 낮아지고, 과거사가 좀더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면 자부심이 높아진다는 그런 생각은 “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앞서 개인의 정신건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 그러니 저는 우려하게 됩니다. 과연 이렇게 자기 나라를 조건에 맞춰서만 긍정적으로 존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혹시 사실은 이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창피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열심히 과거사에 분칠을 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조건에 맞춰서 성형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일제시대를 기술하면서도 그 와중에도 꾸준히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솔직히 하나마나한 이야기(모든 제국은 자기 식민지를 어느 정도까지는 근대화시킵니다. 그래야 그 식민지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안 그런 식민지가 하나라도 있던가요?)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것이 아닐까요?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