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그 뒷 얘기가 궁금하신가요?

 

 


 


 


개츠비를 떠나보내고 닉은, 출생배경이 계급이 되어버린 암담한 사회현실과 그 현실에 굴복한 삶을 사는데 급급한 사람들에 대한 절망감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저 목적없이 방탕한 삶 속으로 빠져들고야 만다.


 


술과 도박 등에 빠져 이리저리 부유하던 닉은 급기야 정신병원에까지 도달하게 되고, 거기서 의료진의 도움으로 몸과 마음을 추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개츠비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였고 그 글들을 책으로 엮어 출판하려 하였다.


 


 


 



니콜라스 캐러웨이


 


 


그리고 그 글을 완성하던 날, 책 제목인 “Gatsby”에다가 “The Great”를 덧붙이던 닉은 불현듯,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암흑가와 결탁하여 부를 쌓은 개츠비였지만 그 역시 넌덜머리나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자 아둥바둥 몸부림치는 여느 젊은이와 다를 바 없었고, 그런 과정에서 손에 쥐어진 부를 이용해 주류에 인정받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자신이 그리도 오르고자 했던 기존 상류층에게 거절당하고 마침내 목숨까지 잃은 것이 아니었던가.


 


자신들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어떤 악행도 마다하지 않는 기득권층과 그들에 의해 이용 당하면서도 그들을 두려워하며 오히려 비슷한 이들에게로 분노의 창끝을 돌리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 이 책을 던져 놓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닉은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그는 개츠비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이 세상과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층을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수를 감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닉이 복수를 위해 맨 처음 한 행동은 얼굴을 바꾸는 것이었다.


 


 


 



성형 후의 닉, 톰 리플리


 


 


이름도 톰 리플리로 바꾸고 신분증도 위조한 닉은, 뷰캐넌가 만큼이나 부유하고 집안이 서로 사이도 돈독한 그린리프가의 손자 필립을 복수의 대상으로 정하였다.


 


필립 그린리프는 전형적인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인지라 토마스, 데이지 그리고 개츠비와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생활양태를 깊숙이 체험하였던 닉, 아니 톰에게는 매우 쉬운 공략대상이었다.


 


그닥 오래지않은 기간에 말하자면 노리개감이 되어주는 친구관계를 형성하여 필립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동시에 신뢰를 얻어내며 기회를 노리던 닉은, 필립이 이태리로 떠난 시점에 드디어 행동을 개시하였다.


 


 



닉과 필립의 이야기는 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태리에 있던 필립과 합류한 톰은 계획한대로 필립을 유희와 환락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였고, 스스로 그 나락으로 걸어들어간 필립은 톰이 그를 해꼬지해도 될만한 수준으로까지 끌어내려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톰은 개츠비에게도 개인적인 의미가 있는 공간, 요트에서 일을 치르고야 말았다. 바다 위에서 필립을 제거한 톰은 뭍으로 돌아와 그간 준비해왔던 바에 따라 자신이 필립인 것처럼 신분을 도용하고 필립의 애인인 마지를 설득하여 그린리프 가문의 돈을 마지에게로 증여한다는 필립의 유서까지 만들었다.


 


완벽해 보였던 톰의 계획은 거의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만 불의의 실수로 인해 그가 저지른 복수의 속살이 만천하에 드러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찰은 그를 소환하였다.


 


허나 여기에서 주저앉을 닉이 아니었다. 닉은 그 시점에서 과감히 그린리프 가문과 마지와의 일은 다 포기하고 위조여권으로 이태리를 떴다.


 


 


 



이태리의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성형한 닉


 


 


닉이 선택한 다음 행선지는 바로 개츠비와의 추억이 어려있는 뉴욕이었다. 닉은 이름을 다시 이녹 존슨으로 바꾸었고 후에 애칭으로 넠키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태리를 떠나 뉴욕 바로 밑에 있는 뉴저지의 부두에 발을 내린 닉은, 특유의 감각과 뉴욕증권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닥치는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지역유지들과의 관계를 돈독히하며 마침내 뉴저지 지방재정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닉은 개츠비의 죽음 이후로 항상 간직하고있던 그의 후계자라는 마음 속 목소리에 따라 밀주사업에 진출하여 동부권 밀주사업의 가장 큰 공급자가 되었다.


 


마침내 돈과 명예를 한 손에 쥐게된 닉이었지만, 아직도 그의 목표는 만족되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개츠비와 자신을 절망시켰던 기득권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통쾌한 복수였다.


 


그래서 그는 밀주사업을 통해 바로 뉴욕의 마이어 윌샤임(일명: 아놀드 로스틴)을 정조준하였고, 정치에 손을 뻗어 자신이 후원한 후보가 대통령에 선출되는데 큰 공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닉의 말년인 너키 존슨 이야기는 절찬리에 드라마로 방영 중이다.


 


 


허나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고 모든 욕망은 찌꺼기를 남기듯, 복수를 위해 전진만을 거듭하던 닉도 결국엔 세월과 함께 사그라들고 말았다.


 


기득권과 그들의 욕망에 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쾌한 복수를 가하고자 했던 닉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기득권이 되었고, 그러자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그가 복수하고자 했던 그들의 방식을 따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멈출 수는 없었다. 타인의 욕망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쌓고 그 부를 더 불려야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굴레와 그 굴레에서 발생하는 악취를 다른 이들에게 전가해야 자신이 살아남는 그 사슬에서 닉은 헤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이전보다 더 치열하게 숨가쁜 삶을 살아야만 하다가 결국 기득권 사이의 경쟁에서 도태된 그는, 이후 자신의 생을 마무리하게된 요양원에서 예전에 자신이 썼다가 출간을 포기하고 고이 간직하고 있던 “The Great Gatsby” 원고를 꺼내어 마지막 구절에 다음 문장을 덧붙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개츠비가 위대한 건 그가 더 이상의 욕망을 펼치기 전에


그의 삶이 강제로 멈추어졌기 때문이다.”


