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셔너리 로드”, 현실과 이상이 서로 만날 수 없는 길

샘 멘더스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가족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아메리칸 뷰티2>를 만들 건줄 알았다. 샘, 아카데미상이 그렇게 그리웠던 거야, 라고 비웃음을 약간 섞어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하여 다섯 개 부문을 수상했던 <아메리칸 뷰티>(1999)와 달리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주요 부문에 후보조차 올리지 못했다!)

근데 영화를 보니 중산층 가족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사실 중산층 가족이라기보다는 ‘부부’라고 해야 될 정도로 남편과 아내 둘의 관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애초 <아메리칸 뷰티>와는 선을 긋고 출발한다. 

휠러 부부는 뉴욕 인근에 위치한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선망의 대상이다. 부부 모두 선남선녀인데다가 동네에서 최고로 치는 새하얀 이층집까지! 그야말로 당시 미국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에 다름 아니었더랬다. 문제는 이들의 삶이 미국인 모두가 바라마지않는 꿈이라는 것. 모든 사람이 같은 목적지를 향해 똑같은 길을 걷는다는 건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인가. 깔끔한 중절모와 수트를 입고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회사로 출근하는 남편, 남편과 자식을 출근시킨 후 집안일에 몰두하는 부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비추는 카메라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꽉 막혀 있는 인상을 준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이 같은 장면을 극 초반 전면적으로 노출하며 영화의 주제가 일상(日常)과 이상(理想) 사이의 갭이 만들어내는 가족의 붕괴를 주제로 삼을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배경이 2차 대전이 끝난 1950년대 중반이란 사실이 중요해진다. 소비와 풍요의 시대, 즉 미국에서는 ‘현대’가 시작된 것이다. 하여 여성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른바 ‘신여성’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니. 반복된 일상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의문에 휩싸이는 여자와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에이프릴 휠러(케이트 윈슬럿)가 배우를 꿈꾸는 인물로 등장하는 건 그래서다. 더군다나 재능이 받쳐주지 못해 배우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얼마나 컸을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파리’에 가본 적 있다는 이유만으로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자신이 만나본 가장 흥미 있는 남자라며 결혼까지 하지 않았던가. 결혼과 함께 미국을 떠나기로 약속했지만 계획에 없던 아이가 생기고(그것도 둘이나!) 남편은 일에 치여 꿈이 뭔지 잊은 것 같고 배우의 꿈은 종치고. 휠러 부부의, 아니 에이프릴의 유일한 해결책은 단조로운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벗어나 총천역색의 프랑스 파리로 떠나는 것.

허나 에이프릴처럼 특별한 사람들에게 삶은 외로운 법. 1950년대 중반이라는 미국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다른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일탈을 인정하지 않았다. 모두가 선망하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새하얀 이층집을 버리고 파리로 떠난다? 그것은 정신이상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이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휠러 부부에게 멋진 집을 소개해준 기빙스 부부에게는 정신이상자 아들 존(마이클 셰넌)이 있는데 그만이 휠러 부부의 계획을 찬성할 정도로 파리 행은 당시 정서로 보건데 미친 짓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잘 살겠다는 삶의 종착역이 같았음에도, 이를 향하는 무수한 다양한 길이 있었음에도 하나의 길 이외의 길은 인정하지 않는 집단적인 무의식이 휠러 부부의 파국을 잉태했던 것이다. 

특기할만한 것은 샘 멘더스 감독이 이를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남녀의 문제, 즉 러브스토리의 화법으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앞서 살짝 언급했듯, 그 당시 가족의 해체는 가족 전체의 문제가 아닌 남녀의 위상 변화에 따른 결과였다. 한마디로 신여성의 도래에 따른 남성의 심리적 불안감 표출이라고 할까. 샘 멘더스는 어느 인터뷰에서 “남녀가 만나 완벽한 가정을 꾸리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판타지의 상실과 비루한 현실의 긴장관계를 다루고 싶었다.”고 했는데 안 그래도 직장 상사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20년간 한 회사에서 근무해온 아버지를 일종의 롤 모델로 삼고 있는 프랭크의 삶의 태도는 정확히 에이프릴과 대척점에 위치한다. 다시 말해, 현실에 안주하려는 프랭크와 이상을 꿈꾸는 에이프릴 사이에 좁혀지지 있는 간극이 결국엔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를 만들고 만 것이다.

이는 시대가 만들어낸 러브스토리이지만 샘 멘더스 감독은 시간 묘사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투의 태도를 취한다. 그로 인해 시대와 이야기의 상호작용이 주는 사회학적 밀도가 헐거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도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다. 바로 현대와의 연관성 때문이다. 현대 역시 모든 이들이 출세와 돈, 성공이라는 하나의 꼭짓점을 향해 부나방처럼 뛰어드는 시대다. 미국의 1950년대 중반과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제목이 주는 뉘앙스는 의미심장하다. ‘레볼루셔너리 로드‘(Revolutionary Road), 혁명적인 길. 모두가 꾸는 꿈은 현실이다. 하지만 다른 꿈을 꾸는 것은 이상이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삶의 혁명일 수 있다. 삶보다 더 큰 무엇, 즉 에이프릴이 꿈꾸던 파리.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이상을 실현하는 길은 멀지 않다고 말한다. 문만 열면 바로 밟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길. 하지만 승진, 임신, 아이 등등 안주하는 생활이 어깨에 축적된 일상의 무게는 혁명의 길을 희미하게 만든다. 그리고 거기에 파멸의 함정이 있다. 그것은 1950년대 중반이나 현재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가까이 두고도 밟지 못한 길, 그것이 바로 <레볼루셔너리 로드>다. 

