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인 : 최후의 결사단”, 중국 블럭버스터의 현주소

요즘 국내에 수입되는 중국 영화들을 보면 – 좀 더 정확히는 중국 영화들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 상당한 격세지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 감상의 요점이란 결국 중국 영화에 대한 우리나라 관객들의 관심이 예전만 못하다는 건데요, 홍콩의 영화 제작 기술과 배우, 스텝들이 중국 본토의 막대한 영화 시장과 자본, 정부 지원 정책 등과 만나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좀처럼 다시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홍콩의 재능과 중국의 막대한 물량이 만났음에도 기대되는 만큼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장예모
감독의 <영웅>(2002) 을 기점으로 본격화된 컨텐츠의 천편일률성입니다.

중국 정부의 정책적 방향 때문인지 아니면 현시점에 중국 내수 영화 시장에서 요구하는 컨텐츠의 특성 때문인지는 좀 더 면밀한 고찰이 필요한 부분이 되겠습니다만 – 결국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같은 것일 수도 있겠네요 –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제작되어 국내에 수입된 중국 블럭버스터들이 하나 같이 ‘전체/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스펙타클을 펼쳐 보인다 하더라도 매번 선보이는 작품들마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엇비슷한 내용과 주제만을 강조하니 식상하다는 반응을 얻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 한 가지는 영화의 문화 산업적인 특성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 80년대에 홍콩은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미국이나 유럽과 같이 선진화된 국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홍콩에서 물 건너 온 것은 어찌되었거나 좋은 것들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음악이, 그리고 영화에 있어서 국산품이 수입품을 누르고 내수 시장을 점령하는 시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홍콩은 중국에 반환이 되면서 영화 산업계의 지각 변동을 맞았지요. 이제 홍콩과 중국 영화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국내에 소개되는 영화들은 더이상 선진 문물로서의 프리미엄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역으로 중국 영화들은 분명히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헐리웃 영화가 국내 시장에서 갖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해볼 수도 있게 됩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중국 본토의 관객들이 선호할 만한 소재를 찾아내고 그들의 대중적인 감성과 집단 의식을 자극하려는 전략은 <8인 : 최후의 결사단>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20세기 초 청나라 말기, 영국령이 되어버린 홍콩을 배경으로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 훗날 신해혁명으로 불리게 된 1911년 손문의 홍콩 방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 몽고족에 의한 오랜 지배와 부패, 외세에 대한 무기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족들의 ‘거룩한’ 희생을 다룬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한족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역사가 바로 칭기스칸에 의해 중국 대륙이 몽고족에게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인 관계로 칭기스칸과 청나라에 대한 해석이 미국과 중국에 의해 서로 다르게 해석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시점을 다룬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청나라 황실은 혁명지도자인 손문을 암살하려고 하고 홍콩의 혁명가들은 손문을 지키려고 합니다.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손문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무사히 홍콩을 다녀가기까지 암살자들의 위협을 죽음으로써 막아낸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전반부에서 이들 인물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배치한 이후 후반부 기다리던 손문의 홍콩 도착과 함께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아날로그 액션을 전개하며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8인 : 최후의 결사단>은 영화 만드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한 마디로 더이상 손 댈 구석이 없을 만큼 세련되면서도 거의 완벽한 만듦새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년 전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배우들 – 장학우, 양가휘, 증지위, 임달화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의 여명, 견자단, 사정봉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튀는 이 없이 하나의 작품 안에 완벽하게 녹아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액션이면 액션, 드라마면 드라마, 그외 미장셴과 배경음악의 사용에 이르기까지 흠잡을 데가 없는 외양을 갖추었음에도 관객으로서 영화 속으로 흠뻑 빠져들지 못하고 마는 이유는 결국 그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전개 방식과 천편일률적으로 반복되는 주제 의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중적인 블럭버스터 영화가 갖는 한계는 비단 중국 영화만의 문제는 아닙니다만 지금 중국의 블럭버스터들은 온통 자기 자신들에게만 신경을 집중시키느라 주변을 전혀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느낌을 주곤 합니다. 같은 중국계 영화라 하더라도 이안 감독의 작품들, <와호장룡>(2000)이나 <색, 계>(2007)가 중국인이 아닌 외국 관객들에게까지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들을 생각해보면 최근 몇 년과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되리라 예상되는 중국 영화들의 한계 – 기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도통 재미가 없는 – 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중국 영화가 과거 한국 내 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영광의 나날을 되찾을 수 있으려면 국내 관객들이 중화풍의 것들에 대한 선망의 시선을 갖게 되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되거나, 아니면 중국 영화가 지금보다 스타일이나 내용 면에서 좀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 두 가지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논의는 중국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한국영화의 해외 경쟁력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고요. 제조에 강한 나라가 문화 컨텐츠의 강국으로 거듭나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중국은 본래 가진 것이 많은 문화적 거대 잠룡이라고 할 수 있어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이겠지만 우리나라는 과연 국내외 관객들에게 보여줄 어떤 것들을 갖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ps. 글 내용 중에 언급된 중국 역사와 관련해 지적해주신 분들이 계셔서 확인해본 결과, 원나라(칭기스칸/몽고족) -> 명나라(한족) -> 청나라(여진족/만주족)이 정확한 역사더군요. 위에 언급된 내용 가운데 칭기스칸/몽고족과 청나라를 연결해서 언급한 부분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니 오해가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신어지)