 


 


 


영진공 이규훈


 


 


 


 


 


 


 


 


 


 


 


 


 


 


 


 


 


 


 


 


 


 


 


 


 


 


 


 


 


 


 


 


 

“벤자민 버튼”, 시간이 거꾸로 간다 한들 세상은 그대로인데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원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이고 F.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집에 끼어있던 한 단락의 이야기입니다.  원작이 단편인 이야기들이 대부분 그렇듯, 한 남자의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이 이야기는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한 한 편의 간단한 구라입니다.  길이가 길지도 않고 디테일한 이야기도 아니죠.  주인공 이름을 보세요.  단추 만드는 집안이라고 성이 [버튼]입니다. (물론 이런식으로 지어진 이름들이 많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_-;;)

어쨌든 이 짧은 이야기를 가지고 한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수많은 설정들과 에피소드, 온갖 놀라운 특수효과가 도우 위에 피자치즈처럼 흩뿌려졌습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한 남자라는, 환타지스런 설정에 약발을 더하기 위해서죠.  이런 장치들은 당대 최고수의 테크니션이라고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는 데이빗 핀처 감독의 섬세한 손길을 타고 이야기에 깊숙히 스며들어갑니다.

핀처 감독은 “조디악”때 처럼 불필요한 감성의 자극이나 화려한 테크닉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영화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위해 판을 마련하는 작업에 집중합니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시대상황을 훌륭하게 연출해 내고,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벤자민 버튼을 스크린 위에 소환하기 위해 온갖 특수효과를 동원하지만 이는 영화의 배경과 설정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불필요하게 노출되어 꼴사나운 특수효과 자랑 쇼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핀처 감독은 말도 안되는 구라일수록 시치미 뚝 떼면서 해야 약발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검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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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미 뚝!

영화는 유려한 영상을 타고 한 마리의 고래가 유영하듯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런닝타임이 꽤 긴 편이지만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이야기의 완급조절과 배분이 적절히 이루어졌다는 반증이겠지요.   전통적으로 아카데미가 일방적으로 편애해 마지 않는 ‘대서사시 + 러브스토리 + 삶에 대한 긍정적인 교훈’에다가 헐리웃 영화기술의 발달을 저렴해 보이지 않게 자랑하는 특수효과 퍼레이드를 골고루 시연하시니, 과연 아카데미에 최대 노미네이트 “될만 하다.”라는 인상을 짙게 주고 있습니다.  작정하고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당 영화, 칭찬만 하기에는 여러가지로 민망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것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원작의 성격과, 데이빗 핀처의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야심작과의 간격이 자연스럽게 좁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가 존재해야 할 당위성을 그닥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는 남들과는 반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는 80대 노인이면서 어린아이의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고, 20대 소년의 머릿 속에 80대 노인을 품고 있지요.  하지만 영화는 이런 그의 캐릭터를 잘 살리지 못하고 그저 한 인간의 성장담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벤자민 버튼은 늙은이로 태어났지만 남들과 비슷한 성장과정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첫사랑을 겪고, 여행을 하며 자아를 찾고 … 이건 그가 굳이 벤자민 버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가 점점 젊어지는 것을 제외하곤 주인공의 인생은 지나치게 평범합니다.  평범한 인생에선 평범한 교훈이 나오는 법이지요.

시간은 소중하다고요? 인생에서 젊음은 잠깐 뿐이고 유한하다고요? 그건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점차 늙어가는(갑자기 슬퍼진다…흑)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려고 거꾸로 살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냥 살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에요.

벤자민 버튼의 캐릭터와 그의 이야기가 충분히 강렬하지 못한 덕에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 버튼의 모습은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20대 브래드 피트의 모습을 다시 리와인드 시켜 보는 것은 남자인 저로서도 혹할만큼 매혹적인 장면이었지만, 그것으로 다입니다.  분장쇼 하려고 그를 부른것은 아닐 터인데.

또한 당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작가인 에릭 로스의 터치가 너무나 강하게 느껴집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던 제가 영화를 보는 동안 자꾸 “포레스트 검프”와의 기시감이 느껴졌을 정도로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그가 각색을 했더군요.  그럴 정도로 이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것은, 주인공인 벤자민 버튼만의 이야기가 강렬하지 못했다는 앞의 이야기와도 일맥이 상통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나 매혹적인 영화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출연배우들도 적절한 연기로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무려 발레리나 역을 소화하면서 전혀 위화감을 주지 않는 케이트 블랑쳇도 그렇고, 틸다 스윈튼도 인상적인 조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배우는 여성적인 역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군요.
 
그리고 주인공인 브래드 피트는 무난하게 전 연령대에 걸친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소리의 톤 조절이나 늙은이처럼 걷는 연기도 능수능란하게 잘 하고 있구요.  다만 늙은이라고 보기엔 너무 각잡힌 그의 체격이 가끔 거슬릴 때는 있습니다.  특수효과를 하지 않고 늙은이 연기를 하기엔 아직 피트는 몸이 너무 좋아요.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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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피트는 케이트 블랑쳇보다도 머리가 작더군요. 졸리보다도 작고 ... 도대체 이 넘은 외계인인 걸 까요???

영진공 거의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