영진공 나뭉

 

“벤자민 버튼”, 시간이 거꾸로 간다 한들 세상은 그대로인데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원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이고 F.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집에 끼어있던 한 단락의 이야기입니다.  원작이 단편인 이야기들이 대부분 그렇듯, 한 남자의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이 이야기는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한 한 편의 간단한 구라입니다.  길이가 길지도 않고 디테일한 이야기도 아니죠.  주인공 이름을 보세요.  단추 만드는 집안이라고 성이 [버튼]입니다. (물론 이런식으로 지어진 이름들이 많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_-;;)

어쨌든 이 짧은 이야기를 가지고 한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수많은 설정들과 에피소드, 온갖 놀라운 특수효과가 도우 위에 피자치즈처럼 흩뿌려졌습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한 남자라는, 환타지스런 설정에 약발을 더하기 위해서죠.  이런 장치들은 당대 최고수의 테크니션이라고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는 데이빗 핀처 감독의 섬세한 손길을 타고 이야기에 깊숙히 스며들어갑니다.

핀처 감독은 “조디악”때 처럼 불필요한 감성의 자극이나 화려한 테크닉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영화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위해 판을 마련하는 작업에 집중합니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시대상황을 훌륭하게 연출해 내고,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벤자민 버튼을 스크린 위에 소환하기 위해 온갖 특수효과를 동원하지만 이는 영화의 배경과 설정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불필요하게 노출되어 꼴사나운 특수효과 자랑 쇼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핀처 감독은 말도 안되는 구라일수록 시치미 뚝 떼면서 해야 약발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검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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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미 뚝!

영화는 유려한 영상을 타고 한 마리의 고래가 유영하듯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런닝타임이 꽤 긴 편이지만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이야기의 완급조절과 배분이 적절히 이루어졌다는 반증이겠지요.   전통적으로 아카데미가 일방적으로 편애해 마지 않는 ‘대서사시 + 러브스토리 + 삶에 대한 긍정적인 교훈’에다가 헐리웃 영화기술의 발달을 저렴해 보이지 않게 자랑하는 특수효과 퍼레이드를 골고루 시연하시니, 과연 아카데미에 최대 노미네이트 “될만 하다.”라는 인상을 짙게 주고 있습니다.  작정하고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당 영화, 칭찬만 하기에는 여러가지로 민망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것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원작의 성격과, 데이빗 핀처의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야심작과의 간격이 자연스럽게 좁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가 존재해야 할 당위성을 그닥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는 남들과는 반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는 80대 노인이면서 어린아이의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고, 20대 소년의 머릿 속에 80대 노인을 품고 있지요.  하지만 영화는 이런 그의 캐릭터를 잘 살리지 못하고 그저 한 인간의 성장담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벤자민 버튼은 늙은이로 태어났지만 남들과 비슷한 성장과정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첫사랑을 겪고, 여행을 하며 자아를 찾고 … 이건 그가 굳이 벤자민 버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가 점점 젊어지는 것을 제외하곤 주인공의 인생은 지나치게 평범합니다.  평범한 인생에선 평범한 교훈이 나오는 법이지요.

시간은 소중하다고요? 인생에서 젊음은 잠깐 뿐이고 유한하다고요? 그건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점차 늙어가는(갑자기 슬퍼진다…흑)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려고 거꾸로 살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냥 살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에요.

벤자민 버튼의 캐릭터와 그의 이야기가 충분히 강렬하지 못한 덕에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 버튼의 모습은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20대 브래드 피트의 모습을 다시 리와인드 시켜 보는 것은 남자인 저로서도 혹할만큼 매혹적인 장면이었지만, 그것으로 다입니다.  분장쇼 하려고 그를 부른것은 아닐 터인데.

또한 당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작가인 에릭 로스의 터치가 너무나 강하게 느껴집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던 제가 영화를 보는 동안 자꾸 “포레스트 검프”와의 기시감이 느껴졌을 정도로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그가 각색을 했더군요.  그럴 정도로 이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것은, 주인공인 벤자민 버튼만의 이야기가 강렬하지 못했다는 앞의 이야기와도 일맥이 상통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나 매혹적인 영화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출연배우들도 적절한 연기로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무려 발레리나 역을 소화하면서 전혀 위화감을 주지 않는 케이트 블랑쳇도 그렇고, 틸다 스윈튼도 인상적인 조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배우는 여성적인 역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군요.
 
그리고 주인공인 브래드 피트는 무난하게 전 연령대에 걸친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소리의 톤 조절이나 늙은이처럼 걷는 연기도 능수능란하게 잘 하고 있구요.  다만 늙은이라고 보기엔 너무 각잡힌 그의 체격이 가끔 거슬릴 때는 있습니다.  특수효과를 하지 않고 늙은이 연기를 하기엔 아직 피트는 몸이 너무 좋아요.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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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피트는 케이트 블랑쳇보다도 머리가 작더군요. 졸리보다도 작고 ... 도대체 이 넘은 외계인인 걸 까요???

영진공 거의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