“망량의 상자”, 처연한 엽기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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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인터뷰에서 요즘 읽은 책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책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책, <망량의 상자>라고 대답했다.

교코쿠 나쓰히코의 책은 처음에 <항설백물어>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꽤나 재미있었다. 일본의 설화와 기담을 활용해서 정의를 세우고 다니는 탐정 사기단 이야기다.
 
이들은 귀신을 믿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귀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믿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그 지식을 활용해서 범죄자를 처단하고 정의를 세운다. 처음에는 화자가 오락가락 하는 글쓰기 방식(아, 중간에는 이 말을 누가 하는 건지 정말 알 수 없더라고…)이나 난데없이 지팡이를 쿵 찍으며 뭐라 웅얼거리는 식의 불친절한 이야기 방식에 적응하기가 좀 힘든데, 이야기가 끝날 때가 되면 대충 합리적으로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그렇게 짜맞춘 전체적인 사건의 모양새가 꽤나 참신했다. 이성과 비이성이 적절히 뒤섞인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재미있었고.


<항설백물어> <속항설백물어> <광골의 꿈> 일본어판의 표지들 …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우부메의 여름>을 봤다. 이건 초반이 엄청나게 힘들다. 난삽하다고 해야 할지, 무겁다고 해야 할지 … 의식과 경험과 감각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을 주요 등장인물인 ‘교고쿠도’의 입을 빌어 강의 형식으로 풀어내니 당연히 힘들다. 등장인물들도 꽤 많은데 이름들이 하나같이 다 그 이름이 그 이름같아서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가면 그동안 여기저기 널어놓은 괴담, 설화, 심리학(특히 정신분석학)적 단서들이 하나씩 연결되면서 속도가 붙는다. 교고쿠도네 헌책방으로 가는 길처럼 중간까지는 엄청 힘들다가 내리막 직전에 현기증이 나고 그 다음에는 일사천리 … 그 결과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아 … 엽기적이었지만 참신했다.

마침내 <망량의 상자>에 이르러서는 전작 <우부메의 여름>이 귀여워보일 정도다.

이제는 기담과 이상심리학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사와 의학까지 곁들여지고, 벌어지는 범죄의 뒤엉킴도 한 3배쯤 복잡해지며 그 결과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
“처연한 엽기”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책의 뒷맛은 찜찜하고 애잔하면서 끔찍하고 기괴하기 그지없다. 한동안은 정신이 좀 이상해지는 느낌이었을 정도다.

사실은 아직도 나는 ‘호오~’의 잔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 … 그 ‘호오’ … 진짜 소름끼친다. 이 평도 사실 이렇게 글이라도 써 놓으면 그 망량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쓰는 것이다 -_-;;;


원판 소설은 표지가 이런 모양이다 …

이 책이 어떤 면에서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일단 미스테리로서는 결격사유가 많다.

원래 미스테리는 일종의 게임, 저자와 독자가 벌이는 머리싸움이다.
그래서 공평하게 게임을 전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규칙이 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아는 것을 독자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바로 나쓰히코의 미스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애매하게 반칙을 한다.

<우부메의 여름>이 특히 그렇다.
이 이야기의 화자라는 인간(소설가 세키구치)이 어딘가 나사가 빠진 인간이라서 남들이라면 당연히 보았어야 할 것을 못본다. 만약 그가 제대로 보기만 했으면 이야기는 초반에 끝나버렸을 것이다. 결국 이 미스테리의 트릭은 화자의 눈이 삐꾸라는 점에 있었던 거다. 그러니 사실 이야기의 결말은 꽤나 허탈하고 싱거운 셈이다.

하지만 그 미스테리가 풀린 뒤에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이 워낙 상상을 뛰어넘게 엽기적이라 … 독자들도 그 반칙 트릭을 보고서도 (세키구치 처럼)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 벌어진다.

<망량의 상자>는 또 다른 주변인 주인공 기바 형사가 주요 화자로 등장한다.
게다가 얼빠진 소설가 세키구치도 화자로 끼어들고 … 그 와중에 서로 다른 계열의 두 싸이코가 한데 만나서 정말 엽기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소설의 중반쯤 되면 누군가가 유괴(?)되는데, 나도 그 사건의 트릭은 대충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 내 상상의 수준을 한두단계쯤 뛰어넘고도 또 끝까지 아주 비릿한 엽기의 향취를 풍기며 끝낸다.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처음 책에 등장하는 소설에 담겨있다. 그걸 처음 읽을 때의 느낌과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었을때의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

망량의 상자에서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 중 하나는 특별한 범죄라고 해서 반드시 특별한 사람이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누구나 잠깐씩 망량의 손길이 닿는 순간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정신줄을 놓는 순간이다. 저자에 따르면 범죄는 악인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몇몇 상황의 겹쳐짐에 의해서 발생한다. 우리들 모두는 성장하면서 각자의 욕구를 축적해간다. 그 중에 일부는 몇몇 우연한 만남 탓에 그 욕구가 조금 특이한 방향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그동안 축적한 욕구의 충족이 완벽하게 가능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순간이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이 엽기적인 범죄가 되기도 하고, 행복의 완성이 되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둘 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망량의 상자에 등장하는 범죄는 모두 끔찍함의 엣지를 달린다. 하지만 알고보면 거기에 진짜 끔찍한 인물은 하나도 없다.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최선을 다한, 알고보면 조금씩은 처연하고 조금씩은 안타까우며 조금씩은 공감이 가는 인물들이다.

특히 마지막까지 남은 범죄자의 경우가 더 그렇다. 그에겐 정말 별다른 죄가 없다. 그는 그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적응 해왔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짧은 순간 그가 ‘이 세계’가 아니라 ‘저 세계’의 맛을 보면서 그는 엽기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교고쿠도가 말했듯, 행복해지는 방법은 간단했다. 인간이기를 그만두면 되는 거였다.


오른쪽이 저자 교고쿠 나쓰히코

이 책의 저자인 교고쿠 나쓰히코는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다. 미술디자인과 소설을 병행하는데, 공식석상에 손가락 없는 장갑을 끼고 기모노를 입고 나타난다. 거기에 일본의 고대 근대 역사와 각종 기담에 대한 해박한 지식, 거기에 정신분석학에 대한 나름의 깊은 이해까지 녹여냈다는 점에서 이 양반은 일본의 움베르토 에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사건의 구성은 에코보다 한 두 수 위다. 특히 엽기적인 면으로 … 일본에서는 아마도 A급과 B급을 두루 망라하는 문화계의 스타인듯 하다.


이 소설은 만화와 애니매이션, 그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엔 소설보다는 만화가 더 많이 알려진 모양이다.


검색하면 나오는게 이런 이미지들이니 …


하지만 기왕 읽으려면 소설을 읽으시길 추천한다.

영진공 짱가

“언 에듀케이션”, 17살 인생 최고의 선물


제니(캐리 멀리건)의 나이는 17살. 한국나이로 치면 18살쯤. 그때 난 즉석떡볶이, 스티커사진, 브래드피트, 스크린,
로드쇼 같은 것에 빠져 살았다. 가끔 일탈을 꿈꿀 때도 있었지만 기껏 점심시간에 학교 담을 넘어 친구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거나
명동에 나가 핸드폰 줄을 사오는 걸로 만족하곤 했다. 제니처럼 친구들과 러시아제 담배를 나눠 태우며 파리의 환상을 노닥거리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때 난 남자가 뭔지도 몰랐고, 책을 나눠 읽을 이성 친구 하나 없었다. 헌데 제니는 진짜 남자 데이빗(피터 사스가드)과
대화도 나누고 데이트 날을 잡고 예쁘게 치장하고 꿈같은 파리 여행도 떠난다. 아 물론, 첫날 밤 아닌 첫날 밤도 함께 보낸다.

이 모든 게 너무 너무 부러워 영화를 보는 내내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한 것 같다. 제니의 수줍은 미소와 데이빗의 유쾌한
농담으로 점철된 첫 만남 장면에선 거의 넋을 놓았다. 상큼한 제니의 미소가 내 것인 양 시공간을 무시한 채 영화에 푹 빠졌다.
곧 제니가 마주칠 진짜 현실을 까맣게 모르고서.

남들처럼 무난해 별 감동도 깨침도 없던 지난날을 비춰보면, 제니의 경험들이 (비록 행복과 불행의 극단을 오갔더라도) 분명 그녀에게
사랑과 욕망 같은 감정을 직시하고 또 견제하는 힘을 얻게 해 줬을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보였을 법한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모든
걸 포기하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에 주저하지 않은 순수함은 곧 현명함으로 성숙됐을 것이다.
 

나의 과거에게 이 영화를 주고 싶다. 감정의 실타래 속에서 생고생하는 사춘기의 여고생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혹 더러운
경험으로 인생 망쳤다고 생각하는 안타까운 소녀들도 주저 말고 이 영화 꼭 보길 바란다. 실패는 언제나 도약하는 계기를 준다.
제니처럼.


<언 애듀케이션>은 영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린 바버의 실화를 닉 혼비가 각색한 작품으로, 3월 18일 정식 개봉한다.


영진공 애플

“러블리 본즈”, 피터 잭슨에게 영화다양성을 허하라


개인적으로 피터 잭슨 감독의 팬이냐고 물으신다면 뭐 꼭 그렇지도 않다는 쪽이다. <반지의 제왕> 보다 <매트릭스>가 더 좋다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개봉했던 3부작 영화들을 꼬박꼬박 보러가기는 했으되 시간 가는 줄을 모를 정도로 영화 속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 아니라 솔직히 엉덩이가 좀 아파서 아 이젠 그노무 작별 인사 좀 그만 하시지? 뭐 이런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뒤늦게 피터 잭슨 감독 팬덤에 줄을 서서 <고무인간의 최후>(1987)나 <데드 얼라이브>(1992)를 굳이 챙겨보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감히 뉴질랜드 영화 산업의 자랑스러운 큰 형님이 되신 감독의 역량을 평가절하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만 해도 누가 감히 <반지의 제왕>을 3부작의 형태로 기획하고 연출할 생각을 했겠는가. 그리고 그처럼 완전한 형태로 대서사시를 만들어낼 수 있었겠는가.

인간의 탐욕이 그러하듯 절대 사라지지 않는 저 반지 ...

차기작이었던 <킹콩>(2005)은 피터 잭슨의 대범한 스케일과 연출 역량이 탁월함을 다시 한번 입증해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 아울러 나오미 왓츠의 캐스팅에 개인적으로 무척 감사할 따름이다. <디스트릭트 9>(2009)도 피터 잭슨의 손을 거쳐 탄생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견을 달기 어려울 만큼 영화를 잘 만드는 것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여전히 별개의 문제다. 피터 잭슨은 한마디로 감히 딴지를 걸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이지만 관객으로서의 내 취향에 아주 딱 맞아떨어지는 영화를 만들어주는 감독도 아닌 부류다.

특정 감독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나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 그의 새로운 영화들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 과도한 기대나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서의 실망도 없이 – 봐줄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않나 싶다.

<러블리 본즈>는 분명 우리가 아는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들과는 내용이나 스타일면에서 상당히 다른 작품이다. <반지의 제왕> 3부작과 <킹콩>이 피터 잭슨 영화의 전부라고 알고 있는 관객이 그 이름만 보고 선택했다면 우선 내용면에서 재미없어할 가능성이 높고,

그리 많지 않은 감독의 전작들 가운데 <천상의 피조물>(1994)과 같은 영화까지 봐두었던 관객이라면 이 감독이 갖고 있는 취향의 다양성에 관한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그나마 당황하는 일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러블리 본즈>는 이웃집 남자에게 유괴 살인을 당한 14세 소녀의 사후 세계를 판타지 형태로 펼쳐보이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강한 – 피터 잭슨이라는 알려진 브랜드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 영화라 할 수 있고 앨리스 시볼드의 2002년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피터 잭슨이 직접 영화화 판권을 매입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작품이다.

피터 잭슨이 무슨 생각으로 이와 같은 비상업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어찌되었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 – 상업적인 성공이 보장된 것 – 보다 진정 하고 싶거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바를 실천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크랭크인 사흘 전에 주연급 남자배우가 급히 교체(마크 왈버그의 배역은 원래 라이언 고슬링이 캐스팅되었었다)되는 와중에서도 피터 잭슨은 이 까다롭기 그지 없는 원작 소설의 영화화 프로젝트를 기술적인 완성도에 있어 만큼은 손색이 없는 작품으로 완성해냈다.

미국 내 유괴 살인 사건들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많았지만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죽은 피해자의 시각에서 다루는 작품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사회성과 판타지가 공존하는 이런 이야기야 말로 피터 잭슨과 같은 감독이 아니고서는 감히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러블리 본즈>는 사후 세계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스케일을 과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억울하게 생을 마쳐야만 했던 어린 소녀의 안타까움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이들의 상실감을 성공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사후 세계와 현실 세계의 이벤트들이 절묘하게 결합되는 부분들은 <러블리 본즈> 전반을 아우르는 묘미라고 할 수 있고 피터 잭슨 감독의 연출력을 입증하는 요소라고 하겠다. 여기에 수지(시얼샤 로넌)의 동생(로즈 맥키버)이 물증을 얻기 위해 살인자의 집 안에 침입하는 시퀀스는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서스펜스를 전달하기도 한다.

피터 잭슨의 전작들과는 경향 자체가 다른 작품이기 때문에 기대했던 만큼의 재미가 없었다는 평에 대해서는 이견을 달기 힘들다. 하지만 피터 잭슨이 발로 연출을 했다는 식의 일부 폄하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절대 동의할 수가 없다. 관객의 입맛을 사로잡는 일 역시 연출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연출력과 취향은 분별을 해두는 편이 맞다 – 발연출로 만든 영화를 좋게 보고 온 사람들은 그럼 눈이 삐어서 좋았다는 것이겠는가.

<러블리 본즈>는 아주 재미있는 영화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기술적인 완성도나 영화가 담고 있는 정서적 울림의 수준을 볼 때 시간을 들여 감상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일부 관객들은 의외의 감동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까지 한다. 개인적으로 막내 동생(크리스챤 토마스 애쉬데일)이 죽은 누나를 봤다며 아버지와 서로 위로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기 어려웠다. 수지의 소녀적 감성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면 살아남은 자로서 주어진 삶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할 수 있으리라.

일찌감치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에 훌륭한 스릴러 영화로서는 자리매김하기를 포기했던 작품이 되었지만 언제나 감초 같은 조연으로 많은 영화들에 출연해왔던 스탠리 투치가 <러블리 본즈>에서 발군의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스탠리 투치인줄 모르고 피터 스토메이어 닮긴 했는데 좀 다른 것 같다라고 생각만 했을 정도로 분장이나 연기력이 훌륭했다.

수지의 외할머니로 등장하는 수잔 서랜든은 등장 인물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극의 분위기를 이완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수녀나 이상적인 어머니 같은 역할도 좋지만 <19번째 남자>(1988)나 <하얀 궁전>(1990)에서와 같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 수잔 서랜든은 반짝반짝하곤 한다. 그리고 쇼핑몰 사진관에서 피터 잭슨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한다.

시얼샤 로넌과 감독 피터 잭슨
영진공 신어지